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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일의 작업실

경무부의 수사고문, 성록 홍주

웹소설 > 일반연재 > 추리, 대체역사

고도일
작품등록일 :
2021.05.30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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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8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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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30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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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색 연구(4) - 홍주의 추리

DUMMY

4. 홍주의 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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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우편국 전경(1939, 출처:서울역사아카이브) -


우리가 화천정 사건 현장을 떠난 것은 대략 오후 1시경이었다. 홍주는 가는 길에 우편국에 들려 상당히 긴 전보를 보냈다. 우편국을 나서자 마침 승합마차⁽¹⁾가 지나가길래 마차를 세우고는 서대문경찰서 쪽으로 지나가는지를 확인한 뒤 승합마차에 올랐다. 마차에는 둘뿐이라 사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았다.


"그 정순경이란 자의 증언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가장 좋네. 사실 나로서는 아까의 조사만으로 대략의 윤곽은 잡았지만 좀 더 자세히 알아두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어리둥절할 따름이네. 조금 전에 그 둘에게 이것저것 설명해 주었지만 어떻게 그렇게 훤히 다 알고 있는 건가? 전부 확실한 건 아니지?"


"추리가 빗나갈 여지는 없어. 단지 생각만으로 떠들어 댄 것은 아니니까 말일세. 내가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보도에 인접해서 자동차의 바큇자국이 나있다는 것이었네. 지난 며칠간 계속 날이 좋았다가 어젯 낮부터 저녁까지 비가 왔으니 그렇게 선명한 바큇자국은 어젯밤의 것이 분명하지. 특히나 뒤의 두 개의 바퀴 가운데 왼쪽 바큇자국이 유난히 뚜렷한 것으로 보아 바퀴를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네.


그 자동차가 비가 내린 다음 도착했다는 건 확실해. 그리고 아침이 되고 나서는 사람이나 마차, 자동차 한 대도 그 앞으로 지나가지 않았다는 나 형사의 말로 미루어 자동차는 정순경이라는 자가 시신을 발견하기 전인 밤 열 시 이전에 왔다 갔고 그 차에 두 사람이 타고 왔다는 것 또한 확실한 사실이지."


"그렇게 설명하니 간단한 것 같지만 범인의 키는 대체 어떻게 알아냈나?"


“사람의 신장이나 체중은 십중팔구 걸음걸이로 알아낼 수 있다네. 보폭을 알아내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지.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찍힌 발자국이나 집 안에 가득 쌓인 먼지 사이에 난 발자국 간격으로 측정할 수 있다네. 또한 그 계산이 정확할지 확인해 보는 방법도 있어.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기 눈높이에 맞춰 글씨를 쓰니까 말이야.


그런데 이 글씨는 딱 내 눈높이와 일치하는 곳에 쓰여 있었고 나랑 비슷한 신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 보폭 또한 나와 비슷하지만 진흙의 눌린 정도나 먼지가 끌린 것을 봐서 나보다 좀 더 체중이 나간다는 것까지 알 수 있었네. 그렇다고 물웅덩이를 뛰어넘은 것을 보면 몸이 날랜 사람일 텐데 뚱뚱할 리가 없지 않은가? 딱히 어려울 것이 없는 추리야.”


“그렇다면 나이는?”


"아, 한쪽 다리가 불편한데도 1메타 정도 되는 거리를 쉽게 뛸 수 있는 남자라면 우선 노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어. 지팡이 자국도 없고 말일세. 1메타라는 것은 비가 와 생긴 문 앞 물웅덩이의 폭이라네. 범인으로 추정되는 자가 웅덩이를 뛰어넘은 발자국이 남아있었고...


피살자가 신고 있던 가죽 구두의 발자국은 물웅덩이를 돌아갔으나 뒷굽이 상당히 닮아진 구두는 그것을 그냥 뛰어넘었더군. 이건 뭐 이상하거나 신기할 것도 없는 그냥 사실 그대로일세. 내가 일전에 사설에서도 관찰과 추리를 숙달해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그것을 이번 사건에서 응용해 본 것뿐일세. 더 궁금한 게 남았나?"


