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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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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최근연재일 :
2021.11.10 22:29
연재수 :
226 회
조회수 :
586,479
추천수 :
10,871
글자수 :
1,513,856

작성
13.09.16 23:43
조회
2,168
추천
40
글자
8쪽

7. Humblesse Oblige (17)

DUMMY

토리나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피식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한결 홀가분한 눈으로 별이 반짝이기 시작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마디로 여기까지 내가 해낼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도군 네 덕분이라는 거야..”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저 멍하니 그녀의 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늘 밝고 긍정적이던 그녀가 한때는 자포자기에 가까운 감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걸 벗어나 빛나는 노력가가 되는 데에 나 따위의 머저리가 일조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날 이끌어준 빛은 사실 내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아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단순한 계기야. 내 생각엔 너는 언제고 스스로 깨달을 수 있었어. 그리고 나는 네가 생각하는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냐.”

나는 혼돈에 휘둘리며 힘을 취하고 휘두르기만 한 인간이다. 결코 그녀처럼 스스로 현재를 쟁취하고 힘을 적절히 휘두르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토리나는 한 점 스스럼없이 나를 두둔했다.

“겸손도 지나치면 독이 된대. 난 확신해. 넌 대단한 사람이야. 아니, 더 대단한 사람이 될 거야. 이 세상 누구라도 너처럼 될 수는 없을 거야.”

토리나는 나를 소위 천재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나는 토리나를 이상적인 무인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 그녀에게 이끌렸기에 오히려 그녀의 말에 납득할 수 없었다.

과거의 치부가 떠오른다. 혼돈이 부여한 운명에 휘둘려 수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무인으로서 완전히 실패했던 과거가 떠오른다. 다시 한 번 토리나의 생각을 부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부정할 근거를 댈 수는 없었다. 나는 사실 혼돈의 사도이며 혼돈이 내게 힘을 주었다고 어찌 말하랴. 그런 답답함을 담아 나는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넌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난 소렌에게 완전히 패배했어. 성산에서 네 오빠들이 죽는 걸 봤어! 네 정혼자가 될 뻔한 에럴드도 내 눈앞에서 죽었어. 난 늘 무력하게 지켜보고 있었을 뿐이라고!”

정적과 함께 스산한 바람이 분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모닥불이 장작 타는 소리에 맞춰 힘없이 몸을 흔든다. 이윽고 불이 줄어들 때 쯤, 토리나는 모닥불에 장작을 집어넣으며 모닥불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모닥불이 순식간에 다시 살아난다.

“어쩌면 말야.”

매운 연기를 들이마시고 코를 훌쩍이며 토리나는 장작을 하나 더 밀어 넣는다. 잘 마른 장작이 확 하고 타오르고, 토리나가 그 불꽃을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네 말이 맞을지도 몰라. 난 지금까지 네가 어땠는지 잘 모르잖아.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너를 동경할거야. 네가 어떤 사람이었든 내가 볼마르그가 될 수 있게 한 건 사실이고, 솔직히 난 예전 일에는 신경 쓰지 않아. 예전에 어떻게 했든지 지금 너는 충분히 강한 사람이잖아?”

“나는....”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뒤통수를 맞은 것처럼 머리가 멍해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토리나는 정말로 부드럽게 웃으며 앉은 채로 엉덩이를 끌며 내게 다가왔다. 그녀의 얼굴이 가까워지면서 가슴이 미친 듯이 날뛴다. 머리가 완전히 멈춘 것과는 달리 말이다.

“다 지금으로 충분해. 지금 넌 대단한 사람이야.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난.......”

토리나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진다. 심장소리가 모닥불 소리와 벌레소리를 뒤덮어 머리까지 흔들기 시작한다. 이윽고 부드럽고 달콤한 뭔가가 입술에 불쑥 와 닿았다. 그것이 뭔지는 알 것 같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왜냐면 나는 그 순간 눈을 꽉 감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이건 변명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지만, 납득하지 않으려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런 네가 좋아.”

토리나의 목소리가 들려옴과 함께 그제야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뜬다. 토리나는 입을 가린 채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다름 아닌 평소의 그녀다. 아니, 조금 더 사랑스러운 그녀다.

“어때? 깜짝 놀랐지?”

“아, 응. 조금.”

내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잘 떠오르지 않는다. 아니, 떠오르지 않는 척을 할 뿐이었다. 난 또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이래선 안 돼. 나는 머리를 뒤흔들며 할 말을 찾아내려 애썼다. 뛰는 가슴이 점점 가라앉는다. 그리고 내가 품어왔던 감정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토리나...”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나 역시 그녀를 이성으로서 좋아한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누구보다 당당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살아온 그녀를 동경한다. 그리고 지금 토리나 역시 스스로의 마음을 밝혔다. 그럼 되지 않을까? 토리나가 내 빛이고 내가 토리나의 빛이었다면 그걸로 좋은 게 아닐까?

