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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erior Strug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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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개
작품등록일 :
2013.01.31 09:36
최근연재일 :
2021.11.10 22:29
연재수 :
226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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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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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513,856

작성
14.07.1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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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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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글자
19쪽

2. 기연 (3)

DUMMY

“안 지루해요?”


한여름 매미 소리에 뒤섞여 흐릿하게 심하령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이제는 한결 능숙하게 육합권의 형을 펼쳐내던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매미 소리 너머에 있는 목소리를 다시 떠올렸다.


“죄송합니다. 미처 못 들었는데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늘에 앉아서 내가 수련하는 걸 죽 지켜보던 심하령이 눈꼬리를 치켜세우다가 다시 평정을 되찾고 말했다.


“계속 기초 수련만 하고 있잖아요. 변변한 성과도 없고요. 그런데 안 지루하냐고요.”


“별로 안 지루합니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된 훈련이 거듭되니, 둔해빠진 내 몸도 조금씩 변화가 일고 있었다. 심유환의 의술이 아니었으면 진작 죽어나갔을 수련이다. 그랬기 때문일지, 나는 늘 지루함보다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하지만 이 날씨에 철의를 입는 건 좀 문제가 있군요.”


나는 더욱 묵직해진 철의의 감촉을 다시 느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두꺼운 옷을 덧대 입지 않았다면 살이 익었겠군. 하지만 옷을 덧대 입더라도 철의가 한껏 달아오른 탓에 움직임에 제한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그만하지 그래요?”


“그럴 수 없다는 건 아시지 않습니까?”


“어리석군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는데 조바심만 낼 생각이신가요? 그리고 그 수련도 이제 별로 효용이 없어 보이고요.”


확실히 요즘은 체력이 더 붙는 걸 못 느끼고 있었다. 아니, 지금까지 너무 빠르게 성장했기에 이리 느껴지는 것이겠지. 어찌 되었든 다른 대책이 필요하다. 어쩌면 심하령은 무식하게 뙤약볕 아래서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혹시 조언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조언이라기보다는 충고라 해 둘게요. 우리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충고해주는 거라고요.”


어느새 더위에 지쳐버려서일까? 그늘에 앉아 계속 심술을 부리는 그녀가 조금은 고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곧 그날 밤 엿들은 대화가 떠올라, 답답했던 마음은 금세 가라앉아버렸다. 그나저나 나란 놈의 그릇도 참 작군. 변변한 이유 없이 그녀를 이해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분명 서역에서 살아봤다고 했었죠? 거짓말 같지만 잠깐만 그 말을 믿어 드리겠어요. 만약 그렇다면 서역 사람들이 어떻게 무공을 수련했는지 대답할 수 있겠군요.”


“제가 하는 대로 외문의 방식으로 수련을 했습니다.”


이 말을 꺼낸 건 자가당착이 아닐까? 서역에서는 외적인 수련만으로 고수가 되는 이들이 많으니 말이다. 그러나 역시나 심하령이 그 말을 꺼낸 이유는 있었다.


“글쎄요? 제가 알기로는 당신처럼 지루한 수련만 계속하지는 않았다고 하는데요. 서역의 방식은 사파의 방식과 비슷하다 들었어요.”

“서역과 사파는 같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한 사파처럼 사이한 방식을 사용하는 이는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아무리 이질적으로 생겼어도 그들 역시 그들만의 법도와 의지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나는 이것만은 지고 들어갈 생각이 없다. 허나 이는 내가 속단한 것에 불과했다.


“제가 사파가 사이한 방법으로만 강해진다고 했나요? 서역과 마찬가지로 사파도 마냥 흡성대법 같은 것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아녜요.”


얼굴이 확 붉어졌다. 이미 더위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었지만, 어디에 더 붉어질 구석이 있었는지, 볼이며 이마가 더욱 뜨끈해지며 온몸의 땀구멍에서 땀이 새어나왔다. 그렇구나. 오히려 편견을 가진 건 나였던 거구나.


“사파는 진득하게 한 곳에서 수련을 하는 이들이 아녜요.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이들이죠. 이건 서역도 마찬가지에요. 당신이 말한 그 검은 별과 싸우고 있기 때문에 상당히 동적이죠. 즉...”


