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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님의 서재입니다.

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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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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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1.08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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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2쪽

해의 그림자 47

DUMMY

숙종은 진홍이 몸져 누웠다는 소식을 듣고 중궁전에 행차했다. 어미도 놀라서 수행궁인들을 이끌고 당도한 직후였다. 진홍은 아들보다 뜨끈뜨끈한 온돌방에서도 온몸이 불덩이가 되어 끙끙 앓는 중이었다. 어의들과 의녀가 입시하여 진홍의 상태를 살피는 중이었다. 어의 대신 의녀가 손을 내밀어 진홍의 왼 손목을 짚고 진맥을 하려 들자, 진홍은 그 와중에도 오른손으로 책을 바꿔잡고 꼬옥 쥔 채로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허열과 실맥實脈을 봐선...전하와 똑같이 뭔가에 심력을 너무 소모하신 것 같은데.."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의녀의 눈길이 진홍이 여전히 오른손 꼬옥 쥔 한권의 책에 쏠렸다. 대비 김씨의 눈초리가 뾰족해졌다. 며늘아이가 책을 보느라고 기운이 다 빠진 것이 분명했다. 어린 아들은 살을 에는 외풍이 드는 여막에서 지내느라 뼈마디가 삭을지경인데, 며늘아이는 훈훈한 온기가 가득찬 방안에서 지내면서 책을 너무 읽어 병이 나다니. 기가 찼다.


"훈민정음해례? 도대체 저 책이 뭐라고.."


혀를 차던 대비는 순간 김석주의 언질이 떠올랐다. 왕이 난데없이 재산루로 사람을 보내어 훈민정음해례를 찾았다는데, 무슨 곡절인지 모르겠다는 얘기였다. 언문이면 으레 내명부의 소관일 거라 짐작하는 정도였다.


세종이 야심차게 창제한 언문이건만, 공식적으로 쓰는 것은 오롯이 왕실 내명부의 몫이었다. 왕의 유고시에, 대비나 중궁이 언문교지를 반포하는가 하면, '궁체'라고 하여 부드럽고 우아하게 획을 꺾어쓰는 서체를 연마해온 것도 구중궁궐 심처였다. 그런데 도무지 알 수 없는 행보를 보이는 며늘아이다.


"허열이 있으시니 일단 가미온담탕을 처방하여 기를 보하겠사옵니다. 모쪼록 안정을 취하게 하옵소서. 우선 마음이 편하셔야 나으실 것이옵니다."

"알았다."

"허면, 이만 신들은 물러가보겠사옵니다."

"그냥 간다고? 침은 왜 안 놓느냐?"


어의들끼리 숙의를 거친 후에 아뢰는 말에 덥썩 침은 안 놓냐고 묻는 숙종이었다. 효종이 종기를 째다 신가귀의 침끝에 붕어한 이후로는 침을 꺼리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도 숙종은 백광현에게 침을 놓게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에.."


침 소리에 놀라 진홍이 움찔하여 두팔을 이불 속으로 감추었다. 백광현은 쓴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예전에 가온을 죽게한 것이 진홍이란 오해를 하고 슬그머니 침끝으로 겁을 준 것이 어린 마음에 아직도 충격이 남은 모양이었다.


"중궁께서 워낙 침을 무서워하시어..그냥 가벼운 증상이니 안 놓아도 될 것이옵니다. 우선 푹 쉬면서 조섭을 하시면 좋아지실 것이옵니다."

"그래도 놓아라. 듣자하니 조반도 제대로 못 먹고 죄다 토해냈다 들었으니."

"알겠..습니다."


어의들이 물러가고, 혹시라도 책을 뺏길세라 품에 도로 끌어안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쓰는 진홍을 보고 숙종은 고개를 흔들었다. 곰 같다. 훈민정음해례를 구했으면 자신한테 바로 가져왔어야지, 뭐가 궁금해서 그렇게 읽어보다 병이 난 것인지, 그러고도 무슨 금단지를 품은 것처럼 안 뺏기려고 책을 꼬옥 끌어안는 모습이라니.


밥도 제대로 못넘기는 진홍을 위해 수라간에서 간단히 전복죽과 깍두기, 그리고 수저를 정갈하게 내어왔다. 진홍이 전복죽을 한술 뜨는 모습을 지켜보며 숙종이 놀리듯이 한마디 했다.


"송송이도 많이 먹으시오. 중궁의 서체를 닮았으니, 많이 먹을수록 서체가 반듯해질 거요."

"...."


진홍의 눈길이 밥상 위의 깍두기로 뚝 떨어졌다. 송송이체라더니, 송송이도 많이 먹으라니. 숙종의 장난끼에 어쩐지 웃음이 비집고 나오려 했다.


"쯧쯧..그냥 서사상궁이 가르쳐주는대로 서체를 연마하면 될 일이지, 뭘 그리 옛날 고서들을 뒤져가며 그런 모난, 못난 글씨를 고집하는지..."


진홍이 웃을 뻔한 순간 숙종은 어미가 혀를 차는 소리를 들으며 움찔했다. 처음부터 미리 자신의 짝으로 점찍어두고 어미가 공을 들인 진홍이었다. 그런데 막상 들이고 보니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숙종은 달랐다. 무슨 청개구리 심보인지 모르겠지만 어미가 진홍을 마뜩찮아 하면 할수록, 이상하게도 자신은 진홍이 좋아진다. 아무래도 효자는 못되는 모양이다.


