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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님의 서재입니다.

해의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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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파
작품등록일 :
2012.11.19 13:33
최근연재일 :
2017.12.22 23:56
연재수 :
34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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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07 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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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44쪽

해의 그림자 271

DUMMY

배후에 대한 의혹으로 진홍이 허공만 멍하니 바라보는데, 갑자기 장지문너머에서 최석정의 당혹스런 음성이 터져나왔다.


"전하?"


진홍이 흠칫 놀라 장지문을 쳐다보니, 문 오른쪽에서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림자는 머리꼭대기가 길쭉하니 양날개 매미관을 썼는지, 고갯짓에 흔들렸다. 그 뒤로, 민날개 매미관을 쓴 그림자도 쪼르르 뒤따랐다.


"전하!"


굳이 장지문을 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진홍은 두눈을 뎅그렇게 뜨고서 그림자로 비친 매미관을 올려다 보았다. 왕의 낮은 헛기침이 들려왔다.


이미 장지문 건너편의 최석정도 상대가 누군지를 짐작한 모양이었다. 최석정의 목소리도 진홍의 귓전을 때리는데,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지아비의 옥음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어찌 두분이서 여기서 밀담을 나누시오?"

"밀담..."

"밀담이 아니면 무엇이오? 내 이 장지문도 확 젖혀드릴까?"


겨우 한칸너비 툇간을 걸어와서 서온돌 앞에 떡 버티고 서고서, 숙종은 고개를 옆으로 비꼬고 심술궂은 눈초리로 장지문을 흘끗 흘겨보았다. 끄느름한 저녁볕에 비친 왕의 눈자위는 희푸름하니 스산하기까지 했다.


"두분이서 나를 제쳐두고 무슨 역적모의를 하시었소?"

"황공하옵니다, 전하."


숙종의 엄포에 석정은 살짝 당황한 음색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갑자기 툇간에서 왕이 맹렬한 멧돼지처럼 걸어오더니, 자신과 중궁이 이미 장지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화를 하는데도, 그 앞을 떡 가로막고 무섭게 쏘아보는 참이었다.


"배신자들..."


숙종의 볼멘 소리 뒤로 두광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잇따랐다. 난감한지 석정은 볼웃음을 짓고 툇마루를 쳐다보았다. 그림자를 보는 것도 용납지 않을 기세로, 왕은 중궁의 그림자가 비치는 장지문마저 떡하니 가로막은 참이었다.


"전하 귀에 들릴 위험도 감안하고 예서 말씀드렸으니 배신까진 아닌데요."


석정도 쿡쿡거리며 변명했다. 숙종은 툇마루에서 석정의 등줄기를 내려다 보며 골난 눈빛을 지었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두광이 낄낄대며 또 다시 끼여들었다.


"얼른. 전하께서 보시기 전에, 이러셨사옵니다요."

"자넨 그 고자질...아니 쏘개질 좀 하지 말게. 순 상습범 같으니."


석정은 고자질 석자까지 내뱉아놓고서, 두광의 눈치가 보였는지, 눈시울을 찔끔대며 얼른 정정했다. 이미 두광이 석정을 나비눈으로 흘끔대는 참이었다.


"고자..."

"쏘개질로 정정했..."

"제가 쏘개질 상습범이면, 영감은 실랑이질 상습범이죠."

"실랑이질? 내가 언제?"

"반질반질한 얼굴로 은근슬쩍 시비도 잘 따지시잖아요."


두광의 핀잔에, 석정이 인상을 팍 쓰는데, 숙종도 얼른 동조해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가끔 좀 피곤해."

"전하..."

"맞잖은가. 뭐 하나 꽂히면, 이게 옳다, 또 저게 그르다...아주 집요하게 사람 괴롭히더군."

"그...괴롭히는 걸로만 말씀드리자면...제가 아니라 전하께서..."

석정이 약오른 얼굴로 한마디 하는데, 두광이 또 냅다 맞장구를 쳤다.

"그쵸. 쌩이질 하난 천하제일이시죠."

"허? 쌩이질?"


숙종이 눈을 부라리는데도, 두광은 쌓아둔 불만을 이참에 죄다 쏟아낼 참인지, 계속해서 푸념을 해댔다.


"예, 쌩이질요. 전 바빠 죽겠는데, 전하께오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뭐라? 내가 뭘 그렇게 부려먹었다고...""

"대전 월대 쓰레질, 대청마루 걸레질, 터진 목화 바느질, 도련저주지 가위질, 동온돌선 부채질, 서온돌에선 불질, 아 정말..."

"뭐라 씨부렁거리는 거냐."


숙종은 두광을 잡아먹을 기세로 두눈을 부라렸다.


"혀끝에 그 운율이 착착 붙는군. 평소 얼마나 내 흉으로 노래를 불러댔으면."

"무슨요. 에이..."


두광이 손사래를 쳐도 숙종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질 않았다.


"아니래두요...안했사옵니다. 정말요. 안했대두요. 진짠데..."

"그 노래가 증거다."

"노래라뇨...이게 무슨 노래라구요."

"노래가 아니면 뭐냐."


두광이 움찔하여 어깻죽지를 움츠리는데, 장지문 안쪽에서 중궁의 나직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 노래엔 웃음도 희미하게 묻어났다.


"대전월대 쓰레질, 대청마루 걸레질, 터진 목화 바느질, 도련젖지 가위질, 동온돌선 부채질, 서온돌에선 불질, 수랏상에 기미질, 잠행땐 숨바꼭질, 양화당선 먹갈이, 야대청선 등갈이..."


숙종은 금세 눈초리가 누그러져선 피식 웃었다. 오랜만에 중궁의 노랫소리를 듣는 기분이라 좋았다.


"왜...웃으십니까? 화내다가 갑자기?"

"알 것 없다."


갑자기 머쓱해진 얼굴로 숙종은 두광의 질문을 일축했다. 알면서도 물었는지, 두광은 석정과 눈짓을 주고받으며 키득거렸다. 그런 두사람에게 장난스레 눈을 흘기다가도, 숙종은 순식간에 볼웃음을 지웠다.


"중궁에게 용건은 다 끝났소?"

"예, 전하."

"그게 다요?"

"총명한 중궁전하시니, 하나만 말씀드려도 열을 알아들으시겠지요."


석정의 담담한 대답에 숙종은 괜히 웃음이 나왔다. 참으려고 얼른 미간을 찡그렸지만, 제풀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허면 자세한 얘기는 과인하고 합시다."

"예?"

"총명한 중궁과는 달리, 멍충한 과인은 열을 말해도 하나만 알아듣소."


왕이 애써 웃음을 참느라 콧잔등을 잔뜩 찡그리고 하는 말에, 석정은 잔기침이 나왔다. 난처한 낯빛이 되어, 괜히 손끝으로 행의의 주름만 펴는데, 옥음이 또 한번 들렸다.


