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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일의 작업실

경무부의 수사고문, 성록 홍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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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일
작품등록일 :
2021.05.30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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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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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색 연구(9) - 사건의 결말

DUMMY

9. 사건의 결말


우리들은 목요일 군정청에서 진행되는 추가 수사의 증인으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정작 목요일이 되자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군정청에서 재판이 진행될 예정이었고, 박준길은 준엄한 법의 심판을 앞두고 있었으나 그는 체포된 그날 밤 동맥이 파열되며 유치장의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발견 당시 그의 얼굴은 수십 년을 기다렸던 복수를 마무리해서인지 매우 평온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그날 저녁 홍주와 나는 이번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준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 형사나 나 형사 모두 실망이 크겠군. 자신들의 이름을 널리 알릴 기회였는데 박준길이 죽음으로써 공치사가 불가능해졌으니까."


"두 사람이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 크게 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네만."


그러자 홍주가 씁쓸하게 대답했다.


"자네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를 세상이 알아주진 않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자네가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 믿게 만드는 것이지. 하기야 아무려면 어떤가..."


홍주는 잠시 후 좀 더 밝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이번 사건을 조사하게 된 것은 무척 행운이었어. 그 어떤 사건보다도 흥미로웠네. 단순하긴 했지만 굉장히 유익한 점들이 있었지."


"단순했다고?"


나도 모르게 홍주를 향해 소리를 쳤고 홍주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음.. 사실이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군. 내가 단순하다고 하는 이유는 큰 수고 없이도 범인이 남겨놓은 단서들로 추리를 할 수 있었고 결국 사흘 만에 범인을 체포했다는 의미네."


"그야 그렇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사건 현장에 벌어진 이상한 점들은 오히려 수사에 도움이 되면 됐지 전혀 방해가 되지 않네. 이런 문제를 풀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으로 추론해 나갈 수 있냐는 것이야. 매우 유용한 방법이고, 배우기도 쉽지만 실제로 써먹는 사람들은 거의 없네. 평소에는 귀납적으로 추론하는 것이 유용하다 보니 이런 연역적 추리기법은 경시되기 십상이지. 귀납적 추리를 하는 사람이 오십이라면 연역적 추리를 사람은 한둘에 불과해."


"솔직히 말해서 도통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군."


"아, 자네가 이해하지 못할 줄은 몰랐네. 어떻게 이야기해야 이해하기 쉬우려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일련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면 이야기를 종합해서 생각하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예상하지. 하지만 반대로 결과부터 말해준다면 어째서 그런 결과가 초래되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 이것이 내가 말하는 연역적 추리라네."


"이제 이해가 가네."


"가령 이번 사건 같은 경우에도 살인이라는 결과만 주어졌을 뿐, 나머지 조각은 모두 우리가 전부 찾아야만 했어. 이제 내가 어떤 식으로 추리해 나갔는지 단계적으로 알려줌세. 처음부터 이야기하자면 자네도 알다시피 중간에 전차에서 내려 완전히 머릿속을 비우고 현장까지 걸어갔네. 어떠 선입견도 갖지 않기 위함이었지. 그런 다음 자연스럽게 도로부터 조사하고 거기서 전날 다녀간 택시의 흔적을 발견했네. 간밤에 자동차 한 대가 거기 머문 것이 확실했고, 바퀴 간의 간격이나 차량 종류를 보면 택시라는 것도 알 수 있었지. 바퀴 하나만 가지고도 차량의 종류를 알아내는 건 식은 죽 먹기니까. 그렇게 첫 번째 단서를 알아낸 셈이네.


그러고 나서 현관으로 통하는 진흙투성이 길을 걷기 시작했어. 자네 눈에는 그저 마구 짓밟힌 진흙길에 불과했겠지만 훈련된 내 눈으로 보면 거기 찍힌 모든 발자국이 의미가 있었거든. 보통 범죄추리학에 있어 발자국을 추적하는 기술은 굉장히 중요하지만 현장에서 경시 당하기 일쑤라네. 다행히도 나는 그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고, 평상시 많은 훈련을 통해 완벽히 습득했네.


경관들이 다녀간 발자국이 여기저기 찍혀있었지만 그것보다 먼저 먼저 다녀간 두 사람의 발자국이 뚜렷하게 남아있더군. 누가 먼저 다녀갔는지 파악하는 것은 간단하지. 발자국 중에 어떤 발자국이 위로 겹쳐졌는지만 확인하면 되니까. 이렇게 해서 두 번째 단서를 알아냈네.


