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웃음
잠시 관아에 고변할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장소칠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안 그래도 무림인들에 의한 난리를 방관하고 있는 낙양의 관청이었다. 일개 만두 장수인 그가 찾아간다 하여 별다른 조치를 취해 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또 조치를 취한다 한들 그게 그의 목숨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문사가 약속을 지켜 주기를 바라며 가만히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
흑호파의 정문에 도착한 원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건물은 멀쩡한 상태였지만 이상하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다. 정문을 지키고 있는 사람도 단 한 명뿐이었으며 그 역시 익숙한 얼굴은 아니었다. 문으로 원호가 다가가자 보초가 화들짝 놀랐다.
“누, 누구십니까?”
“흑호 두목이 찾는다 하여 왔네. 관청 앞 만두가게에서 사람을 보내서 왔다고 하면 알아들을 걸세.”
원호는 이름을 숨기고 자신이 찾아 온 용건만을 밝혔다. 흑호파의 분위기가 묘한 것도 마음에 걸렸을 뿐더러, 지난번 이후의 습격 역시 흑호파에서 자신의 은신처 위치가 새어나갔기 때문이었다.
신분을 상세히 물을 법도 했지만, 보초는 이내 밝은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그저 적이 아니란 게 기쁜 모양이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문을 열고 안으로 사라지는 보초를 보며 원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신분을 확인하지 않은 건 그렇다 치더라도, 상대가 어떤 인물인지도 모르는데 문을 대놓고 비운다는 건 보초로서 상식 이하의 행동이었다.
흑호파의 무서운 점은 지닌바 무공이 아니라, 뒷골목 문파답지 않은 잘 짜여진 체계와 그를 망설임 없이 수행하는 구성원의 철저함에 있었다. 말단이라는 하나 소속원이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기존의 흑호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
“무슨 일은. 쓸 만한 녀석들이 싸그리 죽은 거지.”
“전부 죽었다...? 대체 누가?”
원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흑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만나보지 않았나? 생각보다 충격이 크지 않았었나 보군.”
“아...”
이후의 악귀 같은 모습이 원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생각해 보면 그가 흑호파를 고이 지나갔을 리가 없었다.
“나름 숫자도 불리고 실력도 이런 뒷골목 패거리치고는 제대로 갖춰 놨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진짜를 상대하기에는 어림도 없더군. 뭐, 그 정도가 됐으니 규원 같은 독종 녀석도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자네에 대한 정보를 불어 버린 거지만.”
“규원은 무사합니까?”
“비교적. 어느 정도 뒷수습을 마치고는 수련을 하겠다고 틀어박혔어. 어지간히 분하고 수치스러웠던 모양이야. 아마 자신이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기 전까지는 절대 밖으로 나오지 않겠지. 그리고 분명히 스스로의 힘으로 발전할 거야. 내 밑에 있는 녀석들 중에서는 가장 독하고, 자질도 있는 놈이니까.”
“...”
“뭐, 그래 봤자 어림도 없지만. 진짜 무림인은 삼류의 노력 따위로는 넘어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 흐흐.”
흑호가 흘리는 웃음소리에 원호의 몸이 굳어졌다. 흑호의 말에 담긴 것은 자조, 그리고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평소에 그가 봐 왔던 흑호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아니. 생각해보면...’
흑호파를 결성한 이후에도 흑호는 항상 문파와는 거리를 두는 편이었다. 실무를 처리하는 것은 규원과 몇몇 간부들이었고, 그는 자신의 수련을 하거나 휘적휘적 마음 가는 대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 일쑤였다. 실제로 흑호가 일선에 나서는 것은 일반 간부들로는 감당하기 힘든 신분의 자들을 상대할 때나, 원호와 관련된 것처럼 은밀한 작업에 나설 때였다.
하지만 그렇다 한들 그런 말을 쉬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호의 얼굴을 보며 흑호가 빙글거렸다.
“진정하라고.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게 원호 자네 아니었나? 말 몇 마디에 흥분하는 건 살수와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라고. 20년 동안 살행을 해 왔으면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텐데.”
“...”
“아니면, 지금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 아이와 함께라면 실력이 늘기는 했을 테니.”
의외의 말에 원호의 눈이 커졌다. 흑호가 큭큭거렸다.
“왜.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한가?”
“...”
“진정하라고. 그런 얘기를 하자고 부른 건 아니니. 일단 일이 우선이지.”
“일...이요?”
원호가 화들짝 놀랐다.
“왜. 설마 일 이외의 문제로 내가 자네를 찾으리라 생각한 건가? 볼 일이 없을 때는 내가 직접 자네를 찾아갔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건 그렇지만...전 지금...”
“그렇지. 한왕부에 있지. 내가 직접 집어넣어서. 설마 단순히 자네보고 몸 간수 잘 하라고 거기에 넣어 놨다고 생각하는 건가?”
흑호의 말에 원호의 몸이 굳어졌다. 그의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이 느껴졌다. 흑호가 빙긋 웃으며 품에서 쪽지 하나를 꺼냈다.
“언제나처럼 잘 읽고 처분하라고. 그럼.”
하지만 원호는 쪽지를 움켜쥔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흑호의 표정이 묘해졌다.
“왜.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대체 당신은 누굽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지?”
흑호가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맞은편에 앉으며 원호가 입을 열었다.
“문주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입니다. 아무리 문주가 남다르다 한들 무림맹에, 사마련에, 심지어 한왕부까지. 일개 흑도 문파의 주인이 얽힐 수 있는 대상은 아닙니다.”
“너무하군. 얽힐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흑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얼굴에는 흥미롭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원호의 말투가 더욱 진중해졌다.
“그리고 문주가 그 이후라는 자를 잡았다고 들었습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거의 반송장 상태더군. 덕분에 쉽게 잡았지.”
“반송장인 상태조차 우리 같은 뒷골목 인생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 하지만 문주는 그를 잡았고, 심지어 별다른 부상도 입지 않은 듯 보입니다.”
“그래서. 내가 다치기라도 해야 했다는 건가?”
섭섭하다는 듯 흑호는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하지만 원호가 굳은 표정으로 그를 계속 응시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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