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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일의 작업실

경무부의 수사고문, 성록 홍주

웹소설 > 일반연재 > 추리, 대체역사

고도일
작품등록일 :
2021.05.30 15:02
최근연재일 :
2022.09.08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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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6.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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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쪽

주홍색 연구(8) - 박완승의 회고록

DUMMY

8. 박완승의 회고록


우리에게 붙잡힌 박준길은 처음에는 심하게 저항했지만 더는 난폭하게 반항하지 않았다.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한 듯 오히려 상냥한 미소를 지었으며, 우리 중 누구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며 홍주에게 말했다.


"제가 몰고 온 택시가 있으니 그걸 타고 경찰서로 데려가면 됩니다. 만약 다리만 풀어준다면 직접 걸어가겠소. 들어서 옮기기엔 너무 무거울 테니까요."


두 형사는 박준길의 제안을 듣고 건방지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으나 홍주는 그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의 발을 풀어주었다. 박준길은 일어나 이리저리 다리를 뻗어보며 문제가 없는지 확인했다. 나는 그전까지 그토록 강렬한 의지와 그 이상으로 우람한 체격을 갖춘 사내를 본 적이 없다. 그리고 햇볕에 그을린 얼굴 역시 그의 우람한 체격이 더해져 박준길이 가진 강력한 의지와 정력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런 박준길은 대놓고 홍주를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차기 경무부장 자리가 공석이라면 선생이야말로 제격입니다. 저를 이런 식으로 꾀어내다니 정말 감탄했습니다."


홍주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형사들에게 말했다.


"자, 함께 서로 이동하시지요."


나형사가 말했다.


"제가 운전하지요."


"그래 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김 형사님이 저랑 함께 뒤에 타시죠. 그리고 완승 자네도 함께 가세나. 자네는 처음부터 이 사건에 흥미를 갖고 있었으니까 끝까지 지켜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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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서대문경찰서 -


나는 기꺼이 따라가기로 하고 모두 계단을 내려갔다. 박준길은 순순히 차에 올라탔고, 우리 역시 모두 택시에 탑승했다. 나 형사는 빠르게 차를 몰아 우리는 순식간에 서대문 경찰서에 도착했다. 경관 하나가 용의자의 신상을 기록하더니 우리를 취조실로 안내했다. 유난히 창백한 얼굴에 무뚝뚝하던 그 경관은 기계처럼 자신의 업무를 수행했다.


"군정청의 용의자 취조는 금주 안으로 시작될 겁니다. 박준길씨, 그전에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미리 말해두겠는데 모든 진술은 기록되고 재판에 불리한 증거로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자 박준길이 대답했다.


"할 말이야 많습니다만. 저는 여기 계시는 분들 모두에게 남김없이 다 털어놓고 싶습니다."


그러자 경관이 다시 말했다.


"재판장에서 진술하는 게 낫지 않겠소?"


"제가 재판받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도주하거나 자살할 생각은 아니니까요. 혹시 선생님은 의사십니까?"


박준길은 마지막에 질문을 덧붙이며 매서운 눈을 내게로 향했다.


"네. 맞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박준길이 웃으며 수갑이 채워진 손목으로 가슴을 가리켰다. 나는 박준길이 시키는 대로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고 손을 대자마자 심상치 않은 박동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그의 심장은 고장 난 엔진처럼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대동맥이 손상된 것 같은데? 빨리 치료해야 하오."


"그렇다더군요. 지난주에 병원에서 진료를 받았는데 가까운 시일 내에 혈관이 터질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사실상 시한부 상태죠. 증상은 지난 몇 년 동안 크게 악화됐습니다. 젊을 적에는 수시로 내장산 계곡에서 노숙을 하며 제대로 먹지 못했고 만주로 넘어가서도 하루 한 끼 챙겨 먹는 것도 힘들었으니...


해방된 후에도 생계를 위해 허드렛일을 하다가 결국 탈이 난 거죠. 하지만 전 해야 할 일을 마쳤으니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만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막은 털어놓고 싶군요. 평범한 살인자로 기억되고 싶진 않으니까요."