"하여 하나를 들으면 아홉도 들어야겠소."

"알겠...습니다."


석정은 두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왠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감히 중궁과 독대를 하였으니, 왕도 독기를 품었을 터였다. 헌데 석정이 채 눈을 뜨기도 전에 왕의 곤룡포가 바스락거리며, 겨우 한칸짜리 툇마루를 무섭게 가로질렀다.


"따라오시오."


말보다 발이 먼저 나섰다. 통명전과는 정반대편으로 걸음을 내치고선, 따라오라 말하는 참이었다. 그런 왕의 뒷모습에 석정은 한숨을 삭였다. 스스로 아둔해서 말귀를 못 알아듣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하나를 들으니 나머지 아홉도 따져봐야겠다는 위협처럼 들렸다.


"안 따라오고 뭐 하오?"


숙종은 먼저 동온돌을 지나 양화당 쪽으로 걷다가, 등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이 없어서 의아히 뒤돌아 보았다.


자신을 뒤따라와야 하는데, 제자리에서 오른쪽으로 발끝만 몇번이고 돌린 끝에, 겨우 오른쪽으로 허벅지를 트는 참이었다. 숙종이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 두눈을 깜빡이는데, 석정은 걷는 것도 한쪽 다리가 짧은 듯이 걸음걸이가 뒤틀렸다.


"왜 갑자기 봉충다리요?"

"예?"

"불두덩에 문제라도 있소? 꼭 애 낳은 산모 같소."


이미 중궁이 네번이나 회임하고도, 반산과 난산, 사산을 거듭하던 것을 익히 봤던 탓에, 숙종은 석정의 걸음을 두고 애 낳은 산모 같다는 농을 거침없이 해버렸다. 석정은 겸연쩍은 얼굴이 되어 그저 신음만 흘렸다.


"그게 계속 꿇어엎드..."

"산증이 있어 병가 내신 양반이, 왜 배보다 불두덩에 불이 나셨소?"

"그게..."


석정은 왕의 눈치가 보여 진땀을 뻘뻘 흘렸다. 토씨 하나라도 숨길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왕에게 곧이곧대로 보고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자신을 압박하는 왕의 태도에 묘하게 기분이 이지러졌다. 어쩐지 왕의 말투가 평소보다 조급했다.


"양화당에 이르면 아뢰겠습니다."

"그 다리로 걸을 수나 있겠소?"


숙종은 석정의 다리를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눈길에서 석정에 대한 염려가 낙숫물처럼 뚝뚝 떨어졌다. 음색에도 걱정이 짙었다. 두광이 등뒤에서 종종걸음으로 뒤따르다 종알종알 지껄였다.


"와...똑같이 양화당까진데...소인한텐 무거운 궤안도 옮기게 하셔놓고 역정만 해대시고...영감한텐 걱정만 해주시고...너무 하십니다."

"뭐? 너무해?"

"순 차별, 차별, 차별..."

"네놈은 두다리가 멀쩡하잖느냐."

"두손은 엄청 문드러졌는데요. 부채질 하느라."


두광은 보란듯이 두손을 펴보였다. 샘이 나서 자꾸만 따져드는 참이었다. 그런 암상궂은 태도에, 숙종은 험상궂은 얼굴로 버럭 소리질렀다. 이미 두광의 엉덩이라도 걷어찰 기세였다.


"야 이놈아! 그럼 네놈 다리도 뭉개주랴? 그뒤에 네놈 걱정도 해주마!"

"저, 전하...!"


두광은 뒤로 풀쩍 뛰어 석정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그 등뒤로 슬쩍 몸을 피했다. 상전이 그악스런 눈길로 길길이 날뛰니, 이럴 때는 석정의 등뒤로 숨는 게 나았다. 두광이 소맷부리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몸이 더욱 뒤로 뒤뚱 기울어서, 석정도 덩달아 손끝을 허우적거렸다.


"이 사람..."

"살려주세요, 영감..."

"저, 저..."


숙종은 울화를 삭이질 못하고 두광을 가리키며 손가락끝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묘한 눈빛이 되어선, 석정 뒤에 숨은 두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눈길이 석정의 소맷자락으로 내려갔다. 두광이 있는 힘껏 그러쥔 탓에, 석정의 소맷자락이 한껏 늘어나버렸다.


"손 문드러졌다는 놈이..."

"예? 예에?"

"그게 네놈과 사부의 차이다. 내 차별이 아니라."


상전의 짤막한 한마디에, 두광은 벙찐 얼굴이 되어 자신의 손끝을 보았다. 왕의 역정이 무서워서 석정의 소매를 죽어라고 움켜쥐고 최석정의 등짝에 숨어 버티는 참이었다.

하지만 두광은 그런 자신의 손끝보다, 손끝에 힘주느라 더 희뜩해진 속손톱이 더 눈에 띄었다. 두광의 손에서 유일하게 하얀 물건이었다. 나머지는 온갖 잡일로 샅샅이 우그러지고, 마디마디 불거져서 꼭 북두갈고리 같았다.


"사부 등짝이 그리 좋더냐? 그러면서 강샘은."


숙종의 농도 두광의 귓결엔 들리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눈동자가 흔들리며, 그저 젖혀진 석정의 소맷부리 아래로 잘록한 손회목手腕이, 거기 달린 희고 고운 손만 눈에 들어왔다.


니산에서 워낙 서둘러 돌아오느라 말고삐를 한참 쥐었다 놓았다 한 탓에 손가락이 퉁퉁 붓긴 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고왔다. 오른쪽 중지와 약지의 첫째마디가 다소 울퉁불퉁한 것 빼곤, 손등에는 상처 하나 없었다.


누구는 앉아서 붓만 쥐고, 누구는 싸락비에, 부채에, 바늘에...두광은 괜히 입안이 시금털털했다. 자신보다 터울이 열두살도 넘게 지는 사람한테 시샘을 느낄 일이 아닌데도, 알면서도 질투가 났다. 궁정宮廷에 속한 자신이 이럴 진대, 저 치열한 조정朝廷에서 녹을 먹는 신료들은 보면서 어떤 기분일까, 왠지 알 것도 같았다.


"어?"


무심코 뜰어귀 앞을 돌아보던 두광은 양화당 앞 마당을 삼삼오로 모여 서성이는 신료들을 발견했다. 대여섯발짝만 더 나아가면 월대였다. 신료들 눈에 띄면 좋을 게 없었다.


"전하, 저기 신료들..."

"아, 지겨운 작자들..."


숙종도 미간을 찌푸렸다. 짜증이 나서 자신도 모르게 홧홧한 입김을 내뿜었다. 괜히 신료들을 쓸데없이 마주치고 싶진 않았다. 지금은 최석정까지 있었다. 숙종은 얼른 모퉁이로 바짝 붙어 몸을 숨기면서, 뒤따르는 최석정을 돌아보고 손짓했다.


