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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님의 서재입니다.

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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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연재수 :
3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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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2.13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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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4쪽

해의 그림자 68

DUMMY

경덕궁 중궁전에 이어한 진홍은 연꽃부채를 가만히 살랑이며, 무료한 나날을 보냈다. 간혹 자수를 놓거나, 서책을 읽거나, 그림도 그렸다. 하지만 가슴 한가운데에 구멍이 뻥 뚫린 듯하여 허전했다. 친정에서 찾아와도 가만히 돌려보냈다.


왕과 대비가 자신을 미워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특히 대비는 청풍부원군이 급서하고 나서, 다시금 시퍼런 비수 한자루를 가슴에 숨기고 진홍을 대하였다. 매일 아침 문후를 올릴 때면, 대비는 순채 잎을 오미자 우린 물에 넣고 꿀을 탄 순채차를 진홍 앞에 내어놓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순채차가 올라왔다.


"선친께서 참으로 좋아하시던 차였습니다."


진홍의 아비도 좋아하는 순채였다. 하지만 죽은 김우명도 좋아했는지는 몰랐다. 아니, 생각해 보니 얼핏 들은 것도 같다. 진홍은 동그란 순채잎이 돌돌 말려서 가시처럼 뾰족하게 목구멍을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대비 김씨는 아예 진홍을 말려 죽이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노상 그녀를 붙들고 청풍부원군 얘기만 하였다. 물론 숙종 앞에서는 입도 벙긋하질 않았다. 애써 가슴에 묻은 듯이 잠자코 조보만 읽을 뿐이었다.


"오늘 조보 보셨습니까?"

"못..봤사옵니다."

"아니, 국모가 되어서 조보를 안보다니요? 조보야말로 백성의 소식이거늘, 그리 눈과 귀를 닫고 있어서야 어찌 국모라 할 수 있겠습니까?"

"송구..하옵니다."


고개를 숙이는 진홍의 앞으로, 대비 김씨는 조보(기사)를 툭 내밀었다. 손끝이 유난히도 차가웠다. 진홍은 손어름에 와닿는 조보와 함께 대비 김씨의 송장처럼 차가운 손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가만히 받아들었다.


- 중궁은 정치를 몰랐으면 좋겠소.


숙종의 음성이 아직도 귓전을 맴돈다. 그래서 애써 조보를 읽지 않았더니 시어미는 조보를 읽지 않는다고 탓하면서 조보를 들이민다. 청풍부원군의 얘기를 늘어놓으면서 매번 며느리의 가슴에 납덩이를 매단다. 그러니 진홍은 자꾸만 끌려가는 심정으로 조보를 받아들 수 밖에 없었다.


남인 세상이라고는 해도, 여전히 조보를 집필하는 손은 서인이었다. 여론을 호도하는 서인이 쓰는 기별은 하나같이 서인편향이었다. 진홍이 펴든 조보에는 윤휴가 지패법의 시행을 건의한 일을 사관이 비웃는 기사가 적혔다.


"소낭패대낭패小囊佩大狼狽"


진홍이 읽을 부분을 미리 지정하는 대비였다. 뭔가 생각이 있어서 조보를 보인 모양이었다. 진홍은 가만히 조보를 들여다 보며 소낭패대낭패란 구절을 찾았다.


紙牌造小囊佩之,

時人爲之語曰

小囊佩大狼狽.


지패를 작은 주머니에 만들어 차니,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소낭패가 대낭패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은근히 재우쳐 묻는 대비였다. 진홍은 당혹스레 조보를 움켜잡다가 오른손 손샅에 느껴지는 종이의 차디찬 감촉에 몸서리를 쳤다. 손끝에 닿는 종이가 차갑게 느껴지다니, 그렇게 뭉그적거리던 여름이 가고, 또 가을이 밤도둑처럼 숨어든 걸까.


"왜 대답을 안합니까."

"아..송구합니다. 저는 무슨 얘긴지.."

"쯧쯧..그러게 내 뭐랬습니까. 조보 정도는 읽을 줄 알아야 그게 국모입니다."

"..."

"호패가 뭔지는 압니까? 사내들이 허리춤에 차는 호패 말입니다. 중궁도 입궁 전엔..광성부원군이 차는 호패를 보아서 알 것이 아닙니까. 양반인지 상놈인지, 뭐하는 사람인지, 신분을 증명하는 그 나무 호패 말입니다. 그걸 윤휴란 자가 종이로 바꾸자고 상소했고, 주상께서 너무도 가볍게 수락을 하셨다 이 말입니다."

"..."


진홍은 자신을 무지렁이 취급하며 설명하는 대비 김씨의 음성을 들으면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당연히 호패가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도 안다. 급제자들에게 수여되는 백패란 종이붙이도 보았다. 그냥 가볍게 호패를 종이로 바꾼 것이라는 것만 알려주면 나머지는 저절로 알아들을 얘기였다. 당연히 사관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대비는 이미 진홍이 못마땅한 탓에 말귀를 못알아듣는다 생각하고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니까, 소낭패가 대낭패란 말은 이 작은 지패가 큰 낭패라는 말이지요. 신분이 고작 종이조각이 되다니..세상에서 이 지패법을 어찌 보는 지를 아시겠습니까?"

"..."

"지금 주상은 윤휴의 뜻대로 지패법을 시행하고도 모자라서 오가통인지 오가작통인지 하는 것도 추진하는 중이에요. 오가통이 뭔지는 압니까?"

