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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님의 서재입니다.

해의 그림자

웹소설 > 일반연재 > 일반소설

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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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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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16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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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5쪽

해의 그림자 51

DUMMY

김만중이 홍문관으로 돌아가고, 진홍은 해례를 꺼내어 들추어보며 우물정井자로 칸을 나누어 자음의 방위를 정리했다.


喉邃而潤 水也

목구멍은 깊고 젖으니 물이라..


聲虛而通 如水之虛明而流通也

소리가 비어서 통하니, 흘러 통하는 물과 같으니라.


"아..."


가만히 소리를 흘러내본다. 그러고 보니 앞의 발음을 따라 소리가 흐른다. 그래서 물일까?


於時爲冬 於音爲羽.

사철로는 겨울이 되고, 오음으로는 깃털우羽가 된다.


"깃털우?"


차마 김만중 앞에서 쓰다가 못쓴 부분이었다. 북녘으로 날아가는 새를 뜻하는 걸까? 하지만 음이라고 했다. 숙부 앞에서도 기역 아래로 우羽라고 쓰다가 멈칫하니, 숙부는 알듯 모를 듯 묘한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진홍은 어쩐지 찜찜함을 느끼며 계속해서 풀어내렸다. 계속해서 칸을 채우다 보니 ㄱ이 음계로는 각角음이고, ㄴ이 徵치음이고, ㅅ이 상商음이고, ㅇ이 우羽음이며, ㅁ이 궁宮이라는 부분들이 5음을 이루었다.


┌─┬─┬─┐

│─│ㅇ│─│

├─┼─┼─┤

│ㅅ│ㅁ│ㄱ│

├─┼─┼─┤

│─│ㄴ│─│

└─┴─┴─┘

┌─┬─┬─┐

│─│水│─│

├─┼─┼─┤

│金│土│木│

├─┼─┼─┤

│─│火│─│

└─┴─┴─┘

┌─┬─┬─┐

│─│北│─│

├─┼─┼─┤

│西│中│東│

├─┼─┼─┤

│─│南│─│

└─┴─┴─┘

┌─┬─┬─┐

│─│羽│─│

├─┼─┼─┤

│商│宮│角│

├─┼─┼─┤

│─│徵│─│

└─┴─┴─┘


"궁상각치우?"


진홍은 고개를 갸웃했다. 봐도 모르겠다.


궁상각치우라면, 음계를 이루는 5대 음률이다. 그런데 자음들이 각자 오음을 이룬다는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어쩐지 숙부의 웃음이 뇌리에 걸렸다.


하지만 오음은 나중에 생각할 문제다. 당장은 자음의 기본이라는 기역, 니은, 디귿, 시옷, 이응의 성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진홍은 고개를 털고는 다시금 해례에 집중했다. 아예 처음부터, 첫장부터 차근차근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읽어내렸다.


國之語音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



"벌써 며칠 째..이게 뭐냐.."


어린 숙종은 며칠 째 자신의 서안 위로 산더미처럼 쌓인 장계와 상소 등의 문건들을 쳐다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병약한 몸으로 여막살이를 한지 벌써 반년이다. 엄동설한에 외풍이 으슬으슬 온몸을 파고드는 것만 같다.


그런데 당장 정무에 치여서 여막으로 가져오고도 밀린 문건들을 처리하기가 버겁다. 특히나 엊그제 올라온 여민락과 보허사를 넣어도 되냐는 장계는 숙종의 신경을 박박 긁는다. 노래를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금시초문인 악곡들이다.


그래서 두광을 시켜서 장악원의 악학궤범을 가져오라 일렀다. 그랬더니 총 9권 3책인 악학궤범을 안아들고 낑낑대며 두광이 여막으로 들어왔다. 어쩐지 두광이 놈이 감히 뾰족한 눈초리를 휘두르는 것만 같다. 자꾸 책심부름을 시킨다고 불만인 모양이다.


하지만 일거수일투족이 신료들에게 흘러나간다든지, 뒤에서 신료들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는 것보다는 믿을 만한 두광에게 전담시키는 편이 나았다. 그건 두광이 이해해줘야 한다고 숙종은 생각했다. 이게 다 자신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탓이려니 해야지 싶었다.


"전하, 분부대로 악학궤범을 가져왔습니다."

"어떻게 이리 빨리 찾아온 것이냐? 책 찾는 것도 솜씨가 느는 건가?"


숙종이 놀리듯이 건넨 말에 두광이 입술을 삐죽였다.


"전하께서 뭘 찾으실 지 아는 것처럼 김응교가 척척 찾아주던데요."

"김응교가? 일단 서안에 올려두라."


보기만 해도 질리는 분량에 숙종은 한숨어린 대꾸로 답하였다. 두광은 일부러 소리가 크게 나도록 서안에 악학궤범을 내려놓으며 키득 소리죽여 웃었다.


"예 전하."


악학궤범은 성종 때 예조판서 성현이 진두지휘하여 편찬한 악전樂典(박자, 속도, 음정 등 악보에 쓰는 모든 규범)으로, 궁중 장악원에서 쓰이는 악보와 의궤를 총망라하여 만든 책이었다. 단순히 악보만 실은 것이 아니라 악곡의 역사, 전통, 악기, 악보 등의 잡다한 걸 모두 실었기에 더욱 분량이 방대했다. 당장 무슨 노래인지 악공을 불러 들어보면 편할텐데.


