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토공공 문고전

추리무협(追利無俠)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토공공
작품등록일 :
2022.05.11 11:06
최근연재일 :
2022.06.29 00:10
연재수 :
71 회
조회수 :
17,646
추천수 :
803
글자수 :
388,926

작성
22.05.14 16:32
조회
332
추천
18
글자
12쪽

대탈주(大脫走)-5

DUMMY

벽운경은 석관에서 울려퍼진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이것이 혹여 환청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자신의 볼을 세게 꼬집어 보았으나 여실하게 얼얼히 전해져오는 통증이 이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생생히 느끼게 되었다.


벽운경은 조심스레 석관 앞으로 다가가 보았다. 오십 여년의 긴 세월동안 공동에 놓여 방치된 탓에 석관에 곳곳에 짙푸른 이끼가 자라나 있었다. 침을 한 차례 꿀떡 삼킨 벽운경은 소리의 원인을 확인하기 위해 무례를 무릎쓰고 증조부의 관을 열어보기로 결심했다.


무거운 청석으로 이루어진 석관의 뚜껑은 웬만한 성인 남성의 몸무게만큼이나 무거워 어린 벽운경이 안간힘을 다해 밀어붙인 다음에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참동안 이어진 실강이가 끝나고 마침내 석관이 열려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석관의 안에는 흰 수염이 건장하게 자란 노인이 잠든 듯 평온한 얼굴로 누워있었다. 그것을 본 벽운경은 직감적으로 그가 자신의 증조부인 벽자엽임을 바로 깨닫고는 예를 갖춰 절을 올렸다.


"불초 증손 벽운경이 증조부님을 뵙습니다."


한참동안 머리를 조아린 벽운경은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고개를 힐끔 들었다. 방금 전 목소리는 분명 석관에서 나온 것이 맞거늘 석관 속 벽자엽은 가만히 누워있을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일어나 석관 속 대답없는 벽자엽을 바라보았다.


벽자엽은 어제 누운 이라 하여도 믿을 수 만큼 생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외에 특이한 점이라면 가슴팍에 가지런히 모은 손에 기묘한 글씨가 새겨있는 주술용 단도같은 것이 쥐어져 있단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방금 전까지 석관에 기댄 자신에게 말을 건넨 벽자엽은 그 이후에는 움직일 기색이라곤 도통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어찌 50년 전에 돌아가신 분께서 아직까지 살아계신단 말인가. 내가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었나 보다.'


공연히 기운을 빼 괜한 짓을 했다는 생각에 벽운경은 툴툴대며 다시 석관에 지친 몸을 기댔다. 그리고 그 순간 일전의 소리가 다시금 그에게 말을 걸었다.


"관까지 열었으면서 무엇하는게냐. 어서 나를 깨우래두!"


"아니, 깜짝이야!"


귓전에 울리는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벽운경은 재차 놀라게 되었고 전부 자신의 망상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애써 머리를 굴려 목소리가 들렸을 때의 상황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았다.


목소리가 들렸을 때는 항상 석관에 자신의 몸이 닿았을 때였다는 것을 떠올린 벽운경은 석관에 슬쩍 다시 손을 얹었다. 그러자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와 대화를 하는 방법을 금새 알아챈 걸 보니 영 멍청한 놈은 아니구만."


"선배님께선 저의 증조부이신 벽자엽 대협이 맞으십니까?"


벽운경은 이 목소리의 주인이 귀를 통하지 않고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울려퍼지는 소리로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가 벽자엽이 맞냐는 질문에 목소리는 뜻밖의 대답을 하였다.


"네 놈은 이 망할 놈의 핏줄이로구나! 그 멍청한 게 대협이라니 가소롭지도 않군."


"그렇다면 당신은 누구십니까? 혹시 당신이 바로 그 혈마입니까?"


자신의 매형이었던 도진기를 포함한 무림맹의 무사들은 증조부가 혈마의 비급을 숨겨두었다고 했었다. 물론 얼토당토하지 않은 음모라 생각했지만 석굴안에 숨겨놓은 비밀 통로와 공동을 비롯한 지금의 믿기지 않는 모든 일들은 이 목소리의 주인이 혈마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목소리는 그것을 적극 부인했다.


"혈마? 그래, 그런 것도 있었지. 이 벽자엽 놈이 그 혈마라는 놈에게 뒤질 뻔한 걸 바로 내가 살려냈지. 덕분에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여기에 쳐박혀있지만 말야."


"이 꼴이라면..."


"이 조그만 금속에 갇혀 옴짝달싹도 못하고 있으니 한심하기 그지 없는 상황이지 뭐냐."


"선배님께선 그러면 지금 이 단도에 갇혀계시는군요."


