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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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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최근연재일 :
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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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05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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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0. 호접지몽(胡蝶之夢) (2)

DUMMY

느닷없이 터져 나온 외침에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러 고요함만 가득했던 비무장이 한차례 들썩인다. 그리고 좌중의 시선이 그들의 뒤편에 있는 나를 향했다.

그 시선을 대한 순간 부르르 몸이 떨렸다. 그러나 나는 내색하지 않고 주위를 슥 둘러보았다. 그렇게 주위가 눈에 새기는 중, 문득 나는 그런 내 자신이 너무 낯설게만 느껴졌다.

지금까지의 나였다면 결코 남들 앞에 나서지 않았을 테고, 감정을 숨기지도 못했을 터다. 정말로 나는 미쳐버린 걸까?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그렇게 스스로를 의심하면서, 나는 천의검문의 소문주라는 가면을 써서 그 초조함을 감추었다.


“백윤, 그대의 의지는 실로 대단하오. 그대 덕분에 나 도군은 이 자리에서 크게 개안하였소.”


주위가 소란스럽다. 나를 두고 수군대는 수많은 목소리와 얼굴 가운데 유독 위 장로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파천마제의 간세, 열화검 위양풍. 순조롭게 백윤을 천의검문에 들이려는데 내가 이런 식으로 나온 것에 당황한 눈치가 보인다. 그렇겠지. 이건 천하제일의 둔재다운 행동이 아니었으니.


“허나, 강호에 위명이 쟁쟁한 열화검과 그대가 격돌하는 건 어떨까 싶소. 아니, 어불성설이오.”


“제 패배를 우려하시는 것이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좋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뒤로 물러선 적이 없으며, 단 한번도지지 않았습니다.”


백윤이 실로 이야기 속에나 나올 영웅처럼 당당하게 말한다.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백윤이 과연 어떤 생각으로 백천무의 손아귀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는지는 모른다. 다만 나는 그 꼴을 좌시할 생각이 없었다. 내가 꿈과 현실을 착각하고 있는 한.


“그대는 사람의 위치나 환경이 아니라 사람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했지. 하지만 제 분수를 알아야 할 때도 있는 법. 열화검은 나뭇가지만으로 그대를 압도할 수 있는 고수요. 그대가 검을 잡기도 전부터 이름을 날린 절정의 고수라는 말이오.”


“그건 제가 물러날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허면!”


나는 단박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비무대로 뛰어갔다. 온 힘을 쥐어짜 발한 내공이 둔하기 짝이없는 육체를 조금이나마 날카롭게 다듬는다. 그리고 나는 천의검문의 독문보법, 승천보(昇天步)를 통해 단번에 비무대에 올라섰다.


“그대가 겨루어야 할 사람을 내가 소개해 주겠다면 어떻소?”


멋들어진 착지와 함께 여기저기서 경탄이 터져 나왔다. 제기랄, 억지로 내공을 발하니 몸 상태가 난리도 아니다. 격에 어울리지 않는 승천보를 펼친 탓에 기혈이 들끓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평정을 가장하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고작 경공 한 번으로 내상을 입기 직전까지 몰렸다는 걸 알아채면 경탄은 야유로 돌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이런 속사정을 알 리 없는 백윤이 조금 긴장한 얼굴로 위양풍을 슬쩍 바라본다. 정말로 꿈처럼 흘러가고 있는 걸까? 두 사람은 가까이 있지 않았다면 보지 못할 작은 눈짓으로 의사를 전하고 있었다.


“허허, 소문주께서 젊은 용사들의 싸움을 보니 피가 들끓는 모양입니다. 본래 사람들에게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던 분이 이렇게 앞으로 나오시다니요.”


위양풍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백윤과 내 사이에 끼어든다. 붉은 빛을 띈 수염이 미소를 일그러진다. 그래, 가소롭겠지. 감히 나 따위가 자기 일을 방해했다는 게 당치도 않다는 눈치다.


