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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님의 서재입니다.

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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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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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2.08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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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5쪽

해의 그림자 65

DUMMY

"기어코 일을 저지르셨더군요."


방갓을 쓰고 입궐한 최석정은 숙종의 여막을 찾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열다섯의 왕이 참 끈질기기도 하다. 한번 찍은 표적은 결코 놓지 않는다. 한번 물은 먹이도 결코 뱉지 않는다.


"사부가 도와준 덕분에."

"..."


숙종은 손에서 정시록을 놓지 않았다. 최석정은 숙종이 손에 든 낡은 책에 눈길이 갔다. 누런 때깔이 어쩐지 꽤 오랜 역사를 간직한 느낌이다.


"술 한방울 입도 안 대신 전하께서 그런 수를 꾸며내신 건 저 말고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조상님의 은덕이 있었소."


숙종은 빙그레 웃었다. 손끝에 쥔 정시록의 촉감이 즐거웠다. 조상들이 골칫거리 신료들을 다룬 비결도 간간이 적힌 책이었다. 이런 책을 대대로 남겨주신 조상들이 고마웠다. 또한 자신이 미리 예고했는데도 끝내 입을 다물어준 최석정도 고마웠다.


"저는 사실 전하께서 이번 일을 하지 않으시길 바랐습니다."

"하지만 도와주었잖소."

"서인을 위한 일은 아니었지만, 전하를 위한 일이었지요."


최석정은 자신의 처지가 참 애매하다고 느꼈다. 분명히 서인을 위해서는 꺼림칙한 일이었지만, 왕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다. 정도를 넘어 지나치게 왕권을 억압하는 강신强臣의 탈이 얼마나 추악한지, 또렷이 밝혀야만 한다. 그리고 왕 주변에 선을 그어 결코 신료들이 함부로 넘나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송시열의 위리안치는 그런 의미였다.


다만, 최석정은 송시열의 죽음까진 원치 않았다. 최석정이 원하는 건 모두의 공생이었다. 송시열을 죽인다고 조부 최명길이 살아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조부의 이름에 먹칠된 간인 내지는 매국노란 누명이 벗겨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송시열은 꼭 살아서 한가지 일을 해줘야만 한다.


"전하, 청이 있습니다."

"청?"

"송시열을..죽음만은 면하게 해주십시오."

"어째서? 자네 또한 그가 조부 최명길의 비각에 간인이라 적어놓은 글귀 때문에 세상에서 양반 취급도 못받는다던데."


겪어본 바로는 이미 최석정은 그 젊은 나이에도 학식이 이미 김만기, 김만중 형제에 필적할 만하다. 그런데도 장원으로 꼽히질 못했다. 실력이 부족했던 탓일까. 아니다. 학식과 문재 모두 빼어난 인물이다. 그런 최석정이 겨우 등과하고, 또한 실력이 아니라 돌아가신 인선대비 장씨의 후광을 입은 것처럼 매도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실력까진 인정해도 선비 취급도 안해주는 사람들이 상당수다. 그런 분위기의 배후에는 분명히 송시열이 있다.


"그래서 더 송시열에게 받아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최석정의 눈동자엔 결의가 어렸다. 숙종을 대면하여 송시열의 목숨만은 보장받고 관상감에 들른 최석정은 관상감 한구석에 덩그러이 놓인 명두를 발견했다.


"뭡니까 이건?"

"뭐긴! 지남이 놈이 엊그제 맡겨놓고 찾아가지도 않은 물건이지."


송이영이 입이 댓발은 나와서 걸쭉한 음성으로 걸걸히 대꾸했다. 이민철도 입맛을 쩝쩝 다셨다. 관상감은 엄연히 역법과 천문을 관장하는 곳이다. 수릿날에 붉은 주사로 천중부를 그려붙이고, 섣달 그믐날에 온갖 나례나 벽사의식을 관장하다 보니 도성 밖의 무지렁이 촌놈들에겐 그저 그런 무당들을 대신하는 관청 쯤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그런 편견들이 거북한 마당에 지남이 자기네 사역원 분위기 살벌하다고 맡기고 간 물건이 하필 명두다.


"지남이가 맡기고 가요?"

"무당 막례란 년이 떠넘긴 물건인데 지도 갖고 있기 불편하다고. 에혀. 요즘 사역원 분위기 살벌하다나 뭐라나."

"..."

"아니 그래도 그렇지, 알만한 놈이 왜 우리한테 이런 걸 맡기냐고. 우리가 뭐, 무당이야?"

"에이, 좋게 생각하세요. 요즘 정말로 사역원 분위기 살벌할텐데. 지남이가 맡길 데가 영감님네 말고 더 있어요?"

"뭐야, 살벌해? 진짜로?"


송이영은 의아히 최석정을 보았다. 자신들이 왕의 측근을 자처해보았자, 진짜 측근은 최석정 뿐이다. 백광현이 있긴 해도, 상중에도 여막으로 곧잘 부르는 최석정에 비하면 왕의 신뢰를 온전히 얻었다고 볼 수 없다. 그런 최석정의 입에서 살벌할 거란 말이 나왔으니 또 그럴싸하다.


"청국 칙사들의 강신 발언이 드디어 꼬리가 잡혔으니, 전하께서 마음 독하게 먹으시면 역관들을 잡아다가 증언부터 받아내실 테니까요."

"아..하긴. 그럼 사역원이 초토화되겠네."