하지만 국상 중엔 음악을 들어선 안된다. 더군다나 숙종으로선 아비의 국상인 만큼 내년 8월까지는 참아야만 했다. 그런데 청칙사의 방문에 맞춰 음악을 연주하게 해야 한다. 더군다나 신료들은 한술 더떠 이번엔 새 군주의 위엄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여민락이나 보허사를 연주해야 한다, 아니 된다 등등의 의견대립으로 싸운다.


여민락? 보허사? 못들어본 노래다. 청국 칙사들이 올 때도 한번도 연주하지 않은 노래다. 그래서 찾아보려는 것이다. 어린 왕이니까, 모르는 게 많으니까 하나라도 꼬투리를 잡아서 밟아버리겠다는 속내도 보이고, 또는 일거리를 잔뜩 쌓아 정신을 분산시키려는 속내도 보인다. 그렇다고 해도 모르고 당할 수는 없다.


"장악원 책임자들을 불러모아라."

"예 전하.."


두광은 그대로 쪼르르 장악원으로 달려갔다. 장악원엔 김익훈이 잠시 정3품 정正직에 있다가 갈려나갔을 뿐, 주변의 탄핵으로 금세 갈렸다. 그리고 지금은 제조2명과 첨정, 주부, 직장까지 자신과는 아무런 연고가 없는 자들로 메꿔진 상태다.


숙종은 이내 여막으로 줄줄이 불려와서 엎드린 책임자들을 힐끗 쳐다보았다. 정2품 제조 2인, 정3품 정正 1인, 그 아래로 당하관인 종4품의 첨정 1인, 종6품의 주부 1인, 종 7품 직장 1인...줄줄이 꼬치처럼 꿰여섰다. 그들을 한결같이 관통한 꼬챙이는 바로 '불만'이란 녀석이었다. 퇴청하려다가 불시에 불려나온 터라 모두들 표정들이 좋지 않았다.


"너희들이 엊그제 여민락與民樂을 청칙사의 연향에 연주하는 것이 좋겠다는 장계를 올렸던데. 어떤 곡인가?"


악학궤범에서 여민락 부분을 펼치고 묻는 숙종의 물음에 장악원 정은 움찔하면서도 당혹스런 감정을 내색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여민락與民樂은 이름 그대로 백성에게 음악을 베풀어준다는 뜻이옵고, 태평성대를 과시하는 곡이옵니다."

"태평성대?"


숙종은 가만히 침묵하며 생각에 잠겼다. 그동안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까닭을 알겠다. 왜란과 호란, 이런 전란 이후로는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졌으니, 연주할 면목도 염치도 없었을 터였다.


"여민락이 그동안 몇번이나 연주가 되었는가?"

"네? 몇번이라뇨?"


장악원 정이 멍청히 되물었다. 2인의 제조들도 멍청히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들은 이내 아랫사람인 첨정과 주부, 직장을 곁눈질로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딱히 아는 것은 아니어서 괜히 서로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찌를 뿐이었다.


"..."

"그것이..각종 전란 이후로는 연주되지 아니하여..거기까지는 신들도 잘.."

"아무도 아는 자가 없느냐?"


얼버무리는 신료들의 대답이 답답하여 숙종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도대체 잘 알지도 못하는 노래를 자신에게 권한 심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멋모르고 아는 체하려고 주워섬긴 것인지, 아니면 교묘하게 덫을 놓으려는 것인지, 온갖 의심이 고개를 쳐든다.


"소신들은..그저 전악이 추천해주는대로..장계를 올렸을 뿐이옵니다."


장악원 제조가 버벅거리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전악? 전악은 뭐하는 자리냐? 뭐하는 자더냐?"


숙종이 워낙 어린 데다 즉위하지 얼마되지 않는 터라 더더욱 생소한 관직이었다. 전악이 추천해주는대로 장계를 꾸몄다는 책임자들의 보고에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장악원 정이 급히 답하였다.


"전악은...정6품 체아직(명예직으로 일정한 직위나 녹봉이 없는 잡직) 관원으로..실제로 이들이 악곡의 연주나 교육 등의 실무를 담당하옵니다."

"그러니까 그대들은 그저 꿔다놓은 보릿자루이고, 전악이야말로 진짜배기라 이건가?"


숙종의 독설에 장악원 책임자들이 흠칫했다.


"전하, 말씀이 지나치시옵니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제조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하지만 숙종의 서슬퍼런 눈길은 이내 제조 2인, 정 1인, 첨정 1인, 주부 1인, 직장 1인..이렇게 여섯명을 낱낱이 파헤쳐버렸다. 여섯명이나 되는 관리들이 그저 행정직에 앉아서는 하나같이 쓸모가 없다. 그런 숙종의 속내를 느낀 장악원 정이 황망히 덧붙였다.


"신이 설명드리겠습니다. 장악원은 예와 악을 전담하는 자리이옵니다. 악은 악공들이 담당하는 자리옵고, 예는 신들이 담당하기에 체제가 이런 것이옵니다."


한마디로 왕이 뭘 몰라서 자신들을 얕잡아본다는 강변이었다.


