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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님의 서재입니다.

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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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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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04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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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글자
41쪽

해의 그림자 258

DUMMY

"뭐라? 중궁이 쓰러져?"


숙종은 양화당에서 서안 위에 추안궤를 올려놓고 반나절이나 추안과 공초를 검토하다가, 뜻밖의 보고를 받고서 귀를 의심하고 되물었다. 눈앞엔 두광이 있었다. 손끝이 시뻘개지도록 힘껏 두손을 맞잡고선, 어쩔 줄을 몰라하는 참이었다.


"어찌..."

"저, 전하...!"


숙종은 서안을 앞으로 확 밀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서안 모서리가 두광의 무릎에 콱 찍혔다. 두광은 뒤로 펄쩍 뛰다가, 무릎을 엄습한 고통에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이내 신음을 삼키며 숙종의 눈치를 보았다. 상전은 지금 당장이라도 통명전으로 달려갈 기세였다.


"저, 저, 중전마마께오선 지금 저승전에..."

"저승전?"


숙종의 안색이 확 굳어졌다. 모후가 계신 저승전에서 중궁이 쓰러졌다니. 얼마나 시달렸으면, 저승전 문턱을 넘지도 못하고 쓰러졌단 말인가.


"저승전?"


한번 더 곱씹는 왕의 표정이 스산하여, 두광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상전은 지금 모후인 대비전에게 의혹을 품은 참이었다. 물론 그동안 대비전이 음으로 양으로 중궁전을 박해하긴 하였으니, 당연한 의심이었다. 두광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대비전이 중궁전을 고꾸라뜨린 게 분명했다.


하지만 두광은 무릎을 똑바로 펴지도 못하고 가재걸음을 하면서도 문앞을 가로막았다. 숙종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왜 이러는 것이냐?"

"전하...설마...지금 저승전에 가시려는 건..."

"그런데?"

"진짜요?"

"왜 또...비키거라..."


문이 반쯤 열린 참이었다. 숙종은 앞을 가로막는 두광이 거추장스러워서 어깻죽지를 한손으로 확 밀치려 했다. 하지만 두광은 문틈으로 제 한팔을 끼워넣고 문설주에 얼굴을 눌리면서까지 문을 닫으려고 애썼다.


"아니...대비마마 쓰러지시곤 국청 때문에 못 간다고 하시고서, 중전마마 쓰러지시곤 한달음에 달려가시면..."


두광은 쭈뼛거리면서도 할 말을 다 했다. 어떻게든 말려야 했다. 국청 일로 바빠서 못 간다고 한 지 고작 한시진이 지났다. 한시진이면 잠시 짬을 내어 들렀다고 둘러댈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모양새가 좋은 건 아니었다. 어미에겐 소홀하면서 아내에겐 살뜰하다는 건, 어떻게든 왕의 권위를 떨어뜨리려고 혈안이 된 신료들에겐 좋은 꼬투리였다.


"아...신료들이 좋아하는 그 형평衡平에 안 맞지."


숙종은 냉소적으로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물론 형평이란 말은 숙종도 좋아했다. 신료들이 숙종 자신을 비난할 때 찾듯이, 숙종 자신도 신료들을 비난할 때 찾는 명분이었다. 듣기만 해도 온몸을 휘도는 피가 식어버려서, 온갖 계산과 추산을 해내게 되는, 그런 단어였다. 형평이란 것은.


"하오시면...아니 가시는 것이옵니까?"


두광이 고개를 움츠리고, 힐끔 상전의 눈치를 보았다. 어떻게든 상전을 도로 양화당 서안 앞에 붙들어 앉혀야만 했다. 부디 상전이 제발로 양화당을 박차고 나가서 중궁에게 달려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아무리 무식하고 무지한 김두광이라 해도, 그 한가지만은 아는 탓에.


하지만 기대를 품고 상전의 대답을 기다리는 두광의 두눈엔 상전의 얄궂은 미소가 비쳤다.


"가야지."

"예?"


귀를 의심하고 두광은 되물었다. 이미 상전의 두눈에서 웃음기를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다. 믿고 싶지 않았다. 신료들에게 책을 잡힐 일은 미연에 방지하는 상전이, 뻔히 달려가면 안될 것을 알고도 나선다니.


"나는 중궁의 일을 듣지 못한 것이다."

"예에? 하오나 소인은..."

"못 들은 것이다. 내 아무래도 어마마마의 병환이 마음에 걸려서 저승전에 들르는 것이니라."

"에...그건 좀..."


두광은 숙종이 억지로 우격다짐을 받아내려 들자, 긴장한 낯빛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당장 방안엔 상전과 두광 자신, 이렇게 단 둘 뿐이었다. 하지만 장지문 밖에서 시립한 지밀나인 한둘은 대화를 들었을 터였다. 이말 저말 밖으로 옮기지 않도록 어려서부터 호된 훈육을 받으며 자라서, 입이야 무겁겠지만, 사람의 입은 본디 믿을 게 못 되었다. 한 입 건너 두 입이란 말도 있으니...


"전하! 호조판서 민유중 대감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장지문 바로 밖에서 들리는 대전상궁의 목소리에, 숙종이 미간이 꿈틀했다. 민유중이 대청 분합문 밖에 와 있다는 얘기였다. 아마도 월대에서, 자신들의 대화를 민유중이 들었을 수도 있었다. 낭패한 얼굴로 두광을 돌아보며, 숙종은 상체를 병풍 쪽으로 틀었다. 저 병풍을 등지고 민유중이나 맞이해야 할 판이었다.


"무슨 일이라더냐."


숙종은 사뭇 날선 옥음으로 물었다. 하필이면 지금, 민유중이 와서 자신과 두광의 대화를 들었을 수도 있었다. 이래서야 통명전으로 달려갈 수도 없었다.


"국청의 일로 급고急告할 것이 있다 하옵니다."

"급고?"


숙종은 미간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중궁이 쓰러진 마당에, 당장 달려가도 시원치 않을 판에, 급히 고할 게 있다며 민유중이 자신의 앞길을 막다니.


"예, 전하. 들라 할까요."