대화를 통해 알아낸 사실은 두 가지였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의 증조부인 벽자엽을 구해준 은인이었으며 또 지금은 저 벽자엽이 쥐고 있는 단도의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이제라도 알았다면 나를 잡아 깨워주지 않으련? 이 안에 오래 있다보니 너무나 답답하구나."


"어떻게 해야 제가 깨워드릴 수 있는 건가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나를 잡고 그대로 들어올리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만 해주면 나도 너에게 선물을 하나 주도록 하마."


어렵지 않은 방법에 단도에 손을 갖다대려한 벽운경은 순간 멈칫했다. 증조부는 왜 자신의 생명을 구한 은인인 자를 배은망덕하게 저 단도에 가둬 자신과 같이 이 석관안에 묻어놓은 것인가? 아니 애초에 사람의 영혼을 단도에 가두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것일까? 불안감에 망설이는 벽운경에게 단도가 그를 안심시키려 들었다.


"걱정할 필요 없다. 이 놈은 그저 내가 두려웠던게야. 혈마란 놈에게 몸안의 내공을 거의 다 잃어버리고 나니 이젠 나를 통제할 자신이 없었던거지. 배은망덕한 놈, 애초에 그 힘 조차 모두 내게서 받은 것이었거늘."


"당신이 제 증조부님에게 힘을 주었다고요?"


"흥, 보잘 것 없는 종놈에게 힘을 쥐어 주었더니 결국에 배신으로 돌려받다니. 내가 멍청한 짓을 했었지."


벽자엽을 천하제일인으로 만든 그 힘이라는 것에 대해 크게 동한 벽운경은 단도에게 말했다.


"그럼 제가 당신을 도와드리면 당신께선 제게 증조부님께 주었던 그 힘을 주실 수 있나요?"


"그 정도 뿐이랴? 다시는 그 혈마같은 놈은 얼씬도 못할 막대한 거력(巨力)을 약속하마."


중원 전체를 떨게한 혈마라는 강대한 존재조차 우습게 여기는 듯한 단도 속 목소리의 주인의 말에 벽운경은 의심 반 기대 반이 섞인 마음으로 단도에 손을 갖다 대었다.


"약속하는 겁니다. 제겐 지금 그 힘이 꼭 필요하거든요."


벽운경은 차갑게 식고 굳은 벽자엽의 손을 치워낸 뒤 단도를 잡아 들어올렸다. 단도가 벽자엽의 몸에서 완전히 멀어진 그 순간 생기가 느껴지는 석관 속 벽자엽의 시신은 거짓말처럼 오십 년의 세월을 한순간에 겪은 듯 삽시간에 말라 비틀어져버렸다.


한편 대단한 기대를 품고 단도를 들어올린 벽운경은 자신의 몸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의아해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안의 단도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그때 벽운경은 돌연 원인을 알 수 없는 강렬한 충격이 자신의 머리를 감싸는 것을 느끼며 의식을 잃어버렸다.




'이 자의 무위는 나는 물론이고 도 문주 이상이로다. 대체 어디서 이런 괴물이 숨어있었을까.'


수십 초가 오가는 공방이 지나간 뒤에 공단은 권안생에 대한 생각을 달리 먹게 되었다.


분명 도승문과 일 대 일로 겨룰 때 백중세이기에 자신이 가세한다면 빠르게 승기를 가져올 것이라 생각했지만 보법을 자유롭게 구사하게 된 권안생의 검은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비록 이 대 일이었기에 약간의 우세를 점하고 있었으나 저 빙글 돌리며 찔러오는 섬광같은 찌르기는 오싹하기 이를 데 없어 잠시만 방심해도 단숨에 상대의 목숨을 앗아갈 듯했다.


사실 공단은 알지 못했지만 이러한 백중세의 이 대 일 구도가 계속 유지가 됐던 원인은 바로 그에게 있었다.


최선을 다해 상대한다고는 했지만 그는 내심 석굴에 자신보다 먼저 들어간 도진기가 신경이 쓰여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를 제압하고 석굴 안으로 들어가고픈 마음에 초조하게 검을 서두르다보니 검의 경로가 무척 단순해지는 결과를 낳았고 덕분에 권안생은 수월하게 그를 상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도승문이었다. 팔 성에 달하는 설산대응심법에서 나온 웅장한 내력의 힘으로 곰처럼 밀어 붙이는 그를 상대하다보니 갈수록 손목이 뻐근해져 검을 찌르는 데 점점 힘이 빠지고 있었다. 하여 권안생은 최대한 빨리 승부를 보기 위해 도박수를 던지기로 결심했다.


'일단 비교적 헐거운 상대인 저 자부터 쓰러트린 뒤 도승문을 본격적으로 상대해야겠구나.'


