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찾았다
#003 찾았다
나는 몇 번 눈을 깜박이고 자세를 바로 했다.
무림지옥에서의 내공은 실제처럼 구현된다.
검을 쥐거나 내공을 검에 주입하는 감각이 모두 실제처럼 느껴졌다.
진짜로 기가 흐르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검기를 흘릴 때, 무공을 펼칠 때의 감각은 실제같다.
그리고 그 감각은 방금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무림지옥에서 일궜던 걸 모두 잃었다고 생각했지만 다를지 모른다.
어쩌면 VR게임을 하다 죽었기 때문에 그 상태 그대로 이곳에 왔을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이런 판타지 세계에 환생한 것 자체가 괴상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법이 존재하는 세상에 태어나는 걸 누가 상상이나 생각했을까.
사람의 영혼이 전생의 기억과 생각, 경험을 모두 가져와 다른 세계의 인간이 될 수 있다면, 내재해 있던 힘을 가져오는 것도 어쩌면 가능할 것이다.
아니, 제발 가능해 줘.
나는 눈을 감고 내면에 집중했다.
그러나 처음에 잠깐 맛본 것 같은 느낌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역시 없는 걸까.
조바심이 난다.
'침착해. 급하게 하려고 하면 안 돼. 침착하게... 침착하게....'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다 문득 깨달았다.
침착하게, 무심하게.
루퍼트로 살면서 스스로에게 많이 속삭였던 말이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성격이 완전히 달라져도, 역시 루퍼트와 지구의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하나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만 태어나 자란 환경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둘 다 똑같은 나다.
'그러니까 괜찮아, 할 수 있어.'
무림지옥 안에서 나는 무적이었다.
높은 내공과 현란한 검 실력, 정확한 판단력, 빠른 반응속도.
돈의 힘을 빌린 능력이지만, 그걸 바탕으로 싸운 건 나 자신이다.
손가락만으로 즐기는 일반 게임과 달리, VR게임은 자신이 직접 뛰고 검을 휘둘러야 한다.
현질로 얻은 능력이라도 그걸 활용해 싸운 건 확실하게 내 몸이었다.
그러니 만에 하나 무림지옥의 능력이 나한테 깃들었다면, 혹시 내 영혼에 새겨져 있었다면, 그래, 틀림없이 이 몸 루퍼트의 신체에도 드러낼 수 있다.
나와 루퍼트는 같은 영혼, 같은 사람이니까.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찾아 헤맨 끝에 몸속에서 뭔가가 꿈틀 움직였다.
실낱처럼 미세하지만 확실하게.
'아, 찾았다.'
이거다.
그렇게 느끼고 그 감각을 막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시종의 목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루퍼트 님, 백작님께서 부르십니다."
"쯧."
나도 모르게 혀를 찬다.
이제 막 뭔가를 잡았는데 시종의 목소리 때문에 사라져 버렸다.
시종을 무시하고 다시 한번 찾으려고 했지만 흔적도 없었다.
어쩔 수 없다.
눈을 뜨자 시종이 굳은 얼굴로 나를 보다 얼른 고개를 내렸다.
왠지 귀신 보는 듯한 반응이다.
'이건 좀 조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시종이 이렇게 놀랄 정도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거다.
'당분간은 루퍼트의 탈을 쓰고 얌전히 있다 서서히 바뀌는 게 좋겠지.'
하지만 잘 될까 모르겠다.
내 안에 루퍼트의 기억은 있지만 거의 영화 보는 듯한 감각이니까.
전생이 살아나면서 인격이 교체된 느낌이었다.
뭐, 일단은 밥부터 먹자.
내가 수프를 먹기 시작하자 시종이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저... 루퍼트 님, 백작님께서 부르십니다."
"들었다. 하지만 이대로는 걷지도 못해. 아버님도 내가 며칠이나 누워 있었던 건 알고 계실 테니 조금 늦게 가도 뭐라 하지는 않으시겠지."
"...."
시종은 뭔가 말할 듯하다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백작이 내 아버지라는 느낌은 없다.
전생의 기억이 되살아난 지금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구의 부모님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고, 그게 아니라도 백작은 부모의 역할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만나는 일 자체가 거의 없고 대화는 더더군다나 해본 적이 없다.
타인이나 마찬가지다.