"그러니 여민락이 언제 어디서 몇회 정도 연주되었는지, 그 전례 정도는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더냐. 내가 너희들에게 여민락의 노래를 부르라 하였더냐, 아니면 악보를 가르쳐달라 하였더냐?"

"..."


장악원 정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가서 전악을 불러오너라."


날벼락이 떨어진 것 같은 표정으로 장악원 책임자들이 다같이 고개를 쳐들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송구하오나..전악은 병이 나서..소인들도 겨우 자문을 구했을 뿐이오라.."

"뭐라? 그럼 그 밑에 있는 자라도 불러오라."

"전악의 제자를 불러오겠나이다."


장악원 직장이 황급히 여막을 나섰다. 안 그래도 좁디 좁은 여막에 여섯명이 줄줄이 서 있으려니 어깨와 팔이 서로 맞닿을 만큼 좁았던 터라, 한사람이 비자, 나머지 사람들은 그제야 어깨와 팔꿈치라도 움직여보며 숨을 돌렸다.


한참 후에 악공 한명이 불려왔다. 숙종은 흠칫 놀라 악공을 쳐다보았다. 스물이나 되었을까. 한눈에도 피죽도 제대로 못 먹어서 피골이 상접했다. 그리고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했고, 얼굴이며 팔도 붉으죽죽하게 살갗이 튼 몰골이었다. 예를 전담한다고 큰소리친 책임자들과는 전혀 딴판으로 행색이 초라한 자였다. 그는 바들바들 떨며 여막에 엎드렸다.


"소인을...어인 일로..부르셨나이까?"

"네 이름이 무엇이냐?"

"소인은..김정겸이라 하옵니다."


천인인데도 성이 있다. 전쟁 이후로는 천인들도 김씨, 박씨 같은 흔한 성을 갖다쓴다더니, 전쟁 탓인지, 아니면 이름 뿐인 관직을 얻은 탓인지, 숙종으로선 곡절을 알 수 없었다. 숙종은 악공을 힐끗 보며 물었다.


"여민락이란 노래를 아느냐?"

"네?"


정겸은 두눈을 말똥말똥 떴다. 이내 왕의 용안을 쳐다본 죄로 김두광은 물론 좌우의 관리들의 따가운 눈총을 한몸에 받고 고개를 수그렸다.


"그야 당연히.."

"안다?"

"예 전하.."

"허면 무슨 곡인지 설명을 해보거라. 내가 저들을 불러모아 물었더니 자신들은 예를 알 뿐이고 악은 모른다고 답하더구나."

"..."


숙종의 날카로운 말에 정겸은 힐끗 눈길을 돌렸다. 신료들이 뻘쭘하니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숙종과 정겸의 눈길을 피했다.


"여민락은 '봉래의'에 속하여 춤출 때 향피리로 연주하고 노래를 덧붙이는 것이오며..백년동안 연주되지 못하는 곡이오나..아주 오래 전에 세종대왕께서...직접 작곡하신 노래로,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이라 배웠사옵니다."


숙종은 뜻밖의 이름을 듣고 두눈을 크게 떴다.


"세종대왕께서?"

"예 전하.."


고작 짧은 대답을 하는데도 정겸의 음성이 떨려왔다. 숙종은 물끄러미 정겸을 쳐다보았다.


"장악원 책임자들은 여민락의 뜻을 백성에게 음악을 베풀어준다는 뜻이라 말하고, 너는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뜻이라 말하는구나."

"송구하옵니다."


정겸은 금세라도 울먹일 듯 고개를 떨구었다. 악공이란 너무도 배고프고 고달픈 삶이었다. 한달에 주어지는 봉록이란 고작 악공포라 이름붙은 베 한필이었다. 먹고 살 집 한칸도 없어, 움막을 짓고 살아야만 한다. 한끼 배불리 먹는 것도 소원이다. 그래서 스승과 죽 한그릇 갖다놓고 악기를 연주하며 배고픔을 달래는 것이 고작이었다.


스승은 평소 여민락이란 곡을 좋아했다. 중화의 것이 아니라 우리 고유의 곡이라며 특히 아꼈었다. 그리고 그 노래의 뜻도 백성과 함께 즐긴다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깃들어서 좋다고 하였었다. 스승의 평생 소원은 다시금 여민락이 궐안에 울려퍼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반정과 전란의 여파로, 민생이 피폐해져 좀처럼 연주되지 못했고, 스승은 여민락이 연주되는 모습을 보지 못한 채로 한많은 눈을 감게 생겼다.


"혹시 여민락을 네 스승이 추천한 이유를 아느냐?"

"세종께선, 조선사람이 살아서는 조선의 향악을 듣는데, 죽어서는 중화의 당악을 듣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노릇이겠냐시며, 여민락을 지으셨다 하옵니다. 하여 스승께선 조선의 여민락을 연주해야 한다고 믿으시옵니다."

"그것이 전부냐?"

"송구하옵니다. 스승께선..한번이라도 살아생전에 궐에서 여민락이 연주되는 것을 보고 듣고 싶다..하셨사옵니다. 늙고 병들어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 전에 한번만이라도..보고 드고 싶다 하셨사옵니다. 그래서 장악원 나으리들이 곡을 추천하라 강요하시자 여민락의 이름을 쓰셨사옵니다."