"하긴. 원래 분위기 나쁠 때 가장 피보는 게 아랫사람들이니까. 근데 지남인 또 뭔 상관이라고."

"그 칙사들과 원접사들을 담당한 역관들이 지남이의 조카와 처숙이라지요."

"..."


최석정의 말에 송이영이 뎅그레한 눈으로 최석정을 쳐다보곤 들었냐고 묻는 눈빛으로 이민철을 쳐다보았다. 이민철 역시 자신의 선기옥형에 사유옥형 대신 연결한 지구의를 손끝으로 툭툭 치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다가 멈칫 이쪽을 보는 참이었다.


잘못 걸렸다. 숙종이 마음 독하게 먹고 강신 발언을 더 조사하라 보챈다면 역관들이 줄줄이 잡혀들어가서 모진 형신 끝에 줄초상이 나게 생겼다. 그것도 지남의 경우에는 친가와 처가 양쪽이 결딴나게 생겼다.


"우리가 맡아주는 게 낫겠네."


송이영이 그 자리에서 내린 결론이었다. 좀 껄적지근해도, 무당의 명두를 관상감에서 맡아두는 게 낫겠다 싶다. 최석정은 피식 웃으면서 명두를 가만히 들었다.


"뭐 정히 눈치보이시면 제가 그녀석 집까지 갖다주.."


최석정은 갑자기 말문이 막힌 채로 명두를 쳐다보았다. 무겁다. 그는 지남의 집에 가져다주려던 생각을 바로 철회했다.


"이 명두가 여기 있고 싶다는데요?"

"뭐? 명두가 무슨 말을 한다고."

"에그 저 약아빠진 놈."

"저거저거, 지가 들고 가기 싫어서 저러는 거지. 뻔해."


이민철과 송이영이 치를 떨었지만 최석정은 눈알을 또르르 굴리며 딴청을 부릴 뿐이었다. 그는 곁눈으로 이민철을 힐끗 쳐다보았다. 남북의 축을 이은 지구의가 회전한다. 고장이라 하여 어좌에서 퇴출되었지만, 정말로 고장일까?


"영감님, 그 지구의는 언제 고치실 겁니까?"

"그건 왜 묻나."


이민철이 뜨끔한 표정으로 시큰둥히 되물었다.


"아니, 지구의가 회전하는 건 고장나서 그런 거라면서요. 근데 왜 안 붙이세요. 붙이는 게 뭐 힘들다고."


최석정은 유들유들 놀렸다. 벌써 몇년째 이민철은 고장나서 지구의가 회전하는 거라 둘러댈 뿐 좀처럼 고정시킬 생각을 않는다. 묘한 고집이 느껴진다.


청국에서도 지동설의 존재를 알면서도 천동설을 정설로 규정하는 마당에, 조선에서 감히 지동설을 주장할 사람은 없다. 지구의를 보고도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지구의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은 더더욱 납득할 리가 없다. 아마 지구가 회전한다고 말한다면 그 자리에서 미친 놈 취급하며 돌팔매질을 당할 것이 뻔하다. 이민철 역시 지동설을 주장하진 않는다. 그런데 묘하게 이민철의 지구의는 뱅글뱅글 돈다. 참 수상쩍다.


"혹시 일부러 회전하게 만든 거 아녀요?"

"무슨 소리! 나 정상일세!"

"아니 뭐, 제가 영감님더러 미쳤다고 했나요?"

"이 지구의를 일부러 돌게 만들었냐고 했잖나."

"아니 난..그냥 해본 소린데.."


최석정은 심증을 굳히고 가재미눈으로 이민철을 힐끗 보았다. 역시나 이민철은 지구가 회전한다고 믿는다. 차마 남들과 다른 의견을 낼 용기가 없어서, 조선을 발칵 뒤집어놓을 엄두가 안나서 그냥 실수인 척, 고장인 척 지구의를 회전하도록 내버려두는 거다.


지구가 회전한다..


최석정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주변에 정상적인 사람은 하나도 없다. 자신만 해도 주자학이 주류인 조선 땅에서 양명학과 상수학 같은 잡학에 빠져 있다. 그리고 어의 백광현은 말 타고 칼 휘두르는 겸사복이 사복시의 말들을 상대로 온갖 침을 연마한 끝에 기어이 어의까지 올랐지만, 역시 상식적인 사람은 아니다. 이민철은 아예 실수인 척 지구의를 빙글빙글 돌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벌써 6년째 고장이라 우기면서 고칠 생각도 않는다.


그나마 정상인 게 김지남일까. 아니다. 마첩으로 말 좀 바꾸겠다고 말 앞다리도 붙잡은 놈이다. 미친 놈 맞다. 이 미친 놈이 그나마 자신들 중에서 가장 정상에 가깝다는 게 문제다. 그래도 전공인 한어는 물론이고, 왜어와 청어까지 부지런히 익히면서, 꼬박꼬박 지각 한번 않고 사역원에 등청하고, 조퇴 한번 않고 퇴청하니 성실근면으로는 따라올 사람도 없고, 또 가장 정석을 따르는 녀석이다.


그래, 지남이만이라도 정상이라고 봐주자.