"손톱이 길다는 것과 담배는?"


"벽의 글씨는 검지에 피를 묻혀 쓴 것이었네. 돋보기로 확대해 보니 글씨를 쓸 당시 흙벽에 살짝 긁힌 자국이 있더구만. 만약 손톱을 짧게 다듬었다면 나올 수 없는 흔적이지.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꽁초를 조사해 봤는데 가장 흔한 담배였다네. 참고로 피살자의 소지품 가운데는 담배가 없었고, 죽음이 닥친 상황에서 여유 있게 담배를 피우지도 못했겠지. 뭣보다 몸에서 담배 냄새도 나지 않았고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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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당시 전매국(출처:서울역사아카이브) -


나는 사소한 무언가라도 연구하는 것을 좋아해서 풍년초 같은 쌈지담배나 승리, 미제와 일제 담배의 꽁초와 재까지도 다 연구한 적이 있다네. 워낙에 끽연을 좋아하기도 하니 자연스레 관찰하고 연구하게 된 것이기도 하지. 자네가 생각하기에는 미친 짓 같겠지만 말이야. 나로서는 어떤 담배라도 꽁초만 있다면 무슨 담배를 피웠는지 바로 맞출 수 있어. 이렇게 사소한 점에 대한 집착이 다른 형사들이나 소설 속 탐정들과는 다른 점이라네."


"그렇다면 얼굴이 붉은 편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나?"


"내생각이 틀림없다고 확신하지만 추리 자체는 좀 대담했지. 지금 상황에서는 정확히 말하기엔 곤란하니 나중에 이야기해 줌세."


나는 이마에 손을 대며 말했다.


"현기증이 다 나려고 하네. 생각하면 할수록 이해가 안 가는 것들 투성이야 두 남자는 어떻게 그 빈집에 들어갔을까? 그리고 두 사람을 태우고 간 운전수를 어찌 되었을까? 또한 어떤 방법으로 범인이 피해자에게 독을 마시도록 강요했을까?


도난당한 것도 없고 정말 범인의 복수가 단순한 복수라면 왜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하고도 굳이 천벌이 아닌 벌천이라는 단어를 남겼을까? 그것도 자신의 피로 말일세. 솔직히 말해서 도무지 연결이 안 되네. 전혀 모르겠어."


홍주가 내 말에 손뼉이라도 칠 듯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복잡한 사건을 간결하게 요약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군. 그것도 매우 요령 있게. 사건의 핵심은 대충 파악했지만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것들 투성이긴 해.


나형사가 발견한 벌천이라는 글자는 천벌로 읽기 쉬운데다, 피해자의 신원을 고려하면 일본인나 친일파에 대한 피의 응징 정도로 생각하게 만들지. 해방 이후 그런 사건이 꽤나 많았던 데다 피해자가 재일 교포라면 경찰도 형식적으로 조사하고 말거든. 


하지만 난 벌천이라는 단어가 단순히 복수를 위해 쓴 것은 아니라 확신하네. 천벌이면 모를까 벌천이라는 단어는 불교를 비롯해 종교적으로도 아예 쓰이지 않는 단어거든. 


물론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고 범인이 그렇게 쓴 것에도 역시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지. 특히나 이렇게 형사들이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교묘하게 살인을 저지른 자라면. 이렇게 없는 단어를 굳이 썼을 때는 반댓말이나 상대적 의미를 갖는 단어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야 하네.


하늘을 벌한다라는 표현의 반대는 하늘을 받드는 것 아닌가? 그런 표현들로는 상천이나 보천, 경천 같은 단어들이 있네. 뭐 벌써 짐작 가는 부분이 있긴 하네만 설명은 이 정도로 끝내지.