"..."

"다섯 가구가 한 통이 되어 서로를 감시하고 규찰하는 일입니다. 지패를 차나 안 차나..호포를 내나 안 내나..나원..이게 뭡니까? 지금 밖에서는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는 중입니다. 서로를 감시하니 이젠 이웃도 못 믿는 세상이 되었다 이 말입니다."


진홍은 대비의 말에 머리가 멍해졌다. 지패를 차는 건 그럴 수 있다. 굳이 신분을 증명하는 호패가 나무여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가통이니 오가작통이니 하는 건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서로 감시하고 규찰한다고?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쯧쯧..세상 돌아가는 일을 이렇게 몰라서야..내 매일같이 중궁에게 조보를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검사를 할테니 그리 아세요."

"..."

"왜 대답을 안합니까."

"하오나 전하께오선 신첩에게 정치에 관심을 두지 말라고 하시어.."

"쯧쯧..이런 팔자 좋은 사람을 봤나. 중궁은 후궁이 아닙니다. 당연히 정치에 관심가질 자격이 있습니다. 주상이 아플 때면 정치를 대신하고, 주상이 길을 잘못 가면 바로 안내할 책임 또한 중궁에게 있어요. 그러니, 이 지패법도 주상에게 간하여 중궁이 말려야지요. 그게 바로 중궁이 할 일입니다. 편하게 궐에서 놀고 먹으라고 있는 중궁이 아니라 이겁니다."

"..."


진홍은 모욕감을 느꼈다. 벼린 칼끝이 진홍의 목덜미에 닿는 느낌이다. 대비와 숙종의 사이가 예전같지 않다. 청풍부원군의 죽음으로 숙종은 대비에게 큰 마음의 빚을 진 셈이다. 그래서 일전에 벌어진 대비의 자살유서 사건도 숙종은 그저 분노를 안으로만 삭일 뿐 대비의 뜻대로 박헌과 조사기를 처벌해 주었다.


하지만 끝끝내 윤휴의 처벌을 거부하여 분명히 선을 그은 셈이었다. 게다가 윤휴의 지패법까지 추진했다. 당연히 대비가 무슨 말을 하든 먹힐 리가 없었다. 아들이 말을 듣지 않으니 이제는 며느리를 잡겠다는 뜻이다.


진홍은 답답하게 한숨이 가슴에 꽉 차는 것을 느끼며 대비전을 물러나왔다. 대비는 노골적으로 서인의 편이었다. 대비의 말만 들어보면 그야말로 윤휴와 숙종이 미친 짓을 벌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진홍은 대비의 말이 항상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판단은 그녀 자신의 몫이니까.


"봉이야, 최사부는 아직이냐?"

"예? 아직이라뇨?"

"아직도 조정에 돌아오지 않았냐는 말이다."


진홍은 문득 최석정의 존재를 떠올렸다. 정말 이게 미친 제도라면, 최석정이 어떻게든 왕을 뜯어말렸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고집쟁이 왕이라 해도, 최석정의 간언은 일단 한수 접어주고 들었다. 숙종에겐 윤휴나 송시열보다 최석정의 한마디가 더 중했다. 그런 최석정의 얘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글쎄요.."

"한번 알아보너라. 내 그분께 물어볼 것이 있다."


봉이는 의아히 두눈을 꿈뻑였다. 진홍이 뜬금없이 최석정의 이름을 언급했다. 대비전을 물러나올 때 안색이 좋지 못하더니, 무슨 일일까. 그나저나 최석정의 근황을 묻는 것도 아니고 조정에 돌아왔는지 여부만 알아보는 일이다. 중궁전에 콕 틀어박힌 중궁 덕분에 봉이와 상아도 궐내에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그저 중궁의 유모가 왕의 유모 이씨와 친분이 있어 자신들도 곁다리로 친분을 튼 게 전부였다.


"최석정?"


김만기는 봉이가 아침일찍 글월비자를 통해 자신에게 최석정에 대해 물어오자, 미간을 찌푸렸다. 당분간 출입을 금한 중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시녀를 통해 최석정의 일을 물었다. 봉이가 물어볼 데도 없으니 자신에게 언찰로 부탁을 해온 거다.


김만기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대체 중궁이 신하를 만날 일이 무어란 말인가. 중궁은 그저 궐에 앉아서 친인척만 챙기면 될 일이었다. 불만이 가슴 속에 부어올랐지만, 이내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최석정이 누구인가. 왕이 송시열보다 귀하겨 여기는 인재다. 왕에게는 송시열보다 최석정이 스승이다. 지금 중궁은 숙종과 사이가 틀어진 만큼, 그런 최석정의 조력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 그자는 벌써 여러차례 홍문록(홍문관 관원의 후보로 결정된 명부)에 들었으나 아직 시묘살이를 하느라고 출사를 않고 있다. 중궁께는 그리 전하거라.


김만기는 그리 간단히 답서를 써서 글월비자에게 전하였다. 글월비자가 문턱을 넘어서 물러가자, 이제 여섯살이 되는 어린 춘택을 데리고 김진구가 뒤를 돌아보며 안으로 들어섰다.


"형님, 웬 글월비자입니까. 중전마마께서 이제 좀 화가 풀리셨답니까."

"아버지, 중전마마께서 보내신 것입니까?"

"아니다. 봉이가 보낸 거다."


실망감에 김만중과 김진구의 안색이 흐려졌다. 그 와중에도 김춘택은 천진난만하게 김만기에게 다가들었다.