“허면 소문주께서는 어떤 협사를 이 당찬 젊은이에게 소개해주실 셈이신지요? 저로서는 두문불출하며 수련에 매진하던 소문주가 그런 협사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지는 않습니다만.”


맞는 말이다. 나는 혼자다. 변변한 인맥이란 태중혼약자인 심하령이 고작이다. 그러나 저 말은 착각이다. 나는 다른 이를 앞으로 내세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위양풍에게, 그리고 백윤에게 포권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제가 백 소협을 직접 상대하겠습니다.”


또다시 좌중이 술렁인다. 아니, 아까와는 다르다. 무림을 지탱하는 거목 중 하나인 천의검문. 그 소문주가 직접 검을 휘두른다는 건 내 생각보다 훨씬 큰 무게감이 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나는 지금까지 외인에게 실력을 선보인 적 없다. 이래서야 내 결정이 어떻게 흘러가든 호사가들의 좋은 안주거리가 될 것이다.


“허허...”


위양풍이 피식 웃는다. 제길, 가소롭겠지. 그리고 위양풍이 조롱을 담은 한 마디를 꺼내려는 찰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자리로부터 막대한 기세가 터져 나왔다. 아버지. 천의검문의 문주 도윤형이 몸을 일으킨 것이다.


“위 장로는 돌아오라.”


몸이 떨리는 걸 감출 수가 없다. 지엄한 한 마디에 얼마나 강대한 위압감이 깃들어 있는지 내 머리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었다. 이 정도면 드래곤 슬레이어 중 볼마르그 공작과 비견되겠군. 물론 그 꿈이 사실이라면 말이지.


문주가 직접 명을 내린 이상, 위양풍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본래는 그래야 했다. 그러나 위양풍은 내 돌발행동과 문주의 기세에 당황했는지, 감히 문주의 뜻을 거스르는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문주, 이는 불공평합니다. 아무리 저 소협이 대단하다 하나, 소문주는 천의검문의 한 사람. 더욱이 아직 강호 경험이 없어 손속에 여유를 둘 수 있을지 어떨지 모릅니다. 이건 저 소협의 의기를 조롱하는 처사나 다름없습니다.”


여기서 내가 백윤보다 약하다는 말을 하면 나는 아무런 제 얼굴에 먹칠을 하는 꼴이 된다. 그러나 내 실력을 추켜세우는 것도 오히려 독이 된다. 이름 없는 자에게 천의검문의 후계자가 쓰러진다면 어떻게 될까? 여러모로 머리를 쓴 주장이군.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때 예상외의 인물이 전면에 나섰다. 동시에 위양풍의 표정이 아주 잠시나마 심각하게 일그러졌다. 심하령이 면사를 쓴 채 비무대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와 있을 때와는 달리 면사를 쓴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낭랑한 목소리와 우아한 자태에 다들 숨을 죽였고, 백윤도 깜짝 놀라서 심하령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심하령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안을 제시했다.


“장로님께서는 공자께서 천의검문의 소문주로서 많은 혜택을 받았다는 게 마음에 걸리시는 것이겠지요? 그럼 서로의 내공을 금제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으음... 확실히 그것도 좋겠소이다. 하지만 소문주는 문주께서 직접 사사하신....”


궁지에 몰린 위양풍에게 심하령이 방긋 웃으며 쐐기를 박았다.


“그런 불리함을 이겨내고자 백 소협은 이 자리에 선 것이지요. 내공을 금제한다면 결국 자기가 얼마나 노력했느냐에 따라 실력이 결정되지 않겠어요?”


당차지만 매혹적인 자태와 조리 있는 말에 모두가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다. 그리고 백윤도 별다른 뜻을 내비치지 않고 있다. 아니, 그럴 정신이 아니군. 백면서생처럼 얼굴을 붉히고 쭈볏대고만 있을 뿐이다. 왠지 짜증이 치솟는다.


“결정하시오 백 소협. 어찌 하시겠소?”