"..."


숙종은 어쩐지 코끝이 시큰해지고 목구멍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조상인 세종대왕이 친히 지은 노래라 하였다. 언문에 마방진을 도입하는 데 이어 악곡까지 직접 짓는 분이셨다. 천한 재주라는 산학과 음악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다.


"한번..들어볼 수 있느냐?"


숙종의 말에 장악원 관료들이 화들짝 놀라서 반대했다.


"전하, 아니되옵니다. 상중에는 음악을 듣지 않는 법이옵니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흥. 누가 지금 듣겠냐고 했더냐?"

"예에? 하오나 방금 말씀은 어감이.."


장악원 관료들이 두눈을 말똥말똥 떴다. 숙종은 얄궂은 눈빛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말했다.


"나중에 듣겠다는 말을 하려던 것이다."

"..."

"내 어의를 보내어, 전악을 치료하라 명할 것이니, 스승이 나으면, 또 탈상을 하면 꼭 그때는 내게 여민락을 들려주거라."


숙종의 명에 정겸은 귀를 의심했다. 어의를 보내준다고 하였다.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얘기였다. 꿈인지 생신지, 자신들처럼 천한 이에게 왕이 어의를 보내준다 하였다. 당연히 그 자리에서 장악원 관료들이 펄쩍 뛰었다.


"전하! 아니되옵니다! 어찌 귀한 인력을 천한 악공에게 낭비하시옵니까! 전하의 존체를 담당하는 어의에게, 천한 악공을 만지도록 윤허하시다니요!"

"신분이 천하나, 재주가 귀하니 어쩌겠느냐."


숙종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전하! 전하께서 상중이라 저자들의 연주를 들어보지 못해서 그러시옵니다. 본디 음악이란 천한 자들이나 하는 것이옵고, 마땅히 그 재주가 천한 것이오니..귀한 재주라니 당치도 않사옵니다!"

"지금 누구더러 천하다고 하였느냐! 내 선조이신 세종대왕께서 천하다고 한 것이냐!"


숙종이 두눈을 지릅뜨고 소리쳤다. 분노로 파르르 물결치는 숙종의 눈꼬리가 매서웠다. 장악원 관료들은 움찔하여 엉겁결에 변명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신들은 그저 천한 악공들을.."

"내 선조이신 세종대왕께서 친히 만드신 곡이다. 너희들 논리대로라면, 세종대왕께서도 천한 것이냐? 그런 것이냐?"

"천, 천부당만부당이옵니다. 어찌 천한 신들이..감히..세종대왕께선 당연히, 그 누구보다도 존귀하신 분이시옵고, 세종대왕께서 만드신 곡도 무엇보다도 귀한 곡입니다."

"그래. 당연히 귀한 곡이니, 이 곡을 연주할 손도 귀한 손이고, 그 재주도 귀하다. 여민락을 연주하는 것이 평생의 염원이라지 않느냐. 그러니 당연히 저들이 오래 살아서 여민락을 연주해야만 한다. 하여 내 어의를 보내는 것이다. 그래도 할 말이 있느냐?"

"..."


여전히 얼굴엔 불만이 가득하다. 참으로 불손한 자들이다. 숙종은 속으로 이를 갈며 코웃음을 쳤다. 악은 몰라도 예를 알아? 지나던 개가 풀 뜯어먹는 소리.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장악원 신료들을 잡아먹을 듯하던 무서운 눈빛으로, 숙종은 정겸을 돌아보며 웃음지었다.


"들었느냐? 내 어의를 보낼 터이니, 먼저 돌아가서 네 스승을 치료하는 데에 전념하라."

"성은이..망극하옵니다."


정겸은 구슬 같은 눈물이 두눈에 어려서 눈앞이 희뿌옇게 변하는 것을 느꼈다. 여민락을 연주하는 것이 평생 염원이라던 스승의 한이 풀리게 생겼다. 약 한첩 지을 돈도 없어서 죽어가는 스승이었다. 어의를 보낸다니, 이제 스승도 제대로 병을 치료할 수 있게 되었다. 정겸은 여막의 거친 짚자리에 이마가 긁히는 것도 아랑곳 않고 몇번이고 쿵쿵 머리를 찧어가며 절하였다. 정겸을 쳐다보는 숙종의 두눈에 잠깐이지만 해맑은 웃음이 스쳐갔다.


정겸이 나가고, 숙종은 가만히 장악원 관료들을 쏘아보며 악학궤범을 뒤척였다.


"내 궁금한 게 있어서 말인데.."

"하문하시옵소서.."


자라목이 되어 어깨를 움츠리는 관료들의 뒷덜미를 숙종의 눈길이 차갑게 쓰다듬었다.


"관리가 신분은 귀한데, 재주는 천하면, 그들이 받아먹는 녹봉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네? 그것이.."


장악원 관료들이 차마 답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말문이 막혔다. 그저 쭈볏쭈볏 손바닥을 비비며 서로 눈치를 볼 따름이었다. 두광은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워서 설핏 웃음이 삐쳤다. 관료들이 이내 두광에게 눈을 부랴렸으나, 워낙 왕의 총애를 받는 내관이었다.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두광이 네가 말해볼테냐?"

"네? 저요?"