"할아버지, 저 노래 배웠어요."


이제 여섯살이지만, 겨울에 태어나서 실제로는 다섯살이나 다름없는 김춘택이었다. 노래를 배웠다고 자랑스레 김만기에게 다가들어 무릎에 앉았다. 다소 버릇이 없는 행동이었지만, 워낙 스스럼없는 애교이기도 했다.


"노래?"

"예."


그저 언문으로 되어 아이들이 따라부르기 쉬운 노래겠거니 싶었다. 하지만 김만기가 귀를 의심할 만큼 김춘택은 한자로 된 노래를 그 자리에서 불러버렸다.


허적위산적

許積爲散炙


허목위회목

許穆爲回目


오시수식시수

吳始壽食是壽


민희슬희

閔熙瑟熙


허적은 꼬치산적 되고

허목은 도로묵 되고

오시수는 나이만 먹고

민희는 쓸쓸히 탄식하네.


"..."


김만기는 멍하니 춘택을 보았다. 여섯살 아이가 부른 노래다. 허적, 허목, 오시수, 민희 모두 남인들이다. 대여섯살 아이가 입에 담을 이름이 아니다. 도대체 누가 가르쳤단 말인가. 김만중과 김진구를 쳐다보니 둘다 어깨를 으쓱한다.


"길에서 누가 부르는 걸 한번 듣고, 그 자리에서 따라부르던데요."

"..."


김만기는 너무 놀라서 되물을 여력도 없었다. 한번 듣고, 그 자리에서 따라불렀다? 차라리 언문으로 된 노래였으면 바로 뜻이 연결되어 따라부르기도, 외워부르기도 쉬웠다. 하지만 한문으로 된 노래다. 들으면 바로 고막에 닿지도 않고 꼬여버릴 노랫가락이다.


"정말이냐?"

"예. 우리 춘택이 천잰가 봅니다."

"..."

"할아버지, 나 잘하죠? 아까 왔던 누나도 저 막 칭찬하고 갔어요."

"..."


김만기는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자신들도 천재다. 나이 마흔에 대제학이 될 순 있어도, 마흔에 문형이 된 사람은 세상 천지에 자신 하나다. 그런 자신도 그 나이때 뜻도 모르는 노래를 한번 듣고 따라 불렀던가. 동생 만중도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도 같다. 이리 총명한 아이라니, 아무리 아우에게 성난 중궁이든 왕이든 이 아이를 보면 마음이 누그러질 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춘택이를 데리고 한번 궐에 다녀와야겠다."

"형님?"

"요즘 적적하실텐데, 춘택이를 보면 얼마나 좋아하시겠느냐?"

"하긴..중궁께서 워낙 춘택이를 귀여워하셨으니.."


김만중은 쿡 웃음이 나왔다. 좋은 생각 같았다. 아무리 중궁과 왕이 자신들을 만나주지도 않더라도, 아이까지 내치진 않을테니.


그렇게 김만기와 김만중은 말 두필을 끌고 회현방 갑제를 나섰다. 김만기가 앞서거니 어린 춘택을 말에 태우고, 김만중이 뒷서거니 뒤따랐다. 그들 앞뒤로 구사 여섯명이 길을 인도했다.


거리로 나오면 펼쳐지는 군상들은 천태만상이었다. 광통교 앞에서 점을 치는 맹인, 그 옆에서 삼태기를 머리에 쓰고 얼쩡거리는 아이, 비도 안 오는데 도롱이를 입고 다니는 사내, 하인들 여섯명이 굴리는 초헌 위에 느긋하게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관료, 김이 모락모락 나며 구뜰한 냄새를 솔솔 피우는 아욱국을 품에 안고 누가 볼세라 황급히 뛰어가는 아낙, 낮술에 취해 게슴츠레 눈시울이 처져선 흐물흐물 걷는 중년사내, 벌써 찬바람이 들었는데도 곰보투성이 얼굴로 버젓이 젖무리를 훤히 드러내고 다니는 계집도 있었다.


"미친 년!"


김만중은 와락 눈살을 찌푸렸다. 마치 시야가 짜부라지는 느낌으로 그는 고개를 홱 돌렸다.


"미친 년 아니에요. 우리 옆집 아줌마예요."

"뭐? 맨정신으로 저러고 다닌단 말이냐?"

"귀찮대요. 어차피 애 젖먹일 거라 가릴 필요도 없대요. 그리고 천도 없고 돈도 없대요. 어차피 누가 보지도 않는대요."

"..."


김만중은 혀를 찼다. 귀찮다. 천도 없다. 그래서 젖가슴을 내놓고 다녀도 봐주는 사람이 없다? 안 보긴 누가 안 본다고. 본다. 당연히 본다. 혐오감에 눈을 돌릴 뿐이다.


눈을 버린 셈치고 김만기도 춘택의 두눈을 가렸다. 하마터면 대로변에서 말을 달릴 뻔했다. 무지렁이 천것이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배움이 부족한 탓인지, 생활이 궁핍한 탓인지. 불쾌한 생각을 떨치고 유쾌한 생각만 하기 위해, 김만기는 춘택이 한번 듣고 따라불렀다던 참요를 조용히 흥얼거렸다. 어느덧 궐문이 보인다.


"정말, 한번 듣고 따라했단 말이냐? 전에도 누가 부르는 걸 들은 적이 없고?"

"예. 왜요?"