나는 은연중에 묻어나올 불편함을 감추고 소문주답게 여유를 갖추어 물었다. 물론 그 대답은 결정되어 있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심하령은 아랫사람을 시켜 내공을 금제하는 단약을 가져오게 하였다. 잠시 후 종복이 기름종이로 포장한 단약 두 개를 가져왔다. 심하령이 그것들 중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여기 있어요.”


푸른빛이 도는 단약 뒤로 면사에 가려진 심하령의 얼굴이 보인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해서 날 도와준건지는 모르지만 덕분에 일이 쉬워졌다.

그 고마움을 마음속으로만 표현하고, 나는 푸른빛이 도는 단약을 서슴없이 집어삼켰다. 그와 함께 미약한 내공이 점점 내 몸에서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오히려 잘 됐다. 덕분에 내상 직전까지 몰린 몸 상태가 회복되는 기분이다.


“여기 있습니다, 소협.”


심하령이 단약을 내밀자 백윤은 한껏 당황해서는 단약을 받아들다 그것을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곧 다른 쪽 손으로 그것을 받아들고 재빨리 단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가관이군. 이쯤 되면 왜 백윤이 굳이 혼인이라는 수단으로 심가장을 좌지우지하려 했는지 알겠어.


“그럼 소녀는 두 분의 무운을 빌겠습니다.”


심하령이 비무대를 내려가는 것을, 백윤은 끝까지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다. 물론 대놓고 바라보고 있지만 않지만 쉴새없이 눈이 돌아가는 게 내게는 뻔히 보였다. 명색이 정혼자인데 참 너무하군. 하기야 위양풍에게 내 실력을 들었다면 날 무시하는 것도 이상할 건 없다.


“그럼 이 위 모가 공정한 승부를 가늠해 드리겠소이다.”


위양풍이 호기롭게 앞으로 나선다. 그리고 은연중에 내게 조롱어린 눈길을 보낸다. 예전 같았으면 움찔했을 만큼의 위세가 담긴 눈이다. 예상치 못한 일에 당황했지만 결국 내 실력을 명약관화하게 아는 이상 백윤이 이기는 걸 당연시하는 것 같다. 빌어먹을.


“오시오. 삼 초를 양보해 드리겠소.”


치밀어 오른 화를, 이 한마디에 담아 풀어냈다. 적어도 두 사람에게는 건방지게 보일 행동에 비무를 관전하는 이들은 그저 내 자신감에 감탄하고만 있었다. 백윤도 이런 태도에 조금 당황해서 자세가 흔들렸다.


“저 백윤, 소문주의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사양치 않겠습니다.”


백윤이 먼저 공세를 취하려 한다. 만약 내 머릿속을 휘젓는 기억이 그저 꿈이라면, 나는 백윤의 일검에 바닥을 나뒹굴 것이다. 운이 나쁘면 사지가 상하거나 큰 상처를 입고 오락가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그것들이 꿈이 아니라면, 내가 정녕 수많은 비극과 싸움터를 넘어 다시 기회를 움켜쥔 거라면 나는 백윤의 첫 공격에 쓰러지는 걸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습게도 이런 생각을 한 것만으로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죽음 직전에 느꼈던 후회가 온몸을 간지른다. 어쩌면 이건 그 후회를 바로잡을 기회일지도 모른다.


“하압!”


백윤의 기다란 검이 짓쳐든다. 공격이 잘 보이지 않는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저 꿈이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난 대체 무슨 짓을 해버린 걸까? 그러나 그 순간 몸이 스스로 움직였다. 너무나도 능숙하게 나는 백윤의 검을 허리를 트는 것만으로 피해냈다. 그리고 그 기세를 타고 팔을 뻗어 백윤의 가슴팍에 주먹을 찔러 넣었다.


“크윽!”


백윤이 그대로 가슴을 얻어맞고 뒤로 물러선다. 저 공격을 시작으로 연이어 공격을 가하려 했는데 내가 절묘하게 공격의 맥을 끊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무심코 내 주먹을 내려다보았다가 두 번째로 날아드는 검으로 눈을 돌렸다.