"내놓으시오."

"내놓다니요?"

"그 책."


눈을 동그랗게 뜨고 쏘아보는데도 숙종이 매정하게도 손을 뻗었다. 진홍은 어쩐지 아까운 마음에 책을 허리 뒤로 감추었다.


"좀더..읽고 드릴게요."

"중궁, 뭘 하세요? 어서 내놓지 않고? 중궁의 소임은 장차 왕실의 대통을 이어 주상의 왕위를 공고히 하는 것이지요. 몸이 부실하면 이전처럼 주상의 처소로 나인을 들이거나, 후궁을 들일 수 밖에 없어요. 그러니 중궁의 자리를 똑바로 지키고 싶다면, 알아서 몸관리 잘하세요."


고개를 도리질치는 진홍이 대비는 몹시 못마땅했다. 이미 진홍의 방패막이가 되어주던 지아비 현종은 가고 없다. 그나마 상중이라 나인들을 동궁의 침소에 들여보내지 못할 뿐이지, 아직 초경도 못치른 중궁을 참고 볼 생각은 없었다. 빨리 후사를 이어야 아들의 보위가 든든하다.


당장 소현세자의 후손이 살아있다. 임창군을 암암리에 보위에 올리려는 불온한 무리가 있을 수도 있다. 복창군 3형제 또한 왕위에 야욕을 품었다면 얼마든지 남인쪽과 손을 잡고 물밑에서 수작을 벌일지도 모른다. 일단 아들이 허약하고 후사가 없다면야, 은밀하게 독살하고 저들이 수면위로 부상할까 마음이 불안한 것이었다.


내년 8월에 국상만 끝나면..당장 둘을 합방시켜 후사를 보리라. 그때까지 초경을 못 치르거나, 몸이 허약하다면, 그때는 후궁을 들이든 전처럼 나인들을 아들의 처소로 밀어넣든 해서라도, 후사를 보고야 말 것이었다.


가시돋친 대비의 으름장에 진홍은 마음이 섬뜩해졌다. 어쩐지 온몸을 찔린 것만 같았다. 그녀는 조금은 주눅이 들어서 숙종에게 해례를 내놓았다. 어쩐지 코끝이 시큰한 게, 눈 한번 깜빡이면 바로 눈물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런 진홍을 보며 숙종은 정색을 하고 대비에게 말을 꺼내었다.


"어마마마, 소자는 절대로 후궁에게선 후사를 보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도 저들이 왕을 우습게 아는데, 서출이 후사를 잇는다면 더더욱 우습게 알 것이옵니다."

"주상..."


대비는 흠칫하여 숙종을 쳐다보았다. 어미 앞에서 며느리를 편드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왕위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결의 같은 것인지, 그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남편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아들은 점점 차갑고 멀어지는 것만 같다. 아니, 그런가 하면 또 며느리에겐 점점 살가워지는 것도 같다. 아들을 점점 빼앗기는 기분이다. 애써 섭섭함과 서운함을 삭이며 대비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나 또 왔다."


이민철은 어명을 받고 또 최석정의 여막을 오가는 것도 못할 노릇이라 느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고, 듣기 좋은 육자배기도 한두 번이다. 하물며 한양에서 백봉산까지 최석정을 보러 오는 것도 한두 번이지, 한주 사이에 무려 세번을 왕복하려니 마흔 다섯의 체력이 벌써 방전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보고도 최석정이 두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히 쳐다본다.


"아니 왜요?"

"몰라서 물어? 몰라서 묻냐? 네놈이 구해달라고 한 책 때문이잖아!"

"아니 그러니까 인편에 보내시면 되지, 왜 굳이 찾아오시냐구요. 내가 뭐 영감님 숨겨놓은 자식도 아니고."

"그러니까! 네놈이 해롄지 해님인지를 빌려달라 하는 바람에 중간에 껴서 나만 고생이잖아! 전하께서 워낙 요긴한 책이어서 남에게 함부로 맡길 수 없으시단다! 그러니 졸지에 나만 네놈 아는 죄로 왔다갔다 신발 닳게 생겼잖아!"

"어이구! 갖신 한켤레 지어드려야겠네. 가만, 그런데 당하관도 아니고 참하관 노릇 하다가 여막살이 하는 저보다야, 당상관에 무려 영감님이신데 형편이 더 좋으실텐데. 에효. 제가 돈이 없으니 나중에 제 몸뚱아리라도 빌려드리죠."


최석정이 냉큼 받아들어, 방바닥에 덜려 있던 종이 중 한장을 집어들고 비교했다. 이민철의 두눈이 꿈틀거렸다. 뜻밖에도 그 종이는 똑같은 모음배열이면서도 왕과 최석정 사이에 오가던 종이가 아니라, 오롯이 최석정의 필체로만 적힌 종이였다. 게다가 이리저리 실험해본 흔적이 역력했다.


"뭐야, 너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다니, 뭘요?"

"해례가 없어서 못 푼다더니? 이건 뭐야?"


이민철이 흰눈자위가 드러날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거리자, 최석정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면서 으스댔다.


