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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erior Struggle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최근연재일 :
2021.11.10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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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5.19 2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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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쪽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5)

DUMMY

나이 든 귀족들이 물러가고 나서, 이번에는 새파랗게 젊은 세 명의 귀족들이 소렌에게 다가온다. 그러나 평범한 귀족은 아니다. 모두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무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는 낯익은 얼굴도 섞여 있었다. 크리스와 플로렌스가 말이다.

“죄송합니다. 백부께서 또 엄한 소리를 늘어놓으셔서 심기가 불편하셨을 텐데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먼발치서 그 귀족들의 행태를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크리스가 정말로 당혹해하는 기색을 드러내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을 묵묵히 지켜보던 소렌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인다.

“무례 같은 것에는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소렌이 무골호인이라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소렌은 아예 림벨 후작과 같은 자에 대해서는 신경을 끊고 있었다. 결코 크리스의 얼굴을 봐서 모욕을 참고 넘긴 게 아닌 것이다. 크리스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오히려 이렇게 사과를 건네는 거겠지.

그러나 이런 사과가 면죄부를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건 크리스도 잘 알고 있겠지. 만약 림벨 후작이 정말로 소렌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그때는 크리스와의 가느다란 친분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사과를 하는 건 크리스 본인이 안심을 하기 위서일 것이다. 그는 소렌의 힘을 잘 실감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도군님께도요.”

크리스가 느닷없이 내게도 고개를 숙여 보인다. 아무래도 외경의 대상에는 소렌뿐만이 아니라 나도 해당되는 것 같다. 나는 이미 저들에게 경고를 해 주었기 때문에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고 마찬가지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당신이 그 대단한 검사인가?”

그때 크리스의 뒤에서 한 청년이 퉁명스러운 말을 내뱉는다. 그리고는 크리스를 지나쳐 내 앞에 똑바로 서서 나를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본다.

“확실히 강해 보이기는 하는데 정말로 검은 별을 압도할 수 있는 건가?”

“그렇다고 말해도 안 믿을 것 같은데?”

비공식적으로나마 구국의 영웅인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건 이 청년이 처음이었다. 이에 당황해서 크리스가 청년에게 눈치를 주지만 청년은 요지부동이었다.

“잘 아네. 아, 계급도 같고 나이도 같으니 말 편하게 할게.”

청년이 불쑥 손을 내민다.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오만불손해 보일 뿐이지만, 나는 이 청년이 결코 예의가 없어서 초면에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얼마든지.”

나는 청년이 내민 손을 맞잡고 억지로 웃어 보였다. 그리고 어렴풋이 느끼던 사실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자는 정말 뼛속까지 무인이다. 그것도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이 강한 그런 사람이었다. 내 실력을 직접 보지 못했기에 아직 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일 테지.

“험! 소개가 늦었군요. 도군님이 돌아오시기 전까지 부관을 대행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크리스가 헛기침을 하면서 청년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고는 소개를 시작한다. 그러나 청년은 꿋꿋하게 손을 앞으로 뻗은 채 크리스의 말에 끼어들었다.

“카헬. 너와 마찬가지로 혼혈이고 평민이면서 고아 출신이지.”

검은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인 얼굴. 나와는 달리 진짜 혼혈이며 고아 출신의 무인이다. 어쩐지 카헬이 내게 대항의식을 불태우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똑같은 처지에 있었으면서 나는 이렇게 강해지고 자신은 고만고만한 경지에 있었으니.

“이런, 이 친구 여기 있었구만! 술 냄새만 맡아도 취하는 녀석이 왜 술은 마셔서... 어라?”

그때 갑자기 어딘가에서 싱글벙글 웃는 낯의 청년이 다가와, 크리스가 손을 대지 않은 다른 편 어깨에 손을 뻗는다. 그러다가 나와 소렌을 번갈아보고는 탄성을 내지르며 조금 유쾌한 느낌으로 경레를 붙인다.