대전상궁의 목소리가 숙종은 오늘따라 성가셨다. 짜증이 치밀었다. 숙종은 대청쪽 장지문이 아닌 북쪽 장지문으로 시선을 휙 던졌다. 저 북쪽 장지문으로 나가서 어디론가로 눈길은 급한데, 발길이 더디게 생겼다. 숙종은 자신도 모르게 발을 한번 굴렀다.


"들라 할까요, 전하."


대전상궁이 다시금 재우쳐 물었다. 숙종은 짜증스레 입맛을 다셨다. 마음 같아선 대청쪽 장지문이 아니라 앞이건 뒤건 다른 장지문을 열어젖히고 얼른 내빼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사방의 장지문을 지키는 궁인들의 그림자가 짙어보였다. 숙종은 고개를 틀어서, 대청쪽 장지문을 보고야 말았다.


"전하."

"들라 하라."


결국은 알현을 윤허하고야 말았다.


"예, 전하."


숙종은 짜증스레 곤룡포 앞섶을 틀어쥐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얼른 인견을 후딱 해치워야지만, 중궁에게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전하께오서 들라십니다."


장지문 너머로 대전상궁이 민유중에게 말하는 목소리에, 숙종은 한번 더 곤룡포 앞섶을 비틀었다. 평소 등줄기도 똑바로 세우고 신료들을 인견하던 성미인데도, 숙종은 곤룡포 앞섶이 흐트러지거나 말거나, 끈이 풀리거나 말거나, 서안 앞으로 가서 병풍을 등지고 앉았다.


장지문이 열리고, 홍단령을 입은 두명의 관료가 문간으로 나타났다. 대신을 독대할 수는 없다는 법도대로, 민유중이 좌승지를 앞세우고 문턱을 넘기 시작했다. 서안 앞을 지키는 숙종을 곁눈으로 힐끗 보고서, 민유중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리고 그는 숙종의 서안 앞에 꿇어앉아, 가만히 입을 열었다.


"전하, 죄인 정원로의 일로 아뢸 것이 있어...감히 알현을 청했습니다."

"정원로?"

"예, 전하...벌써 사흘째 정원로가 곡기를 끊고, 굶어죽기를 자처하여..."

"뭐라? 곡기를 끊어?"


숙종은 뜨악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민유중은 숙종의 서안 앞에 부복하여 고개를 조아렸다.


"예, 전하..."

"며칠째인가?"

"사흘째이옵니다."

"사흘? 그걸 이제야 고한단 말인가?"

"실상은 밥을 굶는 척하는 것일 뿐...간수들 몰래 그 식솔들이 구메밥을 넣어주는 듯 하여..."

"흥..."

"하오니 전하께서 엄히 다스리라 명하시어, 공초를 받아내심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민유중은 숙종에게 아뢰면서 한순간 두눈을 차갑게 번뜩였다. 내병조 옥사에 들러서 반송장이 되어버린 정원로를 보고 오는 길이었다. 며칠 째 병조에서 주는 구메밥도 거부했다는데, 안색은 괜찮았다. 한끼 굶은 김만중보다도 더 볼살이 토실한데다, 핏기도 불긋했다. 옥문 구멍으로 식솔들이 밥을 넣어주는 게 분명했다. 가소로웠지만, 정원로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굶어죽었다는 식의 뒷말이 나오면 안될 것 같아서 이렇게 왕에게 고하는 참이었다. 내키지는 않았어도.


"정원로의 상변으로, 역적들의 수괴가 복주伏誅 되었으니, 공초供招를 똑바로 내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전하거라."


숙종이 민유중의 어깨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뒤켠에 정좌한 석정은 붓을 쥐고 전지를 쓰다가 멈칫했다. 왕이 직접 분부를 내렸으니, 정원로는 더이상 금식을 지킬 수가 없을 터였다. 있는 말 없는 말 죄다 쥐어짜서 공초를 적어내야 할 터였다.


석정은 잠시 붓대를 헐겁게 쥐고선 고개를 갸웃했다. 정원로가 자기 집에 신범화가 태을수太乙數를 쓴 책자가 있다고 했는데도, 민유중과 김석주는 군사를 오히려 정원로의 집으로 보내어 책자를 수색하게 했다. 착각인 척 신범화의 집을 뒤졌으니 책이 나올 리가 없었다. 이제 와서 사람을 보낸들 나올 리도 만무했다.


물론 정원로를 추포할 때 당연히 정원로의 집을 수색했을 테니, 정원로의 집에서 책이 나올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정원로를 체포했을 때 책자도 어디론가 빼돌린 건지, 아니면 이번에 신범화의 집을 수색하는 척 하면서 정원로의 집에서 책자를 빼돌린 건지...


하지만 정말 이상한 건 왕의 태도였다. 꼼꼼하고 집요한 왕의 성정으론 공초에서 이상한 점을 눈치챘을 텐데도, 모르는 척 눈감아주는 것만 같았다. 미끼를 던지고 입질을 기다리는 건지, 아니면 왕이 한발 먼저 뭔가 선수를 쳤던 건지...왜 책자를 더는 문제삼지 않는 걸까.


윤대가 끝나고도, 석정은 여전히 의혹에 잠긴 채로 양화당을 물러나왔다. 그런데, 한발짝한발짝 걸음을 내딛을 수록 의혹이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예닐곱보 앞에서 걸어가는 민유중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며, 석정은 가만히 거리를 두고 뒤따랐다.


헌데 걷다 보니, 통명전 서쪽으로 돌아서 숙장문쪽으로 내려가야 할 민유중의 걸음이 오히려 남쪽으로 뻗어서는 함인정을 지나 광례문쪽으로 향하였다. 석정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쪽이 아닌데?


분명히 방향이 숙장문, 그리고 진선문까지는 똑같아야 했다. 진선문에서 석정은 홍문관으로, 민유중은 금천교를 지나 금호문 밖 육조거리로 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유중의 발길은 동궁전 쪽 광례문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거기엔 저승전이 있었다. 왜 청사로 돌아가지 않고, 대비전을 찾는 건지, 석정은 의아한 눈빛으로 민유중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느낌이 좋지가 않았다. 대비 김씨가 신료를 접촉해서 좋은 일이 생긴 적이 한번도 없었다. 스스로 곡기를 끊고 굶어죽겠다고 왕을 겁박하는 유서를 신료들에게 돌리질 않나, 같은 서인이지만 왕권을 지나치게 억압하는 서인의 기세를 꺾을 외교적 구실조차 서인의 편에서 압박하며 감선減膳을 행하질 않나, 왕과 신료들이 강연도 하고 정책도 논하는 야대청에 난입하여 왕의 체모를 깎질 않나...지금은 또 무슨 일을 꾸미려고 이리 암중에서 신료를 만나는 건지.