이 아이가 노래를 불러보이면, 왕도 민심이 어떤 지를 알 터였다. 길에서 사람들이 부르고, 아이가 따라외울 정도다. 이 노래로 왕에게 민심을 전할 생각이었다. 궐앞에 이르러서야 말에서 내려 춘택을 안아들어 조심스레 내려주었다. 그리고는 못내 정겨운 손짓으로 춘택의 머리를 툭 쓰다듬었다.


그때였다. 수문장이 누군가를 집요하게 쳐다보는 것이 보여서 힐끗 눈길을 돌렸더니, 웬 검은 너울을 쓰고 궐문을 나서는 어린 궁녀의 모습이 김만기의 두눈에 들어왔다.


검은 너울로 얼굴을 가렸는데도, 어렴풋이 비치는 모습이 사람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그냥 흔하게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여느 궁녀들과 달리, 너울 속에 흐릿하게 비치는 빼어난 이목구비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람이 불어 살짝 들추면 비치는 석류처럼 붉은 입술, 그리고 너울이 미끌어지다 걸릴 듯한 오똑한 코, 검은 너울 속에서도 흑요석처럼 또렷하게 반짝이는 눈동자까지..너울 속에 한떨기 모란 꽃이 숨은 것만 같아서, 당장 달려가서 너울을 들춰보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


그나마 평소 자제력이 있는 성품인 탓에, 김만기는 가만히 자신의 빈손을 쳐다볼 뿐이었다. 그래도 호기심이 진하게 동한다. 도대체 저 너울 속에 숨은 얼굴은 누구란 말인가.


"형님..?"


김만중은 김만기가 누군가를 정신없이 쳐다보자, 의아한 눈길을 돌렸다. 평소 고아한 선비의 풍모를 잃지 않는 형 김만기가 넋을 잃고 웬 궁녀의 너울만 뚫어져라 쳐다보니 의아한 노릇이었다.


누굴까. 봉이나 상아처럼, 형 김만기가 아는 얼굴일까. 하지만 그 둘에게 이렇게까지 형이 얼빠진 얼굴을 할 리는 없다. 그럼 또 누구란 말인가. 너울로 얼굴이 가려져서 한눈에 알아볼 수가 없으니 답답하다.


그런 김만중의 갈증을 풀어주려는 듯이, 바람이 아까보다 세차게 불어와서 궁녀의 너울을 와락 들추었다. 속살이 궁금하여 여인의 치마를 들추는 개구장이 아이들의 손짓처럼, 그렇게 바람의 손길에 펄럭이며 너울이 들춰진 순간, 김만중은 똑똑히 보았다.


사람의 혼백을 홀리는 요물을.


"사람이냐, 귀신이냐.."


멍청한 혼잣말에, 궁녀는 당황하긴 커녕 피식 웃었다. 곱게 연지를 칠한 입술에 고혹적인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입꼬리는 살짝 비틀어졌다.


광성부원군 김만기와 그 아우 김만중.


한눈에 그들을 알아본 궁녀는 그대로 홱 돌아서서 거침없이 인파의 틈새로 숨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찾아 멍하니 두리번거리는 그들을 비웃듯이 지켜보았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히 경덕궁으로 이어할 적에도, 그녀는 대왕대비 조씨를 모시고 함께 이어길을 나섰다.


때는 이때다, 왕의 눈길을 한번에 사로잡으려고 아예 너울까지 벗고, 자신의 빼어난 용모를 드러내고 말 위에 올랐다. 사람들 틈새에 파묻혀서 걷더라도 눈에 띌 만한 경국지색인데, 당연히 아무 것도 쓰지 않고 말 위에 올랐으니 왕의 눈에 번쩍 뜨여야 했다. 그런데, 왕은 그런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아니, 한번은 분명히 눈길이 와닿았다. 당연히 한번 닿은 눈길을 그대로 잡아끌 마력이 있는 자신의 외모였다. 그런데도 왕의 눈길은 그저 속절없이 흐르는 물처럼 지나쳤다. 그저 그 와중에도 중궁의 얼굴로 저절로 달라붙는 것이었다. 도대체 오른뺨에 곰보까지 있다던 중궁의 얼굴은 꿀이라도 발라 놓았는지, 왕의 눈길은 그대로 중궁에게 못박혔다가는, 중궁이 그쪽을 보자 소스라쳐서 홱 돌아갔다. 애써 중궁을 쳐다보지 않은 것처럼 딴청을 부리면서도, 왕은 다시금 힐끔 중궁의 얼굴을 살필 뿐이었다.


내 얼굴이 그렇게 별로였나?


하지만 괜한 자부심이 아니고, 그녀의 얼굴이 중궁보다는 훨씬 예뻤다. 눈도 더 크고, 코도 더 오똑하고, 입도 더 도톰하고, 피부도 흠잡을 데 없이 백옥처럼 고왔다. 올 하나가 풀려버린 비단결은 사람들의 눈에 걸리적거릴 뿐이다. 자신처럼 완벽한 미모라야 사람들의 혼을 뺏을 것이다. 자신이 왕의 눈길 한번 끌지 못한 것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중궁의 아비와 숙부가 넋을 놓고 자신을 쳐다보았다. 어쩐지 중궁을 이긴 듯한 쾌감이 들었다.


역시..


중궁의 아비와 숙부가 이 정도니, 조만간 왕도 자신에게 시선을 빼앗길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길모퉁이에 찰싹 달라붙어 김만기와 김만중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김만기는 마치 낭패한 얼굴로 허공을 보며 한숨을 내쉬는 참이었다.