“이것도 받아보십시오!”


백윤이 이번에는 가슴팍에 양 손을 모아 검극을 앞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대로 묵직한 찌르기를 구사한다. 역시 보이지 않는다. 허나 내 생각이 미치기 직전 다시 몸이 움직인다. 정확히는 무의식이 내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한발 늦게, 나는 백윤의 찌르기가 너무나도 깊이 마음을 찌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감정을 조용히 바깥으로 토해냈다.


“무디군.”


관(貫)의 극의에 도달한 한 무인이 떠오른다. 볼마르그 공작. 나는 아버지와 비견되는 절정의 무인이 내뻗은 창을 기억한다. 그런 창을 본 다음 어찌 이런 공격에 쉽게 몸을 내줄 수 있으랴?

그런 생각이 반영되었는지, 이번에 무의식적으로 나간 발은 더욱 날카롭게 백윤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가볍게 뻗어낸 발끝이 매섭게 백윤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백윤이 절묘하게 들어오는 공격에 몸을 움츠리는 동시에 검 끝이 확연히 무뎌졌다. 지금이라면 역공이 가능할 것 같다.


그렇게 무심코 백윤이 만들어낸 또 다른 빈틈에 공격을 가하려는 찰나, 백윤의 자세가 한결 단단해짐과 함께 빈틈이 사라졌다. 아쉽지만 역공은 무리라는 느낌이 들어, 나는 반쯤 치켜든 팔을 내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직 내가 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백윤 덕에 창피를 면했군.


“한 번 남았소.”


나는 슬슬 욱신대는 팔다리를 쭉 펴고 나직이 말했다. 욱신거림이 점점 커진다. 빌어먹을. 벌써 몸이 지쳐 나가떨어지다니. 멜븐의 육체를 뒤집어썼던 꿈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 정말 역공을 가하지 않은 게 다행이군. 이 상태론 역공을 취해봐야 소용없었겠어.


“....왜 검을 뽑지 않는 겁니까?”


백윤의 말을 듣고 그제야 나는 내가 검을 뽑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믿을 수가 없다. 내가 검 없이 단순한 동작만으로 백윤을 상대할 수 있다는 게 가능할까? 불가능할 게 분명한데 나는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혼란에 잠겨 침묵을 지키는 것을 무시로 느꼈는지 백윤이 얼굴을 붉히며 눈을 가늘게 떴다.


“무시하는 것입니까?”


“그건 아니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검을 뽑게 해 드려야지요.”


백윤의 자세가 다시금 단단해진다. 삼 초를 양보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직 제 실력을 발휘하지 않은 모양이다. 잘 됐다. 나도 저 실력을 통해 내가 미쳐버렸다는 걸 확인할 작정이었으니.


“오른쪽입니다. 막아 볼테면 막아보시지요!”


백윤이 논검비무를 하는 것처럼 자신의 검로를 훤히 밝히고는 검을 그었다. 이번에는 위험하다. 흐릿하게만 보였던 전번과는 달리 이번에는 훤히 검로가 보였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힘은 이전과 비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피할 수 없다. 피하는 순간 저 검에 담긴 잠력이 폭발하며 나를 쫓아오리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대로 피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진짜 내가 꿈에 홀려버렸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저 검에 직접 부딪쳐야 한다. 그렇다면 내가 할 행동은 하나 뿐이다.


“좋소.”


그렇게 마음을 먹자마자 몸이 움직인다. 이전의 움직임에 철저한 무념에서 비롯된 회피였다면 이번 움직임은 투지에서 비롯된 반격이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검을 뽑아들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나와 백윤의 검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러면서 나는 무심코 손목을 비틀어 백윤의 검력(劍力)을 흩어냈다.


검이 맞닿으며 요란한 금속음이 울려퍼진다. 그리고 나는 내 몸의 균형이 사정없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졌구나. 그렇다면 그건 그저 꿈이라는 말이다. 내가 완전히 미치지 않았다는 의미였건만 어쩐지 서글프다. 어쩌면 나는 그 꿈이 진실이었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몸이 바닥에 쓰러지고, 이어서 다른 무언가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군중들의 목소리가 높아진다. 경악에 가까운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도 공자!”