뜻밖의 질문에 두광은 두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의 어린 주인은 근엄하게 두눈을 내리깔고 서안 위 종이에 무언가를 빠르게 써내렸다. 두광은 당황하였지만 이내 침착하게 답하였다.


"누워서 받아먹는 급료라 하여, 와료臥料라 하옵니다."

"그래? 두광이 너도 아는 와료란 단어를 저들은 왜 이리 어려워하는 것이냐?"

"그것이..찔려서 그런 줄로 아옵니다."

"찔려?"

"양심의 가시에 찔린 것인지, 아니면 여기 짚자리 가시에 찔린 것인지는 소인도 모르겠사옵니다."


주거니 받거니, 왕과 내시가 한마디 한마디 주고 받는 말들이 생선가시처럼 장악원 관료들의 목에 콱 걸려버렸다. 침을 삼키는 것조차도 목이 따가울 지경이었다.


"흥. 그만들 나가보라."


숙종은 못마땅한 눈초리로 관료들을 하나하나 쏘아보곤 손짓도 귀찮은지 턱짓으로 신호했다.


"송구..하옵니다."


장악원 관료들이 황망히 여막을 빠져나갔다. 그 와중에도 장악원 제조는 이를 뿌드득 갈며 두광을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두광은 눈도 꿈쩍않고 혀를 낼름거렸다. 그리고는 가슴어림에 파고드는 쾌감을 느끼며 숙종의 서안을 힐끗 쳐다보았다. 서안 위엔 숙종이 미리 두광이 대답할 말을 적어놓는 글귀들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읽고 대답하는 솜씨가 제법이구나."

"누구 덕분에요."


숙종이 피식 웃으며 하는 말에, 두광은 고개를 흔들며 애써 웃음을 참았다.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소리내어 웃을까. 하지만 생각할 수록 우스웠다. 왕이 아직 어려선지, 이런 식으로 신료들을 골탕먹이는 재미를 들일까 걱정이었다.


"너는 내의원에 가서 백광현에게 일러라. 장악원 소속의 전악이 병들어 누웠으니 가서 치료해주라고 말이다. 약재가 필요하면 또한 청구하라 하고."

"예 전하."


두광이 허리숙여 답하고 여막을 나가자, 숙종은 여민락을 다시금 펼쳐 쳐다보았다. 반정과 전란으로 제대로 연주되지 못한 여민락..고작 열네살에 즉위하여 이제 열다섯살이 된 자신이, 즉위한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여민락을 연주한다면 청국 칙사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이었다. 숙종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덧 쌀쌀해진 저녁이 되어 하얀 입김이 책장 위로 어렸다. 하얀 입김이 마치 칸칸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악보의 선을 흩어놓았다간 다시 모아놓았다. 숙종은 멈칫하니 두눈을 깜빡였다.


"여기도 송송이를 썰어놨나.."


악보가 갑자기 송송이로 보인다. 다시 고개를 흔들고 바라보니 각 칸마다 우물정井자 형태로 굵은 칸이 쳐져 있다. 한쪽당 두개의 우물정井자가 붙어있는 셈이다. 그 우물정井자 안에 작은 송송이들이, 아니 작은 우물정井 칸이 서른 두개씩 쳐졌다. 그리고 칸마다 下一, 下二, 上一, 上二 등으로 암어같은 것이 써져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알아보기가 어려웠다.


"여봐라! 다시 장악원 관리들을 불러오라."


이미 김두광은 숙종의 명을 전하러 내의원에 갔다. 여막 밖은 다른 내시들과 금군 및 별감들이 지키고 선 상태였다. 궐내의 잔심부름은 주로 내시들이 하고, 궐밖으로의 잔심부름은 별감들이 한다. 서로 눈치를 본다. 벌써 관리들이 퇴청을 하였으면 궐밖으로 부르러 가야 한다. 서로 눈치싸움을 버리다간 내시와 별감이 함께 장악원으로 향하였다.


"이게 다 전악과 그 제자 놈들 때문이네."

"당장 잡아다가 물고를 내야.."


장악원 관료들은 치를 떨며 여경방으로 향하였다. 생각만 해도 분하다. 이게 무슨 망신인가 싶었다.


"여민락을 넣어서 감히 우리를 물먹여?"

"퇴청도 못하고 이게 무슨 꼴이야.."


원래 자신들이 왕을 물먹이려던 것은 새까맣게 잊고, 전악과 제자에게 당한 것만 분하여 곱씹는 그들이었다. 최소한 여민락에 대해 기초적인 지식만 가졌어도 이리 당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세종은 물론 성종 때까지만 해도, 예조판서나 장악원 관리들까지도 예악에 밝았었다. 하지만 점차 음악을 천시하는 풍조가 번지면서, 지금은 예악을 수박 겉핡기로만 다루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최소한 성종 때였더라면 절대로 범하지 않았을 실수였고, 무지였다.


"당장 쫓아가서 혼쭐을 내줍시다."

"그러는 게 좋겠으이!"


왕 앞에선 입도 벙긋 못하고선, 분풀이를 전악과 정겸에게 하려는 것이었다. 새파랗게 어린 왕에게 당한 치욕을 씻을 길이 따로 없는 탓이었다.