그렇게 우격다짐으로 일말의 위안을 가슴에 품고 관상감을 나서는 최석정이었다. 그런데 관상감을 나서면서 괜히 뭔가를 잊은 것만 같다. 뒤를 돌아보니 관상감인데 관천대가 없다. 세종 때 법궁인 광화방 경복궁에 관상감 본감을 설치하고, 또 첨성대를 본뜬 관천대도 축조하였는데 전란으로 경복궁이 불타면서, 이궁인 경덕궁과 창덕궁으로 왕실과 관청이 옮겨오며, 버려두고 온 셈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창덕궁과 경덕궁에도 궐내각사만 대충 빌려쓸 게 아니라, 정식으로 관천대를 세우고 관상감의 위용을 갖춰야 할 일이었다. 고대부터 당대까지, 천문은 곧 왕의 권위를 의미했다. 조선이 명이나 청의 제후국이 되어, 천문은 자유롭게 관측하더라도 연호와 역법을 자유롭게 쓰진 못하는 것처럼, 천문은 곧 그 나라 왕의 힘을 보여주는 척도다.


그렇기에 세종은 천체와 천문의 원리를 담은 언문을 창제하고도 이를 공표하지 않고 왕실에 그 본의만 전해왔다. 최석정은 어쩐지 아쉬운 마음에 두손을 쭉 뻗어 손바닥을 네모 형태로 만들어 세우는 시늉을 하였다.


"안 가고 뭐 하는가?"


이민철이 뒤에서 불쑥 나타나 묻는 말에 최석정은 움찔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아니..그냥.."

"그냥 뭐?"

"여기에 관천대 하나 세우면 좋겠다 싶어서요."

"이왕이면 관상감도 다시 지으면 좋겠지.."


참 초라한 관상감이다. 관천대도 없고, 천문의기들은 고장나서 방치되고, 왕실재정이 빈약하여 다시 지을 엄두도 내질 못한다. 그나마 효종 때 청국에서 시헌력을 들여온 것과, 현종 때 이민철과 송이영이 만든 선기옥형 정도로 겨우 그 구색을 갖췄을 뿐이다.


"하지만 몇년이 걸릴 지 모르지요. 왕실에 힘도 없고, 돈도 없으니.."

"몇년은 무슨, 10년 20년이 걸려도 관천대가 재건될지 모르겠구만. 아니 뭐 돌 쌓는 게 뭐 힘들다고 못 만들어, 못 만들길. 근데 너 안 가냐? 관천대 하나 지어주려고? 이왕이면 여기 창덕궁에도 짓고 저기 경덕궁에도 지어라. 왔다 갔다 양쪽엔 다 있어야지."

"갑니다!"


송이영까지 따라나와 툴툴대자, 최석정은 손을 훠이훠이 내저으며 걸음을 떼었다. 그런데 또 이상하게 뭔가를 잊어버린 듯한 허전함이 남는다. 관천대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었나. 도대체 뭘 잊은 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윤계의 상소?"


숙종은 도승지가 가져오는 상소를 힐끗 쳐다보았다. 의금부에 갇힌 윤계였다. 이미 강신이란 두 글자를 자인한 꼴인데도 무슨 할 말이 더 있다고 상소를 올렸을까. 상소를 펼친 숙종의 미간이 찡그러졌다.


"윤계가 자신은 강신인지 신강인지, 당시 장효례가 했던 말을 자세히 듣지 못하였으니 칙사들을 접대한 역관 박정신, 김기문, 변이보도 신문하라는군. 나는 귀신은 믿지 않는데, 물귀신은 믿어야겠으이."


혼자 당하기엔 자못 억울했던 모양이다. 숙종은 냉소를 머금고 힐끔 서인들을 쳐다보았다. 가만히 앉아서 당할 서인들이 아니었다. 사전에 상소의 내용이 귀에 들어갔을 것이고 충분히 논의를 하였을 터였다. 그런데 서인들이 하나같이 외조부 청풍부원군 김우명에게 눈짓을 보낸다. 얼른 고하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


김우명은 입을 꾹 닫고 미동도 없었다. 아직도 한두달 전의 일이 가슴에 대못으로 박혀 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외조부인 자신을, 왕이 버렸다. 복평군과 복창군을 위한 일이었든, 중궁을 위한 일이었든, 왕은 김우명 자신의 목숨을 가차없이 버리려 하였다. 그때의 분한 심정이 아직 그대로다. 생살을 찢는 아픔이 아직 새살도 돋지 않고 피가 절절이 맺힌 그대로다. 그런데 왕에게 서인들을 위해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은 왕의 독한 눈빛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 최소한 지금은.


"..."


얼른 고하라고 김수항이 턱짓으로 보챈다. 다른 서인들도 줄줄이 꼬치처럼 똑같이 눈짓, 턱짓으로 독촉한다. 그래도 입을 열 수는 없다. 왜 이런 일은 매번 자신이 나서야 한단 말인가. 왜 맨날 자신이 화살받이처럼 나서서 왕의 독설과 괄시를 한몸에 받아야 한단 말인가. 왜 맨날 자신만 왕 앞에서 악역을 자처해야 하는가. 손자와 외조부가, 남보다 못한 대척점으로 내몰리는 현실도, 또한 손자가 외조부를 남보다 못한 취급을 하는 것도 서럽고 노엽다.


"전하, 청풍부원군이 아뢸 것이 있다 하옵니다."


김수항은 꿈쩍도 않는 김우명을 쏘아보며 천천히 씹어먹듯 말하였다. 청풍부원군이 굼벵이처럼 두꺼운 껍질 속에서 나올 생각을 않는다면, 끄집어내야 했다. 그게 한여름에 나뭇가지에 앉는 매미의 숙명이다. 듣는 왕의 귀엔 몹시 시끄럽더라도, 맴맴맴맴 소리내어 울며 서인들의 입장을 대면하고, 때로는 벌의 먹이가 되고 또 때로는 나무의 거름이 되는 존재다.