취조를 맡은 경관과 두 형사는 그가 바로 진술할 수 있는지 절차를 확인하고 잠시 이야기를 나누더니 김 형사가 내게 물었다.


"박 선생께서 보시기에 상태가 심각합니까?"


"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당장 용의자의 진술서를 받아두어야겠군요. 진술을 시작하시죠. 모든 진술은 기록될 것입니다."


박준길은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기 시작했다.


"괜찮으시면 좀 앉겠습니다. 증세 때문에 쉽게 피곤해집니다. 게다가 체포될 때 몸싸움을 벌이며 더 진이 빠졌고요. 전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는 데다 여러분을 속일 생각도 없으니 믿어주십시오. 진술은 언론에 공개하든 좋을 대로 하십시오."


그 말과 함께 박준길은 의자에 기대어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박준길은 담담하게, 그리고 침착하게 시기별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당시의 진술은 나형사가 속기로 수첩에 세세히 기록했고, 나는 그 수첩을 참고할 수 있었기에 아래의 이야기가 정확하다고 장담한다.


"제가 그 두 인간은 얼마나 증오하는지 여러분들은 중요치 않겠지요. 하지만 그 두 사람은 무고한 부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살인자들입니다. 시간이 너무 흐른 탓에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말이죠. 그래서 그들이 저지른 짓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 제가 직접 그들에게 지은 죄에 걸맞은 형벌을 내리기로 결심했습니다. 만약 여러분도 제 입장이었다면 저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저는 한 여인과 20년 전에 혼인을 맹세했습니다. 하지만 추악한 차철환에게 끌려가 강제로 결혼했고 화병으로 죽고 말았죠. 저는 그녀가 죽기 전까지 품고 있던 약혼반지를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언젠가는 그에게 복수하리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만주와 온 조선을 헤맨 끝에 두 사람을 찾아냈지요. 그들은 제가 복수를 포기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저는 이제 죽은 거나 다음 없는 목숨이지만 제가 해야 할 일을 마쳤고, 그래서 홀가분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습니다. 제 손으로 직접 그들을 심판했으니까요. 더 이상 어떤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놈들은 부유했지만 저는 가진 것이 없었기에 그들의 뒤를 쫓는 것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땡전 한 푼 없어 당장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해서라도 뭐든 일거리를 찾아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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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년 조선은행앞 택시 -


만주에 있던 시절부터 운전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기에 오래 알고 지낸 동지의 소개를 받아 승합 택시를 모는 일을 지원했더니 곧 써 주더군요. 그리고 일정한 금액을 가져다 내면 나머지는 제 돈이었기에 큰돈은 아니지만 저 하나 건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택시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건 서울 지리를 익히는 것이었습니다. 여기는 사람들도 너무 많고 도로도 많아 길을 잘 모르면 마치 미궁 같으니까요. 그래서 지도를 늘 가지고 다니며 번화가에 있는 호텔이나 여관, 유곽 등을 닥치는 대로 외우기 시작했죠. 그 이후로 택시 영업은 수월해졌습니다.


"두 원수 놈의 거처를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 하지만 끈질기게 수소문한 끝에 두 사람이 아현동의 한 여관에서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아냈지요. 두 놈을 발견하고 나자 이제 오랜 계획을 행동으로 옮기는 일만 남아있었습니다.


저는 수염을 무성하게 기르고 있던 데다 세월이 많이 흘러 두 사람이 저를 알아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두 사람의 뒤를 밟으며 복수할 기회를 노렸죠. 놈들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습니다.


늘 두 놈을 지근거리에서 미행했습니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뒤를 쫓았죠. 어떤 때는 택시를 몰고, 어떤 때는 걸어서 미행했지만 택시가 미행하기엔 훨씬 수월하더군요. 하지만 그렇게 놈들을 쫓다 보니 택시 영업은 이른 오전이나 늦은 밤에나 할 수 있었고, 사납금도 밀리기 시작했죠. 하지만 어차피 목표는 두 놈에게 복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남은 돈을 털어가며 사납금을 채웠고, 하루 온 종일 그렇게 두 놈을 쫓아다녔습니다.