석정이 뒤를 밟는 것을 느꼈는지, 민유중이 뒤돌아보았다. 민유중의 고개가 살짝 돌아가는 순간, 모퉁이에서 갑자기 검붉은 그림자가 석정의 시야로 휙 나타났다. 석정은 놀란 나머지 헛숨을 들이켜다, 금군복을 입은 그림자의 형체를 비로소 알아보았다.


"너..."


석하였다. 양테 가느다란 벙거지를 깊숙하게 눌러쓰고, 석정의 눈앞에서 양테를 검지로 살짝 들추어 낯익은 외모를 드러냈다. 깜짝 놀란 탓인지 석정의 눈시울이 실룩였다. 석하는 활 떠난 시위처럼 파르르 경련하는 석정의 두눈을 보고 피식 웃었다.


"여긴 무슨 일로..."


석정은 그 와중에도 눈길을 석하의 어깻죽지 뒤로 돌려서, 민유중이 자신을 발견했나, 못 했나를 살피는 참이었다.


"저 민유중을 뒤..."


석정이 불안한 시선을 석하의 어깻죽지 뒤로 돌렸더니, 석하의 벙거지에 가려져 민유중의 얼굴이 보이질 않았다. 아마 저쪽에서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석정은 비로소 안도하며, 말끝을 흐렸다. 대답하다 보니, 아무리 봐도 석하의 차림새가 요상했다. 소각 안에 숨어있을 녀석이 밖으로 기어나왔다. 밖이여서일까, 밤이여서일까.


"아...뭐...여긴 제가 있으니..."


석하는 자신에게 뒤를 맡기고 돌아가란 손짓을 보냈다. 당장 석정을 돌려보낼 생각 뿐인 모양이었다. 석정은 직접 두눈으로 지켜봐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서, 다시금 석하의 등뒤로 시선을 돌렸지만, 민유중의 털끝 하나라도 비칠세라 이내 고개를 움츠렸다.


역시나 이대로 민유중의 뒤를 밟는 것은 더는 의미가 없었다. 여기는 대비 김씨가 옥체 미령할 때마다 머무는 곳, 저승전이었고, 석정은 민유중이 대비 김씨를 만나서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염탐할 도리가 없었다. 차라리 귀신도 곡할 재주를 지닌 석하가 숨어서 몰래 정탐하고 전해주는 편이 나았다.


"어서요."


한층 친밀해진 듯이, 석하가 건들건들한 손짓으로 모퉁이를 가리켰다. 자신이 가려줄 때 얼른 빠져나가란 신호였다. 석정은 내키지는 않지만, 민유중에게 들키고 모양새 나쁘게 물러가는 것보다는 나을 법 했다. 석정은 고개를 숙이고 모퉁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석하는 시선을 앞쪽으로 돌려서 민유중을 눈길로 좇았다.


민유중?


석하는 본래 민유중을 따라온 건 아니었다. 지금은 대비전에 다른 용무가 있었다. 석정의 눈앞에선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얼른 이 성가신 최석정을 돌려보내야만 했다. 물론 평소엔 자신이 최석정에게 귀찮은 존재겠지만서도.


"수고..."


석정은 석하의 양쪽 어깨를 쓰다듬듯 툭툭 치고선, 그대로 걸음을 내딛어 모퉁이를 돌았다. 서너발짝 돌다가 슬쩍 돌아보니, 이미 민유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상체를 좀더 뒤로 젖혀 엿보니, 여전히 안 보였다. 벌써 저승전으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설마...


석정은 다시 발길을 돌리려다 멈칫했다. 걸음을 틀었다, 내쳤다...자신도 모르게 갈팡질팡이었다. 김석주도 아니고, 민유중이 저승전에 든 일이 못내 찜찜했다. 석하가 나중에라도 귀띔을 해주겠지만, 그러는 석하가 소각에 은둔하지 않고 여기까지 나와서 저승전 주변을 배회하는 사실이 불안했다.


복수...하려고?


석하의 생모를 죽게 만든 이가...대비 김씨였다. 그런데 석하가 하필 대비 김씨의 처소 주변을 맴도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놓이질 않았다. 석정은 도저히 발길이 떨어지질 않아서, 그대로 저승전 축대를 서성였다.


도대체 뭘 하려는 것일까.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다, 석정은 어깨 위를 스치는 듯한 그림자를 느끼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빛처럼 빠른 그림자 하나가 저승전 지붕을 스치는 듯 했다. 육안으론 확인이 힘들지만, 육감으론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어깨를, 혹은 고개를 스친 듯한 그림자의 임자가 석하라는 사실을.


석하는 저승전 기와지붕 뒤쪽 내림마루에 납작 엎드려서, 안에서 소곤소곤 나직하게 들려오는 남녀의 대화에 온신경을 집중했다. 누가 들을세라 장지문 밖으로도 목소리가 새어나지 않도록 소리를 죽였는지, 집중해서 듣자니 고막이 근질근질했다. 그럴수록 석하는 숨을 죽였다.


"그래, 주상을 뵙고 오는 길입니까."

"예, 대비전하. 분부하신 대로, 정원로의 일을 고하였으니...당분간은 중궁전하께 신경을 쓰시지 못하실 것이옵니다."


대비 김씨의 질문에 답하는 사내의 목소리를 석하는 알아차렸다. 이미 앞서 민유중이 저승전 안으로 들어선 것을 알았으니, 민유중이라 짐작한 터였다.


"그래야 할텐데..."

"걱정 마시지요. 대비전하를 원망할 겨를도 없으실 것이옵니다. 곧 평안도에서도 소식이 하나 닿을 것이오니."

"평안도요."