"..."


김우명은 당혹스레 얼굴이 시뻘개졌다. 왕의 눈길이 자신의 얼굴에 꽂히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매번 서인의 입장을 대변하려 드는 외조부를 못마땅히 쏘아보는 왕의 두눈은 독을 품은 벌의 침끝처럼 금세라도 자신을 쏠 것 같다.


"전하, 한쪽 말만 듣고 윤계를 처벌하는 것은 형평성에 어긋나옵니다. 윤계의 상소대로 역관들도 잡아다가 문초하소서."


김우명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지만 내키지 않았던지 짤막히 말하고 입을 닫았다. 억지로 등떠밀려 간한 자리였다. 더 자세히 말하라고 김수항이 눈을 부랴렸지만, 김우명은 더는 나설 생각이 없었다. 왕에게 미안해서가 아니라, 노여워서였다.


"청풍부원군께선 아직 자숙과 자성이 부족한가 보오?"


숙종은 냉혹하게 자신의 외조부를 쏘아보았다. 김우명이 자신의 입장에서 숙종에게 섭섭하고 분한 것처럼, 숙종 역시 김우명이 노여웠다. 외조부가 잠자코 있었더라면, 어미가 야대청에 난입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체통이 그렇게 종잇장처럼 구겨질 일도 없을 터였다. 아예 서인들을 대변하여 사사건건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방패가 될 셈인가, 참으로 괘씸했다.


"..."


김우명의 얼굴이 분노로 와락 붉어지는 것을 보고, 숙종은 차갑게 일축했다.


"조선 출신인 장효례가 조선말로 말한 것을, 굳이 역관의 증언까지 더 필요하오? 이미 윤계는 자신이 강신이란 말을 들었다고 자인한 마당에."

"하오나 전하, 윤계는 자세한 얘기를 들은 것이 아니옵니다. 스스로도 강신인지 신강인지 제대로 들은 것이 없다고 하였사옵니다. 그러니 미진한 증언은 역관들을 문초하여 받아내심이 마땅한 줄 아옵니다."

"내가 윤계를 의금부에 넘긴 것은 역관들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보다도, 윤계가 무슨 말을 숨겼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일 뿐이다."


숙종은 역관들까지 걸고 넘어지는 서인들이 괘씸했다. 장효례가 했던 말을 굳이 더 캐고 싶진 않았다. 윤계가 강신이란 말을 듣고도 아뢰지 않은 일이면 되었다.


"하오나 전하. 윤계 스스로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확신이 없었던 탓에 부인했던 것이옵니다. 그러니 부디 너그러운 아량을 베풀어주시옵소서."


교묘하게 빠져나가려는 김수항의 말에 숙종은 그를 뚫어져라 쏘아보았다. 송시열만 처리할 게 아니라 김수항 이자부터 처리해야겠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자세라기보단 어른이 아이를 어르고 달래듯이 말장난을 하려고 든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강신이란 두 글자를 들었지 않는가. 윤계는 송시열이 다칠까봐 감히 사실대로 고하지 않고 과인을 능멸한 것이다."

"전하, 강신이란 말은 그저 조정신료 전체를 뜻하는 것일 뿐이옵고, 특별히 누구를 지목한 것이 아니어서 윤계 또한 고할 수 없었사옵니다."


숙종은 김수항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게다가 자신을 은연중에 무시하는 기미도 비친다.


"강신이 조정신료 전체를 말하는 것일 뿐, 송시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기가 차서 되묻는데, 김수항은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예 전하. 조정에 나서지 않는 재야의 신하가 어찌 강신이겠습니까. 송시열이 강신이 아니라 신들이 강신이옵니다. 허니 처벌을 하시려거든 송시열이 아니라 신들을 모두 처벌하시옵소서."

"왕실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린 죄를 물어 신들을 모조리 파직하시옵소서."

"송시열을 풀어주고 신들을 벌하시옵소서."


서인들이 다같이 고개를 조아리며 한목소리로 압박한다. 숙종의 눈동자가 더욱 검어졌다. 어이가 없다. 조부 효종의 서거 당시 예론을 이끌었던 것도 송시열이었고, 자신의 동궁시절 재상이었던 자도 송시열이었고, 또 성균관 입학례 당시 소학이냐 대학이냐로 왕을 압박했던 자도 송시열이었다. 항상 재야와 조정을 넘나들어 절묘하게 서인들을 이끈 사람이다.


"이미 정한 일에 항명을 하겠다?"

"항명이 아니라 해명이옵니다."

"흥. 이미 송시열의 제자 이단하가 성고(현종)의 행장에 송시열오인례라 적은 것도 한번 변명해 보시지?"

"..."

"재야? 송시열이 재야와 조정 사이에서 왔다갔다한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그대들이 안다. 또한 송시열이 예론을 잘못 이끌어 왕실의 권위가 크게 위축되었고, 그러니 청국 칙사들이 감히 강신이란 말을 입에 담은 것이다. 인과관계가 이토록 자명한데 지금 과인을 상대로 궤변을 늘어놓겠다는 건가?"

"그건.."


