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7. 무슨 일 있었어?
집으로 돌아온 리내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 있었다.
몇 시간 만에 확 차분해진 느낌?
원래도 차분한 아이긴 했는데, 이게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지만······.
“리내야, 아빠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니요.”
“그럼 유치원에서 무슨 일 있었어?”
리내는 커다랗고 동글동글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빠.”
“응?”
“방과 후는 안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제만 해도 친구들이랑 더 놀게 방과 후를 가도 되냐고 했던 터라, 나는 유치원 알림장을 끄고 리내와 시선을 맞췄다.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다 말하던 애가 갑자기 입을 닫아버렸다는 건, 분명 무슨 일이 있었다는 증거였다.
아동학대? 그것도 아니면 또래 성폭력?
언젠가 뉴스에서 본 적 있는 온갖 무서운 소식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친구들이랑 싸웠어?”
“아니요. 교우관계는 완만합니다.”
교우관계가······, 완만?
절대 아이들 입에서 나올 단어는 아니었다.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어?”
하지만 유치원 선생님이 애들에게 할 만한 말도 아닌 것 같았다.
학부모 전화에 그렇게 대답한 거라면 몰라도.
“아니요.”
“그럼? 왜 갑자기 안 가고 싶어진 거야? 아빠한테 다 말해 봐.”
“그냥 집에 오고 싶어서요.”
나랑 오래 떨어지는 게 무서운 걸까?
그게 아니라면, 알림장에서 본 ‘오렌지 사건’이 문제였을지도 몰랐다.
알림장에는 다른 아이들은 시다고 뱉어버린 오렌지를 리내는 담담하게 먹었다고 적혀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이 튀는 걸 싫어하니까, 왜 혼자 오렌지를 먹었느냐고 애들끼리 뭐라고 했을 수도 있었다.
혼자 칭찬받아서 좋냐고 했다든가.
그러기에는 애들이 다 너무 어린가?
선생님이 박수를 유도하니까 친구들이 모여서 열심히 박수를 쳐줬고, 멋지다는 말도 해줬다니까 그건 아닐 거 같긴 한데, 짐작 가는 게 없으니 모든 게 의심스러웠다.
“리내야.”
내 말에 리내가 눈을 깜빡였다.
“아빠한테는 무슨 고민이든 말해주기야.”
“네!”
마지막에는 좀 평소의 리내 같았다.
“지금 말할 고민은 없고?”
“네!”
“알았어.”
할 말이 없다고 하니, 그냥 넘어가긴 하지만······.
‘완전 신경 쓰여!’
아빠가 돼서, 의연하게 넘어갈 수 있다면 그건 정말 그 사람이 된 사람인 게 아닐까?
궁금해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 탓에 빨래 돌려놓은 것도 완전히 잊었고, 겨우 기억나서 헹굼 + 탈수 돌려놓은 것도 또 잊었다.
리내는 그런 바보 같은 나를 졸졸졸 따라다녔다.
평소라면 소파에서 TV를 보거나 졸고 있을 시간이라 내 걱정은 커져만 갔다.
혹시 같은 여자면 얘기할까 싶어서 선이 녀석한테 전화했는데······.
[안녕하세요, 혹시 남자친구분이신가요?]
녀석의 편집자가 받았다.
몇 번 목소리를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상대는 나를 모를 게 뻔해서 평범하게 누구냐고 물어봤다.
“아뇨, 친군데요. 전화 받으신 분은 어떻게 되세요?”
[리원 미디어 김은수 편집자입니다. 작가님이 지금 작품 집필 중이셔서 연락이 곤란할 것 같아요. 급한 일 아니시면 10시 이후에 다시 연락해주시겠어요?]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밤 10시까지 바짝 굴릴 생각인 듯했다.
보통 출판사는 6시면 퇴근하는 것 같던데, 녀석의 편집자는 정말 극한 직업인 것 같았다.
“저한테 전화 왔었다고 하면 탈출할 궁리만 할 테니까 그냥 아무 얘기 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전화기까지 빼앗은 걸 보면, 마감이 대충 한 달쯤 앞으로 다가온 모양이었다.
내 편집자는 내가 휴재해야 한다고 하면 ‘네! 알겠습니다!’ 하고 말았고, 연중 한다고 했을 때도 ‘작가님이 오래 고민하고 결정하신 일이겠죠. 알겠습니다!’ 하고 쿨하게 보내줬던 터라 볼 때마다 신기했다.
여하튼, 밤 10시는 통화하기 곤란할 것 같아서 그때쯤 메시지나 한 통 보내 놓을 생각이었다.
유치원 선생님한테도 전화로 물어보고.
