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변하지 않는 것들 4
"비밀 공간이 있는지 어떻게 알았어?"
"할머니도 비슷한 걸 사용하시거든."
아이샤의 말에 나는 일전에 봤던 에키로나의 방을 떠올렸다.
장로의 방에 있던 책상은 그렇게 복잡해 보이지 않았는데?
"책상은 아니고."
내 얼굴이 생각하는 양이 다 드러났던 건지 아이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
비밀 공간이 책상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찾던 게 이게 맞아?"
"응, 맞아."
외견도 그렇고 할아버지가 굳이 비밀 공간에 따로 보관해두신 걸 보면 범상치 않은 물건인 건 틀림없었다.
하지만, 특이한 외양을 제외하고 이렇다할 특이점은 느낄 수 없었다.
"미뉴, 이거 어때?"
"음······, 딱히······?"
미뉴가 알아볼 수 없다면, 마력에 의해 작동하는 물건은 아닐 것이다.
그럼, 아티팩트 종류는 아니라는 뜻인데······.
"석판에는 별 다른 말 없었어?"
"응, 없었어."
이누에타나 카이샤르가 석판에 남긴 것은 검에 대한 외양 묘사 뿐이었다.
정확히는 '때를 대비하여 나의 후손에게 이 검을 남긴다' 라고 했던가.
"······아니면······."
나와 함께 검에 대해 고민하던 아이샤는 한가지를 제안했다.
"유젤, 피를 내봐."
"피?"
그 말에 난 잠시 당황했지만, 곧 아이샤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혈족 봉인을 말하는 거지?"
"응."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 중, 그 혈족만 사용할 수 있도록 마법적 장치를 해놓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인간보단 장수종인 드래곤이나 엘프들이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긴 하지만, 인간의 보물 중에서 간혹 보이는 방법이었다.
난 단검의 날을 왼손 엄지로 쓸었다.
날은 예리했고, 칼날에는 내 손가락에서 나온 피가 긴 자국을 그렸다.
그러자······.
화아앗!
"정답이었네."
갑자기 단검 전체가 빛나더니 이제까지 없던 글자가 검신에 나타났다.
검은 날에서 희게 빛나는 그 글자들은 이누에타나 카이샤르가 석판에 적은 글자보다 훨씬 오래된 시대의 글자였다.
인간이 아닌, 신들이 사용하던 글자.
신어(神語)였다.
그리고 난 그 글자 또한 읽을 수 있었다.
"뭐라고 써있는 거야?"
"······'모든 것은 무(無)로 돌아가리라.'"
"아무래도 신물(神物)인 것 같아."
고개를 돌리자 미뉴가 눈을 가늘게 뜨며 검을 바라보고 있었다.
긴가민가하며 헷갈려 하던 직전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뭐가 달라졌어?"
"네 피를 머금은 다음에, 반응이 달라졌어."
미뉴의 말에 아직 날이 빛나고 있는 검은 자세히 훑었다.
그러고보니 피를 머금기 전과 다르게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역시, 혈족 봉인이 되어었나본데.
"유젤, 검에 마력을 흘려넣어봐."
"마력을?"
"응."
나는 미뉴가 시키는대로 했다.
하지만, 곧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검, 사난톨라의 수정이 내가 의도한 것보다 훨씬 많은 마력을 흡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 마력을 양껏 흡수한 검은 그 모양이 바뀌었다.
단검에서, 장검으로.
"······!"
정확히는 사난톨라의 수정을 기본으로 해 마력의 칼날이 생겨난 것처럼 보였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검은 반투명했고, 일렁거렸다.
"······마법 검이었네?"
"응, 그런 것 같네."
그것도 상당히 강력한.
검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마력은 내 마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즉, 이 사난톨라의 검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도 난 상당히 많은 마력을 소모했다.
"어떻게 보면 검기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무심코 손에 쥔 사난톨라의 수정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러지 말아야 했다.
콰과광!
"?!"
"뭐, 뭐!"
갑자기 벌어진 의도치 않은 상황에 난 무척 당황했다.
내가 검을 휘두른 방향의 벽이 그대로 반파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가볍게 휘둘렀을 뿐인데······?
"부수면 어떡해!"