"이보게 강주부. 정겸이 그놈 움막이 어딘지 알지? 앞장서게."

"예? 거긴..왜요?"

"아니 뭐 들었는가? 혼쭐을 내주러 가는 길이지 않는가."

"그럴 필요까지야.."

"뭣이? 그럼 자넨 그놈들이 잘했다고 보는가?"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커흠! 어서 앞장서게!"

"..."


결국 장악원의 주부는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주변을 살피면서 어기적어기적 앞장서서 걸어갔다. 어린 왕에게 와장창 깨진 자존심이야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그렇다고 병든 전악과 어린 악공을 혼낼 필요까지가 뭐 있나 싶었다. 여민락이 뭔지, 제대로 알지도, 고하지도 않는 자신들의 잘못도 있었다. 괜히 애꿎은 이들에게 화풀이를 하게 생겨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스승님, 전하께서 곧 어의를 보내준다 하셨으니 조금만 힘을 내세요."

"어의를..?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쿨, 쿨럭.."


전악은 가슴부터 허리까지 요동칠 만큼 심한 기침을 하였다. 폐병이었다. 습하고 더러운 주거환경에서 지내다 보니, 폐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 가르릉거리는 숨결을 안정시키는 것도 힘겨웠다. 너무 괴로워서 정신도 가물거린다. 그런데 지금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얘기를 들었다. 집이 이 모양이라, 또 먹은 것것도 변변치 못해서, 제자까지 덩달아 아픈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워졌다.


"정말이에요 스승님.."

"네 어디가 아픈 것이냐..쿨럭..저기 김응교가 가져온 쌀이나 갖다 팔아서 그돈으로 의원을 불러오자꾸나.."


허름한 집안에 유일하게 큰 덩치로 자리를 차지한 쌀 한 섬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전악이 다시금 마른 기침을 해대었다. 그러자 정겸은 황급히 스승을 부축하며 거듭 말했다.


"정말이에요 스승님..전하께서 어의를 보내주신다 하셨.."


이때 움막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시끌벅쩍한 소리에 정겸의 두눈이 반짝였다.


"정겸이 게 있느냐."

"어, 벌써 왔나봐요."


어쩐지 귀에 익숙한 강주부의 음성인데도, 그가 어의를 데려왔겠거니 싶은 정겸은 두눈을 반짝이며 쪼르르 움막 밖으로 달려나왔다. 하지만 문을 딸깍 밀어젖히는 순간, 뜻밖에도 성난 장악원 관료들의 얼굴이 정겸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게다가 관료들의 구사들이 저마다 손에 몽둥이를 들어, 한눈에도 겁이 더럭 날 지경이었다. 정겸은 뒷걸음질치며 문을 닫으려고 하였지만, 이내 구사 한명이 몽둥이를 문틈새로 밀어넣어, 결국 아무 힘도 못써보고 문을 열어주고 말았다.


"왜들..."

"몰라서 물어? 네놈들이 여민락을 연주하자는 말만 안했어도, 우리가 전하께 이렇게 깨지진 않았을 거 아니야!"

"감히 천한 것들이 우리를 갖고 놀아?"

"스승님이 언제 갖고 놀았다고..그러세요?"


정겸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가뜩이나 몸이 성치 않은 스승이다. 말이 관리이지, 이름 뿐인 체아직이라 대접도 제대로 못 받는다. 한달에 베 한필 받는 걸로 피죽도 제대로 못먹는 판이라 약값 대기도 어렵다. 그런데, 거기에 뭇매까지 맞게 생겼다. 눈앞이 캄캄했다.


"병든 네 스승은 때리지 않을테니 걱정마라."

"정말..이시죠?"

"그 대신, 스승의 죄는 제자가 받아야지."

"..."


겁을 지어먹은 정겸을 보고, 전악이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벌벌 떨리는 음성으로 따져물었다.


"그, 그런 법이 어딨습니까?"

"여민락은 왜 연주하게 한 것이냐?"

"그야 당연히...우리 조선의 자랑스런 음악이라.."

"흥. 청국 사신단이 오면 당연히 당악을 연주해야지, 향악을 연주하게 한 건 무슨 심보냔 말이다. 네놈이 다른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꿍꿍이라뇨. 어유. 그런 거 없습니다. 제발, 오해는 하지 마십쇼.."

"맞아요! 스승님은 그저 여민락을 아끼는 마음에서.."

"시끄러!"


장악원 제조 한명이 신경질적으로 정겸의 뺨을 후려쳤다. 정겸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뺨을 부여잡았다. 고개가 옆으로 돌아갈 만큼 엄청난 고통이 불길처럼 일었다. 하지만 그런 정겸을 보고도 분이 풀리기는 커녕 오히려 불이 난 것처럼, 장악원 관료들이 너도 나도 끼여들어 발길질을 해대었다.


"아! 아! 왜 이래요!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도 이놈이!"


관료들이 정겸의 머리채를 잡아 벽에 찧었다. 정겸은 발버둥을 치며 비명을 질렀다.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필사적인 몸부림을 쳐보았지만, 그 바람에 방안 낡은 서안이 엎어지고 부서질 지경이었다. 온갖 악보들이 다 엎어지고 바닥에 처참하게 나뒹굴었다. 정작 몽둥이를 들었던 구사들이 직접 내려칠 틈도 없었다.