"아아..처음에만 기억이 안났지, 영감님 가고 나신 후에 천천히 때려맞춰 보았었죠. 제가 좀 천잽니까? 문일지십!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천재인데, ㅗ가 1, ㅜ가2...당연히 한둘만 기억해도 나머지야 식은 죽 먹기죠."

"..."


얄밉다. 수년을 호의로 알고 지낸 이민철 자신도, 나름 천재라는 백강의 혈육인 자신도 이렇게 최석정이 얄미운데, 심지어 남들은 얼마나 얄미울까. 난놈은 난놈이다. 온전히 기억을 못하더라도 나머지를 추측하여 얼추 맞추는 두뇌라니.


"야 이 놈아, 필요 없으면 필요 없다고 말을 했어야 내가 여기까지 힘들게 안 오지.."

"뭐 이참에 영감님 얼굴 한번더 뵙고 좋죠."

"..."


이민철은 최석정을 지그시 노려보며 입술을 잘근 씹었다. 아무래도 괜한 걸음 한 것이 아깝고 억울했다. 마흔다섯은 예전처럼 몸이 가볍지만은 않아서, 하루 걸러 도성에서 백봉산으로 왔다갔다 하는 일도 몸이 죽어나는 기분이었다.


"근데 전하는 이 중성배열은 어디서 나신 거래요? 혹시나 싶어서 해례에 있나 보니 여기에도 없는데."

"뭐? 거기에도 없어?"


그제야 이민철의 분노도 조금 누그러진다. 최석정은 해례를 확인하고 싶어서 왕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듣고 보니 자신도 어째 조금 이상하다. 도대체 왕은 저런 모음배열이 어디서 나서 최석정에게 보여준 것일까. 온갖 산학과 천체, 심지어는 주술까지도 배워야 하는 관상감에서도, 또 조부 최명길의 영향으로 주학에 파고드는 최석정 조차도 본 적이 없는 것인 만큼 호기심이 슬며시 동한다.


"가만, 여기 해례에 암시가 되어 있나?"


최석정은 손가락으로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해례를 차근차근 들추었다. 그런데 제자해는 세련된 해서와는 너무도 비교될 만큼 투박하게, 마치 깍두기를 썰어놓은 듯한 서체로 언문의 자모음을 설명한다. ㄱ자도, ㄴ자도, ㅅ자도 마치 깍두기를 잘라내어 각만 돌리는 것처럼 회전하는 모양새다. 최석정은 두 눈동자가 한바퀴 돌아가는 듯한 묘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영감님, 뭔가 이상해요."

"이상하긴 뭐가?"

"글자들이 회전을 하잖아요."

"뭐? 회전을 해? 너 돌았냐? 글자들이 무슨 회전을 해? 여막살이 하다보니 헛것이 보이냐, 눈앞이 핑핑 도냐...글자가 돌은 게 아니라 네가 돌은 게지."


이민철은 어이가 없어 혀를 찼다. 여막살이 2년, 3년만 해도 폐인된다더니, 가뜩이나 머리가 너무 좋아서 탈인 젊은 것이 헤까닥 돌았다. 그런 이민철의 반응에 최석정은 억울함을 느끼며 ㄱ자 하나를 종이에 쓰고 빙그르르 돌리며 설명했다.


"아니..제가 미친 게 아니라..보세요 정말..여기 기역이요, 니은, 시옷으로 돌아가잖아요. 글자 각이 똑같아요. 이건 일부러 회전을 시키는 거라구요."

"어?"


이민철이 두눈을 깜빡였다.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글자들이 회전한다? ㄱ이 ㄴ이 되고, 다시 ㅅ이 된다..순간 이민철의 머리에서 자신도 보았던 중성의 십자배열이 번개처럼 번쩍였다. 그 중성들도 열십十자로 배열되어 한바퀴를 빙빙 돌았다.


"가만, 그러면.."


최석정은 단숨에 책장들을 휙휙 넘겨서 모음의 배열을 찾아냈다.


ㆍ,ㅡ,ㅣ, ㅗ,ㅏ,ㅜ,ㅓ,ㅛ,ㅑ,ㅠ,ㅕ...


해례에선 각각의 모음을 순서대로 정리하여 설명을 하였다. 그리고 또한 천수, 지수 및 각각 숫자를 매겨놓았다. 그리고 그 순서대로 최석정의 손가락끝이 단숨에 한바퀴, 또 거꾸로 한바퀴를 돌았다. 최석정의 두눈이 반짝였다.


"영감님, 전하께 한가지 물건을 좀 준비해달라고 부탁해야겠어요. 재미있는 걸 보여드리겠다구요."

"재미있는 거?"

"같이..만드실래요? 관상감에 계시니 지남철이나 자철 다루는 장인도 좀 아실테고.."


최석정의 두눈이 의미심장하게 반짝였다. 이민철의 두눈에도 똑같은 빛이 묻어났다. 금맥을 발견한 사람들의 눈빛보다도 순수한 광기였다. 최석정은 이민철의 두눈에서 자신과 똑같은 감정을 읽어내곤 이내 붓을 들어 왕에게 올리는 서찰을 쓰기 시작했다.