"일부러 그런 건 아니야······."
진심이었다.
검술이라곤 아카데미에서 익힌 기본 교양 수준인 내가 휘두른 흔적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심각해진 저택의 벽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필 할아버지의 연구실을······.
다행히 벽이 부서진 쪽에 충돌로 폭발이 일어날 만한 물건들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어떤 마법 재료들은 작은 자극으로도 폭발하곤 하니까.
나는 뚫린 벽을 망연하게 바라보다가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주인도 없는데, 뭐."
할아버지가 언제 돌아오실지는 모르지만, 할아버지가 저택을 떠나신 이유를 해결하기 전에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나도 짐작가는 이유이고.
카달리우스를 죽이는 것을 성공하더라도 빠른 시일 내에 저택으로 돌아올 일은 없었다.
나는 미련을 버렸다.
"······필요한 걸 얻었으니 됐어."
*
할아버지의 물건을 몇 개 챙겼다.
챙긴 것은 소모형 아티팩트와 회복약 몇 가지.
"그 거리를 이틀만에 주파하다니······."
이틀내내 가르누달을 소환한 나는 물론이고 제대로 자지 못한 아이샤 또한 상당히 피로해보였다.
달린 것은 가르누달이었지만, 가르누달은 내 마력을 바탕으로 모습을 현신하니까.
달리는 것은 말이지만, 승마 자체가 상당히 고단한 운동인 것처럼 말이다.
저택에서 챙겨온 것들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수도에 제대로 도착하기도 전에 나가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쉬는 대신 온갖 회복 약으로 피로를 쫓았다.
효과는 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할아버지가 만든 약이니까.
"이걸 쓰자."
나는 '네쥬로아의 손'에서 한동안 꺼내지 않았던 물건을 꺼냈다.
새벽 여신의 베일.
J.K의 아공간에서 챙겨온 후 기회가 없어서 사용하지 않았던 물건을 이제야 사용한다.
나 하나는 은신하기 어렵지 않지만, 아이샤는 그렇지 않으니까.
나는 아이샤에게 미뉴를 끌어안게 하고, 아이샤와 미뉴에게 새벽 여신의 베일을 씌워줬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
새벽 여신의 베일이 가진 효과를 확인한 아이샤가 말했다.
얼핏 보기에도 상당히 수준 높은 투명화 아티팩트임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본가를 습격한 놈들, 대충 짐작이 가거든."
"수도에 있는 자들이야?"
"응."
아이샤에게 자세한 설명은 생략했다.
범인의 정체는 내 이전 생을 토대로 추측한 것이기에 물질적 증거가 없는 지금, 상대가 엘스티야 황가라는 말은 꺼내기 일렀다.
정확히는 카달리우스의 영향력 하에 있는 엘스티야 황가지만.
"유젤, 너는?"
"난 마법으로 상쇄하면 돼."
범위를 나로 한정할 때 마법의 운용은 난이도가 확 떨어진다.
신경써야하는 조건이 절반으로 줄어드니까.
마침 끝내주는 아티팩트도 있으니 야무지게 사용해야지.
"잘 따라와."
난 그렇게 말하곤 앞장섰다.
번화가를 지나 빈민가 방향으로 갈수록 풍경은 낯설게 바뀌어갔다.
그리고 랑데 골목에 다다르자 그런 분위기는 극에 달했다.
"수도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네."
"빈민가는 어디든 있으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랑데 골목은 빈민가와는 조금 다르지만.
그저 가난한 자들이 모인 보통의 빈민가와는 달리 랑데 골목에 사는 자 대다수는 범죄자 출신이다.
혹은 범죄자 부모를 가졌거나.
때문에 랑데 골목은 멜젤른 아카데미 방향에 있는 빈민가와는 분위기가 비슷한 듯 달랐다.
보다 음울하고 날 선 분위기.
낯선 얼굴을 경계하는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망토에 달린 후드를 좀 더 깊게 내렸다.
그 랑데 골목에서도 훨씬 안쪽.
낡은 집들이 이리저리 얽혀있고 악취를 풍기는 골목의 안쪽에서 목표했던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다왔어."