하지만 부산에서 제 정체가 그놈들에게 발각된 이후 놈들도 신중에 신중을 기했습니다. 이십 년이 지나서까지 제가 다시 나타나 죽은 연인의 복수를 시도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니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미행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습니다. 이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두 사람을 미행했는데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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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명동일대(출처:서울역사아카이브) -


차철환이라는 놈은 늘 술에 취해있었지만, 김일권은 낮잠조차 자지 않았습니다. 늘 밤까지 그놈들을 지켜봤지만 쉽게 기회가 오지 않더군요. 하지만 저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반드시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했으니까요. 20년을 기다렸는데 2주 정도 기다리는 건 일도 아니었죠. 제 유일한 두려움은 혹시라도 혈관이 터져 복수를 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을까 하는 두려움뿐이었습니다.


마침내 어느 날 저녁, 그들이 묵고 있는 숙소 근처에 택시를 태워두고 두 놈의 감시하고 있었는데 숙소에서 짐이 나오더니 얼마 후 두 놈이 택시를 타고 이동하더군요. 저는 이놈들이 멀리 떠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서울역에 두 놈이 내리자 택시를 세워두고 두 놈을 따라 역으로 들어갔죠.


그놈들은 인천행 기차표를 사려고 했는데 역무원이 방금 한 대가 출발했고 다음 열차는 한참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더군요. 김일권은 열차를 놓쳐 화가 난 듯 보였지만 차철환은 오히려 기뻐하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인파에 섞여 좀 더 두 놈에게 가까이 접근했고, 그들이 하는 모든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차철환이 남아서 처리할 일이 있으니, 어딘가에서 기다리면 시간에 맞춰 합류하겠다더군요. 김일권은 함께 다녀야 한다며 차철환을 말렸지만 차철환은 꼭 혼자 처리할 일이라며 억지를 부렸습니다. 차철환은 김일권에게 자신이 고용한 비서 주제에 멋대로 나서지 말라며 버럭 화를 내더군요. 김일권은 막차를 놓치면 내일 출발해야 한다며 혹시 만나지 못한다면 남대문의 대동여관으로 오라고 하더군요. 차철환은 막차 시간 전에 돌아오겠다고 대답했고요.


제가 평생을 기다리던 순간이 드디어 찾아온 것이죠. 놈들은 이제 제 손안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하지만 서두르진 않았습니다. 계획은 이미 세워져있었고 뭣보다 그놈들이 누구 손에 죽는지, 왜 죽음이란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충분히 깨닫게 만들지 못한다면 제대로 된 복수가 아니라 생각했으니까요. 그냥 어두운 밤길에 따라붙어 칼이나 총을 사용해 죽인다면 훨씬 더 쉬웠겠지만 그들에게 그런 편안한 죽음을 선사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저는 오래전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워왔죠.


얼마 전에 화천정에서 태운 손님이 우연히 열쇠를 택시에 잃어버리고 간 일이 있었습니다. 남편 일로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일본인으로부터 매입한 화천정 주택이 팔리지 않자 결국 내년 봄쯤에 동생네 내외가 들어와 살기로 했다며 스스로 본인 이야기를 읊어 댔는데 그 이튿날 열쇠를 찾으러 사무실로 왔기에 곧 돌려주기는 했지만 저는 그전에 본을 떠서 똑같은 열쇠를 하나 더 만들어 두었지요.


그렇게 해서 적어도 내년 봄까지는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아도 될 장소를 이 경성 한복판에 마련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차철환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 집안으로 끌어들일지가 문제였죠.