심하령의 외침이 점점 가까워진다. 바닥에 누워 바라본 기울어진 세상 한가운데로 심하령의 모습이 보인다.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이윽고 심하령이 내 옆에 도달했다.


“괜찮아요?”


“나는....”


졌다는 말을 꺼내기가 참 어렵다. 아니, 싫었다. 잔뜩 샘이 난 어린아이처럼 나는 토라진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검을 쥐었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경악하고야 말았다.


“이건....”


제법 명검 축에 속하는 검임에도 불구하고 검날이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다. 그리고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검병은 손바닥에서는 솟구치는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크으....”


저 쪽에서는 백윤이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다. 몸을 일으켜? 쓰러졌단 말인가? 그 소리는 백윤이 쓰러진 소리였군. 그렇다면....


“이런, 백 소협의 검이 부러졌군.”


위양풍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젓는다. 그제야 상황이 이해가 된다. 내가 쥔 검에 비해 백윤의 검이 질이 떨어진 탓이다. 그만큼 백윤의 검력이 대단하다는 의미겠지. 그리고 그걸 견뎌낸 나는 대체.....


“소협에게 새 검을 주어야겠군요. 동의하십니까 소문주?”


위양풍의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표정이 일그러져 있다. 얼핏 보면 두 사람의 양패구상에 안타까워하는 것 같지만 그 내면에는 커다란 당황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심하령의 부축을 받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십시오. 이대로는 영 개운치 못하군요.”


검은 쥔 손은 물론이고 발끝부터 오금, 엉덩이를 타고 허리와 가슴이 정신없이 떨린다. 머리는 진작부터 엉망진창이었다. 뭐지? 나는 대체 어디에 서 있는 것인가? 꿈이 꿈이 아니라면 대체 뭐란 말인가?


“더 싸울 생각인가요?”


심하령이 묻는다. 그 말에 나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심하령의 부축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백윤도 어느정도 몸을 추스르고 위양풍으로부터 새 검을 받아들고 있었다.


“양보는..... 끝이오.”


그게 꿈이 아니라고?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나는 천의검문의 도군. 절대경지에 올랐던 그 멍청이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이 힘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게 꿈이 아니라면 혹시 이 현실이 꿈이 아닐까?

오래 전 읽었던 고사가 떠오른다. 꿈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꿈에서 깬 다음에는 자신이 나비인지, 나비가 자신이라는 꿈을 꾼 것인지 혼동하더라. 나도 그런 게 아닐까? 이게 꿈이라면 이 불합리함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혼란은 가시지 않는다. 나는 엉킨 실타래같은 마음에 신경질을 부리며 한껏 고함을 내질렀다. 그 실타래를 일검에 끊어버릴 것처럼.


“하아압!!”


마치 거리의 무뢰배처럼 나는 거친 기합을 내뱉으며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피가 줄줄 흐르는 검을 휘둘렀다. 백윤의 검과 다시 맞부딪치니 팔이 빠질 것 같았다. 사방으로 손바닥에 고인 피가 비산한다. 그런 흉험한 풍경과 격한 통증 속에서도 나는 아직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챙!


검과 검이 다시금 맞부딪쳤다. 검날을 타고 불똥이 튄다. 백윤이 갑자기 돌변한 내 태도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능숙하게 검을 놀려 나 공세를 차단하고 있다. 백윤이 그렇게 여유로운 반면, 나는 점점 몸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지쳤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승부를 내야 한다. 천의결처럼 부자연스러운 직감이 아닌, 정말로 경험에서 우러난 통찰이 혼란에 빠진 정신을 밀어내고 뇌리를 완전히 지배했다. 그와 함께 내 몸이 다시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멋대로 움직인다. 그리고 백윤과 나는 순식간의 십여 합의 검격을 주고받았다.