“이야, 정말로 돌아오셨군요. 저를 기억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로지 에인즈. 그때 역에서 우리는 안내한 사람 아닙니까?”

조금 오래된 기억으로부터 새로이 등장한 청년이 떠오른다. 이에 로지가 정말로 기뻐하며 다른 편 손에 든 술잔을 단번에 들이키고는 카헬의 손을 내 손에서 떼어내고 자기가 대신 그 손을 부여잡는다.

“하핫! 기억하시는군요? 다행입니다. 사실 기억 못 하는 쪽에 건 사람이 더 많았거든요. 카헬 너 월급 다 걸었지?”

로지는 싱글대며 카헬과 어깨동무를 한 채 힘차게 악수를 시작했다. 로지의 기세에 휘말려 악수를 하면서, 나는 혹시 하는 마음에 소렌을 돌아보았다. 소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으로 나섰다.

“여기 있는 모두가 새로 편성된 독립기동부대야. 이 외에도 인원은 더 있지만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은 엠펠로니아 침투에 참여할 인재들이지.”

“에이, 인재라니요. 저는 아직 소드마스터도 못 된 걸요.”

로지가 겸손하게 자신의 실력을 평하자 카헬은 코웃음을 치면서 독설을 퍼부었다.

“흥, 쓸데없이 이것저것 익혀대니까 안 되는 거다. 궁술이나 전략, 전술은 그렇다 해도 마법이나 학문 따위에 몰두하면서 소드마스터가 될 리가 없지.”

“기왕이면 다재다능하다고 해 줄래?”

“거절하지.”

이어지는 차가운 독설에도 불구하고 로지는 태평하게 카헬의 말을 받아치며 히죽거린다. 꽤 오래된 친구 사이인 모양이다. 아마 로지가 낙천적인 성격이 아니었다면 저런 독설 속에서 계속 친분을 유지할 순 없었을 것이다.


생사를 함께 할 이들을 뒤로하고, 소렌은 연회장을 그대로 가로질러서 반대편에 난 문으로 나왔다. 연회장의 소란스러운 흥겨움이 벽 뒤로 사라지고 고상한 예술품이 전시된 분위기의 복도가 나왔다. 그제야 나는 내가 이곳에 온 본래 목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여기야.”

복도를 죽 걸어가던 소렌이 제법 호화스러운 문을 앞에 두고 멈춰섰다. 그리고 가볍게 문을 두드리니 천천히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후우....”

작게 숨을 들이마쉬었지만 미미하게나마 생긴 긴장은 쉽사리 풀리지 않는다. 작은 긴장 속에서 엘븐 퀸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때 미처 끝내지 못한 이야기를 한다. 그게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나는 결코 의지를 꺾지 않을 것이다.

“인간 여자 너는 나가도록 해라. 너와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다과상을 앞에 둔 엘프가 우리를 보고 먼저 꺼낸 말은 다름 아닌 무례한 축객령이었다. 이에 소렌은 슬쩍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엘프의 말에 따라 줄 것을 종용했다.

“연회장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다행히도 소렌은 별다른 의문을 품지 않고 자리를 피해 주었다. 이럴 때는 소렌의 성격이 참 고마울 뿐이다. 굳이 캐물었다면 조금 번거로웠을 텐데.

“혼자로군.”

“그렇다.”

이 방에 있는 엘프는 이 엘프 하나뿐이었다. 심지어 이 근방에서도 말이다. 그렇게 동족을 죽여 댄 자를 만나러 홀몸으로 오다니. 이 종족은 죽음이라는 것에 무감각한 것 같다. 하기야 여럿이 곧 하나이니 그것도 또한 어느 정도 이해는 된다.

“앉아라. 어머니께서 이야기를 원하신다.”

아무런 예의며 절차도 없이, 엘프가 다짜고짜 나를 눈앞에 앉히고 곧장 내 머리에 손을 가져댄다. 그 손짓에 문득 경계가 일었지만 해를 끼치려는 느낌은 없었다.

“시작해라.”