대비 김씨가 나직이 되묻는 사이, 석하 역시 입술을 소리없이 달싹이며 곱씹는 참이었다. 평안도에서 소식이 하나 닿는다니. 그 소식이 왕의 혼백을 쏙 빼놓을 일이라 이건지. 중궁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만들 사건이 터진다는 얘긴지.


"그리만 아시지요."

"그래...그렇다 치고, 정원로 얘기...주상은 뭐랍디까?"

"전하께오선...바른대로 고하기만 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노라...그리 전지를 정원로에게 내리셨사옵니다."

"하! 기어이...범화를 버리시겠다...이 말이신가?"

"네? 범화요?"


대비 김씨의 혼잣말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져서 민유중이 되묻는 듯 했다. 석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머릿속에서 앞뒤 아귀를 맞춰보느라, 고개가 잠시 흔들렸다.


"오라버...아니 병판대감의 외종아우 말입니다."

"아, 그 광통교..."


그제야 갈피를 잡은 듯이 민유중이 말을 얼버무렸다. 대비 김씨와 민유중 사이에 서먹한 침묵이 잠시 흘렀다. 광통교라는 석자가 불편한 탓이려니. 석하는 미간을 찡그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하니 민유중 정도 되는 위인이 신범화의 존재를 모라서 저런 실언을 할까. 슬그머니 대비 김씨를 쥐었다 폈다 하려고 스리슬쩍 밑밥을 뿌린 게 분명했다.


"전하께서 버리려는 게 아니라, 중궁전하께서 찍어내려는 것이겠지요."

"..."


석하는 듣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고부간을 민유중이 은근히 이간질을 하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으로. 무슨 수작으로?


"헌데, 그 친구가 잘못되기라도 하면...대비전하와 병판대감도 손해를 보십니까?"

"호판은 어찌 보시오?"

"저보다는...병판대감이 더 잘 알겠지요. 판세를 읽는 눈은...조선바닥에 병판대감을 따라올 자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기야 하지만...병판대감도 은근히 마음이 약해서..."

"마음이...약해요?"

"제 핏줄이라면, 벌벌 떱디다. 아들, 아우, 할 것 없이 다 곁가지든, 피붙이든, 무조건 싸고 돌지요."

"곁가지까지요..."

"호판대감도 조심하세요. 범화 그 아이가 잘못되면, 호판대감은 내 사촌오라비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겝니다."

"아...이거 참...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으니..."

"적당히 의심 안 사게...이번 일을 봉합하세요. 어디까지나, 정원로가 독살이 무서워 곡기를 끊은 게 아니라, 처벌이 무서워 곡기를 끊은 겝니다. 그리 몰아가세요."

"예, 대비전하..."

"그리고, 주상이 중궁에게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국청의 일로 들볶으세요. 중궁에겐 눈길도 주지 못하게 말입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잠시 대화가 끊기는가 싶더니, 대비 김씨의 옥음에 웃음이 희미하게 섞였다.


"흥...이제 보니 호판대감과는 제법 대화가 통합니다."

"그렇습니까.'

"예, 아주 의좋은 사돈이 되겠습니다."

"허허..."

"그리 알고 이만 물러가세요."

"예, 대비전하."


대화가 끝났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민유중도 저승전 밖으로 나왔다. 석하로선 본래 민유중을 따라온 건 아니었지만, 최석정 때문에 우연히 저들의 대화가 얻어걸린 셈이었다. 석하는 더는 민유중을 뒤쫓을 생각을 않고, 고개를 돌렸다. 저승전 주변을 왔다갔다 하는 엄상궁이 시야에 들어왔다.


석하의 두눈이 먹이를 만난 표범처럼 매섭게 번뜩였다. 석하는 엄상궁의 발길을 따라 눈길을 부지런히 돌렸다.


엄상궁은 저승전 전각 뒤로 빠져나와 별군관 한명과 쑥덕거리는 참이었다. 엄상궁은 지붕 위에서 누군가 자신들의 대화를 엿들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서, 주위를 경계하듯 두리번거리고서야 여러번 접은 간찰을 왼소맷부리 속에서 꺼냈다.


"이 서찰을 병판대감 댁에 전하도록 하시게."

"예, 지금요?"

"지금 당장. 화급을 다투는 일일세."

"아, 예."


별군관이 얼른 품에 서찰을 갈무리하고서 자리를 떴다. 광례문쪽으로 빠져나가는 뒷모습에, 석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보나마나 중궁이 쓰러진 소식을 김석주에게 은밀하게 전하려는 모양이었다. 별군관에게서 서찰을 뺏을 필요도 없었다.


따라가 볼까...


별군관이 저승전 뒷뜰을 벗어나더니, 앞뜰 연못을 지나쳐 협문 밖으로 사라졌다. 석하는 여전히 내림마두에 엎드린 채로 별군관을 주시하다가, 아직도 뒤뜰에 있는 엄상궁을 뒤돌아보았다. 누구를 또 기다리는 건지, 엄상궁은 제자리에 있었다. 남아서, 무얼 하려고? 별군관을 뒤쫓아야 하나, 엄상궁을 좀더 감시해야 하나...석하는 별군관과 엄상궁을 갈팡질팡 갈마보다가, 별군관을 뒤쫓으려 몸을 일으키려는데, 갑자기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님."


엄상궁을 부르다가, 비에 젖은 가랑잎을 잘못 밟기라도 했는지, 사내의 목소리가 잠시 호흡이 흐트러졌다. 석하가 고개를 살짝 젖혀서 뒤쪽을 내려다 보니, 이번엔 겸사복이었다. 엄상궁은 이번에도 겸사복에게 오른소맷부리에서 서찰 한통을 꺼내어 건네었다.


"이 서찰을 병판대감 댁에 전하도록 하시게."

"아, 네."


겸사복이 군말 없이 서찰을 받아서 품속에 넣었다. 혹시라도 흘릴까봐, 저고리의 끈도 단단히 여몄다. 그리도 주의깊은 손동작을 보고도, 엄상궁은 마음이 높이질 않는 듯 거듭 당부했다.


"조심하게. 보안을 요하는 일일세."