열다섯살 주제에 언변이 막히질 않는다. 어디를 찔러도 정곡을 찔러 반격한다. 김수항은 숙종의 외조부인 청풍부원군에게 힐끗 눈총을 주었다. 어서 나서서 한마디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


숙종은 성가신 느낌으로 김우명을 쳐다보았다. 매번 자신의 귀를 가로막는다. 왕실의 적은 신하이기 전에 외척인가. 외조부가 이럴진대 장인인 광성부원군은 오죽할까. 대체 왜 잠잠할까. 아직 힘이 없어서 서인들이 내버려두는 건가. 아니면 뒤에서 암암리에 일을 함께 꾸미는 걸까. 마음이 괜히 심란하다.


"이미 정한 일이니 다들 물러가라."

"예 전하.."


김수항은 결국 고개를 조아리고 김우명을 쏘아보았다. 그의 눈길을 따라서 서인들의 눈길이 일제히 김우명에게 쏠렸다. 참 제 구실도 못한다. 왕의 조부씩이나 되어서 제 할 말도 못하고 몸을 사리기나 하고, 참으로 구차하고 비루하다.


"이대로 가만 두고 보실 겁니까?"

"명색이 금상의 외조부가 아닙니까? 이럴 때 힘을 써주셔야지요."

"아니, 외조부 씩이나 되어서 손자 하나 마음대로 못합니까!"

"손자가 외조부를 벌레보듯 하는 마당이니 원.."


빈청에선 서인들이 모여 청풍부원군 김우명을 압박했다. 명분 싸움이다. 왕이 명분을 쥔 마당이니 자신들은 앞에서 안면몰수하고 실력행사를 하거나, 뒤에서 암암리에 일을 꾸밀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렸을 때나 취할 수 있는 방편이다. 당장 그들을 수렁에서 건져올려줄 동아줄이 있는데, 동아줄을 잡는 게 먼저다. 물론 한번 잡은 동아줄을 놔줄 생각도 없다.


"..."


김우명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허공을 볼 뿐 묵묵부답이었다. 원치 않아도 자꾸만 자신이 왕의 앞을 가로막게 된다. 특별히 남들보다 학식이나 심계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저 자신이 대비의 아비요, 왕의 외할아비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렇게 떠밀려 앞을 가로막으니, 손자는 자신을 치우려 하였다. 아니, 고작 한두번 앞을 막았다는 이유로, 또 중궁의 안위를 위협했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자신을 없애려 하였다. 그런데 서인들은 이런 자신을 또 왕의 앞으로 떠민다.


"나더러, 죽으라는 건가?"

"뭐? 무슨 소리요?"

"이미 나는 죽은 사람이지.."


김우명은 비틀거리면서 빈청을 나섰다. 차마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빈청 앞에 삐딱하게 기대어 섰던 홍우원, 윤휴, 허목을 비롯한 남인들이 비웃음을 머금고 김우명을 아래 위로 훑어보았다.


"제 딸 치마폭에 숨은 위인이 이번엔 또 무얼 하시려고? 보자보자하니 서인들의 보자기가 되셨나. 아니면 대비마마 치마폭으로 보자기를 만드셨나."

"이번엔 확실한 증거를 갖고 나서야 할 게요. 아니면 전하께서 믿어주지 않을테니."

"..."


김우명은 가슴속에 들끓는 울혈로 눈가와 입가가 씰룩거렸다. 이내 뒷목이 뻣뻣해져서는 무릎에서 힘이 좍 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서인들의 압박은 밀물이 되어 몸속으로 밀려들고, 자신의 자존감은 썰물이 되어 몸밖으로 빠져나간다. 무릎이 뒤틀려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몸이 기우뚱한다.


"괜찮으시오?"


누군가가 부축을 한다. 하지만 눈앞이 침침하고 흐릿한 게 누군지도 얼굴이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김우명은 가만히 팔을 밀어내고 비틀비틀 걸어나갔다. 뭔가에 무릎이 꺾이고, 발뒤꿈치를 밟힌 것처럼, 빈껍데기가 그야말로 굼벵이 허물을 벗다만 매미처럼 바둥거릴 뿐이다.


그는 공복차림으로 선술집에 들러 술 한동이를 사들고 술을 한모금 마시고, 한모금 한숨을 내뱉으며, 그렇게 갈지之자로 비틀거리면서 초헌도 마다하고 집으로 향하였다. 하인들이 초헌을 굴리며 뒤따르는데도 외면했다. 그냥 지금은 똑바로 걷고 싶었다.


장통방 갑제로 돌아온 김우명은 겨우 지친 몸을 뉘었다. 몸이 돌이 된 것만 같다. 이대로 누우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는 세상의 마지막 장면을 두눈에 담을 듯이 두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이대로 죽고 싶지 않다. 외손자인 왕도, 자신을 자꾸만 왕 앞으로 떠미는 서인들도, 또한 자신을 조롱하는 남인들도 모두가 자신이 죽기만을 바랄텐데, 이대로 죽어주고 싶지 않다.


"전하, 청풍부원군 김우명이 지금 사경을 헤맨다 하옵니다. 속히 어의를 보내시어.."


여막에서 간단히 검은콩죽으로 야참을 먹던 숙종은 두광이 종종걸음으로 뛰어들어 고하는 말에 얼굴이 굳어졌다.


"뭐? 갑자기 사경을 헤매신다니? 멀쩡하던 양반이 왜?"

"그게.."


두광이 머리를 긁적였다. 참 난감하다, 왕의 지친이 죽음을 목전에 두었다는 말을 고하기란 참 쉽지 않다. 더군다나 왕의 두눈에 한순간에 불안과 의심이 엇갈리는 것을 보니 더욱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멀쩡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아프다니?