그럴 것도 없이, 석정은 불두덩 통증 탓에 걸음이 느려서, 아직도 걸음이 동온돌 앞이었다. 신료들의 눈에 띌 리도 없었다. 석정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뒷목을 긁적였다. 그런 석정을 쳐다보며, 숙종은 웃을 듯 말 듯 묘한 표정으로 웃었다. 곁눈으로 두광을 보며 염탐을 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너 나가서 정탐 좀 하고 오너라."

"예에? 정탐요?"

"무슨 작당을 하고 몰려왔는지, 알아오란 말이다."

"또, 또 염탐질에 하리질까지 시키시게요?"


두광의 푸념에 숙종은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아까부터 왜 자꾸 질질타령이냐? 질질 짜게 만들어주랴?"

"아...갑니다요. 그냥 게서 들으셔도 들리겠구만..."

"이놈이...시키는대로 하지 않고?"

"아...요즘 왜 이리 입이 거칠어지셨는지..."


궁시렁대면서도, 두광은 상전이 시키는대로 양화당 앞으로 나아갔다. 신료들에게 들킬세라, 숙종은 더욱 동온돌 바깥기둥에 몸을 붙이고 석정을 돌아보았다.


"그새 어딜 다녀온 게요?"


두광더러 신료들의 얘길 훔쳐듣고 오라더니, 숙종은 석정더런 병가 동안의 일을 물었다. 일부러 두광을 떼어놓을 겸, 신료들의 용건도 대비할 겸 염탐을 내보낸 모양이었다. 석정은 왕과 단둘이 된 부담에 등골이 괜히 후끈해졌다.


"얼른 말하시오."


왕의 성마른 독촉에, 석정은 쓴웃음을 짓고 입을 열었다.


"니산에서 윤증을 만나고 왔습니다."

"윤증을? 그자는 어이하여?"

"그게..."


석정이 머뭇대자, 숙종은 눈시울을 실그러뜨렸다. 일전에도 윤증을 부르니, 윤증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한사코 마다한 일이 생각났다.


"조정에 또 부르려고 한 게요?"

"아닙니다."

"아니라? 허면?"

"그..."

"허면?"

"그...강아지 일로 다녀왔습니다."


석정은 머뭇대다 대답했다. 어차피 그 일을 고하려고 급히 입궁한 참이었다. 입이 쉽게 안 떨어져서 문제지, 사실은 보고를 미룰 수도 없는 사안이었다. 그런 석정의 대답이 너무 뜻밖인지, 숙종은 두눈을 깜빡였다.


"뭐? 그 강아지?"


왕의 눈썹이 꿈틀했다. 석정은 강아지로 통용되는 것이 왠지 우습긴 했지만, 웃음을 내진 않았다. 저 앞에 신료들까지, 아마도 민유중이나 민정중 둘 중 하나는 와 있을테니, 그저 조심스러웠다.


"예, 전하."

"그 강아지가 윤증과 무슨 관계가 있다고?"


이번에도 숙종은 반문이 빨랐다. 말투 자체가 며칠새 빨라졌다. 점점 보채고, 자꾸 다그치고, 그렇게 곱살끼는 왕의 태도가 불안했다. 석정은 일부러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일전에...윤증의 처조카와 김석하가 함께 민씨집안에 쫓긴 적이 있습니다."

"윤증의 처조카와 김석하가...?"

"예, 하여 그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러 니산에 다녀..."

"무슨 일로?"


또 말이 끊겼다. 석정은 자신의 말을 끝까지 못 기다려주고 자꾸만 더 독촉하는 왕의 조급증에 숨이 가빠질 지경이었다. 폭주하는 왕의 말에 같이 올라탈 필요는 없었다.


"무슨 일로?"

"심증만 있을 뿐입니다."

"심증?"

"예, 더 알아보자면, 김석하의 얘길 더 들어봐야 하는데...김석하는 어찌 되었습니까?"


석정의 말투는 느긋했고, 또 느슨했다. 그래서 숙종은 더 답답했다. 며칠 말미를 얻어 니산에 다녀오더니, 사람이 해이해진 건지...미치도록 답답했다. 하지만 거칠어진 숨을 몇번이고 골라내는 새에 그 사나워진 숨결도 느슨하게, 또 느긋하게 늘어졌다.


"그걸 이제 묻소?"

"어찌...되었습니까?"


석정은 김석하가 잘못될 거란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같이 다니면서 느꼈지만, 김석하하고 있으면 목숨이 아홉개가 된 기분이었다. 진천이 불바다가 되었을 때도, 김석하가 자신을 구출해냈다. 그 자욱한 연기, 매캐한 냄새 말고는 아무 것도 기억나지 않는 그곳에서, 자신을 찾아내고, 구해냈다. 그 뒤로도 숱한 고비마다, 그 위험했던 고빗사위에서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주고, 등을 지켜주던 녀석이라 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게..."


이번엔 왕이 대답을 머뭇거린다. 석정은 의아히 왕의 손끝을 내려다 보았다. 생채기 하나 없는 손끝이 쭈뼛쭈뼛 팔죽지에 닿더니, 슬쩍슬쩍 문질렀다.


"전하?"


설마 잘못 된 건 아니냐고, 그리 묻는 것도 석정은 겁이 났다. 성질 급한 왕이 대답을 미루는 모습이 어쩐지 불안했다. 석하에게 먼저 들렀어야 했나. 갑자기 왕에게 여쭈어 놓고도 그 대답을 듣기가 두려워졌다. 석정은 자신도 모르게 어깻죽지가 움츠러들었다.


"살았소. 그런데 죽었소."


살았다는 말에 일단 마음이 놓였다가, 석정은 도로 철렁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살았는데, 죽었다니? 살았다 죽어버렸다는 얘긴가. 죽다 살아났다는 얘긴가.


"무슨..."

"산송장 같다지."

"산...송장요?"


일단 죽진 않았다는 얘기처럼 들렸다. 석정은 귀가 흔들리는 기분으로, 애써 정신을 차렸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말귀를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왕의 성미가 더 급해진 탓인지, 자신의 말이 두미가 뒤엉킨 건지.


"눈을 뜨기 무섭게 눈을 감고, 자고, 또 자고...그래서 못 자고, 또 못 자고...잠을 자도 자는 게 아니라던가..."

"예?"

"나도 모르겠소. 뭐가 문젠지. 병판 말론 그러다 나을 거라 하던데..."

숙종의 말을 듣고, 석정은 묘한 표정이 되어 조심스레 대꾸했다.

"귀엽鬼魘...인 것같습니다."

"귀...엽?"

"가위눌림...말입니다."

"가위...눌림?"


이제는 왕이 석정의 말귀를 못 알아들은 듯이 자꾸 머뭇머뭇 되물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실체가 없는 귀신에 잠식당해 반송장이 되는, 그런 괴상한 이야길 왕이 알 리가 없었다. 석정자신도 한번도 귀신은 두눈으로 직접 보질 못했다. 그저 가위에 눌려 옴짝달싹 못하는 김석하를 보았을 뿐이었다.


