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개, 적염창귀
“호오, 날 아는 게냐? 역시 거지새끼답구나.”
향개의 소속인 개방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개방은 거지들의 모임에서 시작되었던 탓에 정보에 꽤나 밝았고, 정파에 편입된 초기에는 무림맹의 정보망 역할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무림 문파로서 제대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이후로는 그런 특성은 많이 사라졌다. 개방이 정보를 모으는 방법이라야 전국에 무수하게 퍼진 거지들을 통해 적대 단체 혹은 주요 인사의 인원 이동이나 움직임을 잡아내는 정도였는데, 이런 식으로는 진짜 핵심적인 정보를 얻어 내기는 힘들뿐더러 자금과 인력만 뒷받침이 되면 충분히 대체가 가능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방 역시 스스로 그런 하부 조직 같은 위치에서 벗어나 다른 구성원들과 대등한 무림 문파로 자리를 잡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연유로 세월이 지난 지금 개방은 어지간한 대문파에 버금갈 정도로 큰 세력을 구축했고, 개방(丐幇)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일반적인 거지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돈을 가진 이가 힘이 부족하지 않듯, 힘을 가진 이가 순수한 거지로 남아 있기도 힘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련 같은 적대적 관계의 문파나 사이가 안 좋은 무림 세력이 개방 혹은 그 구성원을 조롱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말이 거지 취급, 혹은 정보 외에는 아무런 보잘 것도 없는 삼류 문파로 개방을 비하하는 것이었다. 이런 경우 개방도들 역시 어지간하면 참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라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거나, 심하면 생사결에 버금가는 수준의 난투극이 벌어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그런 일반적인 모습과는 달리 향개는 쉽게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적염창귀는 그와 격을 달리하는 고수인데다, 독문 무기와 무공의 특성상 자신보다 약한, 혹은 다수의 적을 상대로 할 때 절대적인 강점을 발휘하는 유형의 고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마련의 군사 정필이 비밀리에 그를 낙양으로 보내 기습에 투입한 이유기도 했다.
“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지.”
창을 고쳐 잡은 적염창귀가 향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림맹의 무사들이 그를 막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중과부적, 사방에 피를 흩뿌리며 하나 둘 쓰러졌다. 희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더 견디지 못한 향개가 앞으로 나서며, 부하들에게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 적염창귀가 씩 웃었다.
“드디어 나설 생각이 들었나 보군.”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노괴.”
개방 제자들의 기본 무기인 타구봉을 뽑아 든 향개가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비수처럼 극단적인 건 아니지만 비교적 단병(短兵)에 속하는 타구봉의 특성상 아무 생각 없이 다가가는 것은 자살 행위였다. 적염창귀의 홍련삭과의 길이 차이가 워낙 현격해 필연적으로 선공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탓이었다.
‘기회를 노려서...한 번에 거리를 좁힌다. 그러면 오히려 내 타구봉 쪽이 훨씬 유리해.’
향개의 상체가 흔들거리며, 두 발이 묘한 동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쓰러질 듯 말 듯, 바람에 휘청이는 듯한 모습에 적염창귀의 눈에는 이채가 떠올랐다.
“취팔선보...인가? 개방의 핵심 제자들에게만 전수되는 보법이라고 알고 있는데...그래도 제법 한 수는 있는 거지새끼로구나.”
심호흡을 한 창귀가 손을 휘저었다. 곧 무수한 창영(槍影)이 향개의 몸을 향해 쏟아졌다. 한 발 한 발이 모두 일격에 숨을 끊을 수 있을 정도로 치명적인 참격이었다. 옷이 찢어지고 피가 튀었지만 향개는 끈질기게 공격을 피해 냈다. 서른 번쯤의 공격을 끝낸 후, 적염창귀의 창질 사이에 약간의 간극이 생겼다. 순간 향개의 눈이 번뜩였다.
‘지금이다.’
땅에 무릎을 꿇듯 몸을 숙인 향개가 그 자세 그대로 달려들었다. 얼핏 멀리서 보면 땅을 거의 기는 것 같은 극도로 낮은 자세였다. 약간의 차로 창이 등을 스치며 피가 튀었지만, 겉을 흩었을 뿐 치명적인 타격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지자 그제서야 창귀도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창을 내지른 터라 몸의 중심이 앞으로 쏠려 있었고, 그렇다고 무기를 놓을 수도 없었다. 결국 창을 잡은 채 오른쪽으로 몸을 선회하며 거리를 벌리는 선택을 했고, 그로 인해 처음으로 적염창귀의 공세가 멈췄다. 주변의 무림맹 무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됐다!”
천신만고 끝에 잡은 선기를 놓칠 정도로 향개가 허술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대로 땅을 박차며 달려 든 향개가 타구봉법의 전반부 아홉 초식을 펼쳐 냈다. 개방 제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기본적인 초식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빠르게 시전할 수 있는 공격이기도 했다.
눈앞을 가득 메우는 봉의 잔영을 보며 적염창귀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아무리 나무로 만든 봉이라 한들 머리를 당하면 즉사였고, 다른 곳을 맞는다 한들 뼈 몇 개 부러지는 건 일도 아니었다. 일단 주요 부위를 방어하기 위해 그는 다시 뒤로 풀쩍 뛰었다. 향개의 눈이 다시 한 번 빛났다.
“걸렸군.”
몸을 뒤집은 그가 옆으로 돌려차기를 날리며, 동시에 봉을 일직선으로 내질렀다. 봉이 노리는 곳은 적염창귀가 창을 잡고 있는 오른 손목이었다. 반사적으로 창을 회수하려던 적염창귀가 멈칫했다. 봉의 속도가 그리 빠른 것은 아니라 충분히 회수는 가능했다.
하지만 창을 잡은 손을 회수하기 위해서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어야 했고, 그 위치에는 향개의 돌려차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한 번의 공격으로 두 가지를 본 절묘한 공격이었다. 적염창귀가 혀를 찼다.
“젠장.”
망설임은 찰나였고 선택은 빨랐다. 적염창귀는 미련 없이 홍련삭을 손에서 놓으며 뒤로 물러났다. 창이 땅에 나뒹굴며 커다란 소리를 냈다. 적수공권이 된 창귀를 보며 향개가 씩 웃었다. 온 몸이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지만, 흐름은 완전히 그에게로 넘어간 상태였다.
“창끝이 무뎌지신 것 같구려. 한낱 거지새끼를 상대로 이렇게 고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적염창귀 선배.”
“확실히 그런 것도 같구나.”
적염창귀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답했다. 그의 여유로운 모습을 보며 향개가 이죽거렸다.
“그렇게 허세를 부리실 상황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허세인지 아닌지는 덤벼 보면 알겠지.”
창귀가 자세를 바꾸며 손을 뻗어 까딱거렸다. 향개의 이마에 힘줄이 솟았다.
“오늘 이 자리에 뼈를 묻게 해 드리지요.”
봉을 고쳐 잡은 향개가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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