"정말이냐? 칭병이 아니냐? 서인들과 함께 나를 압박하려는 게 아니고?"

"그게.."


두광이 고하려는데 열린 문틈으로 소란이 인다. 소식을 듣고 사방에서 신료들이 모여드는 상황이다. 그리고 지금 대비 김씨가 총총히 여막 앞으로 달려오는 참이다. 여막 앞에 모인 신료들이 놀라 한발 뒤로 물러선다. 대비 김씨는 내관들과 금군들이 저지할 틈도 없이 단숨에 여막 문틈으로 뛰어들었다.


"주상, 들으셨습니까? 지금 아버지가..아니 주상의 외조부가 위독합니다. 어서 어의를.."


방금 전까지 걱정스런 눈빛이 이내 차갑게 식어버렸다. 숙종은 대비 김씨를 쳐다보며 차갑게 대꾸했다.


"제가 왜요?"

"주상.."


대비 김씨는 이질적인 눈빛으로 자신의 아들을 쳐다보았다. 열달 품어 십여년을 키운 아들이다. 그런데 너무도 낯선 타인처럼 차가운 눈을 한다. 차가운 말도 한다.


"어의는 죄인에게는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명확한 근거도 없이 왕실종친을 무고한 죄, 어마마마와 외조부님 모두 공범이십니다. 두분 모두 똑같이 자숙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러니 청풍부원군은 물론 어마마마에게도 어의를 보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마마마께서도 절대로 아프지 마십시오!"

"..."


숙종의 음성은 여막 안에 차갑게 울려퍼졌다. 대비 김씨는 가슴이 섬뜩해졌다. 마지막 한마디는 피보다 진한 격정과 걱정을 동시에 내뱉았지만, 대비에겐 그저 가슴을 후벼파는 경고로만 들렸다.


이게 내 배로 낳은 아들이라니.


두눈을, 두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아비가 위중한데, 아들이 어의조차 윤허하지 않는다. 조부를 나 몰라라 하겠단다. 정치에 개입하여 좌지우지하려 든 죄를, 수렴첨정도 불사하려 든 죄를, 선왕을 억압하고 또 그 죽음을 방조한 서인들의 편에 선 죄를 묻겠다고, 피도 눈물도 없이, 걸리적거리는 것은 모조리 치울 기세다.


"돌아가십시오 어마마마."

"..."


대비 김씨는 털썩 주저앉았다. 하늘이 무너지고 발밑이 부서지려 한다. 그녀의 손길에 닿는 짚자리의 따가운 감촉보다, 눈길에 닿는 아들의 차가운 눈동자가 더 뼈아프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이게 다 저를 위해 복창군 형제를 제거하려 한 것인데. 딴생각을 품고 나인과 무수리를 동원하여 궐안 동정을 염탐하며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는 잠재적 위험을 없애려고 한 것 뿐인데, 너무도 원통하고 분통하다.


"어떻게..어떻게 이 에미에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주상! 주상의 외조부입니다. 그분이 없었으면 지금의 주상도 없었습니다. 어찌 천륜을 저버리려 하십니까!"

"돌아가신 아바마마의 곁을 지킨 것도, 청풍부원군입니다. 그리 천륜에 충실하여, 아바마마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인삼차를 마시는 것도 두고 보셨답니까!"

"..."

"돌아가십시오. 어의를 기다리지 말고, 다른 의원들을 찾아보시지요."


대비 김씨는 파르르 떨면서, 독한 눈빛으로 숙종을 쏘아보았다.


"이 어미가 그리 우습습니까, 아니면 외할아비가 그리 우습습니까? 다 뜻이 있어서 한 일입니다. 주상을 위해서!"

"저를 위한 일이 아니라, 어마마마의 끝없는 욕심을 채우려고 하신 일이겠지요."

"주상!"

"이미 경고했습니다. 다시는 내 앞에 서지 말라고. 하지만 청풍부원군은 또 다시 서인의 입장을 대변하여 제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아버지가 뭘 그리 주상의 앞을 가로막았다고 그러십니까. 뭘 그리 잘못했다고!"

"존재자체가 제 걸림돌이십니다. 서인들의 손에 놀아나는 꼭둑각시이고, 서인들의 죄를 감싸주는 보자기이지요! 처음부터, 서인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럼...중궁은요, 광성부원군은요?"

"..."

"두고 보십시오. 서인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내 아버지 청풍부원군을 전하의 눈앞에서 치운다면, 그때는 광성부원군이 그 뒤를 이어 전하의 앞을 가로막을 것입니다. 그것이 궐이고, 그것이 조정입니다. 우리는 적이 아니라, 그저 폭주하는 전하를 안전히 멈춰세울, 보호자들일 뿐입니다."

"..."


대비 김씨는 자신의 코끝마저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차가운 입김으로 말을 마쳤다. 어서 돌아가서 중궁을 만나봐야 한다. 어의를 보내지 않겠다고? 중궁과 광성부원군까지 나서서 어의를 보내라 애원하면 그때도 버틸 수 있을까.


"제가 나서봐야 아무 힘도 되어드릴 수가 없사옵니다."


진홍은 한밤중에 들이닥친 시어미에게 맥없이 답하였다. 어쩌다 모자지간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또 어쩌다 부부지간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시어미는 자신이 나서서 어의를 보내주십사 지아비에게 청해보라 하지만, 이미 자신도 눈밖에 난 처지다. 여막 안으로는 한걸음도 들어가지 못한다. 친정에 왕실의 비밀을 흘렸다고 아예 찬바람이 쌩쌩 돌도록 외면하는 왕인데, 사사로이 청탁을 들어주려 나선다면, 그것이 시가의 일이라 해도 두고 볼 리 만무하다.