혼돈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정신을 집중하라는 말이겠지. 나 또한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는 대신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들리시나요?]

엘프 여왕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혼돈의 목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하다. 비유하자면 혼돈의 목소리는 좀 더 깊은 곳에 있었고, 여왕의 목소리는 그 가운데 즈음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죄송해요. 그때는 너무 급해서 이야기를 다 하지 못했어요.]

그런 것 치고는 1년이나 늦었지만 말이지. 이렇게 빈정대는 것을 들었는지 엘프의 여왕이 곧바로 대답을 들려주었다.

[오해가 있었군요. 엘븐 생츄어리는 그 세상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른답니다. 그때 저는 엘븐 생츄어리의 시간을 통제하고 있었고요.]

뭐라고? 그렇다면 내가 1년이나 늦게 돌아온 건 저 여왕의 짓이란 말인가? 기도 차지 않는다. 날 방해하려고 작정하고 있었군. 조곤조곤한 말투에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그리고 다시 통감한다. 엘프의 여왕은 결코 내 편이 아니다.

[그 또한 오해에요. 당신의 행동을 막은 건 크게는 이 세상. 그리고 좁게는 당신을 위해서 한 일이니까요.]

“설명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금 화가 치밀어 올라 나는 마음의 문을 닫고 육성을 내뱉었다. 마음 속 모든 걸 내보이고 싶은 상대는 결코 아니었으니까. 애초에 이렇게 하는 편이 좋았을 것 같다.

[화를 거두세요. 제가 당신을 막은 이유는 둘이랍니다. 먼저 당신이 움직일 때마다 이 세상이 분열되기 때문이에요.]

“그건 전에도 들었던 말이군요.”

[네. 이걸 설명하기 전에 저는 먼저 두 번째 이유부터 설명해야 겠네요. 부디 마음의 벽을 거두세요. 그래야 설명을 해 드리기가 좋은 것 같아요.]

조금 망설인 다음 나는 천의결로 쌓아둔 벽을 허물었다. 그와 함께 머릿속에서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하이스쿨의 연무장이다.

그러나 이건 결코 내 기억에서 흘러들어온 풍경이 아니었다. 이 풍경은 내 머리에 닿은 엘프에게서, 정확히는 엘프의 여왕으로부터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이건....”

익숙한 얼굴을 가진 소년이 어설프게 검을 휘두르고 있다. 세수를 할 때 늘 보아왔던 그 얼굴. 바로 내 얼굴이다. 그러나 무언가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확실히 다른 사람이다.

[당신의 생각대로에요. 저 사람은 그 몸의 본래 주인인 멜븐이랍니다. 이건 제가 예견한 미래의 풍경이고요.]

어설프지만 검을 휘두르는 것을 즐거워하는 선량한 소년. 열등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한 표정에 괜찮게 성장하는 실력까지. 역시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멜븐은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하이스쿨에 들어가요. 하지만 당신과는 다르게 그저 평범하고 수줍음 많은 소년으로서 성장하죠.]

이윽고 멜븐의 모습이 조금씩 흐려지고 풍경이 바뀐다. 이번에는 성산 므로아에서 성녀와 만나는 광경이 펼쳐진다. 성녀는 멜븐에게 그녀의 팬던트를 건네준다. 그와 함께 펜던트에서 기묘한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는 성녀의 인정을 받게 되고....]

다시 풍경이 바뀐다. 성인이 되었는지 이제는 진검을 가진 멜븐이 므로아에서 몬스터와 싸우고 있다.

[그리고 당신이 겪은대로 대륙연합과 엠펠로니아는 정전협정을 맺고 함께 매칭을 치르지요. 하지만 멜븐이 성인이 되고 나서 엠펠로니아는 기습적으로 연합을 배신하게 돼요.]

힘겹게 몬스터를 막아내던 중, 한 소녀가 위험에 처한다. 소렌 폰테일. 내 손에 쓰러졌던 강력한 오거가 소렌을 노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멜븐이 목에 걸려 있던 팬던트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온다.