"예, 근처에 신당이나 무덤이 있으면 가위눌림이 심해지고, 하루종일 자다깨다만 반복하다, 심지어는 가사상태에 빠진다 합니다."

"가사상태...? 허면 그러다 낫는다는 건가?"

"그게...김석하는 좀 특이한 괴질이라, 누가 깨워줘야 되는데...그 깨운 사람에게 귀엽이 옮아가서...주변에서도 섣불리 깨우려 드는 이가 없지요..."

"별 해괴한 얘길 다 들어보는군."


숙종은 헛웃음을 흘렸다. 믿고 싶지 않았다.


"중독이라지 않았나? 어찌 그런 괴질에..."

"신도 직접 겪어보지 못해서...더는 드릴 말씀이..."


석정의 말에, 숙종은 턱을 괴고 통명전 뒷뜰을 서성였다. 동온돌 봉창이 보이긴 하지만, 신료들의 눈에 띌세라 뒤쪽으로만 돌아다니는 참이었다. 두광이 신료들에게 들키든 안 들키든 최대한 오래 버텨주길 바랄 뿐이었다.


"그러다 낫는다...일부러 안 깨우는 건가?"


숙종은 혼자만의 생각에 곰곰 잠겨 혼잣말을 했다. 석정으로선 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예?"

"벌써 닷새가 지났는데, 잠만 잔다 하니...일부러 안 깨우는 모양이오."

"무슨..."

"김석주라면 그럴 만도 하오."

"설마요..."


석정은 질린 기색으로 대꾸했다. 고개를 가로젓지도 못할 만큼 뒷목이 뻣뻣해져 왔다. 생각만으로도 무서운 얘기였다. 일부러 안 깨운다니...석정은 겨우 도리질을 했다.


"그럴 리 없습니다. 그 김석주가 끔찍이도 아끼는 아운데..."

"그러니 하는 말이오. 그저 남이면, 진작 베어낼 것을, 아끼는 족제니까, 다리를 부러뜨려 주저앉혀서, 자기 곁에 붙들어맬, 그런 위인이오. 내가 아는 김석주는."


확신어린 왕의 말투에, 석정은 숨이 턱 막혔다. 가위에 눌려 고통스러워 하는 족제를, 일부러 깨우지 않고 곁에 붙들어 맨다고? 다리를 부러뜨려 곁에 둔다고? 어떻게 그런 발상이 가능한 건지, 왕의 발언이 너무도 충격이었다. 그만큼 왕이 김석주를 잘 아는 건지, 아니면 왕도 김석주와 똑같은 부류인 건지.


"성품의 문제일까요, 집착의 문제일까요."

"둘 다 아니겠소?"

"둘다...허면...전하께선...제비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못 도망가게 곁에 두실 겁니까?"

"글쎄...고작 제비라면야..."

"허면, 왕비전하라면요..."

"왕비?"

"예, 전하."

"무슨 그런 물음을..."


석정의 거침 없는 질문이 못마땅하여, 숙종은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하지만 버럭 성을 내기엔 어쩐지 가슴 한켠이 켕겨서, 그저 입맛만 쓰게 다셨다.


"그건 왜 묻소?"

"전하의 대답여하에 따라서, 제 보고여하도 달라질테니까요."

"사부는...너무 솔직해서 탈이오."


숙종은 석정을 쏘아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 법이라, 석정도 억지로 웃어보이려 했지만, 석정의 입가는 금세 굳어버렸다. 그런 석정을 똑바로 쳐다보며 숙종은 짙은 눈동자로 말했다.


"허나, 사부답지 않게 질문이 틀렸소."

"틀렸...다뇨?"

"그냥 제비 다리가 부러진다면, 고쳐줄 것이오. 다리가 다 나아서, 떠나간다면 고이 보내줄 거요. 허나, 나의 왕비 다리가 부러진다면, 주변 다리를 모조리 분질러서, 똑같이 제자리에 주저앉힐 거요. 아무도 감히 굽어다 볼 수 없게. 아무도 감히 내보내지 못하게."


숙종의 발언은 스산하다 못해 살벌했다. 그저 뜰어귀까지만 퍼지는 소리가 아니라, 한줄기 칼날처럼, 그대로 뻗어선, 두광을 앞세워 통명전 뒷뜰로 숙종을 찾아들던 김수항, 민정중, 민유중, 김석주의 귓등도 그대로 관통했다.


"아, 들으셨소들? 결코 빈말이 아니오."


숙종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곁눈만 주고서 차갑게 물었다. 왕과 석정의 독대를 눈치채고 두광을 앞세워 들이닥치던 신료들은 그 자리에서 가슴이 섬뜩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신들은 그저 대신과 독대를 하시는 것이 염려되어..."


석주가 어색한 미소로 화답하는 순간, 두광이 자라목이 되어 곁눈으로 석주를 보았다. 그 눈길에 원망이 뚝뚝 묻어나는 것이, 여기 이 귀밝은 양반만 없었어도...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김석주가 운을 떼자마자, 김수항도 자못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품하였다.


"예, 전하. 어찌 전하께서 중신도 아닌 대신과 독대를 하시옵니까. 전하께선 문무백관의 주군이시지, 한 신하만의 주군이 아니십니다."

"독대는 전하께서 바른 정치를 펴는 방도가 아닌 줄로 사료되옵니다. 만백성을 굽어보는 전하께서 고작 신하 한사람의 눈으로, 한사람의 손으로만 정치를 하신다면, 어찌 만천하의 이치를 두루 펼 수 있겠습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숙종은 신료들 넷이서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고 하는 말에,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홱 틀었다. 이제는 곁눈으로도 신료들의 얼굴을 보기가 싫었다. 역겨웠다. 요즘들어 이자들이 귀따갑게 해대는 말이라곤 독대는 아니 된다, 대로의 억울함을 풀어달라...이토록 편협한 작자들이 자신에게 형평을 논하는 것이 어쩐지 역겨웠다.


"대신? 누가 대신이란 말인가? 말이 당상이지, 관직은 여태 행行전한으로 준직準職(당하관의 최고직급으로 당상관이 되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관직)을 벗어나지 못했건만. 더군다나 홍만종의 일로 사직소에 병가까지 내고 쉬고 있는 게, 영락 없는 환자요 환자."


숙종은 석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얄궂게 말했다. 그러자 석주가 입을 열었다.


"하여 군직으로라도 정3품직에 올리자고 이미 신이 주청을 드렸사온데..."

"군직? 아직 과인이 가납지도 않았는데, 벌써 대신 운운하며 독대는 아니 된다, 그 호들갑들이오?"

"하오나 전하, 최석정은 이미 당상품계를 받았습니다. 군직에 붙여서라도 당상관직을 수여하는 게 마땅하고, 또한 그 또한 대신의 예우로..."