"네깐 놈이 뭘 안다고 입을 나불대느냐!"

"에잇 드러운 놈들!"

"천한 네놈들 때문에, 우리만 전하께 찍혔단 말이다!"


전악은 병든 몸을 이끌고 두손을 휘저으며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아니 왜들 이러십니까! 얘가 뭘 잘못했다고!"

"이놈은 잘못을 한 게 없지만, 네놈은 잘못을 했지 않느냐!"

"네놈을 손봐주려다가 그나마 제자를 손봐주는 것이니, 그리 알거라!"

"이만하면 우리도 많이 봐주는 것이야."

"차라리, 차라리 절 때리십시오 절!"


울먹이는 전악의 고함에, 장악원 관료들은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힐끗 쳐다보았다.


"그 몸으로?"


얼굴이 거뭇한 게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꼬락서니다. 한대만 잘못 맞아도 골로 갈 중늙은이다. 그나마 실무에 능하고 재주가 아까워서 차라리 제자를 때리는 것이니 나름대로 배려라면 배려였다.


"지금 뭣들 하는 거요?"


백광현은 어명을 받들어 침반을 챙겨 움막으로 달려와보니 뜻밖에도 천담복을 입은 관리들이 눈에 들어와서 어이가 없었다. 관리 여섯명과 몽둥이를 든 구사들까지, 떼거지로 몰려들어 채 스물도 안되었을 법한 아이를 팬다.


"백어의는 몰라도 되네."


장악원 관료들은 퉁명스럽게 잘라 말했다. 천한 중인이지만 명색이 당상관에 오른 왕의 어의다. 무시하자니 왕의 귀에 말이 들어갈까 신경쓰이고, 예대하자니 사대부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허면 전하께 여쭈어야겠군요."

"지금 쏘개질을 하겠다는 건가?"

"쏘개질도 아니고, 불쏘시개질도 아니외다. 그저 전하께 여쭈어보겠다는 것이외다."

"그 말이 그 말이지!"

"허면 전하께 여쭈기 전에 이 자리에서 대답을 해주시든지, 아니면 이대로 곱게 물러가시든지요."

"..."

광현의 으름장에 할말을 잃은 장악원 관리들은 잡아먹을 듯이 쏘아보곤 홱 돌아섰다. 워낙 도포자락이 펄럭일 정도여서 그중 장악원 정의 도포자락은 움막의 지푸라기에 옷자락이 긁힐 지경이었다.


"에이씨!..!"


고상한 체면에 욕지거리가 치밀어올랐다. 참기 힘들 만큼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다.


성질을 있는대로 부리고 물러서는 그들의 뒤로 광현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어떻게 한치 앞도 못보고 분풀이를 하려 들 수 있을까. 한심했다. 의원은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그게 백광현의 신조였다. 그래서 저자거리의 천한 이들에게도 의술을 베풀게 윤허해달라 선왕에게 청했었다. 그리고 그 약조는 지금도 유효하다.


"이거, 집안 꼴이 이래서야 치료를 할 수가 있나.."


백광현은 허리를 굽혀 방안에 널브러진 악보들을 한권한권, 또 한장한장 줏어들었다. 그런데 악보의 모양새가 특이했다.


"이게 악보인가?"

"악보 좀 보실 줄 아십니까?"

"의서 읽기도 벅찬 까막눈일세."


광현은 씁쓸히 웃으면서도 어쩐지 묘하게 손끝이 달라붙는 느낌으로 악보들을 한장한장 정리했다. 깍두기처럼 생긴 것도 같고, 우물정井자처럼 생긴 것도 같다. 하지만 그의 전문분야도 아닌 이상 관심을 깊이 두진 않고 차곡차곡 쌓아 서안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그는 침반을 열었다.


"자, 눕게. 전하께서 여민락인지 뭔지를 꼭 들어야겠으니, 자네를 기필코 낫게 하라고 하시었네."

"정말..어의십니까?"

"그럼, 사칭 같은가?"

"정말..이었군요...이런 광영이 있나.."


전악의 두눈에 눈물이 고였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믿어지질 않는다. 그로서는 자신이 죽으나 사나 여민락을 연주하려는 일념으로 살아온 덕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김응교께서 늦어지네요."


뜻밖의 말에, 백광현은 멈칫하니 정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김..응교라니? 홍문관의?"

"예. 김만중 응교 나으리요. 요며칠 저희 스승님께 악보 보는 법을 배우고 계세요. 쌀 한포대기 가져 오셔서 배우시는데..덕분에 저희가 굶어죽지 않게 되었거든요."

"..."


백광현은 의아하여 서안 위의 악보로 다시 한번 눈길을 던졌다. 봐도 모르겠다. 도대체 쌩뚱맞게 김만중이 왜 악보를 배우러 다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신첩은 어인 일로 또 부르셨나이까?"


진홍은 대뜸 왕이 두광을 보내어 자신을 부르자, 영문을 모르고 불려왔다. 어느덧 어둠이 대궐을 삼켜버린 듯이 온통 컴컴하여, 내시들과 교전비들이 호롱을 들고 여막으로 오는 길을 열어야만 했다.


"인삼차나 마시자고 불렀소."

"또요?"