다시 그날 이야기를 하자면 차철환은 길을 따라 걷다가 여기저기 술집에 들르더니 마지막 가게에서는 30분이 지나서야 나왔습니다. 그가 밖으로 나왔을 때 걸음걸이를 보니 상당히 취했더군요. 택시 앞에 인력거가 서있었는데 차철환이 그 인력거에 타고 어딘가로 출발하길래 그 인력거를 쫓아갔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인력거를 타고 가더니 놀랍게도 차철환은 자신이 묵었던 아현정 여관 앞에서 내리더군요. 어째서 다시 여관으로 돌아왔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만 일단 택시를 세워두고 조금 멀리서 여관 쪽을 지켜보며 놈이 다시 나오길 기다렸죠. 아, 죄송한데 물 한잔 마실 수 있겠습니까? 쉴 새 없이 떠들다 보니 입이 바짝바짝 마르는군요."


김형사가 물을 따라 건네니, 박준길은 물 잔을 쭉 들이켰다.


"시원하군요. 감사합니다. 어쨌든 저는 거기서 십오분쯤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집안에서 누군가 다투는 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열리고 두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그중 하나는 차철환이었고, 다른 하나는 젊은 남자였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습니다. 이 젊은이가 차철환의 멱살을 잡고 있었는데 계단에서 차철환을 발로 차서 밀어버리더군요. 젊은 친구가 몽둥이를 흔들며 소리쳤습니다.


"이 개자식아. 내 여동생을 감히 그따위로 모욕해? 오늘 곱게 돌아가긴 틀린 줄 알아!"


젊은 남자는 엄청나게 화가 나 보였고, 몽둥이를 들고 차철환에게 다가가자 차철환은 다리를 절룩거리며 허겁지겁 달아났습니다. 그는 제가 택시를 세워둔 모퉁이까지 도망쳐 왔고, 택시를 보더니 반가워하며 부랴부랴 타더군요. 그리고서는 제게 행선지를 말했습니다.


[남대문 쪽으로 가주게!]


제가 손님으로 그놈을 택시에 태웠을 때 저는 너무 기쁜 나머지 이러다 혈관이 터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습니다. 천천히 택시를 몰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했죠. 이대로 시내를 빠져나가 외딴 숲으로 데려갈 수도 있고, 인적 없는 으슥한 골목에서 처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차철환이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더군요.


술이 더 땡겼는지, 어느 술집 앞에서 택시를 세우고는 얼마를 쥐여주며 자기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영업을 마칠 때까지 술을 마시더니 밖으로 다시 나왔을 때는 아예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고주망태가 되어 있었죠. 저는 이제 차철환 그 놈이 완전히 제 손안에 들어왔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처참히 죽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설사 그렇게 했더라도 마땅한 죗값을 치르게 할 뿐이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만주로 넘어가기 전에 정읍에서 심마니를 해서 먹고살았는데 그때 약방을 드나들며 어깨너머로 환을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러다 만주로 넘어가서 별별 고생을 하다 독립군에 들어갔지요. 제 입으로 이야기 하긴 그렇지만 젊을 적에는 몸이 날래고 입이 무거워 정찰이나 첩보 같은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고 때때로는 암살 임무도 있었는데 그때는 무색무취의 독약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극히 작은 양으로도 사람을 즉사시킬 수 있는 맹독이었는데 그것을 물에 잘 녹는 환단으로 만들어 사용했지요. 친일분자 암살용이긴 했지만 여차하면 임무 중에 붙잡혔을 때 자결할 용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엔 독약과 똑같지만 인체에는 무해한 환단도 함께 만든 뒤 짝을 지어 연고 상자에 담아두었습니다.


언제든 기회가 오면 놈들에게 상자 속에서 한 알을 선택해 먹게 만들고 나머지 하나는 입에 털어 넣을 생각이었죠. 그 방법이라면 총을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조용하면서도 치명적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렇게 늘 환약 상자를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마침내 그것들을 사용할 때가 온 것이죠.


당시는 대략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고 비가 억수로 쏟아졌죠. 거리는 스산했지만 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기쁜 날이었습니다. 정말 고래고래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이었지요. 일평생을 기다리던 순간이 마침내 찾아왔으니까요. 여러분도 제 입장이 되어보신다면, 제 심정을 이해하실 겁니다.