[하지만 그때 멜븐은 그가 동경하던 소녀가 위험에 처하는 걸 보고 각성하게 돼요. 바로 구원자로요.]

팬던트의 힘을 따라 므로아로부터 막대한 양의 마나가 멜븐을 휘감는다. 그리고 멜븐은 간신히 그 막대한 힘을 통제하며 몬스터의 습격을 막아낸다. 그리고 그는....

“영웅이 되는군요.”

기분이 착 가라앉는다. 똑같은 처지에서 나는 내 힘을 통제하지 못하고 알리오네에게 조종당하던 이들을 몰살했고 그 비극을 견디지 못하고 힘을 버렸다. 그리고 돌고 돌아 다시 힘을 되찾게 되지. 저게 바로 내가 본래 걸었어야 하는 길이었을 것이다.

[그래요. 이게 멜븐이란 사람의 운명이지요. 하지만 이 운명은 이미 바뀐 지 오래에요.]

“제가 그렇게 만든 건 잘 압니다.”

[아니요. 당신 때문만은 아니랍니다.]

엘프 여왕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는다. 나 때문만은 아니라고? 나는 조금 놀란 상태로 그녀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먼저 검은 별이라 불리는 자가 운명을 바꾸었어요. 멜븐이 자신을 위협하리라 여기고 싹을 자르기 위해 손을 써 두었죠.]

다시 멜븐이 어린 모습으로 바뀐다. 멜븐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멜븐은 창백한 피부의 여성을 눈앞에 두고 공포에 질린 채 거품을 물고 있었다.

“알리오네...”

나이는 달라 보였지만 멜븐을 앞에 둔 여성은 내 손으로 죽여버린 뱀파이어 퀸. 알레오네다. 알리오네는 한적한 산책로에서 마주친 멜븐을 납치했다. 그리고 곧장 멜븐의 피를 빨아 절명시켰다. 그와 함께 멜븐의 혼까지 알리오네에게 빨려들어갔다.

[검은 별은 뱀파이어 퀸을 통해 멜븐을 처치해요. 그리고 뱀파이어 퀸은 멜븐의 영혼을 흡수해서 영혼의 격을 높이지요. 그 덕분에 그녀는 수많은 이들의 능력을 흡수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어느정도 강해진 다음에는 검은 별의 의향과는 달리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해요.]

잠시 후, 쓰러진 멜븐을 발견한 여성이 비명을 지르며 멜븐을 부둥켜안는다. 고아원의 원장인 아스트리다였다. 머릿속에 떠오르던 풍경이 서서히 검에 물들어간다. 여왕이 흘려보낸 풍경은 여기까지였다.

[보신 것처럼 멜븐은 검은 별에 의해 죽어버렸죠. 하지만 그때 운명이 바뀌었어요. 멜븐을 대신할 이들이 나타난 거죠.]

“그게 누굽니까?”

여왕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건 아직 말씀드릴 수 없어요. 당신이 아는 순간 다시 운명이 뒤틀릴 테니까요.]

엘프의 여왕은 그렇게 말하고는 아예 내 머릿속에 모습을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이게 바로 당신을 막는 두 번째 이유. 당신이 구원자가 아니기 때문이에요. 당신이 취한 그 힘. 그 운명은 본래 멜븐의 것이었지만 지금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에요. 그렇기에 케이오스가 그것을 멋대로 유용(流用)한 것에 불과해요. 진짜 구원의 영웅은 따로 있어요.]

“하지만 이상하군요. 방금 제피온이 운명을 뒤틀었다고 했는데, 결국 다른 운명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게 다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흐르는 것 아닙니까?”

설령 내가 가짜 영웅노릇을 하면서 천기를 흐린다 해도 결국 천기는 제 갈 길을 갈 터. 내가 무슨 짓을 하든 상관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엘프의 여왕은 나를 막으려 드는 걸까?