"그래서 독대는 아니 된다? 그 말이오?"


숙종은 석주를 보며 차갑게 비웃었다.


"중궁전하 납시오!"


갑자기 들리는 내관의 선창에 신료들은 일제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방금 자신들이 김두광을 앞세워서 통명전 뒷뜰로 들이닥쳤다. 헌데 저 뒷뜰에서 중궁의 행차를 알리는 선창이라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고개를 돌리니, 중궁이 좀더 안쪽에서 쥘부채로 얼굴을 가리고서, 궁인들과 내동까지 대동하고 사뿐사뿐 걸어오는 참이었다. 부채에 눈밑이 가려져 얼굴을 볼 수도 없을 뿐더러, 감히 마주쳐서도 안되는 귀한 옥안이었다. 신료들은 중궁의 행차를 확인하자마자 급히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했다. 헌데 중궁의 고운 옥음이 그들의 귓불을 긁었다.


"독대라 하셨소?"

"왜 물어보시는지요."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민정중이 다소 반항조로 되물었다. 고개를 숙이긴 하였으나, 마음마저 숙일 수는 없는 탓이었다.


"무엇이 독대인지, 정확히 알아야, 조심할 게 아닙니까?"

"예, 그걸 모른다는 건 어불성설..."

"최석정은 정3품이지만 아직 준직을 면치 못했습니다. 준직을 면치 못했으니 당상이지만 대신은 아니지요. 이런 전하의 논리에 무리가 있습니까?"

"하오나 품계가 당상인데, 어찌 대신이 아니라 우기십니까?"

"죽은 원로는 당상품계였지만, 누가 그를 대신이라 여겼습니까?"

"하오나..."


김수항은 반박을 하려다 말문이 막혔다. 왕이나 중궁이나, 한쌍의 원앙처럼 자신들에게 한마디도 지질 않으니, 속이 홧홧했다.


"경들도 최전한을 대신이라 여기지 않으면서, 어찌 이럴 때만 독대 타령입니까? 최석정은 주상전하가 아닌 제가 보자고 했습니다. 뭐 잘못되었습니까?"


뜻밖의 말에 대신들은 벙찐 얼굴이 되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최석정이 통명전 뒷뜰로 들어갔다는 내관 한명의 귀띔을 받아서 달려온 자리였다. 헌데 갑자기 중궁이 나와선, 독대를 한 건 왕이 아니라 중궁 자신이라 거짓말을 하는 참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민정중은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중궁전하께서 최석정을 만나보셨다구요?"

"그렇습니다."

"허...내외유별內外有別한데 어인 일로 만나셨단 말입니까. 그럴 일이 있기나 하십니까?"

"허면 상하유별上下有別인데 경들은 어찌 감히 대내大內(왕의 침전 근처)를 범했단 말이오? 그것도 내궁의 후원을?"

"그...그건..."


추상 같은 중궁의 일갈에, 신료들은 흠칫해서 발치를 내려다 보았다. 이미 그들의 발길은 모두 뒷뜰로 들어온 상태였다. 그것도 편전이나 양화당 뒤가 아니라, 중궁의 거처인 통명전의 뒷뜰이니 문제였다.


"그리고, 최석정을 만난 일은, 내 숙부님께 정음正音에 관해 배움을 청했는데, 숙부님이 최석정과 함께 들른다 하셨다가, 늦어지신 탓입니다. 아니 그렇습니까, 숙부님?"


진홍은 연당쪽을 돌아보며 목청을 돋웠다. 그러자 모퉁이에서 나직한 헛기침이 들리더니, 홍단령 차림의 김만중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김수항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등뒤의 민정중을 돌아보았다. 민정중 역시 황당한 얼굴이 되어 아우 민유중을 돌아보는 참이었다. 김만중도 자신들을 배신하고 조카 편에 선 모양이었다. 이럴 때 왕과 최석정의 독대를 덮어주는 짓이라니.


"예제학(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어찌..."

"어찌 이런 말도 안되는 일에 동조를..."

"이게 말이 되는가? 고작 더 배울 것도 가르칠 것도 없는 언문 때문에 최석정과 함께 중궁전하를 배알하다니?"


김수항을 비롯해서, 민정중, 민유중이 한마디씩 따지고 들었다. 하지만 김만중은 그저 코웃음을 치고 대꾸도 없었다. 그 와중에도 중궁은 차갑게 그들을 질책했다.


"고작 언문이라? 정음正音입니다. 정음은 곧 칠조七調요, 삼극三極이요 이기二氣요, 이십팔숙二十八宿이니...이는 곧 음악이요, 주역이요, 의술이요, 천문이니...그 배움이 무궁무진한 법...어찌 더 배울 게 없다고 단언하십니까? 그게, 소위 학문을 하는 자의 태도입니까?"

"옳소. 역시 중궁은 옳은 말만 하는구려."


숙종은 사뭇 동조하는 듯이, 고개를 연신 주억거렸다. 그 태도가 마치 '얼쑤' 하고 추임새를 넣는 듯하여, 신료들의 얼굴이 자못 뜨악해졌다. 헌데 얄궂게도 김만중이 자랑스레 한마디 했다.


"그래서 중궁전하께서 사내였으면 큰 가르침을 전할 유현儒賢이 되었을 거라고, 제 형님께서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셨습니다."

"제게도 중궁전하 자랑을 하셨습니다."


석정도 거들었다. 그러자 신료들의 안색이 더욱 험악해졌다. 이럴 때면 꼭 끼여들어 반지랍게 보태는 석정의 모습이 그들 눈엔 밉살스럽기 그지 없었다.


"이보게! 지금 누구 땜에...!"

"감히 내궁에 발을 들였으니, 태학에서 알면 유생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날 걸세."

"이만 물러가서 자중자애自重自愛 하게나."


신료들이 한마디씩 석정을 꾸짖는 동안 김석주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침묵하는 대신, 차갑게 비웃는 눈초리로 석정을 쏘아보는 참이었다. 이젠 왕과는 독대는 꿈도 꾸지 말라는 경고의 서슬이 시퍼렇게 번뜩였다.


"가만, 그전에 최전한께서 제 질문에 답해주시겠습니까?"

"예?"

"준직을 거치지 않은 자 외에, 또 어떤 관리가 독대에 해당하지 않는가요?"


활짝 펼친 홍련 문양 부채살 위로 중궁의 총명한 두눈이 영롱하게 반짝였다. 석정은 차마 눈길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렸다. 헌데 숙종이 얄궂은 미소로 답했다.


"내가 대신 답하리다. 승정원에 몸담은 자는 독대에 해당하지 않소."

"아...그렇군요."


진홍은 빙그레 웃으며 숙종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하오면 신첩은 이만 물러가겠사옵니다."

"아니 왜 벌써? 나온 김에 바람도 좀 쐬시오."