"그래서, 못해주겠다는 겁니까? 내 중궁을 어떻게 대했는데..죽은 명혜와 명선 대신 딸처럼 여겼거늘, 어찌 이 시어미를 나몰라라 하겠다는 겁니까?"

"..."

"아, 이제 보니 어쩌다 이 시어미가 실수한 것을 갖고 가슴에 담아두었나 봅니다. 때는 이때다, 지금이야말로 마음껏 분풀이를 할 때다, 한번 속 좀 썩어봐라..이렇게 벼르고 별렀나 봅니다?"

"어마마마...왜 그런 오해를.."


진홍은 당황하여 해명을 하려 들었다. 정말로 왕이 자신의 말은 들어주지도 않을 것 같았다. 사월 초파일 이후로 자신에게는 아예 동공이 닫혀버린 듯한 지아비다.


"오해? 무슨 오해? 중궁이야말로 오해를 하는 게 있어요. 주상이 말을 안한 모양인데, 내 아버지 김우명은 결코 없는 소리를 지껄인 게 아닙니다. 복평군과 복창군이 사사로이 궁녀들과 내통하고 간통한 것도 사실이고, 그들이 한 아기를 몰래 지켜보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걸 복창군 형제가 궁녀들 사이에 낳은 아기로 오해했을 뿐, 사실은 그 아기는 중궁 사가와 관련이 있는 아기입니다. 그 존재를 덮기 위해, 주상이 이 모든 걸 내 아비의 무고죄로 몰아간 것이고, 대신 희생시키려 한 것입니다. 아시겠습니까?"


대비 김씨의 말에 진홍의 머리가 멍해졌다. 도대체 무슨 얘길 하는지 모르겠다. 사가와 관련이 있는 아기라니, 그 존재를 덮기 위해 왕이 모든 것을 청풍부원군에게 덮어씌운 것이라니..


"이게 다 중궁 탓입니다. 그러니 책임을 지세요."


표독하게 쏘아보는 대비의 눈길이 마치 북풍한설 같다. 가시는 있지만 겨울을 걷어낸 봄바람 같던 눈길이 도로 겨울이다. 아니, 처음부터 시어미가 이랬던 것 같다. 잠시 자신에게 봄눈처럼 녹던 것이 다시 얼어붙었다.


나의..책임..


납덩이가 가슴을 콱 조여든다. 어지러운 진홍의 눈빛에 대비는 차갑게 입을 놀렸다. 미처 친정식구들에게 전해듣지 못한 비사들이 그녀의 귓속으로 콕콕 파고들어 뇌리를 찌른다.


"내가 중궁을 왜 그리 미워하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이 모든 게 다 중궁 탓이니, 그 죄를, 그 빚을 갚으라 이겁니다. 내 아비를, 살려내세요."

"송구하오나..저는 누구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옵니다."

"중궁!"

"어마마마를 위해 전하께 빌어보기는 하겠사오나..제겐..아무 힘도 없다는 것을..아셔야 합니다."

"뭐, 뭣?"


진홍은 대비 김씨가 자신을 쏘아보든 말든, 그대로 일어서서 여막으로 향하였다. 온몸이 텅텅 빈 것 같다. 아니 오히려 꽉 찬 걸까. 모르겠다. 그냥 어지럽다. 왕이 자신을 위해 자신의 외조부에게 모든 죄상을 뒤집어씌었다는 시어미의 말이 산 언덕의 메아리처럼, 혹은 우물 속의 메아리처럼 그저 공허하다.


"어의를 불러와라. 아니 내가 직접 내의원으로 가겠다!"


날선 음성으로 시어미가 말하면서 바로 뒤에서 일어서며 지밀상궁에게 명하는 음성도 그저 쇳소리처럼 의미없이 고막을 긁을 뿐이다.



"내의원에 일러, 한발짝도 궐을 나가지 말라 해라."


숙종의 증오섞인 음성이 여막에서 흘러나온다. 여막 앞에 대기 중인 신료들과 내관들, 금군들마저 그저 가슴이 섬뜩하여 서로를 돌아보았다.


"전하..청풍부원군이 칭병을 한 게 아니라..정말로 위중하다 하옵니다."

"..."


숙종은 헷갈렸다. 송시열을 위리안치하라는 명을 내린 후다. 그 명을 철회시키기 위해 서인들이 가지가지한다 싶다. 이젠 외조부가 아픈 척 하는 건가. 어미까지 아픈 척 하는 건 아닌가. 아니 정말로 아프신가. 이러다 잘못되실까. 그러면 어미의 격한 성정으로 버텨내기가 힘드실텐데.


앉아있을 수가 없어 그는 여막에서 일어나서 서성였다. 좁다란 창문으로 다가가서 열어보았다. 바람이 안으로 들어온다. 그런데 여기저기서 웅성이며 소리치는 소리도 들려온다.


"전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전하의 외조부이십니다! 하늘이 내린 인연이니 부디 어의를 보내시어 그 인연을 보존하시옵소서!"