"물론입니다"


석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병판대감한테 보낼 서찰을 한번에 보내지 않고, 두번에 걸쳐 나눠서 보낸다? 이상했다. 아무리 봐도, 뭔가를 깜빡했다가 덧붙여 보내는 건 아니었다. 처음부터 엄상궁이 서로 다른 소속의 무관들을 차례로 불러서 서찰을 나눠 주었으니. 첫번째 전인은 훈련도감 별군관, 두번째 전인은 사복시 겸사복...헌데 수신인은 똑같이 김석주니...왠지 찜찜해졌다.


석하는 혹시라도 엄상궁이 또 다른 군관에게 서찰을 전하나 싶어서 내림마루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고 잠자코 기다렸다. 세번째 서찰도 있을 것만 같았다. 석하는 혹시라도 반대편 안쪽 행랑담장에서 군관이 나타날까 신경이 쓰이는지, 자꾸 곁눈으로 돌아보곤, 또 바깥쪽 행랑담장도 살폈다.


헌데 겸사복이 저승전 뒷뜰을 나서기 무섭게, 엄상궁도 몸을 돌려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석하는 아차 싶어서 겸사복쪽을 돌아보았다. 벌써 연못가를 지나치는 모습을 보니, 가슴어림이 괜히 뻐근했다.


엄상궁을 놓칠세라, 석하는 저승전 기와지붕 내림마루에서 담벼락을 이루는 행랑지붕마루로 훌쩍 뛰어내렸다. 갑자기 오른쪽 담장에서 시꺼먼 그림자가 스치는 듯 하여, 엄상궁은 소스라쳐 고개를 돌렸다.


"너..."


채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엄상궁의 목뒤로 거대한 독수리 발톱 같은 것이 날아들었다. 최소한 엄상궁의 눈에는 먹이를 낚아채는 독수리의 날개 같은 것이 보였다. 헛숨을 삼키는 순간, 엄상궁은 뇌리가 부풀어오르는 듯한 충격을 느끼며 의식을 까무룩 잃었다. 그러자 검은 그림자가 팔을 뻗어 엄상궁의 팔을 잡아 엉거주춤 부축했다.


"너..."


석하가 엄상궁을 발치에 곱게 눕히는 순간, 이번에는 사내의 귀익은 목소리가 석하의 고막을 후벼팠다. 석하는 흠칫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 담장에서 최석정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쳐다보는 참이었다.


"뭐하냐?"

"..."


석하의 눈시울이 실룩실룩 경련하며, 눈동자가 돌처럼 굳어졌다. 사실 석하는 진작 석정의 염탐을 눈치챘다. 숙련된 무사도 아닌 석정이 석하의 이목을 속일 수는 없었다. 아무리 어두웠어도, 석하는 사람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었다. 흰 눈자위에 숨은 검은 눈동자 잡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어두워진 만큼, 동굴 속 물방울 소리를 잡아내듯, 석정의 목화 앞축이 젖은 가랑잎을 밟는 소리도 감지할 수 있었다.


"영감나리..."


석하는 입술을 달싹이다, 겨우 석정의 호칭을 소리내어 나직하게 불렀다. 사실 석정에게 들켜도 상관없다 여겼다. 아주 조금 석정의 존재가 부담스런 상황이긴 했지만, 그래도 위험스런 상황은 아니었다. 석정이라면, 자신을 방해하거나 하지 않고 일단 지켜봐주리라 믿었기에. 아니, 한술 더떠 오히려 유사시에 조력을 구할 수도 있었기에. 지금처럼.


"이 여인 좀 김두광한테...맡겨 주시지요."

"뭐?"


짐짝 맡기듯이 엄상궁을 김두광한테 보내 달라는 부탁을 하다니. 석정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며, 엄상궁을 쳐다보았다. 혼절한 채로 석하의 발치에 누워 있는 것만 봐도 어쩐지 위화감이 들었다. 그런데, 김두광에게 보낸다는 것은...이 여인의 처분은 곧 왕의 뜻에 따를 것이란 얘기였다.


지금 석하가 왕의 밀명을 따른다는 사실이 어쩐지 이상했다. 아무리 왕이라 해도 모후의 아랫사람을 건드리는 건 궁의 법도에도 어긋났다. 하지만, 대비 김씨가 워낙 음으로 양으로 정치에 관여하다 보니, 뭔가 숙종의 심기를 건드리는 잘못을 엄상궁이 지었을 법도 했다. 지금도 모종의 밀지를 쥐여주고 김석주의 집으로 무관들을 보냈으니.


그런데...왜 이리 기분이 찜찜할까.


석정이 다시금 엄상궁을 내려다 보는 사이, 어느틈에 석하의 그림자가 행랑 담장 위로 훌쩍 솟구쳤다. 석정이 흠칫 놀라 행랑 담장 위를 올려다 보니, 기다란 담장마루 위로, 석하가 물찬제비처럼 질주하는 모습이 시야로 들어왔다.


"저, 저리 급..."


방금 엄상궁이 두번째 서찰을 들려 보낸 겸사복을 쫓아가는 건가. 그래도 빨랐다. 빨라도 너무 빨랐다. 석정은 귀신에 홀린 듯한 눈빛으로 멀거니 석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대궐, 특히 여기 동궐의 구조는 기다란 담장과 행랑으로 다닥다닥 붙어서, 남산이나 응봉상 등에서 내려다 보면, 얼기설기 엮인 땅그물 같았다. 땅그물 위로 너무도 자유롭게 내달리는 석하의 모습은 신기하다 못해 괴기했다.


자신의 등줄기로 달라붙는, 석정의 시선을 뒤로 하고, 석하는 저승전 담장마루를 미끄러져 광례문 밖으로 빠져나갔다. 벌써 겸사복이 문밖에서 노둣돌을 딛고 말에 올라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참이었다.


석하의 눈빛이 고요히 반짝였다. 저 겸사복은 천연덕스레 광례문 앞길로 천천히 말달릴 터였다. 오히려 긴장하거나 조급한 티를 내고 달리면 수상쩍게 여기는 눈길이 달라붙을테니. 그러니 석하로선 급할 게 없었다. 천천히 숨죽이고 뒤따를 뿐이었다.