전용 어플로 먼저 통화 가능한지 상담 신청을 해둔 나는 서둘러 베란다에서 나왔다.
리내가 베란다 문에 이마를 대고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무서웠다.
“아빠.”
“응?”
“누구랑 전화했어요?”
“고모랑.”
“고모 온대요?”
“아니, 고모 일하느라 바빠서 당분간은 못 만날 거야. 고모 보고 싶어?”
“아니요.”
아무래도 녀석이 당분간 못 온다는 말에 씨익 웃은 것 같았다.
‘아빠랑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다거나 그런 건가?’
소유욕? 아니면 불안감?
상담 날까지는 아직 한참 남았는데, 지금이 바로 긴급 상담이 필요한 때일까?
나도 모르게 리내를 응시하고 있으니, 리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쩌면 내가 너무 예민한 걸 수도 있었다.
아이들도 피곤해서 텐션이 낮아지거나 할 수 있는 거니까.
“아빠랑 저녁 장 보러 갈까? 뭐 먹고 싶어?”
“아빠만 다녀오는 건 어떨까요?”
“응?”
“집에 있고 싶어요.”
100%다.
이건 유치원에서 100%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리내야, 아빠 통화 좀 하고 올게.”
“누구요?”
“어, 아빠 친구.”
“아빠 친구 누구요?”
“리내는 아직 본 적 없을 거야.”
집요하게 물어오는 리내를 간신히 따돌리고, 나는 베란다로 나갔다.
그리고 바로 유치원에 전화를 걸었다.
원래는 상담 신청을 하고, 어플 내 통화 기능을 이용해야 했지만, 마음이 너무 급했다.
* * *
오후 8시.
나한테는 한참 이르지만, 리내는 자기 딱 좋은 시각이었다.
리내가 자면, 나는 설거지를 하고 좀 쉬다가 방송하러 갈 예정이었다.
유치원에서는 특별한 일은 없었다고 했다.
일과 시간 내내 잘 놀았고, 잘 웃었으며, 평소와 같았다고 했다.
선생님은 만약 내가 너무 염려가 되면, 등하원 도우미 선생님께도 혹시 버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답을 해주겠다고도 덧붙였다.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 끊긴 했는데,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고 있었다.
내가 장 보러 나가자거나 했을 때 혼자 있겠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5살인데 벌써 사춘기가 왔을 리는 없고······.’
다행히 두 번째 제안에는 같이 나가겠다고 했지만, 억지로 나가겠다고 하는 걸까 봐 배달 음식을 시켰다.
치킨을 배부르게 먹은 리내는 잘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 위를 토닥이고 있는데, 리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아빠.”
“응?”
“책 읽어주세요.”
“좋아! 아빠가······.”
안 그래도 준비했다고 하려다가 그냥 씩 웃었다.
각색해서 읽어준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아이들은 자신들을 ‘아기’ 취급한다는 걸 싫어한다고 들었으니까.
나중에 글을 배워서 직접 읽게, 두지는 않겠지만.
뭐, 아무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쯤부터 판타지 소설을 읽었으니 리내도 대충 그쯤에나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전에는 문자로서 읽을 수는 있어도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아빠가 뭐가요?”
“응?”
“말을 끝까지 안 했어요.”
“아하, 아빠가 책 찾아왔다고. 어제는 못 찾아서 그냥 잤잖아.”
“와!”
리내가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아빠가 책 읽어준다고 친구들한테 얘기했어요!”
“그랬어?”
“선생님이 아빠 최고라고 했어요!”
“책 내용도 얘기했어?”
“아니요!”
“그래? 왜?”
역시 내용이 너무 어려운가 했더니, 리내가 헤실헤실 웃었다.
“다 읽고 나서요! 중간만 알면 친구들이 궁금하잖아요.”
친구들 입장에서는 천사지만, 내 입장, 아니 전 작가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은 이야기였다.
완결 나면 줄거리를 스포 하며 추천하겠다는 거 아닌가.
연재 소설은 독자들이 처음부터 잘 따라와 주지 않으면 작가들이 관심을 갈구하다가 굶어 죽는다.
당연히 모든 작가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초 메이저 작가에 속하는 선이 녀석도 반응이 별로면 가차 없이 조기 완결을 때려버리니까.
걔야 그렇게 하고 게임 하고 싶어서 그런 거지만.
“그렇구나. 친구들은 좋겠다. 리내가 가서 또 얘기해줄 거잖아.”
“네!”
괜히 애가 한 말에 과한 의미 부여를 한 것 같아서 얼른 책을 꺼내 펼쳤다.
미리 붙여둔 포스트잇이 있어 든든했다.