알다시피 마술사는 자기의 기술들을 전부 알려주지 않아. 그랬다간 나중엔 아무도 신기해하지 않고, 결국 빈털털이가 될 뿐이니까 말야. 내 수사기술도 너무 많이 알려주면 결국 언젠가 자네도 나를 그저 평범하고 뻔한 사람 중에 하나라고 생각할 것 아닌가?"


"아니, 적어도 난 그렇지 않을 걸세. 자네의 추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되려 감탄만 하게 되니까. 자네의 수사방법이 극히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네."


평소 표정 변화가 크게 없는 홍주도 이 말을 듣고 나서는 기뻤는지 살짝 입꼬리가 올라갔다.


"알아주니 고맙네. 내친 김에 한가지만 더 알려주지. 살해된 남자는 범인과 함께, 같은 차를 타고 와서 사이좋게 마당을 걸어 들어갔네. 아마 팔짱을 꼈거나 범인이 부축했겠지. 그리고 집안에 들어가자마자 방안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네. 정확히 말하면 가죽구두를 신은 피살자는 꼼짝 않고 서 있는 동안 굽이 닮아진 구두를 신은 범인은 쉴 새 없이 방안을 오갔지.


이런 것들은 전부 바닥의 먼지에 찍힌 발자국을 보면 알 수 있다네. 한편 발자국 사이의 간격이 점점 넓어지는 걸 보면 구두굽이 닳아진 사나이가 차차 흥분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알 수 있어. 그는 피살자 주변을 서성거리며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다가, 마침내는 언성이 높아지고 흥분이 극에 달해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네.


내가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들은 모두 자네에게 이야기한 셈이네. 나머지는 그저 추측일 뿐이지. 일단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조사는 시작할 수 있어. 그런데 좀 서둘러야겠어. 오늘 저녁 고려교향악단⁽²⁾의 첫 정기연주회에 가야 하니 말이야. 사건 때문에 연주회를 놓치고 싶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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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인용 승합마차 -


그렇게 사건에 관하여 대화하는 사이에 승합마차⁽²⁾는 서대문서 근방에 거의 도착했다. 약도와 주소를 보고 찾아간 유별나게 더러운 골목길에는 판자로 된 집들이 양쪽으로 여러 채 있었고 그중의 한 집에 "정옥수"라는 문패가 걸려있었다. 아마도 정순경 부친의 이름인 듯싶었다. 문을 두드리자 쉰 살 중반의 여인이 나왔는데 그 여자에게


"급하게 정순경을 만나러 왔습니다."


라고 홍주가 말하자


"아들은 자고 있으니 잠시 기다리셔야 되겠어요."


잠시 뒤, 잠에 취해있다 모친이 갑자기 깨워서 그런지 뾰로통한 표정의 남자가 나타났다. 이 자가 정순경일 것이다.


"사건에 관련된 것이라면 서에 전부 보고했습니다."


홍주는 간략히 자기소개를 한 뒤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어 돌돌 말더니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보고서보다는 현장을 목격한 당신으로부터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습니다."


"알고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말씀드리지요."


돈을 본 정순경의 눈빛이 달라졌다.


"사건 현장을 발견했을 당시 본 그대로만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러자 정순경은 평상에 걸터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근무시간은 오후 2시부터 밤 자정까지였습니다. 저녁 7시경 효자정⁽³⁾ 공설시장 근처에서 만취한 주정뱅이들의 싸움 빼고는 순찰 구역에는 별 이상이 없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뒤, 아마도 1시간 조금 넘게 지났을 겁니다만 다시 인근을 한 바퀴 돌고 화천정 골목길 쪽에는 이상이 없을까 해서 그리로 갔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 꽤나 으스스 한 밤이었지요. 도중에 지나가는 군용차 한 대를 만났을 뿐 날도 날인 데다 통금시간이 가까워오자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건 우리들끼리의 이야기이지만 그런 밤에는 막걸리 한 사발에다 뜨끈한 국밥 한 그릇 먹어주면 몸이 풀리겠다고 생각하며 걸어가니 바로 그 사건이 일어난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 눈에 띄더군요. 원래 살던 집주인과 안면이 있는 사인데 당분간 비어있을 것이라고 들었거든요. 그런데 창문에서 불빛이 새어 나온다는 것은 뜻밖의 일이었지요.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별일이 없더라도 집주인이 있으면 인사나 할까 싶어 현관까지 갔는데..."


