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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공공 문고전

추리무협(追利無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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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공공
작품등록일 :
2022.05.11 11:06
최근연재일 :
2022.06.29 00:10
연재수 :
7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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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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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388,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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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11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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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쪽

백화혈사(柏花血事)-5

DUMMY

분기탱천하여 검을 들고 일어난 벽문천의 기세가 잠시 멈추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공단의 발 밑에 놓인 어린 아들의 얼굴을 텅빈 눈으로 바라보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막내 아이의 생일빔을 위해 이름난 장인에게 맞춰 입힌 고급 예복의 여기저기엔 어느새 계절에 맞지 않는 붉은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그 혈흔들이 목숨에 위협적인 요혈들을 피해 팔과 허벅다리 바깥쪽 부위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벽문천은 그 수법에서 벽운경의 출혈을 부각시켜 자신을 위압하려드는 공단의 악랄한 속내를 읽을 수 있었다.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벽문천을 독촉하기 위해 공단은 이미 의식을 잃은 벽운경의 머릿께로 발을 옮기며 윽박질렀다.


“이대로 날을 지샐 생각이라면 여흥을 위해 나와 내기를 하지 않겠소? 과연 이 머리통이 오늘 이 아이가 보인 의기만큼이나 단단한지 확인하는 것 말이오!”


“멈추시오 공 단주! 간악한 모리배의 수법처럼 아이를 인질로 붙들겠단 말이오? 아이에게 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금새라도 아이의 말랑한 머리통을 부술 기세의 공단의 행보를 도승문이 제지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단의 위압적인 협박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런 도승문을 비웃었다.


“흥! 우리 중 목숨을 걸지 않고 저 자를 붙들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내 이런 치졸한 짓은 하지 않았겠지. 그럼 어리석은 이 사람과 달리 영민하신 도 문주께선 달리 방도가 있으시기에 꺼내는 말씀이지요?”


“유감이지만 내게 그런 방도따윈 없소... 그렇지만 아이를 핍박해 원하는 목적을 이루려는 것은 사파의 무리나 할 법한 일이오."


"흥!"


그러나 공단은 물러설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도승문은 벽문천의 부정에 호소해 재차 설득을 시도했다. 도승문이 아는 벽문천은 엄격하면서도 그 내면에는 따뜻한 정이 넘치는 호방한 사내였다.


"형님. 제발 그만하고 맹으로 가서 시비를 가립시다! 경아를 이리 헛되이 죽게 놔둘 생각이오?”


벽문천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한편의 촌극을 감상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들의 말에 따라 맹에 가기만 하면 아이들은 살 수 있을까?


그의 안방과도 같은 대남에서도 맹의 권위를 앞세워 그와 그의 가족들을 핍박하려든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의 본거지인 무림맹에서는 분명 이보다 더한 참행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


아니, 애시당초 주인인 자신도 모르게 장원에 묻어 놓은 사체들과 정 집사의 시체를 들이밀며 음모를 뒤집어 씌우기 시작한 순간부터 이 촌극의 끝은 이미 벽가의 멸문으로 정해져 있었으리라.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뒤 생각의 정리가 끝난 벽문천은 이제 결정을 내렸다.


“흐흐흐...좋다. 네 놈들이 바라는 대로 해주기로 하마.”


“형님!”


“음. 잘 생각했소. 그렇다면...”


전의를 상실하고 투항하기로 한 벽문천을 보며 공단은 만족한 듯 벽운경의 머리를 지긋이 누르고 있던 발을 천천히 뗐다. 그러나 이어진 벽문천의 다음 말은 그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내 기꺼이 네 놈들이 그렇게 원하는 혈마가 되어 돌아오겠다! 내가 다시 세상에 나올 그날, 온 무림이 피로 물들 것이니 목을 씻고 기다려라!”


“이런 젠장...뭣들 하느냐! 당장 저 놈을 막아라!”


공단의 일갈과 함께 아직 남아 있는 무림맹의 검수들이 벽문천의 탈출을 막기 위해 검진을 이루며 점차로 좁히기 시작했으나 만전의 상태에서도 막지 못한 그를 급조한 검진으로 막아낸 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승냥이같은 적들 앞에 자식들을 두고 떠나야 하는 부모의 마음이 오죽할까. 벽문천은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앞 길을 막는 십 수명의 검수를 베어내며 유유히 포위망에서 빠져나갔다.


눈 앞에서 다 잡은 벽문천을 놓치게 된 공단은 부상을 추스르고 있는 도진기에게 분통을 터트렸다.


“비연단주 부친이 보인 미적지근한 대응으로 결국 일을 그르치고 말았소.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하고 눈 앞에서 흉수를 놓쳤으니 대체 맹주께 뭐라 말씀드린단 말이오?”


'나도 엄연히 한 문파의 수장이거늘 이 자 나를 겨우 한 사람의 무부로 취급하는구나.'