"형님, 그 궁녀에게 혹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김만중이다. 무려 중궁의 부친이고, 왕의 장인이다. 국구인 형이 일개 궁녀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마음을 빼앗기는 추태를 보였다는 말조차 입에 담기 민망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김만기는 한번 더 한숨을 내쉬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돌아가자."

"형님?"

"돌아가자. 만중아, 춘택아."

"아니 왜요? 여기까지 다 와서.."

"허..노래를 배운단 놈이...너는 아까 그 궁녀의 너울을 보고도 뭐 느낀 게 없더냐?"

"뭘 느껴요? 형님 정말.."

"..."

"정말, 그 궁녀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라도.."

"뭐?"


김만기는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아우가 그런 말을 내뱉을 줄은 미처 상상도 못했던지, 그는 어처구니 없다는 웃음을 뿜었다. 할아비가 웃자, 춘택은 옆에서 따라 웃어야 할지 말지 고민하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왜 웃습니까? 그럼 아니란 말입니까?"


아우가 멀뚱히 되묻자, 김만기는 아직도 웃음이 목에 걸린 양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아까 그 너울 말이다."

"너울..요?"

"만약 그 궁녀가 너울을 쓰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그렇게 그 얼굴만 쳐다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울로 얼굴을 가렸으니, 그 너울 속이 미치도록 궁금해서 쳐다본 것이다."

"예. 그렇겠죠. 그 궁녀가 이쁜 것은 사실이나, 검은 너울 속에 감춘 얼굴이 궁금했으니 말입니다."


떫디 떫은 표정으로 김만중이 수긍했다.


"그러니 하는 말이다. 아까 춘택이가 부른 참요는 누가 만든 건지 모르나, 너무 노골적으로 허적, 허목, 오시수, 민희 같은 이름이 들어갔다. 노래를 만든 사람이 나 서인입네 하는 거지. 참요란 저 궁녀의 너울처럼 보일듯 말듯 은근히 얼굴을 감춰야 하는 거다. 그러니 돌아가자는 거다."

"..."


김만중은 비로소 머릿속이 탁 트였다. 계집의 너울처럼 은근한 멋..그의 날카로운 눈매가 번뜩였다. 못생긴 얼굴로 가슴을 훤히 드러내고 다니는 계집보다 요염한 얼굴을 은근히 가리고 다니는 계집이 더 구미가 당기는 법이다.


노래도 그렇다. 허적이니, 허목이니, 오시수니, 민희니 저자거리 무지렁이 백성들이 그 이름을 몇이나 알까. 그런데 뻔히 참요랍시고 춘택을 데려가 노래를 부르게 하면,왕의 반응은 젖무리를 드러낸 계집을 본 자신들과 똑같을 것이었다. 저리 노골적으로 가슴을 드러내듯 저리 노골적으로 이름을 드러낸다면.


"은근하게 감추고, 은근하게 보여라.."



여전히 대비 김씨가 진홍의 아침 문후 때마다 조보의 내용을 묻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녀에게 진홍의 견해는 필요치 않았다. 그저 서인 입장에서 쓰는 조보를 읽는 것이면 충분했다. 보는 만큼 느끼는 법이기에.


"보셨습니까. 이번에는 허목과 허적이 지패법을 반대했답니다.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한다고, 같은 남인끼리도 이리 오합지졸처럼 사분오열되는 것이 남인입니다."

"..."


맥없이 조보를 쥔 손을 꼬물딱거리는 진홍을 비웃듯이 쳐다보곤 대비는 힘주어 말했다.


"남인도 싫다는 지패법입니다. 괜히 분란만 일으키는 법이니 곧 없애야지요."

"..."


진홍은 시르죽은 얼굴로 대비전을 나섰다. 온몸에 기운이 빠져선지 어깨를 휘감는 찬공기에 몸서리가 쳐진다. 그녀는 어느덧 입김이 어리는 허공을 보며 겨울을 실감했다. 밤도둑처럼 겨울이 왔다. 그리고 낮도둑처럼 조보가 머리속에 밀려든다.


"세뇌 당하는 것 같구나.."


뒤따르는 봉이와 상아의 기척을 느끼며 진홍은 자신의 뇌리에 억지로 쑤셔박힌 조보의 내용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씁쓸히 웃었다.


세상에 많은 지식과 정보가 떠돈다. 세상에 진실만 말하는 사람은 없다. 사람이 쓰는 책, 사람이 쓰는 글..어느 것이 쭉정이고 열매인지 솎아낼 수도 없다. 그런데 이 조보들은 정말 옳은 말만 할까. 괜히 의심하고 싶다.


"본방나인들만 남고 너희들은 이만 돌아가라."

"예 중전마마."


진홍은 수행원들을 물리고 봉이와 상아만 대동하고 무턱대고 걸음을 떼었다. 온갖 익살스런 원숭이잡상을 얹은 숭정전 기와가 보였다. 그 왼쪽으로 걷다보니 온통 야트막한 바위로 비탈진 곳이 나왔다.


그런데 평평한 바위로 바닥을 깐 것인지, 바위를 평평하게 깎아 바닥을 만든 것인지, 밑도 끝도 없이 벌이는 바위잔치다. 바위 밑을 깎은 건지, 원래 쪼개진 바위로 만든 건지, 자그마한 토끼나 다람쥐가 비를 피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그 추녀바위 틈새 밑으로 옹달샘이 졸졸 흘러서, 은빛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인다.