진홍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다 숙종과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었다. 왕은 여막에서 지내는데, 자신이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심심해서 불렀든지, 뭔가를 의논하려 불렀든지, 진홍 자신도 무료하던 차에 반가운 일이었다.


"혹시 악보 볼 줄 아시오?"

"악보요?"

"장악원 관료들에게 물어보라 하였더니, 어디로 새었는지 데려오질 못하지 뭐요."

"..."


진홍은 가만히 두눈을 깜빡이며 악보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서체 같은, 네모난 칸들이 쳐진 악보였다. 그리고 온갖 암어같은 글씨들이 쓰여 있고, 또 굵은 줄은 세로로 두칸 만에, 혹은 세칸이나 네칸 만에 쳐져 있다.


"악보 볼 줄 아오, 모르오?"

"전하..송구하오나, 신첩은 악보를 볼 줄 모르옵니다."


진홍은 당혹스레 대답했다. 괜히 얼굴이 귀밑까지 빨개진다. 뭘 모르는데, 모른다는 말을 하는 게 왜 창피한지 모르겠다. 숙종은 그런 진홍을 쳐다보며 입맛을 쓰게 다셨다. 일찌감치 궁에 들어온 진홍이 악보 볼 줄을 알 리가 만무했다. 괜히 말을 하나라도 더 걸어보려고 해본 소리였다. 그런데 얼굴이 빨개진다. 홍시처럼 익는다. 그 모습을 보며 왜 자신이 갑자기 목이 타는지 모르겠다.


"험..두광아, 어서 인삼차를 들이지 않고 뭐하느냐?"

"예예. 대령하는 중입니다!"


성질 급한 숙종을 속으로 원망하며 두광이 간단한 다과상을 들였다. 그저 인삼차 두 잔과 당과 정도였다. 그래도 추위를 견디는 데엔 제법 도움이 되는 인삼차인 만큼 인삼차를 구실로 진홍을 붙잡아두려는 숙종의 응큼한 속내에 웃음을 빼어무는 두광이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의 주인도 이제 사내가 될 때도 되었다.


"전하, 김응교라면 알 지도 모르옵니다."


보다 못한 두광이 끼여들었다.


"김응교?"

"예 전하. 아까 악학궤범을 찾아줄 때도 책장을 넘기면서 얼핏 콧노래로 악보를 따라부르기까지 하였사옵니다."

"그 얘길 왜 이제 하느냐!"

"..."

"김응교라.."


숙종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요즘들어 김만중이 너무 진홍의 주위를 얼쩡거린다. 하도를 가르치든, 낙서를 가르치든 알 바 아니다. 도대체 무슨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감시하듯 붙어있냐 하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아까 악학궤범을 찾을 때도, 마치 자신이 찾을 것을 미리 예상한 것처럼 손쉽게 찾아주었던 것도 괜히 찜찜하다.


일단 김만중을 불러 악보를 보는 법을 물어볼까, 모른다고 하면 이참에 경고라도 할까. 하지만 막상 경고를 하다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몰랐다. 자신이 조금 전에 장악원 관료들을 애먹인 것을 자각하지도 못하는 숙종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숙종은 자신과 진홍 사이로 놓이는 다과상 위로 손을 뻗었다. 잔을 꾹 움켜쥐는 손에, 따끈한 기운이 만져졌다. 두광이 쪼로록 인삼차를 따르는 중이었다.


"부르셨나이까."


벌써 기회가 왔다. 김만중은 차분한 안색으로 여막으로 들어섰다. 퇴청을 하려다가 갑자기 또 악학궤범이니, 장악원에서 서고의 책을 빌리러 온 탓에, 또 호기심에 촉각을 곤두세운 터였다. 그래서 퇴청도 미루고, 이런저런 서책을 들춰보는 중이었다.


"혹시, 악보 볼 줄 아는가?"


어쩐지 꼬투리를 하나라도 잡으려는 꼬챙이같은 숙종의 시선 앞에, 김만중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고 엎드려 웃었다.


"조금은, 압니다."

"조금은...안다?"


진홍이 인삼차를 한모금 마시다 말고, 눈길을 들어 김만중을 쳐다보았다. 숙종은 뜻밖의 대답에 가만히 김만중을 쳐다보았다.


"예 전하. 이 악보는 세종대왕께서 창안하셨는데, 이름이 우물정井, 사이간間, 계보보譜자를 써서, 우물사이의 계보란 뜻으로, 정간보라 하옵니다."

"정간보? 우물정井?"


숙종은 멍청히 되물었다.


"예 전하.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칸을 질러놓고 음의 장단을 칸수로 표시하며, 궁宮,상商,각角,치徵,우羽, 혹은 또 황潢, 태汰, 중仲, 임林, 남南으로 율명을 기입하는 방식이옵니다. 신도 요즘들어 장악원의 전악에게 배우는 터라, 악보를 읽는 법은 서투옵니다."


김만중은 두눈을 날카롭게 번뜩이며 대답했다. 진홍은 멍하니 숙부를 쳐다보았다. 해례를 가르쳐주겠다던 숙부였다. 그런데 숙부가 악보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한발 앞서, 정간보의 비밀을 캐는 중이다. 그녀는 나중에 익히려고 일단 미루었던 궁상각치우, 그 오음의 비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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