도승문은 도진기를 향한 공단의 질책에서 대남의 명문 무가인 신응문도 무림맹 앞에서는 이름을 들먹이기에 부족한 초라한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눈 앞에서 출신 문파를 모욕당한 것과 마찬가지인 도진기는 이에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천천히 금창약과 붕대를 덧대어 상처의 치료를 마치고는 태연한 낯으로 공단을 마주했다.


“실망하기엔 아직 이릅니다. 잊으셨습니까? 아직 여기엔 벽가의 혈육이 둘이나 있습니다. 혹시 저들이 아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는 법입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의심 많은 맹주가 신임하는 자라 하더니 이 자의 심계는 잔혹한 것이 보통이 아니구나!'


한때 자신의 아내였던 백운소를 마치 타인처럼 지칭하며 자백을 위해 고문을 준비하는 속하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넘기는 냉혈한을 보며 공단은 내심 몸서리쳤다.


그러나 공단은 자신의 불안을 애써 숨기고는 달아난 벽문천의 수색을 위해 상태가 나쁘지 않은 검수들을 추려 그가 사라진 방향을 향해 사라졌다.



깊은 밤의 백화장. 하나의 그림자가 아무도 모르게 백화장의 담을 막 넘었다. 발을 한 번 디딘 것 만으로 성인 남자의 키 두배는 됨직할 높이를 단숨에 넘는 것으로 보아 그는 상승의 신법을 익힌 고수임에 틀림없었다.


마침내 담을 넘어 장원 안으로 들어온 그림자의 정체는 바로 권안생이었다. 추레한 외양으로 별 볼일 없어보인 그는 본디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였다. 좌우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다 불 빛과 연기가 피어 오르는 곳을 발견한 그는 곧장 그곳으로 향해 소리없이 움직였다.


다성 장 정도 너머의 후미진 곳에선 네 댓명의 사내가 팔뚝만한 장작들을 태워 야밤의 추위를 달래고 있었다. 안력을 돋워 사내들의 손 끝을 바라본 권안생은 그 물건의 정체가 벽문천의 손에 도륙당한 동료의 시신이란 것을 확인하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타닥...타닥...


“시체는 한 구도 남김없이 모조리 태우라니...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낸들 알겠나. 우리야 시키는 대로 하는 것 뿐인데. 아무튼 감찰단 소속 친구들은 전부 처리했으니 이제 남은 건 미리 묻어 두었던 시체들 뿐인가?”


자신이 찾고자 한 백화장에서 발견됐다던 시체가 여기에 있음을 알아챈 권안생은 더는 지체하지 않고 시신들을 소각하는 무림맹의 무사들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웬 놈이냐!”


무림맹의 무사들은 불쑥 자신의 앞에 나타난 권안생을 경계하며 칼을 뽑아들었으나 권안생은 그런 무림맹 무사들의 수혈을 짚어 순식간에 제압했다. 그리고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쓰러진 무사들을 뒤로하고 권안생은 백화장에 암매장되어 있었던 혈마흡혈대법에 희생된 시신들을 검시하기 시작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 덕분에 그는 불을 밝히기 위해 가져온 화섭자를 따로 꺼낼 필요조차 없었다.


마침 그가 처음 발견한 시신은 정 집사의 것이었다. 온 몸의 피가 한 줌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빨려나간 듯 보이는 창백한 피부와 가슴팍의 오무려진 상처. 벽가의 가전 무공과 혈마의 마공의 흔적이 한 몸에 담긴 시체에게서 권안생은 원인 모를 이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오래 걸리지 않아 정 집사의 시신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해 낼 수 있었다. 그것은 다른 신체 부위보다 더 짙은 푸른 빛을 띄는 발과 발목 부근에 있던 묶인 끈 등으로 쓸려서 생긴 상처였다.


‘이 상처는 흔히 목을 매 죽은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끈으로 묶여 매달렸던 흔적이다. 발 부근이 파란 것을 보아 시체의 피가 발에 쏠렸다는 것일테고 그렇다면 이 시체는 누군가에 의해 거꾸로 매달렸었다는 뜻이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설마...?’


불현듯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린 권안생은 풀어헤쳐진 정 집사의 머리카락 속 관자놀이 부근을 만져보았다. 그리고 그 곳에는 길게 절개된 상처를 피부와 유사한 색깔의 비단 실로 정교하게 봉합한 흔적이 보였다.


혹시나싶어 다른 혈마흡혈대법의 피해자들의 시신을 들쳐보니 정 집사의 것과 대동소이하게 발목과 머리에 같은 흔적들이 보였다.


‘아! 무림맹의 행사답지 않게 조잡하고 우악스럽게 몰아 붙이는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거늘...모든 것이 계획된 음모였구나!’


상대의 정혈을 흡수해 마치 몸 안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간 것처럼 만드는 것이 혈마의 수법이라지만 그 이야기는 도축한 가축의 손질처럼 몸 안의 피를 모조리 빼놓은 시체를 혈마의 수법으로 위장하는 것 또한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수 년에 걸쳐 증거를 만들고 주변의 인물들을 포섭해 정황을 만들어 옭아 맸으니 그 누구라도 이 촘촘히 짜여진 그물망에서 빠져나가진 못 했을 것이다.