우선 목표를 공단으로 정한 권안생은 도승문의 공세에서 벗어나 몸을 공단에게 돌린 뒤 본격적으로 그에게 공격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빙글 돌아가는 권안생의 검 끝의 원은 점점 커져가기 시작했고 그 원에 현혹된 공단은 마침내 자신이 그 원 안에 금방이라도 갇힌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었다. 권안생이 그려낸 검의 원 안으로 서서히 빨려들어가기 시작한 공단은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그의 검에서 어딘가 익숙한 검법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 순간 검의 원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원은 점으로 변했고 이와 동시에 예리한 검끝은 권안생의 손에서 화살처럼 쏘아져 공단의 목을 향해 일직선으로 찔러왔다.


절대적인 쾌속의 검 앞에서 검의 정체를 파악해낸 공단은 우스꽝스럽게 주저 앉아 머리를 틀어 가까스로 목을 피했고 목표를 잃은 검은 공단의 어깨에 들어가 꽂혔다.


"윽!"


'제길, 손목에 힘이 빠져서 검로가 틀어져버렸구나!'


계속된 도승문과의 격돌에서 누적된 손목의 피로 때문에 권안생의 필살검은 온전히 시전되지 못했고 찔러낸 검의 회수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공단이 제 어깨에 박힌 권안생의 검을 양손으로 붙들고 놓아주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여파는 그에게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푸욱-


"컥!"


"안돼!"


공단에게 검과 발이 묶인 권안생의 등을 도승문이 대응대력조법의 가장 파괴적인 일 초식인 응왕훼(鷹王喙)의 수법으로 꿰뚫어버렸다.


하지만 난적을 쓰러트렸음에도 불구하고 공단은 가슴을 꿰뚫린 채 쓰러진 권안생을 보며 절규를 터트렸다. 도승문은 그러한 공단에게 의문을 느꼈다.


"대체 왜 그러시오, 감찰단주?"


"이 자의 검에서 왠지 익숙한 느낌이 든다 했더니 이 자의 검은 일전에 맹주가 보여준 비검과 똑같았소!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만..."


"뭐요? 그렇다면 이자가 맹주와 연관된 사람이란 말이오?"


"모르오. 그래서 그걸 알아내야 하는데 그런 자를 단숨에 숨통을 끊어버렸으니..."


공단은 혹시나 싶어 바닥에 엎어진 권안생의 몸을 돌려 생존을 확인하려 했으나 역시나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절명한 상태였다.


공단과 도승문은 자신들의 합공에 목숨을 잃은 사내가혹시나 맹주의 지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불안에 빠졌다. 이 자가 맹주의 가족이거나 같은 사문의 일원이라면? 자신들 또한 책임에서 온전히 도망칠 수 없게 될 것이다.


싸늘하게 식어가는 사내의 시체를 한참이나 바라보던 공단의 입이 열렸다.


"이 사내는 오늘 여기에 없던 사람이오...여기 죽은 무사들은 모두 백화장주에게 죽었다 이 말입니다."


도승문은 아무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곰처럼 둔한 그라 해도 공단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자 공범인 두 사람이기에 둘 중 누군가 변심하지 않는 이상 이 무명 사내의 죽음이 맹주에게 전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개운치 않은 뒷맛을 느끼며 두 사람은 도진기가 들어간 석굴로 들어갔다. 권안생의 시체는 그렇게 그의 손에 쓰러진 무림맹의 무사들의 시체와 한데 뒤섞인 채 차갑게 방치되었다.


무명서생(無名書生) 권안생(權安生), 그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그것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협(俠)을 지킨 한 사내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허망한 죽음이었다.




재밌게 보셨나요? 그렇다면 추천과 선호작 등록, 그리고 혹여나 시간이 나신다면 작품 추천의 글 부탁드립니다! 응원과 지지는 작품 연재에 큰 힘이 됩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2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추리무협(追利無俠)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2 대탈주(大脫走)-6 +2 22.05.14 337 16 17쪽
» 대탈주(大脫走)-5 +2 22.05.14 333 18 12쪽
10 대탈주(大脫走)-4 +2 22.05.13 317 18 14쪽
9 대탈주(大脫走)-3 +1 22.05.13 315 17 14쪽
8 대탈주(大脫走)-2 +2 22.05.12 340 16 13쪽
7 대탈주(大脫走)-1 +2 22.05.12 379 20 14쪽
6 백화혈사(柏花血事)-5 +2 22.05.11 365 22 14쪽
5 백화혈사(柏花血事)-4 +2 22.05.11 372 21 17쪽
4 백화혈사(柏花血事)-3 +2 22.05.11 445 27 14쪽
3 백화혈사(柏花血事)-2 +2 22.05.11 569 31 14쪽
2 백화혈사(柏花血事)-1 +2 22.05.11 1,008 42 16쪽
1 서장 +6 22.05.11 1,258 50 5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