진홍은 어리둥절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자연의 숨결과 사람의 손길이 함께 공존하는 곳이라서 더욱 신기했다.


"여기가 어디지?"

"모르고 왔단 말이에요?"


상아가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척하니 숭정전 왼쪽언덕으로 오기에 알고 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모르고 왔다니?


"안 와본 길이라서 와봤을 뿐이다."

"..."


봉이와 상아는 인상을 썼다. 와보지 않은 길이라서 와봤다는 말이 한편으론 공감도 가고, 한편으론 반감도 든다. 아는 길을 놔두고, 모르는 길을 찾는 재미, 남의 안내를 받지 않고, 혼자 헤매면서 길을 찾는 묘미..하지만 그런 건 한가할 때나 찾는 얘기다. 바쁠 때는 헤맬 겨를도 없다. 그저 아는 길로 가고, 혹은 길잡이의 도움을 받아 간다. 지금처럼 머리 위에 먹구름이 까마득히 깔릴 때는 발밑의 돌부리를 피해가는 시간조차도 아깝다.


"어딘지는 몰라도 가도 가도 발만 아픈 돌만 나오구요. 그리고 발아프게 여기까지 왔는데, 저 머리 위로 먹구름이 첩첩..앗츠거..거봐요. 비오잖아요."


봉이가 머리를 두손으로 감싸며 하늘을 보았다. 충동적으로 찾은 길이다. 수행원들까지 돌려보낸 바람에 해를 가릴 일산은 커녕 부채조차 없다.


"부채라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왜 돌려보내셔서.."


봉이가 볼멘 소리를 하였다. 참 걱정이다. 자신의 저고리라도 벗어서 씌워드려야 하나, 고민이 앞선다. 비가 계속해서 머리로, 팔로 떨어진다. 진홍도 손바닥을 펼쳐 정수리를 가려보지만, 손샅으로 톡하니 촉촉한 감촉이 닿는다.


"앗츠거. 빗방울도 굵고..이러다 발비를 쫄딱 맞게 생겼네요."

"..."


이미 연포갱을 먹는 연포회도 지난 날이다. 빗발이 보일 만큼 퍼붓는 발비를 맞는다면, 고뿔에 걸릴 것이 자명하다. 봉이는 물론 상아까지 살짝 원망스런 눈초리로 진홍을 흘겨본다.


"돌아가자.."


진홍은 힘없이 돌아섰다. 오늘만 날이 아니다. 다음에 또 짬을 내어 오면 된다. 그런데 몇걸음 걷기도 전에 순식간에 빗줄기가 굵어진다. 빗발이 보인다.


"진짜 발비다."


한숨 섞인 상아의 음성에 진홍의 발길이 급해졌다. 예와 법도를 중시하는 대궐이다. 국모의 신분으로 비를 피해 뛰는 것은 예를 잊고 체통을 잃는 짓이다. 대비나 대왕대비에게 문후를 올릴 때에 홍화부채나 윤선 같은 의장 부채를 잊기라도 하면 사달이 난다.


"어뜨케..빨리 걷다 들키시면 두 대비전에서 꾸지람 하실텐데. 우린 죽었다."

"비를 맞으셔도 우린 죽어."


봉이와 상아가 서로 옆구리를 찌르며 소근대는 소리였다. 다급히 걷던 진홍의 걸음이 숭정전 잡상이 보이는 순간 멈춰섰다. 일단 숭전전 추녀든 어디든 비를 피해야만 했다. 후다닥 문간으로 붙어서는데, 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는 숙종과 두광 등과 맞닥뜨렸다.


좀 이상한 광경이지만, 두광과 내시가 각각 일산과 우산을 하나씩 들고 숙종을 호종하던 참이었다. 숙종은 두광이 씌워주는 우산을 쓰고 걸어오다 진홍과 마주치자 걸음을 멈춰섰다.


진홍의 심장이 덜커덕했다. 여막에서 양지당으로 옮기자마자 오히려 며칠을 몸살을 앓았다던 숙종이다. 긴장이 풀려선지 한순간에 몸살을 심하게 앓더니 얼굴도 누렇게 떴다. 그런데 쾡한 두눈 만큼은 더욱 짙게 번뜩인다. 그 눈동자에 당연히 진홍의 새빨개진 얼굴이 들어올 터였다.


하지만 숙종에겐 콩닥거리는 진홍의 심장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오히려 매몰차게 그 자리에서 홱 돌아섰다.


"저, 전하.."

"..."


못본 척 돌아서서 숭정전 안으로 걸음을 성큼성큼 떼는 숙종의 모습에 두광은 숙종을 보았다, 진홍을 보았다 안절부절했다. 두광은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는 잰걸음으로 달려와서 자신의 우산을 진홍에게 내밀었다.


"이거..쓰시옵소서."

"아니다. 전하께서 쓰셔야 할 것인데.."

"괜찮사옵니다. 어차피..전하께는 또 하나 있사옵니다."

"..."

"어서 받으시옵소서."

"..."

"마마, 소녀들을 생각해서라도 받아주시옵소서."


보다 못한 봉이가 옆에서 보챈다. 말보다는 행동이라고 그 옆에서 상아가 팔을 뻗어 넙죽 받아들었다. 진홍은 진한 고마움을 느끼며 두광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았다.


"그럼..전하께서 숭정전에 가시는 길이라..이만 가보겠나이다."