서인인 평안도 관찰사 윤계는 남인인 오시수가 원접사가 되어 청사에 당도한 것을 보고 떫은 감을 맛본 표정이 되었다. 오시수의 일행으로는 역관 박정신, 김기문, 그리고 변이보가 눈에 들어왔다.


"상피제(친족간엔 같은 관청이나 관직에 종사할 수 없게 하는 제도)의 규율에 어긋나지 않나? 듣자하니 역관 박정신과 김기문은 사돈간이라던데."


변이보야 어차피 서인에게 줄을 대는 변승업의 조카이고, 윤계에겐 껄끄러울 것도 없었다. 하지만 김기문과 박정신은 달랐다. 특히 박정신은 완전히 남인 쪽은 아니지만 남인들과도 약간의 인연을 맺었다. 이미 윤계에게 서인들이 보낸 서찰엔 역관들의 혈연관계가 낱낱이 적혀 있었다. 시국이 시국이고, 사안이 사안인 만큼 역관들의 면면에도 신경을 곤두세울 때였다.


"그러는 여기 변주부도 2년 전에 제 삼촌과 함께 사행에 동참했었지요. 사돈보다 더 가까운 친족인데 말입니다."


박정신이 이내 물귀신처럼 변이보를 물고 늘어졌다. 윤계와 눈길이 마주친 변이보의 표정이 당혹감이 어렸다.


"아니 저는 왜.."

"아니..상피제를 거론하시기에..내 조카사위의 조카와 함께 사신을 맞는 것과, 변누구가 조카를 데리고 사행을 떠나는 것과 어느 쪽이 더 문제가 되나 한번 비교해 보자고."

"..."

"뭐, 정히 문제 삼고 싶으시면, 바로 조정에 파발을 올리시든가요. 저 대신에 당상역관이신 장현 영감이 오실텐데 말이지요."

"뭐라.."


대면하자마자 서로 껄끄럽게 신경전이 오간다. 윤계는 복숭아를 한입 가득 베어물었다가 벌레를 삼킨 기분으로 박정신을 쏘아보았다. 차라리 변승업이 왔으면 좋을 터인데 박정신이 왔다. 그나마도 장현이란 골수 남인이 오는 것보다는 낫다고 애써 위안을 삼는 게 전부였다.


"자자, 그만들 싸우고 사신단은 언제 도착한다는가."


오시수가 박정신의 언변에 비웃듯이 윤계를 쳐다보며 물었다. 윤계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어쨋거나 자신보다 반품계가 높다. 게다가 원접사로 왔다. 불편하지만 예를 차려야만 했다.


"커흠. 내일 사시巳時(아침9시~11시)에 도착한다는 전갈이 왔소이다. 거처를 마련해두었으니 짐이나 푸시지요."


윤계가 답하고는 자신의 부관에게 눈짓하고 홱 돌아섰다. 그 모습을 보며 박정신은 김기문에게 나직이 귓속말로 소근거렸다.


"사돈조카와 함께 발령받은 걸 갖고도 저 난린데, 우리 조카사위까지 따라온 것까지 알면 난리가 나겠구먼."

"어차피 제 삼촌은 정식으로 일하러 오는 것도 아니고, 골동품 사러 오는 건데요 뭐."

"어쨌거나 관찰사 눈에 띄면 곤란하겠으이."


박정신은 입맛을 쩝 다셨다. 그나마 영랑이 출산 및 육아로 정신이 없어서 따라올 엄두를 못내어 다행이지, 그 와중에도 한번이라도 더 청국 사람들을 봐야 청어실력이 는다고 제 남편을 등떠미는 통에 결국 지남이 따로 따라와야 했다. 하지만 영랑의 속내가 정말로 남편의 청어실력을 키우려는 건 아닐 터였다. 청국 사신단과 상인들이 가져올 온갖 진귀한 물건들을 사달라고 잔뜩 졸라대었을 터였다.


안 그래도 조선엔 온갖 골동품 거래가 횡행한다. 고관대작들은 물론 재물을 축적한 중인들, 특히 역관들이 남송 때의 서화는 물론 백제 때의 와연(검은 기와처럼 구운 벼루), 심지어는 왜에서 건너온 예쁜 잔들까지 있는 대로 수집하여 자신들의 재력을 과시하는 풍습이 있었다.


반면 가세가 기운 양반들은 입에 풀칠을 하겠다고, 눈물을 머금고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골동품을 팔아치우기도 한다. 그 와중에서 거간꾼과 감평사가 활개를 치며 각종 이윤을 착복한다. 심지어는 각종 위작들도 판을 친다. 가짜 청동그릇을 만들어서 소금물과 붕사, 망사, 답반, 한수석 등으로 부식을 시켜 감쪽같이 골동품으로 둔갑시켜 눈뜬 소경들을 등쳐 먹는다. 그러다 보니 아예 북경 해왕촌(유리창)에서 직접 건너온 물건을 사겠다고 역관을 통해 거래하는 경우도 많다. 지남이 따라오는 것도 기실은 청국 역관과 상인들이 가져온 물건을 사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걱정이네요. 삼촌이 워낙 순진해서 또 속아서 물건을 살텐데..지난번에도 은 열냥을 주고 마원의 그림이라고 사온 게 가짜였잖아요. 짠돌이 삼촌이 억울해서 몇날며칠 잠도 못잤다대잖아요."