“고작 이 정도로!”


화가 난다. 백윤의 실력은 동년배에서 적수를 찾기 어려운 수준이다. 하지만 그저 우물 안의 우스갯소리일 뿐이다. 서역에 가보라지. 백윤 따위를 훨씬 뛰어넘는 괴물이 수두룩하다. 네놈이 품은 의기를 뛰어넘어 나를 살린 고결한 이가 있다. 운명을 우롱하며 궁극에 경지에 오를 천재도 있다.

그런데 나란 놈은 고작 이런 놈에게 밀리고 있다고? 그들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단 말이냐? 그렇게 나는 조금씩 꿈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없이 난무하는 검영이 일군 균형이 무너졌다.


“으윽!”


백윤의 묵직한 검을 완벽하게 흘려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백윤의 검을 흘려 낸 초식의 이름이 떠오른다. 역풍. 롤랜드 폰테일이 나와 검을 겨루며 보여준 검이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그 꿈은 거짓이 아니다.


“아직이다, 백윤!”


꿈이란 자루에 담아 두었던 수많은 경험이 무의식이라는 고삐를 끊고 의식으로 밀려든다.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그 경험들은 멈추지 않았다.


“아직이라고!”


나는 검을 내리쳤다. 강(强)의 검의를 담은 검명비산이다. 그 이름대로 육중한 검명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주위를 가득 메웠다. 백윤의 손이 점점 어지러워졌다. 그리고 나는 계속해서 그 기억들이 가리키는 대로 검을 휘둘렀다.


“고작 그 정도로 뭘 하겠다는 말인가?”


수없이 많은 이들의 죽음. 절대 경지에 이르렀을 때의 환희. 그리고 끝내 절망으로 치달았던 두 번째 삶. 십여년에 이르는 기억들을 찰나라는 순간에 모조리 받아들인 나는 이제까지와는 비할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내 검은 점점 날카로워만 졌다.


“봐라, 이것이.....”


단 한 번도 정식으로 배우지 못했지만 궁극의 경지에 이르며 깨우친 천의검문 최고의 검이 떠오른다. 그러나 나는 이 검을 보여줄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이 몸이 너무나도 비루하다. 그렇지만 그 편린을 재현하는 건 가능하다. 궁극의 경지에 이르렀던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 이 순간에는 말이다.


“네가 그토록 넘고 싶었던 천의검문이다!”


고통이 사라졌다. 수십의 검영이 정신없이 백윤의 검을 휘갈긴다. 그리고 마침내 백윤이 검을 놓치고 쓰러진다. 그와 함께 정신없이 몰아치던 검영이 사라졌다. 허나, 그 검영이 자아낸 기억을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이 검을 목도한 이들은 하나같이 내 검에 경악하고 있다. 그중 가장 경악한 이는 천의검문의 검을 아는 이들이다.


“진천(振天).... 설마 소문주가!”


천의검문에 전해지는 상승무공 중 하나. 진천검결을 펼쳐내는 나를 보고 위양풍이 체면도 잊고 입을 쩍 벌리고 있다.이는 아버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으로 아들에게 놀란 모습을 보여주는 아버지의 모습은 꽤 낯설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백윤에게 눈을 돌렸다.


“분명 이 세상은 불공평하오.”


그렇기에 나는 끝까지 둔재로 남아 있었고, 그 때문에 수많은 이들을 죽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를 죽이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 불의를 이겨내고자 하는 의기 또한 대단하다 여기오. 허나, 불의는 결코 녹록치 않소. 우리 천의검문은 당신과 같은 이들에게 불의나 다름없으나 결코 무디지 않다는 걸 알아두시오.”


천의검문을 삼키려 했던 당돌한 자가에 나는 쓰디쓴 충고를 던졌다. 또한 이것은 경고였다. 감히 천의검문을 넘보지 말라는 경고. 백윤이 뒤이어 더듬더듬 말했다.


“당신은.... 사실은 강했던 건가?”