두광이 얼른 뛰어갔다. 이미 숭정전 속으로 사라진 숙종을 따라서 바삐 뛰어가는 그 뒷모습을 보며 상아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참 요상하네. 어떻게 우연히도 여기서 딱 마주칠까."

"그러게. 꼭 일부러 오신 것처럼."

"..."

"마마께선 우연을 믿으시옵니까? 소녀들은 믿지 않사옵니다."

"..."


짓궂게 눈매가 휘어지는 봉이와 상아였다. 진홍은 가슴이 설렜지만 고개를 흔들었다. 그 까만 눈으로 반갑게 웃어줬을 법도 한데,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갑기만 하다. 몇날며칠 피를 말려죽이려드는 대비 때문에 힘들고, 아예 눈길조차 주지 않는 지아비 때문에 헛헛하니 허전해서 견딜 수가 없다. 둘중 한사람만 자신을 싫어하는 것이라면 참을 만 하겠는데, 숙종까지 자신을 나 몰라라 하니 죽을 만큼 괴롭다.


어깨가 축 늘어지고, 고개가 탁 처져서, 홀로 빗발 속으로 걸음을 내딛는 진홍을 황급히 상아가 우산을 씌우며 뒤따랐다. 봉이 또한 궁시렁거리면서 총총히 따라갔다.


그들이 지나간 숭정전 앞은 어느새 발길이 떠나가고 사람의 그림자도 사라졌다. 하지만 비를 흠뻑 맞은 지밀나인 하나가, 자신의 긴 치맛자락이 땅에 끌리고 비에 젖어 무릎 위까지 시꺼멓게 물든 것도 느끼지 못한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두눈은 빗속을 뚫고 진홍 일행의 뒷모습을 쏘아보았다.


"어떻게..한번도 안봐주는 거야..왜 저딴 곰보만.."


이해가 되질 않았다. 자신을 총애해주는 대왕대비 조씨가 매일 같이 상번을 서게 해준 덕분에, 아침마다 문후를 올리러 대왕대비전을 찾는 숙종과 맞닥뜨릴 수 있었다. 그녀의 나이 꽃다운17세, 이제 막 여인에 눈뜨기 시작할 어린 왕의 두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모다. 그런 만큼 왕의 눈길이 쏠려야 했다.


하지만 왕은 한번도 자신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 눈은 이미 자신을 아는 눈인데도, 제대로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마치 길가에 널린 흔하디 흔한 꽃을 보는 양, 한술 더떠 자신은 꽃엔 관심도 흥미도 없는 양, 그대로 지나쳤다.


- 비가 온다니 주상이 가다가 비를 맞을까 걱정이구나. 네가 저 우산을 갖고 따라가보아라.


이는 아예 대왕대비 조씨가 내린 파격적인 기회였다. 비를 맞고 걸어가는 왕의 눈앞에 일부러 우산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녀는 사뿐사뿐 빗속을 달려 숙종을 뒤따랐다. 그리고 숙종 일행이 대비전에 당도하기 직전,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숙종에겐 우산 대신 일산이 있었다. 본래 궁중 웃어른을 문후할 때는 의장용 부채와 일산을 수행원들이 갖고 뒤따르는 것이 예법이다.


- 전하, 소녀는 대왕대비전 지밀이온데, 대왕대비마마께오서 이 우산을 쓰고 가시라...


우산에 가려진 그녀의 어여쁜 얼굴이 갑자기 나타났는데도, 숙종은 우산을 다소곳이 바치는 그녀를 오히려 성가신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 되었다. 어차피 일산이 있으니 상관이 없다. 그보다 우산은 왕족만 쓰는 법. 우산을 가져올 때는 네가 쓰고 오는 것이 아니라 들고 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돌아갈 때는 쓰지 말고 그냥 들고 가라.


그 와중에도 숙종은 그녀가 우산을 쓴 사실만 까탈스럽게 지적했다. 당연히 예법을 따지자면, 그녀는 전모를 쓰든 아무거나 걸치고 우산을 들고 왔어야 한다. 그런데 척하니 우산을 쓰고 와서 내미는 꼬락서니가 마뜩치가 않았다.


- 송구..하옵니다.


야박하고 박정한 숙종의 말투에 크게 실망감을 느낀 찰나였다. 숙종이 대비전 앞 지밀나인들에게 묻는 음성이 들렸다.


- 중궁은, 다녀갔느냐?

- 예. 좀전에..숭정전 쪽으로 가시던...

- 비가 오는데?

- 가실 때는 비가 오지 않으시어..


지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숙종은 대왕대비전 궁녀의 손에서 우산을 나꿔채고 두광의 손에 쥐어주었다.


- 가자.

- 가다..니요?

- 중궁이 비를 맞게 생겼지 않느냐.

- 아니 지금은 대비마마께..

- 다시 오면 될 일이 아니냐.


그렇게 숙종은 휘적휘적 대비전을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고, 대왕대비전 궁녀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기껏 생각해서 우산을 가져왔더니, 그 우산을 중궁에게 씌워주려고 쫓아가다니, 속에서 천불이 났다. 분명히 궐에는 왕이 중궁을 싫어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열이면 아홉은 뒤돌아보는 자신의 얼굴을, 아무 감흥없이 지나치며, 오로지 중궁의 꽁무니만 뒤쫓는 왕이라니.