지금도 진짜 부모라는 생각이 있었다면 아들이 깨어났을 때 찾아와 봤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막 깨어난 아들한테 지금 당장 네 발로 걸어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겠지.
내 몸 축내가며 서둘러 가 볼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겠다.
'어차피 가봤자 좋은 소리는 못 들을 테고.'
이 시점에서 나를 부른다면 필시 후계자 관련이다.
당연히 나한테 이로운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밥 먹고 조금 늦게 가서 나쁜 소식을 듣는 거나, 밥도 못 먹고 허둥지둥 달려가서 듣는 거나, 어차피 똑같다.
안 좋은 소리 들으러 굶으며 달려가는 게 바보야.
혹시 체하거나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나는 느긋하게 수프를 입에 흘려 넣었다.
'괜찮은데?'
다른 건 몰라도 수프는 지구보다 낫다.
맛있네.
*
'이 사람이 정말 루퍼트 님인가?'
카일은 아까도 스스로에게 했던 질문을 다시 중얼거렸다.
그는 무능한 후계자 루퍼트를 벌써 십 년 이상 모시고 있다.
누구보다 루퍼트를 가까이에서 보아왔다.
몇 년에 한 번, 그것도 겨우 먼 거리에서나 얼굴을 볼까 말까 한 백작이나, 거리를 둔 채 지시만 내리는 집사장보다, 그리고 어쩌면 루퍼트 자신보다 그가 더 루퍼트를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카일이 아는 루퍼트는 비 맞은 개처럼 언제나 속으로 떨고 있었다.
언제 누가 자기의 나쁜 점을 아버지에게 전할까 두려워해 카일한테도 거친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백작의 말이 한마디라도 전해지면 감시하는 사람도 없는데 곧바로 거기에 따랐다.
백작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잊어버릴 만큼 오래 시간이 지나도 루퍼트는 잊지 않고 그대로 따르는 거다.
루퍼트에게는 아버지의 말이 곧 법이다.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애써 괜찮은 척, 담대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아버지 사랑을 바라며 언제까지고 자라지 않는 불쌍한 아이 같았다.
배워봤자 쓸모없는데 마법을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후계자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욕심보다는 백작의 관심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데 백작이 부른다고 전해도 귀찮은 표정을 보인다고?
수프를 먹고 나서 가?
말도 안 되지.
카일이 아는 루퍼트였다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기어서라도 갔을 거다.
'설마....'
불길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주 드물게 마녀가 발견된다.
태어나면서부터 마녀인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때로는 갑자기 마녀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어디까지나 소문에 불과하지만 마녀는 원래 알 수 없는 존재다.
그런 일도 가능하겠지.
그리고 마녀에는 여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 드물지만 남자 마녀도 있다.
"...."
의식불명이 되어 쓰러진 뒤, 의사는 루퍼트가 살아날 가망은 전혀 없다고 단언했다.
이미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데 다만 심장이 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백작은 루퍼트를 죽은 것으로 취급하고, 카일 자신은 반나절 정도 옆에서 지켜봤지만 그 뒤는 자기 일에 쫓기게 되었다.
루퍼트가 죽으면 그는 다른 일을 맡게 된다.
이미 집사장의 지시가 내려왔다.
루퍼트가 죽자마자 카일은 손님 접대와 관련된 일에 배치될 것이다.
그렇게 될 거라고 알면 미리미리 그 준비를 해두는 게 좋다.
그렇게 생각해 옆을 비워도 그걸 지적하는 이가 아무도 없을 만큼 루퍼트의 상태는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서 멀쩡하게 먹고 움직인다고?'
루퍼트 님은 모르지만 뒤쪽에서는 시체가 되살아났다며 난리가 났다.
평소에는 근엄한 집사장이 몇 번이나 진짜 루퍼트 님이 깨어났냐고 물을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사실이라고 알게 된 뒤 부랴부랴 의사를 부르러 사람이 갔지만 지금 같은 상태라면 필요 없을 것이다.
반시체가 되살아 난 것도 괴상한 일인데, 성격까지 정반대가 되었다면 마녀로 의심하지 않는 게 오히려 힘들다.
'... 가능성이 있어.'
생각해 보면 루퍼트 님은 처음 탄생에서부터 특이한 경우였다.