저는 어떻게든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주머니에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지만 연신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가슴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습니다. 어딘가에서 고방주와 목숨처럼 사랑했던 단월이 저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일전에 봐둔 화천정의 빈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인근에 지나다니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었고, 잦아드는 빗방울 소리를 제외하고는 적막 그 자체였습니다. 뒷좌석을 보니 차철환은 곯아떨어져있더군요. 저는 그놈의 팔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내리십시오.]


[도착했나? 좋아.]


차철환 그놈은 남대문 여관에 도착한 걸로 생각한 모양인지 순순히 택시에서 내려 현관 쪽으로 걸어가더군요. 몸을 제대로 못 가누기에 제가 부축해서 그대로 현관을 향해 걸어갔죠. 현관문을 열고 통로를 지나 빈방으로 걸어들어갈 때 마치 고방주와 단월이 우리 두 사람을 안내하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너무 어둡구먼. 몇 시나 되었기에 이렇게 어둡지?]


[금방 불을 켜겠습니다.]


저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성냥을 그어 가지고 온 양초에 불을 붙인 뒤 그자를 향해 돌아서며 말했습니다.


[이것 봐, 차철환.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나?]


제 말에 차철환 그놈은 취한 눈빛으로 저를 한참 바라보더니 잠시 후 눈이 휘둥그레지며 얼굴이 창백해지고 눈동자에는 공포가 서렸습니다. 그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더니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벌벌 떨더군요. 저는 문을 등지고 서서 공포에 질린 차철환의 모습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습니다. 늘 달콤한 복수를 꿈꿔왔지만 실제로 그 순간이 오니 쾌감은 배가 되더군요.


"이 개자식. 일본에서 부산까지 네놈 뒤를 쫓았지만 번번이 잘도 도망 다녔지. 그것도 이젠 끝이야. 우리 둘 중 하나는 내일 아침을 맞을 수 없을 테니까."


코피가 쏟아지니 도리어 정신은 멀쩡해졌지요. 피가 흘러 바닥에 떨어졌지만 저는 문을 잠그고 열쇠를 흔들며 소리쳤습니다.


[기분이 어때? 불쌍하게 죽어간 단월의 생각이 나냐? 하늘이 무심하여 네놈을 오늘까지 살려뒀지만 오늘이 네 죗값을 치르는 날이다.]


그러자 차철환은 비겁한 표정으로 입술을 떨며 뭐라 말하려다 그만두더군요. 아마 살려달라고 애원하려다 소용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습니다. 잠시 후 더듬거리며 간신히 말하더군요.


[살인을 저지를 셈이냐?]


[아니. 미친개를 때려 죽인다고 그걸 살인이라고 하진 않지. 네놈은 고방주의 목숨을 가지고 단월을 협박해 강제로 결혼을 하고 결국 고방주도 단월도 죽게 만들었지. 그러고는 두 사람의 재산을 모두 가로채고 말야. 그래놓고도 목숨을 구걸하는거냐?]


[그 두 사람은 내가 죽인 것이 아니야!]


저는 환단이 든 상자를 들이밀며 소리쳤습니다.


[개소리 집어치워! 단월을 겁박하고 또 마음을 짓밟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 네놈이 아니라고? 자, 신이 있다면 적어도 어느 쪽이 죄가 많은지 가려주겠지. 원하는 쪽을 집어라. 하나에는 독이 들어 있고, 하나는 그냥 목숨에 아무 지장이 없는 것이다.


네놈이 선택하면 나머지 하나를 내가 먹지. 나는 이제 신이니 하늘이니 이딴 건 믿지 않는다만 적어도 이 세상에 한 줌이라도 정의가 남아있는지 이걸로 시험해 보는 거다.]


그놈은 겁을 먹고 소리를 치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저는 칼을 뽑아 그 자의 목에 들이대고 환단을 삼킬 때까지 기다렸고, 차철환이 환단을 삼키자마자 저도 나머지 하나를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마주 보고 서서 누가 살고 누가 죽게 될지를 기다렸죠.