"괜히 신첩 때문에 전하께서 번독스럽게 되시어...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괜찮소. 내전 후원에 허락도 없이 발을 들인 저들이 예의를 모르는 거지."


부창부수夫唱婦隨라더니, 중궁이고 왕이고, 한마디씩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서로 죽이 너무도 잘 맞았다. 너무 똘똘 뭉쳐서, 한마디 반박조차 더는 찔러볼 수도 없었다. 신료들은 기가 막혀서 입을 벌리고서 그저 치를 떨었다.


"뭣들 하시오? 이만 물러들 가지 않고? 보다시피 여긴 대내이자 내궁의 후원後園이요."


숙종은 보란 듯이 신료들을 비웃으며 손짓했다. 왕의 눈길과 손길을 피해 진홍의 뒷모습을 흘겨보는 신료들의 눈초리가 차갑게 번뜩였다.


우리를...배신해?


물실국혼勿失國婚이라 했다. 국모는 반드시 서인西人 중에서 내야 했다. 하여 같은 서인인 광산김문의 여식을 중궁에 앉혔다. 하지만, 중궁이 자신들의 등에 칼을 꽂았다. 자신들의 뜻을 저버리고, 감히 왕의 편에 섰다. 자신들의 국모가, 서인의 중궁이...감히 왕의 편에 섰다. 이럴 수는 없었다. 이래서는 안되었다.


"어서들 물러가시오!"


왕의 축객령에 찍소리도 못하고서, 그들은 총총걸음으로 물러나왔다. 통명전 동협문을 나와서야, 그들은 비로소 붉은 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이른 새벽 서릿바람에 몸서리를 치면서, 그들은 입을 열어 한마디씩 성토하기 시작했다.


"허...부창부수도 유분수지..."

"어찌 부부가 내외도 않고..."

"그러니 우리 범화가 비판 좀 한 겁니다. 주상께서 너무 중궁전 치마폭에 싸여 있어요."

"하긴, 모름지기 빈양문賓陽門을 사이에 두고 내외가 나뉘어야 하는 것을...어찌..."

"내 듣기로, 세간을 절반만 옮겨다 놓고서, 전하께서 아예 동온돌에서 지내신다더군."

"어찌 그리 망측한 일을...전하께선 어엿한 약관이신데..."

"중궁도 스물이지요."

"허...빈양문은 어쩌고...내외를 해야지, 내외를!"

"내외는 커녕, 그저 중궁의 열두폭 치마폭에 푹 싸여서..."

"부부금슬이 좋아도 탈일세. 정도껏 해야지 원..."

"어리니까 저러지요. 나 원...유치해서 눈뜨고 봐줄 수가 없더이다."


왕과 중궁을 헐뜯던 신료들의 화살은 이내 최석정에게로 향했다.


"난 최석정이 더 밉소. 누가 최명길의 손주 아니랄까봐..."

"아주 전하께 납작 엎드려..."

"찰싹 붙어서겠지...좀전엔 서 있었네."

"어쨌든 말입니다. 그 와중에도 전하 편을 들다뇨?"

"서인이되 서인이 아닌 자입니다."

"봤잖은가. 그 가탈스런 전하께서, 그 가살스런 최석정의 아첨에 정신을 못 차리는 거..."


그런 신료들의 욕지거리는 그대로 통명전 뒷뜰의 숙종과 최석정의 귀에 전해졌다. 이번에도 두광의 입을 통해서였다.


"뭐? 가탈? 또 뭐? 가살?"


숙종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또 다시 석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되물었다. 곱씹었다. 두광은 황망한 기색으로 그저 고개만 숙였다.


"소인도 차마 입에 담기가..."

"앞으로 여기 뒷뜰에서 봐야겠소."


석정은 씁쓸한 기색으로 통명전 뒷뜰의 화계를 올려다 보았다. 아침해가 나무초리에 걸려서, 뒷뜰을 환히 비추는 참이었다.


"하오면 신은 이만 물러가도..."

"내게 더 고할 것이 있소?"


물러가려 윤허를 구하는 석정의 뒷덜미로 왕의 옥음이 닿았다. 석정은 멈칫하며 허공의 붉은 해를 올려다 보았다.


"우선...김석하를 만나보고 싶습니다."

"김석하는 아까 말했잖소. 기면嗜眠, 혹은 가사假死 상태요."

"허나...김석하가 꼭 필요합니다."

"사부..."

"내탕의 열쇠를 제작한 장인을 은밀히 만나보고 싶은데...김석하의 도움이 아니면...누군지 알아내기도 어렵고, 이목을 피하기도 힘듭니다."


석정이 조심스레 의견을 피력하자, 숙종은 미간의 주름을 펴지 않은 채로 천천히 대꾸했다.


"내탕의 열쇠를 제작한 자는 이덕재란 장인이오."

"이덕재...말입니까?"

"그렇소."

"어찌 전하께서 일개 장인의 이름까지..."

"무려 내탕의 열쇠를 바꿔 만든 소은장이 아니오. 그 이름 쯤이야."


숙종은 피식 웃었다. 장고에서의 경험은 숙종에게도 특별했던 탓에, 일부러 열쇠를 제작한 소은장 이름을 알아두었었다.


"이덕재는 왜 만나보려 하는 거요?"


숙종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석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국고의 수납을 재정비하자던 최석정이 갑자기 내탕고 열쇠를 제작한 소은장을 만나려 하다니.


"내탕의 물자가 새는 듯 하여..."

"내탕의 물자가?"

"예, 전하. 왜관 인근 차액을 내탕 차액으로 메꾸고, 또 내탕 차액을 왜관 인근 차액으로 메꾸고...하여 아무래도 정치자금 운용에 이용되는 듯 합니다."


숙종은 미간을 찌푸렸다. 믿기지가 않는 듯이 고개도 천천히 내저었다.


"중궁이 그럴 리가..."

"하여 천신도 이덕재를 만나보려는 것입니다."


석정의 말에, 이번에도 숙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나 이덕재는 수십년을 왕실에 몸바친 자요."

"하여 더 의심이 갑니다. 그만큼 더 왕실과 연이 두터울테니까요."


석정의 음성은 담담하면서도 단호했다. 내탕에 누수가 발생한 만큼, 누구라도 의심을 해야 했다. 중궁이 아니라면, 이덕재를 움직일 법한 누군가를 또 의심을 해야 했다. 그럴 만한 인물은 두 자전慈殿 뿐이었다. 대왕대비 조씨, 대비 김씨...그중 가장 의심이 가는 것은 아무래도 모후인 대비 김씨였다. 유감스럽게도.


"허면...이덕재를 만나게 해주겠소."

"먼저 김석하를 통해 만나보겠습니다. 그 편이 안전합니다."

"오히려 김석하를 만나는 게 더 위험할 거요. 닷새가 넘도록 말 한마디 붙여보기도 힘들다는데."