하도 분하여 여기까지 몰래 뒤쫓아왔다. 그랬더니 왕은 직접 우산을 씌워주지만 않을 뿐, 무시하는 척 외면하는 척 돌아서며 자신의 아랫사람의 손을 통해 중궁에게 우산을 씌워주게 했다.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 모든 신경이 중궁에게 쏠려있는 것만 같다.


"전하, 소녀의 이름은 장옥정이옵니다. 어찌..한번도 쳐다봐주질 않으시옵니까."


옥정은 파르르 떨며 아랫입술을 씹었다. 내가 더 예쁘다. 눈,코,입도, 피부도 다 자신이 활짝 핀 모란꽃처럼 예쁘다. 그런데 저 얼굴이 해맑은 것 빼고는 하나도 자신보다 빼어나지 못한 중궁 따위에게, 왕의 시선이 자꾸만 따라붙는다. 아닌 척 따라붙는다.


지금도 숭정전으로 쏙 들어가버렸던 왕이 다시 나와 고개를 사슴처럼 빼고 까치발을 하며 중궁이 우산을 쓰고 가는 뒷모습을 확인하고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띤다. 가슴 속에 화끈한 불길이 치받는 것을 느끼며, 옥정은 파르르 치를 떨었다.


"전하, 부르셨나이까."


숙종에게 갑자기 어재실로 불려온 허적, 허목, 윤휴는 어리둥절히 숙종을 쳐다보곤 눈길이 마주칠까 두려운 듯 고개를 조아리다 움찔했다. 왕의 어깨너머로 뭔가 그림이 걸려 있었다.


드넓고 푸른 바다에 돛단배 한 척이 닻도 노도 없이 떠도는 풍경이었다. 그 그림엔 숙종의 친필로 쓴 어제주수도설御製舟水圖說이 써져 있었다.


"그림이 어떤가?"

"만경창파 일엽편주라..."


섣불리 품평을 못하고 세 대신이 서로 흘끔흘끔 눈치를 보았다. 요즘 서로 사이가 조금 틀어진 상태였다. 윤휴가 발의한 지패법과 병거도 허적과 허목이 슬슬 반대하던 참이었다. 또한 송시열을 죽이자는 허목의 제안엔 허적이 반대했다. 무엇하나 속시원히 단합하질 못하였다. 그런 남인들이 답답하였는지, 숙종이 도화서에 일러 모종의 그림을 그려보인 것이었다.


"저 넓은 바다에 외로운 배 한 척이 닻도, 노도 없이 헤매는 중이지. 왕은 배, 신하가 물이라면..그 물이 얕으면 배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고, 그 물이 고여 썩으면 배도 함께 썩겠지. 또한 물이 사방팔방 천방지축 날뛰면, 그 또한 배가 나아갈 수 없는 법..경들의 바다가 이런 건가?"

"..."


어쩐지 가슴이 서늘해진 세 신하였다. 그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훑으며, 숙종은 의연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


"나를 돕거라. 나는 앞으로 가야겠으니."

"..."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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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2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3.02.13 15:30
    No. 1

    오오. 카리스마.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7 뚱뚱한멸치
    작성일
    13.02.13 17:39
    No. 2

    같이 할건가 말건가!!!
    같이 안할거면 걸치적거리지 말고 비키라우!
    이런거 같은데^^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1 디오지크
    작성일
    13.02.13 17:58
    No. 3

    먼가모르게 숙종이 갑자기 커버린느낌이네요 마치 몇년 후라도 지난것처럼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2.13 18:43
    No. 4

    일화환님, 뚱뚱한멸치님, 디오지크님, 댓글 감사합니다. (한꺼번에 댓글다는 것도 헷갈리네요..ㅠㅠ;) 어제주수도설은 실제로 실록에도 적힌 실화이고, 평전에도 나온 얘기인데, 열다섯살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저도 의아하네요. 워낙 숙종이 열네살에 신하들을 휘어잡으니 배후인물로 김석주가 지목되긴 합니다만, 숙종 본인이 송시열을 오래전부터 죽이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동궁시절 수업 받으러 불려간 일에 이를 갈았다고 하니, 주관이 뚜렷한 인물인 건 맞는 듯..;; 최석정 또한 말단 때부터 숙종에게 신임이 두터웠다고 하고, 실제로 최석정은 장희빈 사사를 제외하곤 숙종의 뜻을 가장 성실히 받든 인물인 듯 하네요. 지난회에 비해서 반년이 훌쩍 지나긴 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9 jk******
    작성일
    13.02.15 03:33
    No. 5

    남자들이 군대 갔다오면 성숙되듯이, 숙종도 여막살이 하면서 많이 성장했네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64 Unveil
    작성일
    13.02.16 04:07
    No. 6

    어릴때부터 왕재수업을 닦아온 사람은 역시 다르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2.16 11:37
    No. 7

    jk046069님, 포도맛치즈님 댓글 고맙습니다. 숙종은 세종이나 정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왕재수업 만큼은 제대로 받은 사람인 듯..실록 읽어보면 정말 무시무시합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2 수훈
    작성일
    13.02.17 03:26
    No. 8

    멋진 숙종^^
    예비 장희빈은 벌써 칼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2.17 12:07
    No. 9

    칼가는 소리...ㅋ 아주 악역으로 그리진 않을 생각입니다. (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02.18 17:58
    No. 10

    오오 카리스마
    재미있게 읽고 다음편으로 갑니다 =)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2.22 01:11
    No. 11

    카리스마..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2 더마냐
    작성일
    13.04.02 13:30
    No. 12

    멋져요!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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