“동공(動功). 그렇군요. 이제 알겠습니다.”


서역에서도 그랬고 아마 사파에서도 그럴 것이다. 그들은 실전적이다. 다시 말해서 내면의 공부를 수행하기보다는 실전을 통해 육체와 정신을 단련한다. 그제야 내가 꽤 안일한 수련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멜븐의 육체를 쓸 때도 나는 변변한 수련을 하지 않았지만 무인으로서의 감각은 퇴보한 적 없었다. 왜냐면 끝없이 싸우고 또 싸웠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토리나나 소렌처럼 쉴 새 없이 수련을 하는 이가 드물었지.


“당신이 여기 틀어박혀 있는 동안 검문에서는 백윤이라는 자가 득세하고 있어요.”


정신이 번쩍 든다. 제기랄, 너무 늦었을까? 이미 백윤이 검문에서의 입지를 다졌다면 일이 더욱 어려워진다. 내가 긴장한 것을 느꼈는지, 심하령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쓸데없는 긴장을 흩어냈다.


“물론 아직은 백윤의 입지는 당신에 비해 미약해요. 문주께서는 깨어 계신 분이지만 아직 검문 자체는 크게 바뀌지 않았죠. 즉, 소문주라는 자리는 그만큼의 무게를 가지고 있어요. 거기에 당신이 백윤을 이기면서 그 입지가 정말로 힘을 얻었기 때문에 백윤은 그저 촉망받는 제자에 불과해요. 아직 천의검문을 좌우할 수 없죠.”


만약 내가 그때 백윤과 싸우지 않았다면 백윤이라는 걸출한 존재는 내 입지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 싸움을 통해 나는 그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는 걸 깨닫기도 했으니, 이는 굉장한 행운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방치해둘 수는 없어요. 당신 말대로라면 백윤은 정말로 천의검문을 휘어잡을 수도 있어요. 약간 시간이 늦춰진다 해도 당신이 검기를 터득하는 것보다는 빠르겠죠. 백윤 쪽도 당시의 실력을 본 만큼 당신 말에서처럼 안일하게 나오지는 않을 거고요.”


“허면 이대로 폐관만 하고 있을 수는 없군요.”


어렵게 되었다. 이 또한 내가 자초한 어려움이다. 만약 내가 궤를 넘는 힘을 손에 넣는다면 모를까, 이대로는 백윤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


“그래요. 제가 서역의 수련을 언급한 건 그것과 연관이 있어요. 당신은 이제 본격적으로 소문주로서 움직이며 강해져야 해요.”


이는 곧 실전을 통해 강해지라는 말이다. 아직 준비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실전 이야기가 나오니 불안이 앞선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객관적으로 보자면, 나는 하이스쿨 시절의 나와 싸워도 승부를 짐작할 수 없는 수준에 있다.

물론 백윤에게 이겼을 때처럼 무의식이 움직인다면 되겠지만, 언제까지고 요행만 바란다면 나는 절대 발전할 수 없다.


또한 세상은 그리 호락하지 않다. 내가 지키고자 하는 위치가 대단할수록 내게 주어질 여유는 터무니없이 적다. 지금까지는 태평하게 무공수련에 전념했다면, 이제부터는 소문주로서의 자리를 지키기도 해야 한다. 심하령의 조언이 아니었다면 또 멍청하게 빼앗기기만 할 뻔 했군.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 소저께서 정해 주십시오.”


“공짜로요?”


심하령이 남 일인 것처럼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안타깝지만 나는 상가의 여식인 그녀를 만족시킬만한 돈도 없고, 변변히 줄 것 도 없었다.


“만약 도와주신다면 반드시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말은 쉽죠 참.”


심하령이 한숨을 내쉬면서도 미리 준비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쉬운 것부터 시작하는 게 좋겠어요. 댓새 뒤에 천의검문의 보호를 받는 마을에 다녀오는 일이 있어요. 이미 그 일을 맡겠다고 해 두었으니 그리 아세요.”