[그건 첫 번째 이유와 관련이 있어요. 대답을 드리기 전에 하나 묻겠어요. 당신은 운명이 바뀐 세상을 살아가고 있어요. 하지만 그게 바뀌지 않는 세상은 어디 있을까요?]

“무슨 말입니까? 바뀌지 않는 세상이 어딘가에 존재하기라고 하는 건가요?”

[물론 그래요. 당신이 다시 태어나면서 세상이 바뀌었다고 했었죠? 그렇다면 바뀌기 전의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그냥 바뀌는 것 아닙니까?”

[정확히는 바뀌면서 바뀌지 않는답니다. 두 세상은 함께 존재해요. 단지 당신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서 실존하는 것 뿐이고요.]

“그걸 어떻게 믿으라는 겁니까?”

천의결은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천의결이 뭐라고 하든 혼란스러울 뿐이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확실한 대답이 필요했다.

[원래 검은 별은 죽었어야 해요. 당신도 그걸 느끼고 있었을 거고요. 그렇지 않은가요?]

백윤의 힘을 흡수할 때. 그때 나는 제피온의 죽음을 확신했다. 천의결 역시 그 운명을 짚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운명을 바뀌었다. 그렇게 제피온은 부활했고 나는 제피온을 놓쳤다.

[그렇다면 제피온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건 왜일까요? 당신은 운명을 읽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그때 당신은 두 개의 운명을 읽어냈죠.]

그렇다. 나는 제피온의 운명이 바뀐 것을 읽어냈다. 중간에 바뀌기는 했지만 결국 나는 제피온이 백윤의 힘을 빨아들이기 전에 운명을 짚어냈다. 즉, 천의결로 두 개의 운명을 읽어낸 셈이다.

“하늘의 뜻(天意)이 하나가 아니라는 말이군요.”

[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어요. 이 세상은 그 가능성이 이루어지거나 그렇지 않은 경우로 분열되고 있어요.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번 그렇게 분열되고 또 분열되고 있어요.]

그렇다면 멜븐이 죽지 않은 세상도 존재한다는 말이군. 엘프의 여왕이 읽어낸 운명도 바로 그 세상이리라.

[이걸 알고 있는 이는 오직 엘더와 엘더에 근접한 이들 중에서도 일부뿐이에요. 그리고 그 분기를 만들어내는 것 역시 그들뿐이지요.]

세상이 바뀌는 걸 알아야 바꿀 수 있다는 말이군.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됩니까?”

[모르는 자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못해요. 본래 세상을 기억하는 자는 세상이 변질되는 걸 두려워해요. 생각해 보세요. 어느 날 당신과 교류하던 이들이 다른 사람이 되어있는 것을요. 당신과 안면이 있는 그 마법사도 그걸 알기 때문에 함부로 세상사에 관여하지 않고 있었지요.]

그렇군. 제임스도 엘더가 될 뻔 했으니 이걸 알고 있었겠지. 그렇다면 이미 운명을 바꾸어버린 제피온도 이 사실을 짐작하고 있겠군. 하지만 제피온은 이런 두려움을 뛰어넘어 강자존을 이룩하려 날뛰는 거고. 비록 적이지만 감탄할 수밖에 없다.

“우습군요. 강해질수록 세상에서 멀어지게 된다니.”

[꼭 그렇지는 않아요. 격이 높은 엘더 중에서 몇몇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운명을 조종하려 드니까요. 먼저 온 대륙을 뒤덮은 성세를 자랑하는 신이란 존재를 알고 있나요?]

그것도 엘더에 속하는 건가? 잘은 모르지만 좋은 나쁘든 힘을 빌려주는 머저리라는 건 잘 안다. 루베르크가 그 힘으로 부활할 때는 정말로 놀랐지.

[신은 질서를 추구해요. 그렇게 다른 엘더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나서서 분열을 막으려 애쓰죠. 그렇기에 신은 당신을 악을 규정하고 처단할 것을 명했어요. 우리 엘프도 당신이 세상을 뒤흔드는 걸 원하지 않았기에 당신을 적대한 거고요.]