곧 차철환에게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놈의 절망과 고통으로 가득 찬 표정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웃음을 터트리며 단월과의 약혼반지는 놈의 눈앞에 들이댔습니다.


독약의 성분은 금세 퍼지더군요. 격한 고통이 찾아왔는지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비틀거리며 손을 꿈틀대더니 짜낸 듯한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습니다. 엎드린 차철환의 시신을 발로 차 눕힌 뒤 그의 심장에 손을 가져다 댔더니 맥박이 없더군요. 확실히 죽었다는 걸 확인했습니다.


코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어찌나 흥분했는데 그걸 알아차리지도 못했습니다. 당시에는 무슨 생각으로 벽에 글을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일생을 기다린 복수가 성공한 날이고 제 나름의 승전보를 올리고 싶은 그런 기분이었다고 할까요? 한편으로는 김일권에게 남남은 복수를 마무리 할 때까지 수사에 혼선을 주고 싶은 목적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히 천벌(天罰)이라고 적으려 했습니다만 이제껏 제 기도를 단 한 번도 들어준 적이 없었던 하늘이 되려 원망스럽기도 했고, 이놈들이 보천(普天)이니 경천(敬天)이니 하고 부르짖던 것이 갑자기 떠올라 차라리 무정한 하늘을 벌하고 싶단 마음에 벌천(罰天)이라고 쓴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저는 택시로 되돌아갔고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람은 여전히 거셌지만 비는 이미 그쳤더군요. 한참을 운전해서 가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더니 단월의 금반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남긴 유일한 유품이었기 때문에 저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분명 차철환이 죽을 때만 해도 제가 그 자의 눈앞에 반지를 들이댔기에 그 때까지 반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건 확실했죠. 아마 반지를 주머니에 다시 넣고나서 차철환의 시체 위에 허리를 구부렸을 때나 밖으로 나와서 택시로 뛰어가던 도중에 떨어뜨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단 그래서 차철환이 쓰러져 있는 빈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그 반지를 찾기 위해서라면 살해 현장에서 잡힐지도 모른다는 위험마저 감수할 생각이었죠. 그런데 그때 집 안에서 경관이 뛰쳐나오지 뭡니까? 저는 순간적으로 주정뱅이로 가장해서 위기를 넘긴 뒤, 그곳에서 달아났습니다. 


이상이 차철환의 최후입니다. 나머지는 김일권에게도 동일한 죗값을 치르도록 해 단월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놈이 어디서 차철환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고 있던 터라 하루 종일 주변에서 감시해 보았지만 도통 밖으로 나오지 않더군요. 아마도 차철환이 끝내 돌아오지 않자 무슨 일이 생겼다고 눈치를 챈 모양이었습니다.


그놈은 교활하고 눈치가 빨라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여관방에 틀어박힌 걸로 저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실수였죠. 어느 여관에 묵고 있는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일단 놈이 머물고 있는 객실을 알아낸 뒤 다음 날 새벽 동이 트기 전 여관 뒷골목으로 가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습니다. 그러고는 잠든 김일권을 깨워 칼을 들이밀고 오래전 고씨 부녀를 죽음으로 내몬 대가를 치를 때가 왔다고 말했죠.


난 차철환이 어떻게 죽었는지 들려주었고, 김일권에게도 똑같이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놈은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서 저에게 달려들더군요. 저는 들고 있던 칼로 그놈의 심장을 찔러버렸죠.


김일권이 공포와 죄책감에 떨면서 죗값을 치르길 바랬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진 않았죠. 어쩔 수 없이 그 자가 환약을 선택했다고 해도 결국 죽을 운명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사건에 대해서는 이것이 전부입니다. 몹시 피곤하군요.