이미 결정된 일이었던가! 달리 말해서 어떻게든 내 생각을 바꿀 자신이 있었다는 말이다. 과연 심가장의 후계자답군. 한편 나도 언젠가는 저토록 깊은 심계를 지녀야 한다는 것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심하령의 충고는 분명 타당했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고, 나 역시 동감했기에 한 치의 주저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일은 예상 외의 난관에 부딪쳤다. 바로 그녀의 종조부에 의해.


“나는 반대다.”


심유환이 단호하게 심하령의 생각을 쳐내며 말했다. 그리고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만신창이가 된 몸에 침을 놔 주며 말을 이었다.


“이 실력으로 대체 뭘 하겠다는 말이냐? 아직 마물 하나도 감당치 못할 녀석이 무슨 일을 한다는 게야?”


심유환의 일침에 절로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리고 새삼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실력에 머물러 있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서역에서는 어럽지 않게 상대할 것들이었는데, 지금은 그것조차도 감당할 수없다는 말이니까.


“그리고 백윤은 검문의 일개 제자일 뿐이야. 영약을 받아들인 다음 움직여도 전혀 늦지 않아.”


“하지만 위 장로가 움직이면 백윤은 얼마든지 날개를 펼 수 있어요. 도 공자가 바뀌지 않았을 때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심하령이 위양풍을 언급하며 주장에 힘을 더했다. 그렇다. 외인에 불과한 백윤이 천의검문을 좌지우지하게 된 것도 위양풍의 힘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심유환의 이어진 설명도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가졌다.


“그렇겠지. 허나 지금은 그때하곤 다르다. 도군은 지금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소문주가 아니고, 무엇보다 위양풍은 네가 도군의 수련을 적극적으로 돕는 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러니 섣불리 움직이지는 못할 것이야.”


심하령은 백윤의 힘이 커질 것을 우려하고 있지만, 심유환은 백윤의 힘이 커지지 못할 것이라 말하고 있다. 나는 이 두 가지 의견을 두고 생각에 잠겼다. 어느 쪽이 그르다고는 속단할 수없다. 이런 상황에서 천의검문의 소문주라면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어르신. 그렇다면 제가 언제쯤 영약을 받아들일 수 있다 보십니까?”


심유환이 진중한 눈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다. 긴장한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지금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향후 행방이 결정될 터이니.


“족히 1년은 더 수련해야겠지.”


“그렇군요.”


나는 담담한 척 하면서도 화가 치밀어 입술을 깨물었다. 터무니없이 더디다. 좋아하지도 않는 편법을 받아들이는 것조차 이리 늦을 줄이야. 점점 자괴감에 빠지려는 차에, 심하령의 말이 나를 혼자만의 세상에서 건져냈다.


“그래서는 늦어요. 그러니까 도 공자는 실전을 통해 강해질 수밖에 없어요. 그게 더 빠르잖아요.”


“지금은 그렇겠지. 하지만 그런 사도(邪道)로는 절대 진정한 고수가 될 수 없다. 온전히 영약에 의존할 자가 그 기반마저도 스스로 쌓지 않는다면, 결코 상승의 깨달음을 구할 수 없다.”


이른바 편법의 한계다. 내가 소렌같은 엄청난 천재가 아닌 이상, 저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나 드레인을 취한 이들도 쉽게 마나를 얻으며 이런 벽에 부딪혔겠지.


“어르신.”


은침을 전부 빼자마자, 나는 꾹 억누른 화를 더욱 깊숙이 억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 시선을 받으며 나는 문득 떠오른 결심을 더욱 단단히 굳혔다. 이제는 내가 결정을 내릴 때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심 소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심유환의 두 눈에서 안광이 번뜩인다. 뒤늦게 두려움이 몰려온다. 절정 고수에게서 쏟아지는 기세는 천근 바위처럼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내 말했을 터. 내 목적은 네 한계를 부수는 것이다. 네 녀석도 그 말에 동의해서 내 힘을 빌리는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이 답답한 녀석아! 서역에서 그리 어리석게 살고도 또 그런 방법을 택하려는 게야? 그리고 너는 내가 왜 너를 돕는지 듣지 않았더냐?”


심유환의 노호성이 터져 나오자 방 안의 세간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미처 방비하지 못한 탓에 속이 진탕되기 시작했다. 그것을 알아챈 심하령이 냉큼 내 혈을 짚으며 외쳤다.