"뭐 그러다 물건 보는 안목을 키우는 거지.."


박정신이 빙그레 웃었다. 평소에는 돈푼에 벌벌 떠는 지남이 자신도 골동품 좀 팔아보겠다고 사온 것이 가짜였다. 진짜와 가짜도 구별 못하냐고 영랑에게 잔소리를 한바가지 긁힌 후에, 지남은 어찌나 분한지 잠도 못자고,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선 다시는 골동품 같은 건 안 사겠다고, 또 사면 성을 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그렇다고 또 가짜를 진짜라고 속여팔 위인도 못되어 자나깨나 끙끙 앓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청나라 역관과 상인을 통해 직접 사겠다고 따라나선 것이었다. 아마도 내일 낮이나 의주에 당도할 터였다.



의주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원접사 일행은 날이 밝자마자 용만관 앞으로 나아가서 청국 칙사일행을 기다렸다. 그런데 사시에 온다던 사신단 일행이 도착이 늦어지는 것이었다. 날이 추워 입김이 허옇게 허공에 어릴 정도인데 기다리려니 몹시 고달팠다.


그림자가 점점 짧아지고 해가 머리 위로 뜬다 싶을 때쯤에야 정사, 부사까지 정식으로 갖춰진 사신단이 수백대의 수레를 끌고 다가왔다. 앞의 수십대는 청국에서 숙종에게 보내는 선물을 비롯하여 사신단 행렬의 짐이었지만, 나머지는 텅텅 빈 수레였다. 도둑놈들이 또 조선의 재물을 날로 삼키려고 왔구나 싶어서 오시수의 입맛이 썼다.


그런 사신단 행렬에 낀 장효례가 눈에 들어온다. 또 장효례다. 간혹 비공식적인 일로 사신으로 파견될 때는 장효례가 책임자가 되어 오지만, 이번엔 순전히 대통관(통역관)으로서만 왔다. 일전에 장효례가 도주한 청나라 사람들을 데려가는 임무를 맡고 내려올 때와는 달리 정식으로 격식을 차린 행렬이었다. 정말로, 제사를 지내주려고 온 것이었다.


"세분 칙사분들과 통관분을 모시게 되는 중임을 맡은, 원접사 오시수입니다. 지난번에도 다녀가시더니, 또 오셨군요. 두번이나 제사를 지내주시는 일은 전례에 없던 일이온데.."


오시수는 황제의 인장을 찬 사신단 행렬에게 공손히 허리숙여 예를 표하고는 심중에 꼭꼭 눌러담았던 의문을 꺼내며 말끝을 흐렸다. 청국 사신단의 두눈에 언뜻 비웃음의 눈빛이 어렸다. 제 나라의 왕을 스스로 사대부 취급하는 야만적인 것들...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청국칙사는 다소 흰 눈자위가 보일 정도로 오시수를 무시하듯 내려다보면서 짐짓 변죽을 올리듯이 눈알을 굴리며 답하였다. 그 옆에서 장효례가 조선어로 통역했다.


"황상께서는 귀국의 선대왕이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어, 몹시 애통해 하시면서 정식으로 한번 더 극진하게 제사를 치러주라 하시었다..합니다."


의심어린 오시수의 눈길이 장효례의 눈과 입을 흘낏 쏘아보았다. 장효례가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문다. 자신도 태생은 조선인이라서 그런지, 내심 거북하고 불안한 기색이 있었다. 장효례의 눈길은 오시수를 피해, 자신의 어린시절 죽마고우였던 윤계를 향했다.


"오랜만일세."

"또 왔는가. 하기야 자네 자당을 뵈려면 사신단엔 꼭 껴야겠지."


윤계는 씁쓰레히 웃었다. 어릴 때는 함께 미역도 감고 어울렸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 국적이 다르고 목적도 다른 대면을 했다. 장효례는 뜬금없이 제사를 두번이나 치러주겠다고 조선을 찾아온 청국 사신단에 끼여 있고, 자신은 조선의 관리로서, 또 서인의 인물로서 남인인 오시수보다 한발 앞서 그 내막을 알아내야 한다. 그러니 지금은 장효례의 비위를 거스르지 말고 잘 구슬려서 내막을 캐야했다.


"연향(연회)을 마련할테니, 일단 여장을 풀고 쉬고들 계시지요. 이따가 유시酉時(오후 5~7시)에 대청에서 모시겠습니다."


원접사 오시수의 안내를 받으며 칙사 일행은 용만관 안으로 들어가서 영조례를 마치고 동서 상방에 자리를 차지하곤 연회를 기다리며, 각자 가져온 짐들을 풀었다. 청국 상인들은 물론, 사신들도 이 기회에 한몫 잡으려고 몇가지 책과 서화 및 도자기들을 챙겨온 터였다. 연경 해왕촌에서 미리 사들인 물목이었다. 장효례는 힐끗 물목들을 쳐다보았다.


해왕촌에서 판매하는 골동품은 태반이 가짜였다. 날로 가짜를 만드는 기술이 발전하여 이제는 어지간한 안목으로는 감별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마도 이들이 챙겨온 물건들 상당수가 가짜일 터였다. 자신도 모르게 오이짠지를 입안 가득 삼킨 표정이 되는 장효례였다.