복수를 끝내고 나니 허망했지만 일단 정읍으로 돌아가서 단월의 묘 옆에서 죽자는 생각으로 일단은 며칠 더 일해서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택시 조합에 나갔더니 거지 차림을 한 아이 하나가 저에게 와서 봉래정 2층 집에서 오가는 비용을 모두 주겠다며 택시를 불러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 그 아이를 태우고 함께 여기로 온 겁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선생께서 이미 저를 범인으로 확신하고 수소문해 놓은 것이겠죠.


어쨌거나 짐 옮기는 걸 도와달라는 말에 아무 생각 없이 올라갔습니다. 혁대를 채우는 걸 도우려 몸을 숙이자마자 제 손에 수갑이 채워졌고 그 솜씨는 정말 쏜살같았죠. 이제 전부 다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저는 살인을 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저는 세상 그 누구보다 정의롭다고 자부합니다."


박준길의 이야기에 우리는 전율을 느꼈고, 그의 태도 역시 너무 인상적이어서 그가 이야기하는 동안 아무도 큰소리를 내거나 기침 한 번 하지 않았다. 심지어 매일 같이 사건을 직접 접하는 형사들마저도 박준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박준길의 이야기가 끝나고도 한동안 방 안은 아무도 없는 듯 조용했다. 오직 나형사가 박준길의 모든 이야기를 수첩에 속기하는 소리만 들릴 따름이었다. 홍주가 얼마간의 침묵 후 입을 열었다.


"딱 하나 궁금한 것이 있소. 신문광고를 보고 하숙집으로 반지를 받으러 온 자의 정체를 알려줄 수 있소? 체격도 그렇고 당신이 우리 집으로 직접 와서 잡힌 것을 보면 당신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러자 박준길은 홍주를 향해 씽긋 웃더니 말했다.


"저에 대한 비밀이라면 뭐든 말할 수 있습니다만 제 동료를 팔진 않습니다. 그것도 아무런 대가 없이 저를 도와준 이를 말이죠. 저는 신문광고를 보고 그것이 함정인지, 아니면 진짜 단월의 반지가 맞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동료가 자진해서 자기가 다녀오겠다고 했죠.


그는 제가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할 당시 알게 된 동료입니다. 저의 사무친 한을 오래전부터 들어 알고 있기에 필요할 때 힘이 되어 준 사람이라는 정도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다만 그 친구가 반지를 찾으러 간 집과 오늘 제가 잡힌 하숙집과 같은 곳이라는 걸 알았다면 제가 이렇게 붙잡히지는 않았을 텐데요. 이 또한 운명이겠죠. 어쨌든 젊은 선생께서 보시기엔 어떻던가요? 정말 끝내주게 변장했지요? "


홍주는 진심을 담아 이야기했다.


"정말 놀랄만한 실력이더군요."


취조를 담당하던 경관이 말했다.


"자, 여기까지 하시죠. 일단 박준길씨 당신은 목요일쯤 군정청의 취조를 받게 될 테고 추후 재판이 진행될 겁니다. 그때까지는 박준길 당신의 신병은 제 소관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경관의 지시로 박준길은 순경 두 명에 이끌려 좁은 취조실을 나갔고, 나와 홍주는 경찰서를 나와 택시를 타고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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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무부의 수사고문, 성록 홍주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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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주홍색 연구(9) - 사건의 결말 +1 21.06.01 261 13 14쪽
» 주홍색 연구(8) - 박완승의 회고록 21.06.01 243 11 26쪽
7 주홍색 연구(7) - 어둠 속의 빛 +1 21.05.31 256 15 20쪽
6 주홍색 연구(6) - 김형사의 활약 +2 21.05.31 318 13 23쪽
5 주홍색 연구(5) - 광고를 보고 온 손님 21.05.30 325 18 17쪽
4 주홍색 연구(4) - 홍주의 추리 +3 21.05.30 448 18 19쪽
3 주홍색 연구(3) - 화천정 살인사건 +3 21.05.30 772 25 30쪽
2 주홍색 연구(2) - 추리라는 학문 +7 21.05.30 1,141 44 27쪽
1 주홍색 연구(1) - 최성록이라는 사나이 +15 21.05.30 2,350 73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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