광례문 앞길로 나오긴 했지만, 겸사복은 고삐를 늦추기 전에 좌우부터 살폈다. 아무리 태연한 척 하려고 해도, 누군가 자신을 미행하거나 하는 건 대비하도록 훈련된 탓이었다. 말 위라서 미행 걱정은 그다지 없었다. 기척을 죽이고 뒤를 밟는 짚신발은 모를 수 있어도, 지축을 울리고 뒤따르는 말발굽을 모를 수는 없으니.


그렇게 겸사복이 사방을 살피는 둥 마는 둥 하고, 언덕과 돌담 사이로 내달리는 순간, 환청처럼 낮은 휘파람 같은 것이 고막을 스쳤다.


"어?"


겸사복은 순간 온몸이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다. 한밤중 땅밑 우물에서 울리는 귀신의 곡소리처럼, 휘파람 소리는 커다란 진동이 있었다. 고막이 울리고 온통 귓속이 먹먹해졌다. 겸사복은 양쪽 팔 자개미에서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뒤에서 말을 달려와서 자신의 뒷덜미를 창으로 훅 찍어내릴 것만 같은 두려움이 일었다. 하지만 괜한 불안인지, 겸사복의 시야에는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길바닥에 깔린 검푸르스름한 이내 뿐. 겸사복은 못내 찜찜한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자꾸만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고 말을 달렸다.


반각 남짓 달렸더니, 광통교가 나타났다. 겸사복은 긴장된 얼굴로 말을 세웠다. 눈앞에 들어오는 광통교는 난간도 없는 널다리였다. 언제 어디서 누가 불쑥 나타나서 자신을 저 광통교 아래로 떨어뜨릴 지도 몰랐다. 물론 수심이 기껏해야 장정 허리나 가슴께라지만, 혹여 재수가 사나우면 허벅지 정도만 올라오는 물에 빠져서도, 아니 널벅지 정도의 물에 빠져서도, 얼마든지 숨통이 끊길 수도 있었다.


헌데 겸사복이 말달리는 속도를 늦추어 주의깊게 광통교를 건너는데, 갑자기 몸의 중심이 흐트러졌다. 허공에서 몸이 허물어졌다. 어떻게 된 건지는 겸사복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자신이 탄 말이 갑자기 다리의 중심을 잃고 미끄러지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었다.


겸사복은 순간 말고삐를 쥔 채로, 온몸이 허공에 두둥실 떠올랐다. 시야가 잠시 거꾸로 뒤집혔다 싶은 순간, 그는 쓰러지는 말의 반동으로 그대로 다리 바깥으로 날아갔다. 민어의 부레 같은 것이 뱃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듯한 착각과 함께 그는 밑으로 곤두박질했다.


뭐야!


장대 같은 것이 말의 발치로 쑥 굴러들어온 듯한 광경이 뇌리를 잠깐 스치긴 했지만, 개천에 풍덩 가라앉는 순간 배밑의 조각배가 살짝 뒤로 빠지는 듯한 광경도 시야를 잠깐 스치긴 했지만, 겸사복의 눈앞을 정면으로 강타한 광경은 시꺼먼 암흑을 품고, 어슴푸레한 달빛 비늘을 묻힌 윤슬이었다.


세찬 물보라에 휩싸인 채로 겸사복은 잠시 발버둥을 쳤다. 일어서면 발이 바닥에 닿을 수심인데도, 그는 게헤엄을 치듯 두팔 두발을 정신없이 허우적거렸다. 발이 연꽃줄기에 걸리고, 얼굴이 부들 잎에 긁히는데도, 계속해서 두손을 휘저어댔다. 그러다 비로소 턱이 어느 바위 표면에 닿는 순간, 텁텁한 흙알갱이가 눈으로 코로 입으로 사정없이 밀려들어오는 것을 깨달을 새도 없이, 그는 그대로 정신을 까무룩 잃었다.


정신을 잃은 겸사복의 머리 위로, 기괴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컴컴한 그늘 같기도 하고, 시꺼먼 비늘 같기도 한 도포자락을 온몸에 휘감은 사람의 형체가...고개를 숙이고 겸사복을 빤히 내려다보는 참이었다. 왼손은 삿대를 잡고서, 오른손은 끊어져나간 듯이 허전하게, 소맷부리만 펄럭였다.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그 사람 형체의 등에 업히는 듯한 순간, 산산이 부서진 달빛이 정수리를 비껴나가면서 앳띤 소년 얼굴이 어둠 속에서 벗겨졌다.


"어후..."


달빛이 목덜미와 팔꿈치를 문질렀을 뿐인데, 소년의 얼굴이 달빛에 이지러졌다. 베를 짜고 남은 뽀라지처럼 가느다란 실눈이 발치의 겸사복에게로 더욱 사납게 실그러졌다. 소년은 마치 화풀이라도 하듯 발끝으로 겸사복의 어깻죽지를 툭툭 찼다. 소년은 개천을 휘도는 강바람에 소맷부리만 펄럭이며 오른손은 움직이지도 않고, 발끝만 계속 깔짝거릴 뿐이었다.


"흥..."


소년은 입꼬리를 비틀어 비웃고선, 다시 삿대 끝으로 겸사복의 품속을 해작거렸다. 물에 젖은 쪽지가 겸사복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이내 물결 따라 떠내려갔다. 소년은 화들짝 삿대를 놓치고, 쪽지로 손을 허둥지둥 뻗었다. 하지만 손샅으로 물줄기가 새어나가듯이 쪽지도 흘러나갔다.


외마디 신음을 흘리며, 소년은 왼손도 마저 뻗었다. 물살따라 소매부리가 젖혀지며, 팔꿈치 아래로 처참하게 잘려나간 팔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매부리의 주름에 걸려 쪽지가 주춤하는 순간, 소년은 겨우 왼손으로 쪽지를 움켜쥐었다. 다시 손샅으로 쪽지가 빠져나갈세라 힘껏.


"승..."


무심코 소년을 부르다가, 석하는 입술을 달싹였다. 잠깐 방심했다. 아무리 겸사복이 의식이 없다 한들, 자신이 이렇게 이름을 입밖에 내어선 안되었다.


그래도 자기 이름 석자에는 예민한 건지, 소년이 바로 뒤돌아보았다. 소년, 승윤의 옆얼굴이 달빛에 더 창백하게 빛났다.