날이 어둑해질 무렵 원접사 오시수는 대청과 뜨락에 연회를 마련했다. 대청에서 원접사와 관찰사, 그리고 박정신과 같은 역관들이 칙사들을 접대하는 한편, 뜨락엔 의막을 치고 난로를 지피고서 연포갱을 비롯하여 잔치상도 마련했다. 사신단에 합류한 청국상인들까지 배려한 연회였다.


"참, 박첨정, 영랑이는 잘 있는가?"


난 데 없이 영랑의 얘기를 꺼낸 장효례의 질문에 박정신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다. 이 음흉한 영감탱이가 무슨 꿍꿍이로 조카딸의 얘기를 꺼내는지 어쩐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아..잘 있지요. 아주 전도유망한 제 제자한테 시집가서 벌써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서 지지고 볶고..아 글쎄, 북두칠성의 정기를 가뜩 머금은 우물물을 잔뜩 먹고 첫날밤을 지낸 덕인지, 애가 어찌나 똘똘한지...돌도 안된 녀석이 벌써 걸어다니고 말도 하는 게.."


일부러 더 조카손주 자랑을 하는 박정신이었다. 혹시라도 장효례의 심중에 영랑에 대한 흑심이 있었다면 아주 활활 태워버릴 요량이었다. 그런데 자신들끼리 술을 마시던 청국상인 몇이 대청으로도 골동품 몇점을 가져왔다.


"박첨정님을 위해 특별히 챙겨온 당나라 때 골동품입니다. 한번 보시겠습니까?"


순간 박정신이 눈살을 와락 찌푸렸다.


"아니..이건 한눈에도 딱 가짜구만. 이걸 당나라 때 그릇이라 말하면 누가 믿냐 말이외다!"

"당나라 토기 맞대도! 참 말귀를 못 알아들으시네! 이렇게 예스런 문체를 보시오. 요즘 누가 이런 서체를 쓴단 말이오!"

"글쎄..나도 보는 눈이 있다니깐. 당나라든 당나귀든간에 이리 우물정井자인지 본받을효爻자인지에다 이 투박하고 촌스런 서체는 고구려 토기이지 무슨.."


한참 조카손주 자랑을 하던 박정신이 짜증을 내서 하는 말이었다. 흑회색의 토기를 손에 든 청국 상인이 움찔해선 박정신의 눈치를 보며 궁시렁거렸다.


"아니 어쨌든 고구려 토기이면, 당신네들 조상 물건이니 더 잘됐지 뭐..아주 가짜도 아니고요.."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당나라토기라고 속일 때는 언제고."

"어쨌든 당신네 나라 것이잖아요. 살거유, 말거유?"

"아 안산대도! 이런걸 누가 산다고."


박정신이 시큰둥히 대꾸했다. 정식으로 청국사신도 아니고, 사신단에 딸린 하인들이라든지, 상인들과 흥정을 하다 보면 인내심에 한계를 느낄 때가 많았다. 이제 보니 어디서 청동으로 가짜를 만들어 일부러 부식시켜 가져오는 느낌이었다. 워낙 솜씨가 교묘하여 감쪽같이 속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고구려 토기를 당나라 토기로 속여서 팔려고 하다니, 괘씸했다.


고구려토기는 심지어 백제의 토기보다도 인기가 없었다. 신라나 가야보다 실용적인 성격이 강한 백제도 잔에 고리를 만들어 방울을 달아서는 잔이 비면 청명한 방울소리를 내거나 또 물을 잔에 넣어두면 정화가 되는 신비한 매력이 있었다. 반면 고구려토기는 통 기교를 부린 게 없었다. 어쩌다 물결무늬나 톱무늬 정도를 쓱쓱 새겨넣는 게 고작이었다. 워낙 손재주가 없는 건지, 고구려의 토기는 바닥도 평평하고 별다른 멋이 없었다. 게다가 신라토기에 비해서 잘 깨지기까지 한다 했다.


장효례는 입안에 가득 떫은 침이 고이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된 게 조선에선 고구려 토기가 당나라나 한나라 토기보다도 인기가 없는 건지, 엄연히 가짜를 만들어서 일부러 부식시킨 것도 아니고, 진짜라는데도 팔리지가 않아서 억지로 한나라 당나라 토기로 둔갑시켜 팔아야 하는 건지 어이가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이 조선을 욕할 처지도 아니었다. 자신이야말로 조선인 조국을 배반하고 청국의 통역관을 하는 신세이니 그저 입맛을 쓰게 다실 뿐이었다.


"아니..자기네 그릇은 안 사고, 왜 우리네 그릇만 사려 든대?"

"누가 모를까봐! 옆면에 우물정井자인지 본받을효爻자인지가 음각된 걸 보니 보나마나 고구려 사람들이 제사지낸 어느 우물에서 집어온 물건일텐데."


역관들이야말로 골동품에 대한 안목과 자부심이 대단한 자들이다. 사행을 통해 청국을 드나들며 골동품이나 온갖 사치품을 사와서 국내에 팔아서 이문을 챙겼다. 그러다 보니 조선 내에서 팔리는 가짜를 잡아내기 위해서라도, 또 청국 상인들에게 속아 가짜를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골동품을 감별하는 안목은 필수였다.