아이샤를 향해 그렇게 속삭이며 눈앞의 반쯤 내려앉은 나무 문을 밀었다.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안쪽에서 날 반기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늦었군."
"미안해. 뭘 좀 찾아오느라 곧장 출발하지 못했거든."
사난톨라의 수정을 얻으려 거의 반나절을 소비했더니 란기트에게 약속했던 날짜보다 하루가 늦어버렸다.
어쩔 수 없다.
란기트에겐 미안하지만, 란기트를 기다리게 하고 사난톨라의 수정을 얻은 쪽이 훨씬 이득이니까.
난 주변을 훑은 뒤 다 부서져가는 문을 닫았고, 결계를 쳤다.
여기까지 흘러들어오는 놈들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 한 조치였다.
"일단 소개부터 할까."
난 그렇게 말하며 아이샤가 서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아이샤가 새벽 여신의 베일을 걷어주길 기다렸다.
아이샤가 새벽 여신의 베일을 걷어내리자, 허공에서 아이샤와 미뉴의 모습이 드러났다.
"······아티팩트인가?"
란기트가 놀라 물었고, 나는 긍정하며 란기트가 앉아있는 테이블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리고 민망한 얼굴로 나와 란기트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는 아이샤가 내 옆에 앉을 수 있도록 내 옆의 의자를 뺐다.
"아이샤, 이쪽은 란기트.
란기트, 이쪽은 아이샤."
나는 일부러 두 사람에게 서로의 이름만 소개했다.
공식적인 자리도 아니고 무엇보다 란기트는 이렇다할 신분이 없는 입장이니까.
"······안녕하세요."
"반갑소. 유젤이 여기에 다른 사람을 데려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군."
란기트는 그렇게 말하며 조금 힐난이 담긴 시선으로 날 훑었다.
위험한 일에 끌어들였다는 의미겠지.
내 또래인 아이샤는 얼핏 봐선 곱게 자란 온실 속 화초처럼 보일 테니.
실상은 오랜 여행으로 그런 선입견과는 거리가 먼 타입인데 말이다.
"아이샤는 내 일을 도와줄 거야.
내가 먼저 부탁한 것들을 같이 들었으면 하는데."
솔직히 내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이샤가 가진 정령을 부리는 힘은 내게 전혀 다른 방향의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명백했다.
무엇보다 아이샤 자신이 날 돕고 싶다고 강하게 주장했으니까.
란기트가 마지못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일단 네가 알려준대로 녹샤를 찾을 수 있었다.
누구 소개로 왔는지 집요하게 묻는 통에 곤욕을 치른 건 덤이야."
내가 란기트를 보내 녹샤에게서 얻길 원한 정보는 현재 수도 전체의 분위기였다.
빈민부터 황족에 이르기까지.
수도에 살아가는 모든 인간들에게 눈에 띄는 사건이 없었냐는 질문.
"대외적으로는 눈에 띄는 사건이 없어.
아무것도 없지."
"대외적으로는 말이지?"
내 질문에 란기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사이를 두었다가 이어 말했다.
"황제의 지병이 깊었다."
황제의 지병은 원래 깊다.
건강을 잃은 건 이미 몇 년째고, 최근 1~2년 사이 절반은 병석에서 지낼 정도로 병이 악화되었으니까.
그러니, 란기트가 알아온 '정보'로서의 '황제의 지병이 깊었다'는 의미는 보다 단기적인 변화를 의미했다.
"국상이 염려될 정도로?"
내가 묻자 란기트는 미심쩍다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이건 극비로 취급되던 정보인 것 같은데, 넌 마치 이미 알았던 이야기인 것 같군."
"알았던 건 아니야. 추측이었지."
"내가 방금 확인해준 거고?"
"그래."
원래 카달리우스가 엘스티야 황가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은 황제의 지병이 악화되면서부터다.
황제는 원래 제 자식은 로안을 비호했으나 황제가 건강을 잃으면서 로안의 입지도 자연스럽게 불안해졌다.
카달리우스는 그 혼란을 틈타 엘스티야 황가 전체를 제멋대로 주무른 거니까.
하지만 그 시기가 앞당겨졌다면, 본가를 그지경으로 만든 것이 카달리우스라는 추측도 충분히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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