“그럼 그 신이란 것을 조심해야 하는 겁니까?”

[그렇지는 않아요. 신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을 거예요. 그랬다가는 케이오스가 바라는 대로 세상이 멋대로 뒤흔들릴 테니까요.]

혼돈도 엘더에 속하고 있었나? 하지만 같은 엘더라도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신도 그렇거니와 혼돈도 역시 엘더라기보다는 세상을 구성하는 일부에 가까워 보였다. 말하자면 격이 달랐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리 엘프는 당신을 막을 수 없어요. 제가 직접 나서더라도 당신은 저를 뿌리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가? 그때 나는 꼼짝도 못하고 힘을 봉인 당했는데 여기서는 그럴 수 없는 건가?

[맞아요. 제가 당신을 제압한 건 그건 그곳이 제 성지(Sanctuary)였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그곳에서는 세상의 질서를 흩트리지도 않기에 저는 힘을 쓸 수 있었어요.]

머릿속에 떠오른 엘프 여왕의 모습이 점점 흐려진다. 그리고 엘프 여왕이 마지막 전언을 남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당신을 적대하지도, 막지도 않을 거예요. 힘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당신이 제 말을 듣고 바뀔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저를 너무 믿는군요.”

천하제일의 둔재가 그런 말을 듣고 쉽게 바뀔 거라 생각하는 건 오산 중의 오산일 텐데. 이에 엘프 여왕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청명한 여름날의 이파리를 연상케 하는 그런 웃음소리였다.

[이미 엘더가 되었으면서 그런 것으로 스스로를 얽매지 마세요. 부디 이것만 명심해 주세요. 당신은 엘더이지만 세상이 분열되는 두려움을 알지 못해요. 그렇기에 오히려 세상을 바꿀 수 있어요. 그래요. 올바른 쪽으로요. 저는 그것에 기대를 걸어 보겠어요.]

완벽하지 않기에 오히려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미안하지만 엘프의 여왕은 헛수고를 하고 있었다. 이 힘을 가지고 가만히 있으라고? 이미 나는 제피온을 물리치기 위한 일보를 내딛은 상태다. 더 이상은 무를 수 없다.

그리고 설령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나는 이 힘으로 그걸 극복할 것이다. 적어도 이 힘을 포기하기 전까지, 내 결심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천하제일의 둔재라도 천하제일의 명검을 쥐면 조금은 나아지는 법이니까.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떡밥이나 설정을 이렇게 길게 풀어내는 건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이상 좋은 수단이 영 떠오르지 않네요. 조금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그냥 넘겨도 좋습니다. 억지로 이해하려 하지 말아주세요. 소설은 소설답게 그냥 즐기자는 게 제 모토입니다.

그건 그렇고 조금 급하게 쓴 글이라 추후 수정하게 될까봐 걱정이 됩니다. 주말마다 하는 연재가 조금 늦어져서 밤 늦게까지 글을 두드려 봅니다. 그래도 키보드를 기계식으로 바꾸었더니 글쓰는 맛이 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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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0. 호접지몽(胡蝶之夢) (2) +10 14.07.05 1,840 34 23쪽
124 0. 호접지몽(胡蝶之夢) (1) +15 14.06.28 1,898 33 7쪽
123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2) +6 14.06.28 1,664 35 26쪽
122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1) +4 14.06.26 1,258 23 22쪽
121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0) +2 14.06.13 1,220 20 17쪽
120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9) +5 14.06.06 1,715 35 21쪽
119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8) +4 14.05.30 1,190 28 14쪽
118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7) +5 14.05.24 1,586 19 22쪽
117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6) +6 14.05.22 1,654 21 18쪽
»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5) +4 14.05.19 1,568 24 20쪽
115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4) +6 14.05.09 1,376 32 12쪽
114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3) +4 14.05.04 1,502 26 11쪽
113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2) +3 14.04.30 1,648 35 15쪽
112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 +6 14.04.28 1,924 35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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