“종조부님!”


“크으, 알았다. 일단 목소리를 낮추어라.”


심유환이 내 가슴팍에 대번에 장침을 꽂아 넣으며 천천히 기세를 줄여갔다. 역시 절정의 고수란 이런 것인가? 잠깐 마음이 동한 것만으로 기(氣)가 움직여 주위를 압박하다니. 그렇다면 마음만으로 내공을 응축해 검을 만들어낸 그 경지는 대체 얼마나 지고한 경지란 말인가?


“그래, 할 말이 있으면 더 해 보거라. 내 보기에 너는 재능은 부족하다만 내가 돕는다면 얼마든지 절정에 도달할 수 있는 녀석이다. 그런데 그걸 포기한단 말이냐?”


심유환이 조금 불편해진 심기를 드러내며 침을 빼내고는 혈을 풀어 주었다. 나는 잠자코 침묵을 지키며 생각을 정리하곤 조심스레 말했다.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심 소저의 말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더냐?”


“외람된 말이지만 저는 어르신보다 훨씬 높은 경지를 보고 왔습니다. 그런 제가 느끼기로, 절정의 경지에서는 내공이나 외공보다는 깨달음이 더욱 중요하더군요.”


내가 멜븐의 몸을 가졌을 때, 검기를 발하는 경지에서 멈추어 버렸던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편법으로 강해졌다. 이 때문에 나는 깨달음을 얻을 능력을 갖지 못했지.


“그건 맞는 말이다. 그게 지금 섣불리 움직이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 보는 게냐?”


“저는 천하에 둘도 없을 둔치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조금의 후회라도 남아 있다면 무공에 전념할 자신이 없습니다. 또한 저는 작은 후회를 잊을 만큼 그릇이 크지도 않고, 후회를 품지 않을 만큼 마음이 강하지도 못합니다.”


본능적으로 나는 느끼고 있었다. 내가 지향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후회나 망설임이 있다면 도달할 수 없는 정순한 경지다. 그 방식이 악이든 선이든 상관없이, 일로정진(一路精進)하지 않으면 다다를 수 없는 곳이다.


“말은 그럴듯하다만 그 길은 정말로 크게 돌아가는 길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길이 끊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강호는 흉험한 곳이다. 천의검문의 소문주라는 자존심을 지키다 길이 끊어진다면 너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냐?”


“저는 이미 충분히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후회할 일이 없을 정도로요. 그리고......”


끝까지 자신의 길을 걸었던 이들이 떠오른다. 그들로부터 느껴지는 향수 아닌 향수와 비극을 떨쳐내고, 나는 굳은 얼굴로 단언했다.


“어르신께서도 아시겠지요. 천의검문의 한 사람이라면 긍지와 이익을 저울질하지 않는다는 것을.”


예전이라면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많은 이들의 죽음과 긍지를 본 나라면, 아버지의 믿음을 깨달은 지금이라면 단 한순간이라도 용납할 수 없었다.


“으음..... 제가 이끌어낸 말이기는 하지만 막상 들어보니 엄청 무모한 선택이네요.”


심하령마저 내 어리석음에 헛웃음을 흘린다. 그러나 내 마음은 변치 않았다. 역시 그녀는 아직 어리다.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긍지를 택하는 이를 본 적 없기 때문에 이리도 쉽게 어리석다는 말이 나오는 거겠지.

어쩌면 나는 애초에 영약을 취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이리도 쉽게 포기한다는 말이 나왔을지도 모르지. 그런 속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려나, 마침내 심유환이 내 말에 대한 대답을 주었다.


“허어, 정녕 그리 나온다는 말인가...”


심유환이 하얀 수염을 쓰다듬으며 탄식한다. 그것도 잠시, 심유환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알겠네. 내 의원이기는 하나, 무인이기도 한 몸. 천의검문의 소문주가 이리 말한다면 더 이견을 내지 않겠다.”


심유화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심하령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종조부님께서 이리 쉽게 승낙하셨다는 건 차선책이 있다는 의미겠죠?”