마법사 피를 강하게 유지하는 바론 백작가에도 마법사 아닌 일반인은 종종 태어난다.
그러나 마력이 있는데도 마법을 못하는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카일은 들어본 일이 없다.
그래서 루퍼트 님이 마법을 전혀 발현할 수 없다고 알았을 때 모두가 놀라고 지나치게 실망했던 것이다.
그게 모두 마녀였기 때문이라면, 혹은 마녀로 변화할 존재였기 때문이라면.
거기까지 생각한 카일은 흠칫 몸을 떨었다.
'생각하지 말자. 아니, 생각해서는 안 돼.'
비록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났지만 루퍼트의 모친은 공작가 태생이다.
공작가는 왕가와도 피가 가까우니 태생의 고귀함으로 따지면 백작님보다 낫다.
공작가가 무능한 루퍼트 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몰라도, 모친이었던 부인은 공작이 매우 아끼는 딸이었다고 들었다.
만에 하나 카일의 부주의한 말이 원인이 되어 루퍼트가 마녀로 밝혀지거나 나쁜 일을 당하게 되면 무사하지 못할지 모른다.
루퍼트 님은 돌아가신 부인과 매우 닮았으니까.
루퍼트 님은 의례적인 거라고만 생각해도, 공작가에서는 매년 생일에 선물을 보내왔다.
하나같이 매우 귀한 것이었다.
실제로 어떤지는 몰라도 상당히 신경 쓰는 걸 거다.
다만 다른 가문의 일에 참견하지 못하는 것만으로, 루퍼트 님의 처지에 화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백작가 안에 갇히다시피 자라온 루퍼트 님은 그런 것조차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공작가에서 마음만 먹으면 나 같은 시종의 운명쯤 쉽게 시궁창에 처박을 거야.'
이 집안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가 했던 일들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심장 깊은 곳이 차가워졌다.
어째서 지금까지는 그런 것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루퍼트 님이 무시당한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백작이나 봉신 가문 사이의 얘기다.
한낱 시종인 그가 마음에서부터 깔봐도 될 상대는 아니었다.
'미쳤지, 내가 미쳤어.'
루퍼트 님이 아무 말 안 하고 넘겼기 때문에 착각한 거다.
함부로 대해도 되는 상대라고.
루퍼트 님의 지금 행동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무리 무시당하는 처지라 해도 루퍼트 님은 당주의 아들, 그를 시종 자리에서 자를 힘이 있었다.
만일 채찍으로 때린다 해도 그걸 말릴 사람이 없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생겨 백작이 알게 된다 한들, 날 때부터 귀족인 그 사람이 한낱 시종을 위해 뭐라고 해줄 리도 없었다.
시종인 그의 처지는 그대로이고 루퍼트 님이 혼날 뿐이다.
'왜 깨닫지 못했어.'
지금까지는 단순히 루퍼트 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종이나 하인들이 무시할 수 있었던 것뿐이다.
'어쩌면 좋지.'
마녀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두렵고, 지금까지 해온 자기 행동의 결과가 무서워졌다.
'지금이라도 루퍼트 님의 마음을 누그러뜨리지 않으면.'
혹시 저주라도 받게 되면 그게 가장 힘든 일이 된다.
카일은 초조하게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숙였다.
지금까지는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맞췄지만 지금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
시종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왜 저러는 거야.'
시끄럽지 않아 좋은데 왠지 분위기가 이상한 게 신경 쓰였다.
얼굴이 하얘졌다 파래졌다 난리다.
시종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깜짝 놀라 고개를 숙이고, 잠시 지나면 다시 힐끔 곁눈질했다.
그러면서 얼굴색은 계속 변한다.
원래 저 사람은 깔보는 시선을 한달까, 상대방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 사람이 저렇게 갑자기 변하니 아무래도 수상하다.
'설마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찜찜한 마음을 안고 식사를 마칠 무렵 의사가 왔다.
백작가에 고용된 전용 의사다.
의사는 나를 보자 시종이 그랬던 것처럼 눈을 크게 뜨더니 잠시동안은 말도 못한 채 가만히 쳐다보았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진찰은 간단히 끝나고 기적이라는 말을 남긴 채 의사는 돌아갔다.
역시 나는 시체 취급이었던 것 같다.
"...."
그건 진짜로 너무하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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