특히나 청국상인들이 가짜를 만드는 한편 옛날 우물에 쌓인 고구려 토기들을 가져다가 한나라 및 당나라 토기로 둔갑시켜 파는 사실 정도는 익히 알았다. 그냥 솜씨좋게 만든 물건도 아니고, 어디다 제사를 지냈는지 알 수도 없는 물건을 팔려고 드니 괘씸한 것이었다.


"커흠!"


청국상인이 겸연쩍게 고개를 돌렸다. 장효례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제사지낸 물건을 팔려고 하니 인기가 없는 건지, 아니면 고구려 물건이 원래 인기가 없는 건지, 기분이 복잡했다.


그런 장효례의 눈에 대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밀어 자신의 처숙과 조카를 찾는 지남의 순박한 얼굴이 들어왔다.


장효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에 익은 얼굴이다. 일전에 조선의 동궁이 잠행할 때 데리고 왔던 일행이었다. 박정신이야 워낙 노련하고 노회하니 속아넘어가지 않는다 쳐도, 이제 약관을 넘긴 김지남은 다를 터였다. 한눈에도 어리버리한 게 사기치기 딱 좋았다. 그리 미색이 빼어난 영랑을 아내로 맞이한 억세게 재수좋은 놈인 만큼 이 정도 불행은 겪어도 싸다.


"헌데...정말로 왜 제사를 두번 지내는 건가?"


오시수가 볼일을 보러 뒷간을 찾아가자마자 윤계가 은밀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워낙 부어라 마셔라 술마시고 즐기느라 정신이 팔릴 때고 장효례가 다소 취기가 올랐다고 판단해서 쉽게 토설할 거라 계산한 것이었다.


장효례는 조선의 동궁을 얼핏 떠올렸다. 아예 친히 서찰까지 적어주었는데도, 여전히 서인을 몰아내지 못하는 조선이다. 심지어는 왕이 불과 서른넷의 나이에 급서했다. 용이 아니라 지렁이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꿈틀하다가 죽었다.


"애신태친愛臣太親 필위기신必危其身, 인신태귀人臣太貴, 필역주위必易主位.."


갑자기 장효례까 꺼낸 문구에 윤계가 멈칫했다. 총애하는 신하를 지나치게 가까이하면, 반드시 군주의 몸이 위태로워지며, 신하가 지나치게 귀해지면, 반드시 군주의 지위가 위태로워진다...굳어지는 윤계의 얼굴을 보며 장효례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자네도 아는군. 한비자의 애신愛臣편을."

"..."

"자고로 신하가 강하면 군주가 죽는 법. 조선왕이 겨우 서른넷에 죽었으니 신하가 강한 탓이라고 제사나 한번 더 치러주어 조선왕의 권위를 높여주겠다 하시었네."

"..."


윤계는 흠칫하여 장효례를 쳐다보았다. 자신은 슬쩍 물었는데 장효례가 전혀 조심성 없이 큰소리로 답하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박정신은 물론, 김기문, 변이보까지 술잔을 입가로 가져가다 멈칫하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똑똑히 들은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마침 오시수가 볼일을 보러 자리를 비운 것이었다.


"소리 좀 줄.."

"그러게 누가 용을 밟아 지렁이로 만들랬나..아..저기 반가운 얼굴이 보이는군."


장효례는 벌떡 일어서서 걸음을 옮겼다. 김지남이 마침 대청 쪽으로 다가오다 다리가 굳었는지, 자신을 멍청히 쳐다보던 참이었다. 자신들의 대화를 들은 모양이었다.


"오랜만이구먼."

"..."


지남은 자신을 알아본 장효례를 보고 당황했다. 방금 장효례가 했던 말에 확 분노가 치받는 와중에 말을 걸어오니 감정조절이 안될 듯하였다. 용을 밟아 지렁이로 만들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작고한 선대왕도, 그리고 지금의 왕도 결코 그런 조롱거리로 전락해선 안되었다.


"우리 전하께선.."

"아, 내 자네에게만 슬쩍하는 말인데, 이번에 황상께서 친히 제문을 써서 조선왕의 책봉칙서도 함께 내려보내셨는데 말일세. 칙사들에게 조선왕의 자질을 확인하라는 밀명도 내리셨으이."

"네에? 책봉칙서요?"


당혹스런 일이었다. 칙사의 방문 목적이 치제라고만 하였지, 칙서를 가져오는 것이라고는 패문에 밝히지 않은 탓이었다. 지남은 자신이 장효례에게 중요한 사안을 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따지는 것도 잊어버렸다.


"생각보다 좀 빨리 나왔지 않은가. 그나저나 영랑이완 벌써 혼인하여 애가 있다지? 안 그래도 자네 스승이 어찌나 조카손주 자랑을 하던지, 우물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느니, 돌도 안됐는데 벌써 말을 한다느니.."

"..."


장효례는 청국 상인에게로 지남을 데려가며 자못 친근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그래서 말인데, 내 특별히 우물의 정기를 받은 물건을 소개시켜주겠네. 우리 청국 상인이 가져온 물건인데, 상商나라 때 그릇이라네. 좀 부식도 되긴 하였지만, 제법 남성적인 멋이 흐르는 물건이랄까..웬만큼 안목이 있어야만 알아볼 수 있는 물건이지."