그러나 나는 빛이 아니다. 나는 혼돈의 사도다. 내 행동의 결과가 백번 양보해서 내가 토리나를 한차례 도왔다는 걸 인정해도, 앞으로 계속 그녀에게 도움이 되리라 법은 없다. 오히려 지금 이 상황처럼 토리나만 괴로워질 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머리가 깨끗하게 정리된다. 그리고 미친 듯이 뛰던 가슴도 새벽녘의 호수마냥 잔잔하기만 하다. 이제야 정신이 든다. 이런 건 옳지 않다. 그런 생각에 가슴이 뒤틀리고 또 뒤틀리지만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

“먼저 자. 3시간 뒤에 깨워줄게.”

본래 하고 싶은 말과는 달리, 나는 화제를 바꾸는 말을 꺼내놓았다. 나는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일 용기도, 거절할 용기도 없는 겁쟁이였다. 토리나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자리에 눕는다. 그 모습은 평소와는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어쩐지 가슴 한쪽이 무겁다. 아니, 아프다. 빌어먹을.....


이튿날 우리는 다시 움직였다. 이제 곧 하루가 지나니 오크들이 우릴 추적하기 시작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토리나는 능숙하게 볼마르그 공작 일행의 경로를 추정해서 방향을 정했고 나는 그저 복잡한 심경으로 그녀의 말에 따를 뿐이었다.

“지금이 3시니까..... 이쯤에 있으려나?”

평평한 바위에 얇은 가죽을 덧댄 지도를 올려놓고, 토리나는 재차 방향을 가늠하고 있다. 나는 주위를 경계하는 한편 계속해서 그녀를 곁눈질했다. 어젯밤 했던 말 때문에 더욱 그녀가 의식되기 때문이다.

반면 토리나는 이상할 정도로 평온하다. 오히려 더 활기차 보여서 내가 간밤에 꿈이라도 꾼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과연 토리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 생각 때문에 도저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그때 화제를 돌린 탓에 더 어색하기만 하군. 이럴 거면 왜 그 때 확실히 결판을 짓지 못한 거냐?

“이제 얼마나 더 가야 돼?”

나는 어색함을 지우려 애써 담담한 척 물었다.

“이제 하루만 더 가면 될 거야. 그런데 조금 문제가 있어.”

“문제?”

토리나가 울창한 나무 사이로 보이는 시커먼 하늘을 가리킨다. 비가 오기 직전인 것처럼 새까만 구름이 가득하다.

“이 앞으로 계곡이 몇 개 있는데, 물이 많이 불면 우린 계곡을 따라 계속해서 올라가야 돼. 좀 많이 돌아가는 거지.”

그때였다. 별안간 하늘로부터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와 함께 토리나의 안색을 굳히며 내 팔을 잡고 큼직한 나무 사이로 몸을 날린다. 토리나는 나무 틈에 몸을 숨기고 눈을 빛내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괴물을 올려다보았다.

“오크들인가 봐. 벌써 오다니...”

“지금쯤 화가 잔뜩 나 있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비록 살기 위해서라지만 오크를 속인 건 별로 기분이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것도 그 상대가 사내다운 호기를 보여주었기에 더더욱.

잠시 후 날개달린 괴물이 저 멀리 가버리고 우리는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동시에 걸음을 재촉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큼직한 바위를 타 넘고 아름드리나무의 군락을 지나자 점점 하늘이 어두워지고는 이내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걸음은 점점 늦어졌지만 결코 멈추지는 않았다.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이전에 미처 못 쓴 부분에 덧붙여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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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8. 무인과 군인 (2) +7 13.09.23 2,526 41 10쪽
74 8. 무인과 군인 (1) +1 13.09.21 2,419 46 9쪽
73 7. Humblesse Oblige (20) +6 13.09.20 2,348 42 16쪽
72 7. Humblesse Oblige (19) +2 13.09.18 2,123 34 9쪽
71 7. Humblesse Oblige (18) +3 13.09.17 2,156 38 13쪽
» 7. Humblesse Oblige (17) +3 13.09.16 2,169 40 8쪽
69 7. Humblesse Oblige (16) +1 13.09.14 3,441 39 12쪽
68 7. Humblesse Oblige (15) 13.09.13 2,560 43 13쪽
67 7. Humblesse Oblige (14) +1 13.09.12 2,213 48 11쪽
66 7. Humblesse Oblige (13) 13.09.11 4,636 108 15쪽
65 7. Humblesse Oblige (12) 13.09.10 3,559 43 12쪽
64 7. Humblesse Oblige (11) +7 13.08.28 3,379 47 12쪽
63 7. Humblesse Oblige (10) +3 13.08.25 2,680 48 10쪽
62 7. Humblesse Oblige (9) +3 13.08.20 3,419 49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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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7. Humblesse Oblige (6) +2 13.08.11 2,543 51 11쪽
58 7. Humblesse Oblige (5) +1 13.08.07 4,452 49 15쪽
57 7. Humblesse Oblige (4) +4 13.08.04 4,239 123 10쪽
56 7. Humblesse Oblige (3) +3 13.07.30 5,130 64 13쪽
55 7. Humblesse Oblige (2) +1 13.07.21 4,186 51 11쪽
54 7. Humblesse Oblige (1) +8 13.07.19 4,193 118 9쪽
53 6. 볼마르그의 창은 꺾이지 않는다. (9) +4 13.07.12 3,416 66 36쪽
52 6. 볼마르그의 창은 꺾이지 않는다. (8) +3 13.07.10 3,482 119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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