홍주가 끼어들었다.


"현관까지 갔다가 되돌아 나왔지요? 그때 왜 그랬습니까?"


정순경은 깜짝 놀라며 홍주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맞습니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가 현관에 다가갔을 때 집안이 너무 조용하고 음침해서 누군가 함께 들어갈 만한 사람이 없나 찾으러 길가로 다시 나왔습니다. 상대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도 겁나지 않지만 혹시 장티푸스로 죽은 귀신의 원혼이라도 달라붙는다면 그건 무척 곤란하거든요."


"그래 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까?"


"동료들도 다른 곳을 순찰 중인지, 아니면 어디 숨어서 담배를 피우는지 사람은커녕 개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습니다. 별 수없이 나는 다시 현관 쪽으로 가서 문을 열었습니다. 내부는 조용하더군요. 그래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보았습니다. 벽난로 귀퉁이 위에 놓인 촛불이 흔들리고 그 불빛에 비춘 바닥을 보니..."


"거기까지. 뭘 봤는지는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방 주위를 돌다 결국 시체 옆에 다가가서 숨이 붙어 있는지 살펴보고 나서는 부엌으로 연결되는 뒷문을 열어보았죠. 그러고는..."


그 말에 정순경은 겁에 질린 얼굴과 의아하단 표정으로 벌떡 일어서더니 외쳤다.


"어디 숨어서 훔쳐보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선생님은 너무 많은 것을 알고 계신데요?"


홍주는 웃으면서 정순경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나를 살인범으로 체포라도 할 생각입니까? 나는 사냥개이지 늑대가 아닙니다. 그 점은 김 형사나 나 형사에게 물어보면 되겠죠. 이야기를 계속해 보죠. 그다음엔 어떻게 했습니까?"


정순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평상에 다시 주저앉더니 이야기를 계속했다.


"저는 다시 현관으로 나와 호루라기를 불었습니다. 그러자 근처에 있던 두 명의 동료가 달려왔지요."


"그때도 거리엔 아무도 없었습니까?"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라면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정순경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취객은 저도 여태껏 많이 봤습니다만 그 정도로 취해서 해롱대는 주정뱅이는 난생처음이었습니다. 제가 호루라기를 불러 현관 밖으로 나왔을 때, 그 자는 전봇대에 기대 콧노래를 부르고 있더군요. 제대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상태였으니 하물며 도움을 청하는 건 말도 안 됐죠."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정순경은 별 쓸데없는 것도 다 물어본다는 얼굴로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만취한 주정뱅이였다니까요. 바쁘지만 않았어도 그 작자는 오늘 아침 유치장에서 일어났을 겁니다."


홍주가 조급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얼굴이나 복장은 어땠습니까?"


"그야 동료 경관과 함께 그를 일으켜 세우느라고 안 볼 수야 없었죠. 키가 큰 편이고 얼굴은 불그스름 하더군요. 하지만 모자를 눌러쓴 데다 얼굴 아래쪽은 어두워서..."


홍주가 외쳤다.


"됐소! 그래 그 남자는 어떻게 했습니까?"


정순경은 화가 난 듯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아서 잘 갔겠죠. 살인 사건이 벌어진 마당에 주정뱅이까지 챙길 수야 없잖습니까?"


"복장은 어땠나요?"


"곤색 잠바를 입고 있었습니다."


"손에 피가 묻었다거나 코피를 흘리고 있지는 않았고?"


"피요? 글쎄요."


홍주가 중얼거렸다.


"어딘가에는 묻어 있었을 텐데... 혹시 그 뒤로 택시가 지나갔다거나, 시동 거는 소린 못 들었습니까?"