"그래도...해보겠습니다."


석정은 결연했다. 숙종은 마음이 놓이질 않는 듯한 눈길로 물끄러미 석정을 바라보았다.


"사부가 알아둬야 할 게 있소."

"무얼 말입니까."

"재산루는 평범한 장서각이 아니오."


숙종은 걱정어린 눈빛으로 경고했다.


"압니다."

"또한 지금 사부 곁엔 홍만종도, 강승윤도 없소. 그리고 김석하는 지금 폐인이오."

"그것도...압니다."

"재산루에 심어둔 내 사람조차도 사부를 돕지 못할 거요."

"알겠습니다."

"그래도 가겠소?"

"예, 전하."

"그놈의 고집은. 허면 내일 가시오."

"내일...말입니까?"

"그렇소. 내일이오."


숙종은 야릇한 눈길로 석정을 보며 말했다. 그 의중을 짐작하고 석정은 자신도 모르게 어깻죽지가 굳어졌다. 좀전에 왕과 중궁이 서로 주고 받던 대화가 너무도 의미심장했다. 석정도 당상품계니 독대는 불가하다는 신료들의 말에, 중궁은 독대가 무엇이냐며 천천히 되묻고, 곱씹고 했었다. 마치 그 빠져나갈 방도를 알려주려는 심산처럼.


그리고 이튿날 아침이 되어, 석정은 홍단령을 차려입고 집을 나섰다. 기분이 이상했다. 머릿속은 온통 온갖 의혹으로 가득했다. 모두 심증 뿐인 의심이라, 무엇 하나 명확하게 정리되거나 해결된 것도 없었다.


"여기 갓 입수한 따끈따끈한 초집이오!"

"역대 장원들의 시권만 모아둔 초집이오!"


비루먹은 말을 타고 운종가를 지나다가, 석정은 귓등이 근질근질한 기분이 들었다. 귀젖이라도 나려는지, 머릿니라도 옮았는지, 귀가 너무도 근질근질했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자신의 이름이 자꾸 들리는 듯 했다. 동상전 앞에서 석정은 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여긴 전한 최석정이 쓰는 붓이오!"

"최석정이 이번 별시에 시관으로 나선답니다!"

"최석정을 알면 이번 별시가 보입니다!"

"여기 최석정이 읽던 책이요! 그분 부인이 남편 몰래 내다 판 책이오!"


석정은 고개를 돌려서 동상전을 돌아보았다. 붓이나 벼루는 물론 온갖 잡동사니들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판매하는 가게의 풍경이 어쩐지 눈에 익었다. 붓을 쥔 장사치도 낯이 익었다.


"자, 자, 얼마 없으니 얼른 사세요!"


석정은 어이가 없어서, 콧잔등을 찡그렸다. 일전엔 박태보의 붓이라고 속여서 팔더니, 이젠 또 최석정 자신의 붓이라고 사기를 치다니?


버럭 화를 내려는데, 또 웬 푸른 소맷자락이 불쑥 나타나서 동상전 주인의 손에서 붓을 빼앗아 들었다.


"어디 보자...이번에도 사긴가, 아닌가...어라라?"


박태보는 키득거리며 붓을 뺏아들다가 두눈을 뎅그렇게 떴다. 자기도 모르게 개구리눈이 되었다. 어쩐지 붓이 눈에 익었다.


"이 붓은..."

"아, 나리..."


동상전 주인이 박태보를 알아보고 얼굴을 붉혔다. 그는 박태보가 무슨 말이라도 할까 저어되어 재빨리 선수를 쳤다.


"저 이젠 손 씻었습니다. 진짜진짜 그분 겁니다."

"어어? 어떻게 된 거야?"


박태보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손 안의 붓을 내려다 보는데, 또 다른 푸른 소맷부리가 그 옆을 스치더니, 책 한권을 번쩍 집어들었다.


"여기, 이 책도...장서인을 보면 맞는데."

"뭐야, 진짜로 형수님이 내다파신 건가?"

"아, 제수씨 정말..."


동상전 주인 앞에서 박태보와 오도일마저 당황해서 저마다 콧마루를 긁고, 복장뼈를 두드리고 하는 사이, 손님들이 하나둘씩 다가들었다.


"자, 여기 비장의...!"


신이 나서 목청을 돋워서 쩌렁쩌렁 소리를 지르려다, 동상전 주인은 눈앞에 번개같이 달려드는 시뻘건 짐승을 보았다.


"헉! 이게 뭐야! 이 벌건..."


화들짝 놀라서 소리를 지르다가, 동상전 주인은 턱 밑의 붉은 등짝을 보았다. 시뻘건 홍단령이었다. 등쪽에 흉배를 달았는데, 학이 두마리나 있었다.


"안되네. 이건!"


두팔로 책을 한아름 감싸안고서, 석정은 벌겋게 상기 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동상전 주인을 마주보며, 석정은 난처한 얼굴로 흘겨보았다.


"누구 맘대로...내 책을 내다 파는가?"

"오, 오랜만입니다. 나리..."


동상전 주인이 겸연쩍은 얼굴로 웃었다.


"부, 부인夫人께서..."

"자네..."

"이번엔 사기 아닙니다. 진짭니다."

"나도 아네! 내 책이니!"

"그러니 말씀입니다요. 어, 어디까지나 소인은 정당한 셈을 치르고 샀습니다요."

"뭐? 이건 내 책일세!"

"부, 부인께 샀으니, 이젠 제 책입니다요!"


누가 책을 지키려는 건지, 또 누가 책을 뺏으려는 건지, 얼핏 보면 분간이 되질 않았다. 두팔로 아름드리 책더미를 부둥켜 안고서 석정은 그 마른 몸집으로 바둥거렸다. 동상전 주인이 어떻게든 석정을 떼어내려고 등뒤에서 팔죽지를 잡아빼도, 석정은 고개질까지 도리도리 해댔다.


"안돼! 내 책일세! 못 파네!"

"글쎄, 영감이 사직소 냈다고, 부인께서 파셨대두요."

"내가 도로 사겠네! 내 책이니 나한테 도로 파세!"

"아, 진짜...이 책들 다 도로 사실려면 저런 머슴 둘은 파셔야 되는데요."


혹여 누가 끌고라도 갈까 봐서, 구종이 뒤에서 말고삐를 붙잡고서 사태를 관망하다 두눈을 뎅그렇게 떴다.


"에엥?"


구종은 난처한 얼굴로 석정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상전은 관리로선 평판이 좋았지만, 상전으로선 별로였다. 구종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아닌데도, 간혹 책에 눈이 뒤집혀서 말이나 머슴들을 팔아버리니 문제라던가. 평소 책 한권 읽는 걸 못 봤는데, 책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던가...