영악하게 심유환의 심중을 읽어낸 심하령은 뻔뻔하게까지 느껴지는 얼굴로 얼른 차선책을 내 놓으라 종용하고 있었다. 심유환은 이에 허탈하게 웃으며 심하령의 이마에 엄지와 검지를 가져댔다. 그리고 딱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손가락을 튕겼다.


“꺄악!


심하령이 눈을 질끈 감으며 이마를 감싸 쥐고 몸을 웅크렸다. 그 모습이 마치 겁먹은 사슴 같아서, 나는 심각한 와중에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심유환이 고개를 절래 절래 내저으며 말했다.


“오냐, 이번에도 당했구나. 네 말대로 차선책은 있지. 하지만 이건 저 녀석의 선택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이야.”


그렇게 말하며 심유환이 품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는 손가락 길이의 대나무 통을 꺼내서 내게 던져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순간 청아한 향이 감돌아 묵직한 분위기를 한순간에 평온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대나무 통을 비틀자 달칵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고 하얀 빛깔의 환약이 여럿 보인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짐작되는 바가 있다. 확인해봐야겠군.


“설마 패왕환입니까?”


파천마제와의 대결에 앞서, 위양풍이 패왕환을 먹고 잠시 소렌을 압도했던 것이 떠오른다. 패왕환은 본래 황실에서 전해지던 비약이다. 그러니 황도에 다녀온 심유환이 가지고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예상은 반쯤 빗나갔다.


“패왕환은 아니다. 단지 그걸 토대로 새로 만들어낸 물건이지. 패왕환보다 효과는 떨어지지만 그 대신 몸을 덜 상하게 할 게다.”


과연 패왕환은 그런 단점이 있었군. 하기야 그 정도 대가는 있어야 위양풍이 소렌을 압도할 수 있겠지. 심유환이 하얀 단약이 담긴 대나무 통을 닫아 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명심해라. 네겐 이런 것조차 위험해. 아직 너는 이런 힘을 다룰 그릇이 되지 못해. 내상을 입는 건 당연하고, 자칫 잘못하면 이건 네 몸을 완전히 망쳐놓을 수도 있다.”


분수에 맞지 않는 힘은 화가 된다는 말이지. 나는 대나무 통을 잘 갈무리해서 집어넣고는 말했다.


“그 정도는 감수해야겠지요.”


“그 정도가 아닐 게다. 아마 너는 안일해질 것이야. 어려운 길을 앞에 둔 자가 쉬운 길을 겪고 과연 어려운 길을 온전히 걸을 수 있으리라 보느냐? 이 약을 한번 취한 순간부터 너는 실전을 통해 수련하는 길을 걸을 수 없을 게다.”


심유환의 말을 듣자 문득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를 잘 안다. 어려움을 눈앞에 두었을 때, 나는 한 번도 내 스스로의 힘으로 역경을 극복한 적 없다. 어려움을 벗어난 다음에도 다시 고된 길로 돌아가지도 않았다.

금방이라도 대나무 통 속에 있는 단약이 내 마음을 저열한 곳으로 끌어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당장에 단약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싶다.


“그러니 령이 네가 도군이를 잘 통제해야 한다. 도군 너는 당장 령이에게 그걸 맡기거라.”


“제가요?”


심하령이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꽤나 당황해서 되물었다. 단약이라는 유혹이 두렵기만 한 나는 이 말에 얼른 단약이 든 통을 심하령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부디 부탁드립니다. 저는 유혹을 이겨낼 자신이 없습니다. 소저께서 정말 위험한 상황이 되면 이것을 제게 주십시오.”


“그, 그러죠 뭐.”


심하령이 대나무 통을 받아들며 떨떠름하게 수긍했다. 심하령의 심중과는 별개로, 나는 단약을 건네준 것만으로도 꽤 마음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역시 아직 멀었군. 다시 나는 내가 갈 길이 멀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감상이나 비평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작가의말

반으로 뚝 자르는 편법을 쓰려다가..... 저도 제 발전을 위해 그냥 다 올렸습니다. 주인공에게 부끄럽지 않은 작가가 되어야지요. 내일은 연재를 쉬는 날이지만 또 바쁘게 생겼네요 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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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2) +3 14.04.30 1,648 35 15쪽
112 11. 시작과 끝이 교차할 때. (1) +6 14.04.28 1,924 35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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