“공주님은 전날 있었던 일이 꿈처럼 느껴졌어요. ‘이름을 듣는 건 오랜만이네.’ 하고 생각하기도 했죠.”
리내가 빤히 나를 올려다봤다.
경청할 때마다 입이 살짝 벌어지는데, 그게 귀여웠다.
“막 일어난 공주님의 방에 누군가 노크했어요. 공주님은 이불을 정리하며 대답했어요. ‘일어났어요. 들어오셔도 돼요.’”
1권을 다 정리해버린 참이긴 한데, 2권도 읽어야 한다면 그때는 대사를 살리지 말고 다 문장으로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으로 웹소설의 맛은 대사가 결정한다고 생각해서 살린 건데, 읽는 입장에서는 좀 그랬다.
그냥 읽자니 밋밋하고, 그렇다고 연기를 하긴 좀······.
“호위무사인 줄 알았는데, 문 너머에 있는 사람은 마을 청년이었어요.”
“아빠.”
“응?”
혹시 너무 늘어진다거나, 재미가 없다거나 그런 건 아닐까 싶어서 절로 긴장됐다.
“공주님도 마법을 쓸 수 있어요?”
역시 애들은 이상한 걸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요새 어린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공주님들은 얼음을 만들 수 있다거나 하니까······.
“글쎄, 리내는 공주님이 마법을 쓸 수 있을 거 같아?”
우리 리내도 ‘물음표 앵무새’가 되는 걸까 싶어서 웃으며 물어봤더니, 리내는 왠지 당황한 얼굴이었다.
“왜? 질문이 너무 어려웠어?”
“아니요! 리내는 공주님이 마법을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이제껏 한 번도 3인칭을 쓴 적 없던 리내가······!
아기들은 대체로 자신을 3인칭으로 지칭하다가 1인칭으로 넘어가곤 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리내는 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1인칭을 써서 들을 일이 없을 줄 알았다.
“리내는 공주님이 어떤 마법을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몰라요! 아빠가 알려주세요!”
한 번 더 듣고 싶어서 일부러 유도했는데도, 전혀 통하지 않았다.
‘마법이라······.’
여타 로판 작품들이 그렇듯이, 내 소설에도 소드 마스터와 마법사가 나왔다.
특별한 사람들만 마나를 다룰 수 있고, 보통 가문 대대로 어쩌고저쩌고······.
여자 주인공이 마법을 쓰는 장면은 좀 지나서 나오는 터라 페이지를 조금 넘겨야 했다.
소설이라는 특성상, 설정을 줄줄줄 나열하기보다는 사건과 섞어서 보여주는 터라······.
리내 눈높이에 맞게 줄이면서도 이후 사건을 스포 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어려웠다.
열심히 정리하던 나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읽다 보면 나중에 나오는데, 우리 리내 기다릴 수 있지?”
유명한 실험도 있지 않은가.
달콤한 간식을 주고 5분 기다리면 1개 더 준다고 했을 때, 기다려서 1개 더 받은 애들은 대성했다고.
“기다릴 수 없어요.”
단호한 리내의 말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리내가 나중에 대성할 수 없다는 그런 문제는 아니고, 지금껏 내가 생각한 리내의 캐해석이 완전히 달라지는 거니까.
내가 알던 리내는 여기서 ‘네!’ 하고 대답해야 했다.
“왜, 왜 기다릴 수 없을까? 너무 궁금해서?”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리내도 덩달아 당황했는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엘사나랑 싸우면 누가 이기는지 궁금해서요!”
나는 안도했다.
어느 시대에 태어난 애들이든, 싸워서 누가 이기는지는 중요한 쟁점인 모양이었다.
나도 어릴 때 마켓맨이랑 박쥐맨이 싸우면 누가 이기느냐고 지식on에 물어봤던 기억이 있었다.
덜 큰 어른이 박쥐맨이 이긴다고 자세하게도 써 놔서 마켓맨을 좋아하던 나는 어린 마음에 상처을 입었었다.
“리내는 엘사나랑 이 책 공주님이랑 싸우면 누가 이길 거 같은데?”
“당연히 에일린이죠.”
내 책을 그렇게까지 좋아해 주다니.
시간 들여 각색한 보람이 있었다.
“리내가 그렇게 생각하면 에일린이 이길 거야.”
쭉 공주님이라고 지칭했던 거 같은데, 리내의 머릿속에 ‘그 장면’이 꽤 깊이 자리 잡은 듯했다.
호위무사가 이름을 부르는 그 부분.
내가 삽화를 보여주며 설명하니까, 리내는 한참 동안 삽화를 바라보았다.
‘우리 리내는 호위무사 픽이구나······.’
최연소 독자님은 남자 주인공 파트가 나오면 어떤 반응일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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