즉, 밤사이에 빈 집을 들른 것은 두 사람으로 그 중의 한 사람은 키가 크다는 것을 발자국의 폭을 통해 대충 계산해 낼 수가 있었지. 그리고 다른 한사람은 그보다 작고 값비싼 장화의 구두 발자국으로 보아 돈푼 꽤나 있는 사람이란 것을 알았네.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바로 이 추리가 맞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네. 값비싼 가죽 구두를 신은 남자가 그곳에 쓰러져 있었으니까 말이야. 만약 살인이 벌어진 것이라면 자연스럽게 키 큰 남자가 저지른 것일 테고. 죽은 시신에 남아있는 상처는 없었지만, 얼굴에 남은 표정을 보면 자신에게 죽음이 닥칠 것이라는 걸 인지하고 죽은 것이 분명했네. 


심장병이나 갑작스러운 증세로 죽는 사람의 얼굴에서는 그런 표정이 나타나지 않거든. 그래서 시신의 입에서 나는 냄새를 맡아보았더니 약간 시큼한 냄새가 나더군. 누군가 그에게 강제로 독약을 먹였다는 결론에 다다랐네.


독약을 억지로 먹였다면 분명 입을 벌리기 전 강하게 저항했을 텐데 그렇다면 옷매무새를 비롯해 그런 흔적이 남아있어야 하거든. 그런데 전혀 그런 흔적이 없었네. 아마 총이나 칼로 협박 받는 상황이었겠지. 아마 독약을 먹지 않는다면 더 고통스럽게 죽게 되는 그런 상황 말일세. 흔치는 않지만 이런 식으로 독극물을 강제로 투여했던 사건은 예전에도 있었다네.


그럼 가장 큰 의문이 남았네. 바로 살인 동기지. 지갑의 현금도 그대로이고 아무것도 뺏긴 것이 없는 걸로 보아 강도에 의한 살인은 아니었어. 그렇다면 정치적인 이유나 치정이 얽힌 원한 관계였을 가능성이 있었지. 나는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네.


사실 돈이 목적이라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암살하는 것이라면 가능한 신속히 일을 끝내고 현장을 떠나는 것을 선호하네. 하지만 정작 범인은 여기저기 자신의 흔적들을 남겼으며 거기서 한동안 머물렀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네.


게다가 죽은 이로부터 뭔가 알아낼 것이 있었다면 일단 사지를 구속하고 폭행이나 고문을 했을 텐데 전혀 그런 흔적은 없었지. 그건 이미 살해당한 피해자로부터 필요한 건 이미 다 얻었거나 알고 있었다는 소리야.


이런 점들 때문에 이번 사건은 정치적 암살이라기보다는 계획적인 복수극이라고 생각했네. 더군다나 벽에 써진 글씨가 발견되자 내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네. 게다가 금반지가 나타남으로써 내 머릿속으로는 사건이 해결된 것이나 다름없었어.


이 시점에서 나는 김 형사에게 부산서에 피해자의 과거 경력이나 뭐 특별한 점을 조회하지는 않았냐고 물어봤네. 부산에서 온 전보가 있었으니까. 그러나자네도 들었다시피 김 형사는 특별한 건 없었다고 대답했지.


일단 난 사건 현장을 세심하게 조사했고, 추리가 맞아떨어졌다는 걸 확인했네. 그리고 무슨 담배를 피우는지와 손톱이 길다는 추가적인 정보도 알아냈어. 시신에 핏자국이 없고 방 안에서 다툰 흔적이 없었기 때문에 범인이 흥분한 나머지 코피를 터졌다고 추측했지. 


혹여 차철환이 칼을 가지고 있었다거나 주먹으로 반격해 범인에게 피가 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 발자국만 봐도 격투의 흔적이 없었고 그랬다면 십중팔구 차철환에게도 핏자국이 남아있어야 하거든.


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조사해 보니 범인의 발자국이 찍혀있더군. 아무리 흥분했다고 한들 이렇게 많은 코피를 쏟은 것이라면 엄청나게 다혈질일 거라고 생각했네. 그래서 좀 무리해서 추리하긴 했지만 건장한 체격에 불그스름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추리가 맞다는 것이 증명되었지.


현장 조사가 끝난 후 나는 김 형사가 놓친 부분을 다시 파고들었네. 부산서에 알고 지내는 경관 앞으로 죽은 피해자와 관련된 정보가 있는지 확인해 봤지. 답신이 꽤나 사건 해결에 결정적이었는데 그 내용인즉 나카타 테쯔로라는 이름으로 차철환이 김일권과 부산에 얼마간 머물 당시, 박준길이라는 자가 죽은 아내를 자신의 연인이라 착각하고 집착한 나머지 자신을 해치려고 한다며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한 일이 있었지.


그리고 박준길은 조사 이후 풀려나 현재 서울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도 함께 적혀 있었네. 이제 모든 단서는 내 손안에 들어왔고, 남은 것은 살해범을 체포하는 것뿐이었네.


범인의 정체는 차철환과 함께 그 빈집에 들어간 택시 운전수라고 나는 이미 확신했어. 길에 남은 자동차 바큇자국이나 주변의 발자국으로 보아 차에서 내린 사람은 모두 두 명으로 집으로 걸어들어간 두 사람과 일치했으니까.