권안생은 수혈이 짚인 채 바닥에 나동그라진 무사 중 한 명을 깨워 살아남은 벽가 남매의 행방을 묻기로 했다.


“정신이 드나?”


“네 놈은 대체...”


쑤욱-


“읍!”


정신이 들자마자 권안생의 정체를 물으려드는 무사에게 권안생을 아혈을 짚어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무림맹의 무사의 눈을 마주보며 말했다.


“방금 내가 누른 곳은 말을 할 수 없게 하는 아혈이다. 그리고 이 곳은 당혈.”


“!!”


“아마 지금쯤 온몸에 벌레가 기어다니고 있는 기분일테다. 그리고 이곳은 마혈. 이곳은 택혈...해혈...비유혈...”


무사는 권안생의 손가락이 제 몸에 닿을 때마다 생겨나는 참을 수 없는 괴로움에 몸을 비틀며 저항하려 했으나 이미 점혈로 제압되어 있는 몸은 움직일 기색이 없었다. 그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눈만 껌뻑이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단 한번의 점혈로 죽음에 이르는 사혈이 있다. 지금부터 난 네 아혈을 풀어 입을 열어 줄 참이다.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거나 소리를 지를 시에는 지금껏 누른 혈도를 다시 한 번 반복해 누른 뒤 마지막으로 사혈을 눌러주마. 동의한다면 눈을 크게 두 번 깜빡여라.”


“...”


아혈을 집혀 대답할 수 없는 무사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크게 두 번 깜빡이며 권안생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그리고 권안생은 무사의 점혈된 아혈을 풀어주며 벽가 남매의 행방에 대해 물었다.


“너희가 잡아간 벽가의 남매는 어디에 있느냐. 또 그들을 지키는 인원은 어떻게 구성되있나?”


“...이 곳에서 정원을 넘어가면 있는 마굿간의 옆에 마구를 넣어 놓는 헛간이 있습니다. 남매는 그곳에 묶어두었고 감찰단의 무사들이 셋 씩 교대로 그들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감찰단주와 비연단주는?”


“단주님들은 낮에 벽가의 여식을 심문하셨으나 소득이 없어 내일 아침 다시 문초를 시작한다 하셨으니 지금은 본관에서 쉬고 계실 겁니다.”


“그럼 됐다.”


툭-


원하는 대답을 모두 얻어낸 권안생은 무사의 수혈을 짚어 다시 잠재웠다. 눈을 감기며 쓰러지는 무사의 입가엔 다시 찾은 안식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문이 없는 헛간의 작은 문 안에서 한 사내가 기지개를 켜며 걸어 나왔다. 사내는 찌뿌둥한 허리를 두드리며 하늘에 있는 달을 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에구구구. 달이 크고 희게 차오른 것이 그 계집년의 궁둥짝을 떠올리게 하는구나. 흐흐. 이렇게 된 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퍽!


“윽!”


만월을 보며 음담패설을 일삼던 사내는 별안간 목 뒤에 가해진 강렬한 충격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사내를 쓰러트린 권안생은 재빨리 헛간의 안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무사의 말에 따르면 삼인 일조로 돌아가며 감시하고 있다하니 안에는 아직 둘이 남아 있을 터였다.


권안생은 헛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문간 옆에 의자에 앉아 검을 괴고 졸고 있는 사내의 머리를 그대로 내리쳤다.


아직 권안생의 침입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잠에서 깨지 못한 사내는 자신의 검 손잡이에 목뼈가 부러지며 그대로 절명했다.


그리고 그 장면을 목격한 그의 동료가 호각을 불어 다른 이들에게 구원을 요청하려 했으나 즉시 목이 부러진 사내의 검을 들어 날린 권안생에 의해 미처 기운 빠지는 호각 소리만 남긴 채 목숨을 잃었다.


단 한 번의 호흡에 두 목숨을 앗아간 권안생은 참아낸 숨을 뱉어 고른 뒤 헛간에 감금된 벽가의 남매를 찾으려 눈을 돌렸다.


그리고 마침내 구석에서 찾아낸 그들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 없었다.


벽운소의 고운 얼굴은 무차별한 폭행에 의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잔뜩 부어있었고 아랫도리는 비릿한 사내들의 흔적과 피로 범벅이 된 비참한 상황이었다.


벽운경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공단에게 입은 검상은 물론이고 제 누이가 당할 치욕을 막으려하다 흠씬 두들겨 맞은 흔적이 온 몸 구석구석 나있었다.


'아...맹주여. 당신의 야욕이 만들어낸 결과가 보이시오? 당신은 이 죄를 어찌 감당하려고 이러는 겁니까...'


참담한 광경에 머리를 감싸 안은 권안생의 귓가로 희미하게 가녀린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인은...누구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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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백화혈사(柏花血事)-3 +2 22.05.11 446 27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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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화혈사(柏花血事)-1 +2 22.05.11 1,008 42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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