"이름 부르나 마나...팔이 이래서..."


승윤은 자조적으로 웃으며, 잘 움직이지도 않는 오른팔을 힘겹게 들어보였다. 광통교에 있는 금군의 얼굴은 아무리 어두워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이 골육처럼 믿고 의지해온 김석하였다. 석하, 김석하. 하지만 석하의 성함 석자를 새삼스레 되뇌게 되는 것이,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빨리 와."

"알았어."


승윤은 입꼬리를 실룩이곤 다시 고개를 돌려서, 겸사복을 돌아보았다. 사지가 멀쩡한 채로 바위에 엎어진 모습을 보니 괜히 기분이 나빴다. 승윤은 자신도 모르게 발을 뻗어서 겸사복의 팔꿈치를 짓밟았다. 그의 흑혜 밑창은 뾰족한 징이 스무개씩 박힌 놈이었다. 당연히 겸사복은 팔이 바스러지는 고통에 빠질 터였다.


엄청난 고통에 정신이 드는지, 겸사복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개가 꿈틀하기까지 했다. 승윤은 흠칫하여 고개를 돌렸다. 광통교 위에 있는 석하가 신음을 들었을까 겁이 났다.


보았으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당장 혼쭐을 내거나, 목줄이라도 채우거나 해서라도 버릇을 고쳐놓을 것만 같았다. 최소한 강승윤 자신이 아는 김석하라면, 묵과하진 않을 터였다.


승윤이 슬그머니 눈치를 보니 석하가 광통교에서 이쪽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참이었다. 보았나? 보았다. 봤을까, 보았나? 승윤은 조바심이 생겨서 곁눈으로 광통교를 쳐다보다, 강바람에 오른팔꿈치가 시큰거리는 듯한 착각을 느끼고 눈시울을 실룩였다. 이럴 때 석하의 문책을 벗어날 방법은, 지금의 신음이 승윤 자신의 것인 양 둔갑시키는 것이었다.


"흐으..."


석하는 다리 아래에서 들리는 승윤의 신음에, 얼굴을 굳히고 가만히 지켜보는 참이었다. 겸사복이 깨어나는 참인 건지, 경계를 하려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첫마디는 겸사복의 신음처럼 들리더니, 지금은 자꾸 석하도 똑같이 눈시울을 실룩였다. 골육과도 같은 승윤이 신음하면, 괜히 신음하게 되었다. 승윤이 아프니, 석하도 아팠다.


"크흐으..."


계속해서 이어지는 승윤의 신음에 알게 모르게 미약하게 또 다른 자의 신음이 섞였다. 석하의 고개가 개천쪽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는 똑바로 승윤의 발치를 응시했다.


아까 개천에 빠진 충격일까. 아니다. 이건 호흡이 달랐다. 그냥 아파서 하는 신음과 누군가 고문을 가해서 하는 신음은 호흡 자체가 달랐다. 그런데 지금 이 신음은...


언제부터 승윤이 등뒤에서 이렇게 멀쩡한 사람 팔꿈치를 징신으로 짓이겨 놓곤 했을까. 대체 언제부터. 석하는 눈밑이 경련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애써 불안을 떨치면서도, 석하는 승윤의 발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시선을 돌려도, 자꾸만 시선이 갔다.


그런 석하의 눈치가 보였는지, 승윤이 겸사복의 무릎 옆으로 슬그머니 발끝을 비끼고서 쪽지를 펼쳤다. 물에 젖었는지 쪽지에선 물기가 뚝뚝 떨어졌다. 쪽지를 살피는 승윤의 어깻죽지가 움찔했다. 꼭 물에 젖어 글씨가 번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럴 리가."


석하는 실소를 지었다. 그림도 쓰고, 글도 쓰고...그렇게 숱하게 먹물을 다뤄 봐서 잘 알았다. 먹물은 개천물에 쉽사리 번지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어슴푸레한 달빛과 승윤의 표정을 봐선, 정말로 당황하는 참이었다. 쪽지의 글씨를 알아보질 못하는 모양이었다. 먹물 글씨가 번졌을 리가 없으니, 아예 아무 글씨도 쓰이지 않았를 거라 생각하는 게 차라리 합당해 보였다.


"냄새 맡아 봐."


석하는 의심짙은 눈초리로 승윤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혹시라도 황감 우린 물로 글씨를 썼으면, 한밤 중의 육안으론 흔적을 잡아내기 힘들 테니, 냄새라도 맡아보게 하려는 것이었다. 석하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승윤도 종이에 코끝을 대고 냄새를 킁킁 맡아보았다.


황감 냄새는 없었다. 특유의 신내가 코끝을 파고들어야, 황감 우린 물로 글씨라도 썼겠거니 하련만, 코끝에 닿는 건 그저 물비린내 뿐이었다.


"당했어. 형."


영문을 모르면서도, 승윤은 입꼬리를 비틀고 웃었다. 똑똑한 김석하가 뒤통수를 맞았으니, 이 정도 술수를 부릴 만한 이는 보나마나 김석주 같았다. 김석주 외엔 달리 짐작가는 데가 없었다.


"당했다..."


석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하니 곱씹어 보고선, 광통교 밑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승윤은 움찔 놀라 석하를 쳐다보았다.


석하는 미간을 실룩였다. 그럼 자신이 지켜볼 줄 알고, 처음의 연락책은 걸러보낼 것까지 계산해서 두명의 연락책을 쓴 걸까. 입안이 홧홧했다. 하지만 이대로 자신이 당한 거라고 믿고 싶진 않았다. 석하는 그대로 허공에서 한바퀴 돌면서, 대번에 겸사복 앞으로 착지했다.


물보라가 튀는 바람에, 승윤은 고개를 돌리며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전에 이미 석하는 허벅지까지 물에 잠기고도, 물보라까지 뒤집어 써서 가슴께까지 흠뻑 젖었다. 승윤은 인상을 쓰면서 입맛을 쓰게 다셨다. 굳이 옷을 적시면서까지 광통교에서 뛰어내릴 필요는 없었는데, 괜히 아까웠다.


"아 형..."

"비켜봐."