백윤이 덜덜 떨리는 오른쪽 팔을 움켜쥔 채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백윤이 이 의미를 이해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꿈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지는 않소. 하지만......”


나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몸을 돌렸다. 그러나 용케도 몸은 쓰러지지 않는다. 쉬어야 한다. 아니,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직감이 머리를 지배하고, 나는 진즉에 소모된 체력 대신 정신력으로 몸을 움직여 비무대를 내려갔다. 그러면서 간신히 말을 이었다.


“지금은 강하오.”


그래, 적어도 정신은 강하다. 그 수많은 역경은 꿈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서고 후회를 다잡을 기회를 부여잡은 나는 강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시야가 일그러진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나마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몸은 그리 강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비무대를 내려가다 정신을 잃었다.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원래는 이번 편까지 한편짜리 에필로그이자 프롤로그가 되었어야 하는데 지난 주에는 시간이 없어서 그냥 앞부분만 올렸습니다. 그동안 저를 괴롭히던 일들이 일단락 되어서 연참은 조만간 도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잘 되기를 빌어주세요. 저도 굴레에서 벗어나면 강해질 수 있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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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10

  • 작성자
    수수깡
    작성일
    14.07.05 01:40
    No. 1

    연참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그나저나 도군의 본래 몸은 정말 약골이군요.
    누가 개조 해주지 않으려나.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2 요개
    작성일
    14.07.05 03:28
    No. 2

    몸도 튼튼해져야죠!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56 황도복숭아
    작성일
    14.07.05 03:07
    No. 3

    회귀전을 하나의 소설처럼 읽었더니 주인공한테 몰입이 심하게 잘되네요ㅎㅎ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2 요개
    작성일
    14.07.05 03:29
    No. 4

    그게 바로 제가 원한 겁니다! 회귀물도 회귀 전 이야기를 알면 더 재미있으니까요.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16 스킨크
    작성일
    14.07.05 04:54
    No. 5

    앞으로의 전개가 기대되네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2 요개
    작성일
    14.07.06 01:33
    No. 6

    부지런히 써야겠군요 ㅎㅎ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71 아침기상
    작성일
    14.07.05 08:57
    No. 7

    재밌어요. 회귀 소설중 회귀 전을 이렇게 세세하게 다룬 건 처음이네요. 맨날 2,3 페이지 쓰고 죽고 돌아갔는데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2 요개
    작성일
    14.07.06 01:33
    No. 8

    이런 구성이 재미있을지 조금은 불안했는데 재미있다니 다행입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85 쿠바
    작성일
    14.07.05 23:17
    No. 9

    8시간 동안 정주행 했습니다.
    재밌네요. 소렌은 엘더가 됬으니...기억 하고 있을까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42 요개
    작성일
    14.07.06 01:34
    No. 10

    고생하셨네요. 소렌은 엘더가 되었습니다만..... 음,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별 내용은 아니지만 일단은 노코멘트하겠습니다.

    찬성: 0 | 반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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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 1. 둔재지로(鈍才之路) (6) +11 14.07.16 1,678 38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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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 1. 둔재지로(鈍才之路) (4) +9 14.07.14 1,446 34 10쪽
128 1. 둔재지로(鈍才之路) (3) +4 14.07.12 1,591 38 13쪽
127 1. 둔재지로(鈍才之路) (2) +6 14.07.11 1,583 40 10쪽
126 1. 둔재지로(鈍才之路) (1) +8 14.07.10 1,677 34 14쪽
» 0. 호접지몽(胡蝶之夢) (2) +10 14.07.05 1,841 34 23쪽
124 0. 호접지몽(胡蝶之夢) (1) +15 14.06.28 1,898 33 7쪽
123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2) +6 14.06.28 1,664 35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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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5) +4 14.05.19 1,568 24 20쪽
115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4) +6 14.05.09 1,376 32 12쪽
114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3) +4 14.05.04 1,502 26 11쪽
113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2) +3 14.04.30 1,648 35 15쪽
112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 +6 14.04.28 1,924 35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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