장효례는 청국 상인이 박정신에게 팔려다가 실패한 문제의 고구려토기를 안아들어 지남에게 권하였다. 한눈에 보기에도, 마치 싸움만 하던 장수가 아무렇게나 빚은 것처럼 솜씨가 투박한 물건이었다.


"제 내자가 물건을 사려면 일단 스승님께 감정을 받고 사라고 하였는데.."

"쯧쯧...그래서야 언제 안목을 키울텐가. 혼자 물건도 감평하고 해야 안목도 자라는 거지.."


장효례는 혀를 차곤, 지남에게 토기 옆면에 새겨진 우물정井자를 보여주었다.


"자자, 이 우물정井자를 보게나. 우물의 정기를 받았다는 자네 아들처럼 어쩐지 자네를 위해 스스로 발이 달려 찾아온 물건 같지 않나."

"..."


우물의 정기 얘기에 어쩐지 마음이 흔들리는 지남이었다.


"이보게. 자네 이 토기를 어디서 구했는가?"


장효례가 청국상인에게 능글맞은 눈웃음을 보내며 건넨 말이었다.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고, 청국 상인도 장효례가 김지남을 속여 토기를 팔아치우려는 속내를 알아차렸다. 물론 잘 팔리지도 않는 물건을 팔아주면야 고마운 노릇이었다.


"하남성에서 구한 물건이지요. 말도 마십쇼. 황금 두냥이나 주고 샀는데, 여기 조선사람들이 물건 보는 눈이 없어놔서..아 그냥 도로 심양에든 어디든 가져가서 팔까 생각중입지요. "


청국상인도 천연덕스럽게 되받았다. 하남성은 커녕 길림성에서 구했으며, 황금 두냥은 커녕 구리 한냥만 주고 샀다는 사실은 감춘 채로, 입에 침을 바르지도 않고 술술 거짓말을 하는 것이었다. 지남은 어쩐지 혹하는 느낌으로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장 자신이 가져온 돈이 얼마인지 허리춤의 전낭을 더듬는 것이었다. 그틈을 타고 장효례와 상인이 재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역시..순진한 놈이었다.


작가의말

1. 실제로 장효례가 한비자의 애신편을 언급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실록에는 장효례가 강신强臣 발언을 하였다고 오시수가 보고한 것이, 서인들은 무고라고 역관들을 잡아들여 문초 끝에 역관들의 증언을 무위로 돌린데다, 역관들이 뇌물을 바치기 전까지 풀어주지도 않았다고 하니까요. 그래서 소론 일부는 오시수가 아주 없는 말을 하진 않았을 거라 동정하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하지만, 노론 측은 오시수의 무고로 정리했지요. 한비자의 애신편은 제가 상상으로 곁들였습니다. 청나라 때 제왕학으로 사랑받았다는 정황으로 가능할 것 같아서 넣었지요.

 

2. 고구려토기엔 #우물정자가 새겨진 것이 종종 있는데, 광개토대왕의 문양이란 해석도 있고, 특별히 토기를 제작한 가문의 문양이란 해석도 있습니다. 혹은 주술적인 의미로 북두칠성을 뜻하는 문양이란 말도 있구요. 여기서는 광개토대왕까진 가지 않습니다. 그저 고구려토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차용했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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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6

  • 작성자
    Personacon ANU
    작성일
    13.01.08 12:54
    No. 1

    우리나라는 왜이리 실전된 것들이 많을까요?
    뛰어난 관측 기술도, 빼어난 제작 기술도, 찬란한 역사도...
    한글이 변질되기는 했어도 아직까지 활발히 쓰이는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재미있게 읽고 갑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2 수훈
    작성일
    13.01.08 22:16
    No. 2

    은파님의 글에서 옛 선조들의 향기라도 맡을 수 있어서...정말 좋습니다..
    리리플은 꼭 읽어보고 있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97 뚱뚱한멸치
    작성일
    13.01.09 01:35
    No. 3

    재미나게 보고 있습니다
    잘 몰랐던 역사적인 내용도 얻어듣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1.10 21:37
    No. 4

    전쟁을 너무 겪은데다 일제강점까지 당해서 더 아깝죠. 이래저래 자료들이 너무 소실되어서 증명할 만한 것도 증명 못하는 게 많다네요. 특히나 고조선은 물론 그 이전의 환국桓國에 대해서도 증명하기 어려우니까요.

    전 한글 변질된 게 너무 아깝습니다. 되돌리고 싶어요. 컴퓨터 만드는 사람들이 아래아 버튼 하나만 넣어주면 되는 일인데요. 스마트폰도 만드는 시대이니 자판도 좀더 혁신을 이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열십十자 방향으로 화살표를 만들고 중앙에 아래아 버튼 만들어서 누르기만 하면 글자가 만들어지는 방식으로요. 그렇다면 사라진 아래아도 되살아날 확률이 조금은 생기지 않을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1.10 21:39
    No. 5

    수훈님, 고구려토기를 소도구로 쓰려고 자료조사하다가 참 막막하더라구요. 스토리상 필요해서 쓰는 데도 막막하니..;;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7 김은파
    작성일
    13.01.10 21:39
    No. 6

    뚱뚱한 멸치님, 격려 고맙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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