석하는 겸사복 앞으로 다가들어 직접 품속이며 소매춤과 허리춤, 심지어 발목의 띠까지 샅샅이 뒤졌다. 승윤은 석하가 포기 않고 집요히 겸사복의 몸수색을 하는 것을 한발짝 뒤에서 지켜보며 혀끝으로 입천정을 초조히 적셨다. 저렇게 만지다간, 자신이 겸사복의 무릎을 징신에 촘촘히 박힌 쇠징으로 짓이긴 것을 눈치챌 것 같았다. 이미 눈치챘을 수도 있지만. 불안해서 겸사복의 팔꿈치를 힐끗 내려다보니 살짝 눌리고 찢긴 것이 눈에 들어왔다. 승윤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어떻게든 석하의 신경을 돌려야 했다.


"형...이 쪽지에 비밀이 있는 건 아니구?"

"쪽지?"


승윤이 냉큼 수중의 쪽지를 눈앞에 내밀자, 석하는 심드렁히 되물으며 힐끗 쪽지를 보았다. 보름달 같은 것이 휘영청 떠서 어둠을 밝히는 참이지만, 쪽지엔 아무 그림도 글씨도 없었다. 먹뜸조차 없었다.


물에 젖었는데도 흐물거리지 않을 만큼 두껍고도 질긴 것이, 석장을 정교하게 붙여서 만들어 삼층지三層紙라 불리는 옥판선지나, 대충 두껍게 석장을 붙여서 만들어 삼첩지三疊紙라 불리는 창호지일 법했다. 헌데 물기를 흠뻑 머금고 달빛에 새하얗게 반짝이는 것을 보니, 누리끼리한 삼첩지는 아니었다.


석하는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며, 쪽지로 손을 뻗었다. 접힌 주름을 보면 한겹인지 세겹인지 알 수 있었다. 그냥 가만히 손끝으로 표면을 만져봐도 알 수 있었다. 손길에 닿는 감촉은 반질반질하니, 눈길에 닿는 윤기는 반짝반짝하니...서리꽃이 내린 듯이 윤이 나면서도 질긴 상화지霜華紙 같았다.


"상화지...같은데..."


석하는 입맛을 쓰게 다셨다. 마냥 매끄럽지만은 않았지만, 물에 젖은 탓일 터였다. 상화지가 맞았다. 그래서 더 씁쓸했다. 그림 그릴 때나 쓰는 최상품의 종이를, 아무 전갈도 없이 전하려 했다니. 종이 자체를 전하려 했던 모양이었다. 도대체 이 종이를 어디다 쓰려는 건지. 소현세자의 핏줄인양 행세했던 요승 처경처럼 왜능화지가 필요했던 것도 아닐테고.


이렇게 두꺼울 필요가?


석하는 의혹을 품었지만, 바로 떨쳐냈다. 그는 그대로 종이를 개천물에 떠내려보내고, 곁눈을 겸사복에게로 흘겼다. 의식을 잃고 혼절한 것처럼 보여도, 이미 겸사복은 호흡이 돌아온 터였다. 지금까지 자신과 승윤의 대화를 똑똑히 들었을 터...


"가자."

"어?"

"어서 와!"


석하는 혹시라도 승윤이 남아서 겸사복을 해할까 불안해서 발길을 보챘다. 승윤도 불안해선지 아쉬워선지 모를 눈빛으로 겸사복을 흘겨 보고 할 수 없이 뒤따랐다. 석하는 남겨진 겸사복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할 필요가 없었다. 수심이 얕아서가 아니라, 의식이 있어서였다. 그냥 지금 돌아가 주는 게 저 겸사복의 목숨을 해치지 않는 길일 터였다.


그렇게 석하가 승윤을 데리고 개천을 벗어나 광통교로 단숨에 올라가자, 겸사복은 감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이 어두운 밤중에 눈을 온전히 뜨지 않아서, 시야가 침침하긴 하였지만, 달빛에 비친 두 사내가 남산쪽으로 향하는 것은 보였다.


"흥. 멍충이들."


겸사복은 입꼬리를 비틀어 웃고선, 물길 따라 내달렸다. 좀전에 김석하가 물길에 흘려보낸 그 쪽지를 찾아야 했다. 몇걸음 떼지 않아, 겸사복의 시야에 서리꽃처럼 새하얗게 빛이 나는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수풀에 걸려서 더 떠내려가지도 않았다.


"오호..."


겸사복은 두눈을 번뜩이며, 얼른 쪽지를 주워 물기를 탁탁 털어내고 품속에 넣었다. 자신의 옷이 젖든 말든, 이 쪽지만은 지켜야 했다. 그렇게 겸사복이 품속에 챙긴 쪽지는 금세 김석주의 재산루로 전해졌다.


- 백광현을 데려오세요.


숯을 문질러서 온통 시꺼멓게 변한 쪽지에는 우물정井자로 접힌 주름 외에도 정중앙에 하얀 글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김석주는 서안 위에 쪽지를 내려놓으면서 납촉의 불빛을 가만히 응시했다.


백광현을 데려오라...단순한 왕진을 말하는 건 아니었다. 어의 백광현을 부르는 건 사실은 김석주보다 대비 김씨에게 더 쉬운 일이었다. 쪽지의 문구는 백광현을 대비 김씨의 사람으로 만들어달라는 의미였다. 백광현을 포섭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리 재촉하는 참이었다. 그만큼 김석주 자신이 궁지에 몰렸다는 전언인 건지.


"정영아, 병주를 불러오거라."

"예, 대감."


석주는 툇마루쪽 장지문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장지문 옆엔 희미한 그림자가 있었다. 그림자가 짤막히 대꾸하곤 사라졌다. 장지문 앞을 지키던 자가 사라진 탓인지 찬바람이 문틈으로 불어왔다. 석주는 오한을 느꼈는지 어깻죽지를 움츠리다가, 이내 손끝으로 쓱쓱 문지르며 입술 새로 비죽이 실소를 흘렸다.


"바람이 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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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8 해의 그림자 257 +4 15.11.08 994 16 38쪽
257 해의 그림자 256 +2 15.10.12 847 14 39쪽
256 해의 그림자 255 +4 15.09.19 1,007 16 40쪽
255 해의 그림자 254 +2 15.08.27 909 14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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