김수항의 목소리다. 숙종은 심기가 사나워져서 홱 돌아섰다. 궐안에서 한판의 소학지희(희극)을 보는 것만 같다. 열성조들은 간혹 심사가 울적할 때면 배우들을 불러 도목정(이조와 병조에서 문관과 무관 중에 적임자를 천거하는 일)을 희화한 연극을 보곤 했다. 어쩐지 눈앞에서 그 연극을 보는 것만 같다. 송시열을 살리겠다고 참 가지가지 한다. 결국 외조부도 서인이다. 처음에는 송시열을 싫어하던 외조부가, 서인의 손발이 되어 별짓을 다한다.


창문을 닫으려는 숙종의 시야로, 중궁이 시녀들과 함께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엔 핏기가 하나도 없이 창백했다. 이번엔 중궁까지 가담한 건가. 아니다. 어미가 등을 떠민 모양이다. 서인들은 외조부의 등을 떠밀고, 외조부는 어미의 등을 떠밀고, 어미는 중궁의 등을 떠밀고...그렇게 하여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결국 숙종 자신의 사람들이 된다.


"전하.."

"돌아가시오!"


숙종은 한마디 말을 내뱉고 창문을 닫아버렸다. 듣고 싶지 않다. 이미 사가에 왕실의 비밀을 흘렸다고 자신에게 배척당하는 중궁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자신이 들어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여막까지 왔단 말인가. 중궁도 한마디만 더하면 서인 편에 서서 자신을 압박하는 대열에 서는 거다.


"전하, 청풍부원군의 아들 김석익이 약재를 빌려갔습니다."


백광현이 두광을 통해 입시를 청한 후에 굳은 얼굴로 고하였다. 어명 때문에 한발짝도 나갈 수가 없었다. 그 많은 어의들이 김우명의 치료를 외면해야 한다. 마음이 편치 않은 탓에 증세를 물어보고 약이라도 처방하게 하였다.


"사사로이 약재를 내주었다?"

"어의를 보내는 건 금하셨으나, 약재를 내주는 건 금하지 않으셨습니다."


저자거리의 백성들도 치료하겠다던 백광현이다. 사람을 아끼는 마음인가. 하지만 김우명은 저자거리의 백성이 아니다. 왕의 지친이요, 권력의 최첨단에 있는 이다. 숙종은 백광현을 차갑게 쏘아보곤 돌아섰다.


"잘..했다."

"혹여 칭병이라 여기시어 어의의 내방을 막으신 것이라면, 신이 다녀오겠나이다. 신이 가서.."

"..."


숙종이 가만히 생각에 잠기는데, 이내 내시 하나가 다급히 문을 열고 뛰어들었다.


"전하, 청풍부원군 김우명이..김우명이..운명했다 하옵니다."

"뭐, 뭐라?"


숙종은 귀를 의심했다. 백광현도 놀라서 돌아보았다. 이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왕의 외조부다. 서인 편에 서서 연극을 하는 거라 자신도 의심이 들었다. 당연히 왕 또한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정말로 위급했다? 아니, 이제는 세상에 없다?


내가 꿈을 꾸나? 악몽인가?


멍해진 숙종의 시야로, 문틈으로 멍하니 진홍의 충격에 빠진 얼굴이 들어온다. 얼굴에 핏기 하나 없이, 두눈이 뎅그래해져선 어쩌면 숙종 자신과 똑같은 표정으로 본다. 마치 악몽을 꾸는 것과 같은 표정으로. 중궁의 표정을 보니 알겠다. 꿈이 아니다. 정말로 외조부가 죽었다니,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선 아무런 생각도 들질 않는다.



작가의말

실제로 김우명이 ‘홍수의 변’이라 불리는 복창군, 복평군 간통 고변 이후 숙종의 눈밖에 나고, 두어달을 술로 지새다가 화병으로 죽었다 합니다. 이에 따른 대비의 막장행각은...흑, 쓰는 저도 무섭습니다. ㅠ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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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9

  • 작성자
    Lv.85 서울대산신
    작성일
    13.02.08 18:24
    No. 1

    대비의 행각이 기대되네요 ㅋㅋㅋㅋ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1 디오지크
    작성일
    13.02.08 19:54
    No. 2

    아.. 기다렸습니다!! 대비의 분풀이는 이제부터 진짜겠지요.. 글이 점점 더 맛깔나지겠네요 추운날 감기조심하시고, 민족의 대명절 설 잘 쇠시기 바랍니다. 건필하세요 ^^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일화환
    작성일
    13.02.09 01:50
    No. 3

    15살인데.......자기도 모르는 새에 할아버지를 보내버렸어......불쌍하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2.09 02:08
    No. 4

    대나무필통님, 디오지크님, 일화환님, 댓글 고맙습니다. 대비의 분풀이..ㅠㅠ 실록에 적힌 것만도 무시무시합니다. 이래저래 불운한 유년기를 보낸 숙종이지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9 jk******
    작성일
    13.02.09 02:50
    No. 5

    힘들겠네요. 저리되버리면 가슴에 무거운 돌을 매달은 건데...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2 수훈
    작성일
    13.02.10 01:15
    No. 6

    후아. 대비의 북풍은 이제 부는군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2.11 02:02
    No. 7

    jk046069님, 수훈님 댓글 감사합니다. 숙종이 워낙 인생이 파란만장해서..( ..) 가슴에 돌을 수만개는 달았을지도.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7 뚱뚱한멸치
    작성일
    13.02.11 09:49
    No. 8

    대비가...
    겁난당~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2.13 15:23
    No. 9

    무섭죠;;; 자살유서를 내리는 대비라니..전 실록 보고 경악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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