만약 범인이 달리 또 있었다면 문간에 세워둔 택시에 운전수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살인을 할 수가 있었을까? 언제 비명을 지를지 모르는 희생자를 앞에 두고 말일세.


또 사건 장소는 차철환의 집이 아닌데 어떻게 이 집으로 올지 알고 기다릴 수 있었겠나?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는 서울 시내에서 누군가를 찾아 헤매자면 인력거나 택시 운전수가 되는 길이 가장 빠르지. 피우는 싸구려 궐련의 종류를 보니 값비싼 자가용을 타고 다닐 여유가 있었을 것 같지도 않고 말일세.


그리고 택시 운전을 바로 그만둘 것 같지도 않았네. 갑작스럽게 그만두면 수상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래서 한동안은 택시 운전을 계속할 것이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는 종로 쌈패의 소년들을 동원해서 경성에 있는 모든 자동차 조합들을 조사했고 거기서 박준길이라는 이름의 운전수를 찾게 되었네. 본명을 쓰지 않을 가능성을 생각해서 인상착의까지 소상히 알려주었지.


내가 직접 나서거나 경관을 시켜 연락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행여 그랬을 때는 박준길이 눈치를 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어린애들이 접근하면 쉽게 경계를 풀기 마련이니까. 실제로 그 친구들이 얼마나 활약했고, 내가 얼마나 그걸 빨리 이용했는지 자네도 똑똑히 기억할 거네.


실제로 박준길은 고길준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었네. 아마 장인이 될 뻔한 고광덕의 성을 따르고 자신의 이름을 거꾸로 해서 가명을 만들었겠지. 나는 소년 쌈패 대장 잇뽕이 박준길이라는 사람은 없고 내가 얘기한 인상착의와 일치하는 고길준이라는 사람은 있다고 했을 때 거의 고길준이 박준길일 것이라 확신했네. 실제로도 맞아떨어졌고.


한편 박준길이 김일권을 칼로 찔러죽인 것은 예상 밖이었지만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니 준비한 환단을 먹일 상황이 아니었더구만. 자, 어떤가? 모든 것이 끊어지지 않고 논리적 결함 없이 연결되지 않나?"


나는 홍주의 추리에 감격해 소리쳤다.


"정말 대단하네. 자네의 이런 실력은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해. 이번 사건에 대해 신문에 발표하게. 자네가 그럴 생각이 없다면 내가 대신 투고하지."


"그건 자네 좋을 대로 하게. 그전에 이것부터 좀 읽어보겠나?"


홍주가 손에 들고 있던 신문을 내게 건넸고, 홍주가 가리킨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사설이 실려 있었다.


[재일 동포로 고국을 찾은 차철환씨와 김일환 씨의 살해 사건 용의자 박준길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사람들의 관심은 식어버렸다. 사건의 구체적인 내막은 용의자의 죽음으로 영영 파악할 길이 없어졌지만 내부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사건에는 치정과 종교가 얽힌 해묵은 오랜 원한관계가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두 명의 피해자 모두 청년 시절 보천교 간부로 활동했으며, 급사한 용의자 박준길 역시 보천교의 본거지이던 전북 정읍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한편 이번 사건에 의해 미군정의 개입 없이도 경무부가 자체적으로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수사력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였고, 자칫 미제가 될 수도 있었던 사건의 범인이 사흘 만에 검거된 것은 서대문 경찰서의 김광선 형사와 나승일 형사의 집요하고 철저한 수사에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범인은 경무부 수사고문역을 맡고 있는 최성록씨의 하숙집에서 검거되었으며, 최성록씨라는 인물도 이번 사건의 수사에 얼마간의 협조를 한 모양이어서 두 형사의 수사 기술을 바로 눈앞에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경무부에서는 앞으로 두 형사 같은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도록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며 두 형사의 공적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표창을 수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홍주는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거봐, 내가 뭐라고 했나? 이렇게 될 거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두 사람의 수사 기술을 눈앞에서 볼 기회를 얻었다니... 이게 사건의 최종 결과일세. 두 사람은 표창을 받겠지."


그러자 내가 대답했다.


"신경 쓰지 말게. 이 사건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일기에 적어두었고, 나중에 정리해서 언젠가는 신문에 내거나 책으로 출판할 테니. 사람들도 진짜 사건을 해결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야지. 그때까지만 사건을 해결한 장본인이 자네 자신이라는 걸로 참아주게. 일찍이 장자가 제물현동(齊物玄同)이라 하지 않았나? 자기들 딴에는 나름 옳고 그름과 진실을 구별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하는 거지."



(주홍색 연구 2부, 박준길의 이야기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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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홍색 연구(2) - 추리라는 학문 +7 21.05.30 1,141 44 27쪽
1 주홍색 연구(1) - 최성록이라는 사나이 +15 21.05.30 2,350 73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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