자신이야, 관에서 내린 구종이니 함부로 내다 팔진 못하겠지만, 이대로 말을 팔아치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말로만 듣던 그 책쟁이의 실체를 오늘 겪어보게 생겼다. 지금도 온힘을 다해서 버티는 걸 보니, 책벌레는 아니지만, 책쟁이는 맞는 모양이었다.


"파실 건가요?"


동상전 주인이 석정의 비루먹은 말을 보며 말했다. 박태보와 오도일은 석정의 말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리 말라깽이는 아니었는데, 어쩌다 저리 삐쩍 말라버렸는지. 굶겨서 저리 되었는지, 아니면 팔아치우고 또 새로 샀는지. 아무래도 주인 잘못 만난 모양이었다.


"할 수 없지...내 말 맡길테니, 이 책들 도로 내 집으로 갖다주게."

"예? 예...가져가면 거기 부인께서 또 도로 파실..."

"또 한번 이 책들이 나돌아다니면, 그땐 사는 사람이나 파는 사람이나, 내 달달 볶아서 콩자반을 만들어버리겠네."


석정의 으름장에 동상전 주인은 비어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느라 콧잔등에 주름이 잔뜩 잡히고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빈말이 아닐세."


석정은 다시금 동상전 주인을 쏘아보며 차갑게 경고했다. 동상전 주인은 흠칫 놀라 헛숨을 들이켰다. 석정의 곁에서, 무섭다며 박태보와 오도일도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주인이 재빨리 석정의 눈치를 보며 그 어깨너머로 비치는 말 한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허면 저 말이라도..."

"그러세."


석정이 뒤의 구종을 보며 고갯짓을 했다. 구종은 굳어버린 얼굴로 석정을 보며 고개를 두어차례 흔들었다. 말고삐도 더욱 꽉 쥐었다.


"어서. 넘겨주게."

"안 되는데..."

"어서!"


석정의 재촉에, 구종은 난처한 기색으로 고개를 또 가로저었다. 말고삐를 뺏기기 싫어서, 가슴에 바짝 붙였다.


"어서!"


석정이 재촉하는데, 열대여섯으로 보이는 점원 한명이 어디서 뭘 들었는지, 갑자기 주인 등뒤로 다가들어 무어라 귓속말을 했다. 동상전 주인이 두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정말?"

"예에! 방금 입수한 정봅니다요."

"진짜요, 진짜!"

"어떻게?"


동상전 주인은 석정을 쳐다보며 혀를 내두르더니, 이내 헤벌쭉 웃었다.


"아, 이거...말 한마리론 안 되겠는데요. 은 열두냥은 더 받아야..."

"이런 미친...무슨 책값이 돌아서면 뛰고, 돌아서면 또 뛰나 그래?"


석정이 버럭 화를 내자, 동상전 주인은 두손을 모아쥐고 고개를 조아렸다.


"경하드리옵니다. 방금 정3품 동부승지가 되셨습니다요. 영감나리!"

"뭐?"


박태보와 오도일이 놀란 얼굴로 석정을 쳐다보았다. 석정은 혀끝을 데인 듯한 기분으로 입맛을 다셨다.


"동...부승지?"


물론 예감은 했었다. 대신이 독대를 했다고 신료들이 따지는 와중에, 중궁이 끼여들어 은근슬쩍 왕에게 언질을 주었으니...그래도 얼떨떨한데, 박태보와 오도일이 신이 나서 깐족거렸다.


"이야...승정원의 파뿌리들 틈에 흙뿌리라니...경하드립니다. 어서 가서 교지를 받으셔야..."

"허...동부승지나리, 한턱 내야겠는데? 술 사게나 술...선술집으론 안되네. 저기 봉선루 정도는 되어야..."

"그쵸? 그런 의미에서, 말 한마리론 어림도 없습지요. 무려 서른다섯에 동부승지라...그런 분의 손때가 덕지덕지 묻은 책들인데."


동상전 주인의 밉살스런 말에, 석정은 입안이 홧홧해져서, 또 한번 입맛을 다셨다. 박태보와 오도일이 낄낄대며 석정의 옷자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홍단령은 어떤가...여기 이 양반한테서 벗겨먹을 거라곤 요거 하나 뿐인데."

"동부승지 최석정이 입은 홍단령이라...역대 장원들 속고의보다 잘 팔릴 걸세."

"뭐 없으면 빌려 입거나 물려 입으면 되니...일단 벗기세."


석정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자신의 친우들을 돌아보는데, 동상전 주인이 큰소리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자, 자!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방금 동부승지 되신 최석정 영감! 지금 입으신 요거, 요거...요 홍단령 팝니다. 사실 분은 이리로...!"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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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2

  • 작성자
    Lv.38 파리매
    작성일
    16.09.07 12:02
    No. 1

    요 몇회 연재 주기가 빨라져서 자주 보게 되니 참 좋네요.
    간만에 가볍게 미소지으며 본 한 편이었습니다.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건필하세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44 부처님
    작성일
    16.12.16 22:16
    No. 2

    건필하세요ㅎ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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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의 그림자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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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 해의 그림자 283 +2 17.01.14 809 7 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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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해의 그림자 281 +2 16.12.11 736 4 42쪽
281 해의 그림자 280 +2 16.11.29 701 5 41쪽
280 해의 그림자 279 16.11.24 565 7 44쪽
279 해의 그림자 278 +2 16.11.16 1,007 4 41쪽
278 해의 그림자 277 +1 16.11.05 958 8 44쪽
277 해의 그림자 276 +2 16.10.15 954 10 45쪽
276 해의 그림자 275 +1 16.10.09 905 6 43쪽
275 해의 그림자 274 +1 16.09.30 612 9 42쪽
274 해의 그림자 273 16.09.22 581 8 43쪽
273 해의 그림자 272 +1 16.09.15 853 8 44쪽
» 해의 그림자 271 +2 16.09.07 1,194 10 44쪽
271 해의 그림자 270 16.08.30 680 8 42쪽
270 해의 그림자 269 +1 16.08.24 929 10 44쪽
269 해의 그림자 268 +2 16.08.16 646 3 43쪽
268 해의 그림자 267 +2 16.08.08 988 7 41쪽
267 해의 그림자 266 16.07.24 596 11 44쪽
266 해의 그림자 265 +1 16.07.03 952 11 42쪽
265 해의 그림자 264 +2 16.05.30 989 11 44쪽
264 해의 그림자 263 +2 16.05.01 999 13 40쪽
263 해의 그림자 262 16.03.29 726 10 40쪽
262 해의 그림자 261 16.02.18 1,023 13 41쪽
261 해의 그림자 260 +1 16.01.21 1,162 15 40쪽
260 해의 그림자 259 +1 15.12.26 773 12 41쪽
259 해의 그림자 258 +3 15.12.04 921 13 41쪽
258 해의 그림자 257 +4 15.11.08 994 16 38쪽
257 해의 그림자 256 +2 15.10.12 848 14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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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해의 그림자 254 +2 15.08.27 909 14 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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