"정신이 없어서 주변에 차가 세워져 있는지 아닌지는 생각이 잘 나질 않습니다."


홍주는 모자를 다시 쓰더니 돌돌 말린 지폐를 건네며 말했다.


"이 돈은 먹고 싶다던 막걸리 값이나 하시오. 그런데 정순경. 유감스럽지만 당신은 앞으로 출세할 생각을 버려야겠습니다. 그 머리를 장식용으로 달고 다니는 게 아닌 이상 제대로 써먹어야 할 게 아닙니까?


당신은 간밤에 신문에 일면에 나고 특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당신이 안아 일으킨 그 남자야말로 사건의 열쇠를 쥔 인물이고 우리가 찾는 범인입니다. 이제 와 후회한들 무슨 의미가 있나 싶지만 말이죠. 완승, 이제 그만 가세."


우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 정순경을 뒤로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전차를 타고 하숙집으로 향하는 길에 홍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호박이 넝쿨째 굴러왔는데 자기 발로 차버렸군."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것들 투성이네. 정순경이 말한 사내가 자네가 말한 용의자와 인상착의가 일치하는 것은 사실이야. 그런데 왜 집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왔단 말인가? 범인이라면 그럴 리가 없잖은가?"


"아마도 반지 때문이겠지. 반지 때문에 돌아온 것이라고 확신하네. 범인을 잡을 다른 마땅한 수가 없다면 그 반지를 미끼로 던져보는 것이 좋겠어. 내기하지 않겠나? 범인을 내가 잡는지 못 잡는지에 대해. 자기가 이기면 건 돈의 두 배를 주지."


"흠... 그럼 자네가 잡는다에 천원 걸겠네."


"아니 그럼 내기가 안 되잖나. 내가 이기려면 범인을 잡아서는 안 되니."


"자네라면 결국 어떻게든 잡을 것 같거든."


"그럼 내기는 없던 걸로 하는 수 밖에. 그나저나 자네에겐 감사하네."


"내게 감사할 게 있나? 나는 그저 자네를 지켜봤을 뿐이네만."


"자네가 아니었다면 이번 사건에 참여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랬다면 지금까지의 어떤 사건보다도 흥미로운 사건을 놓치고 말았겠지. 그래서 이번 사건을 "주홍색 연구"라고 부를 셈이네.


"주홍색 연구?"


"그래, 주홍색 연구. 운명의 상대에게만 붉은 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네. 인생이라는 무색의 삶 속에, 살인이라는 주홍색 실타래가 감겨져 있는 셈이지.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그 실타래를 풀어 헤치고 떼어내서 진실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이고.


자, 그럼 가볍게 식사를 하고 자네도 함께 고려교향악단의 연주를 들으러 가볼까? 조선 땅에 한가락 한다는 연주자들이 다 모인 데다 올해 첫 연주회라 사람들이 무척이나 붐빌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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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에서 연주하는 고려교향악단 -


조금 전까지 사냥개마냥 사건에 몰두해 있던 홍주는, 여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전차 등받이에 기대어 종달새마냥 즐거워 보였지만, 정작 나는 끔찍한 범죄와 인간의 본성에 관해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계속)



[주석 1 - 승합마차⁽¹⁾]

광복 후 해방된 서울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지만 기존의 전차가 수송량을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이 당시 택시, 승합마차, 인력거 등이 다시 활기를 띄고 영업을 하기 시작한다. 승합마차는 하루 3만명의 수송했고, 해방 후 전국 1,000여대 남짓의 택시 역시 대부분이 서울을 중심으로 영업했다. 인력거의 경우에는 일제 당시부터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추세였으나 해방 직후 상대적으로 싼 가격에 잠깐 다시 유행하기도 했다. 하지만 1)인력거로 인한 교통 방해, 2)인력거부들의 매춘 알선, 3) 사람을 우마처럼 써서는 안된다는 비란 여론 등으로 인력거를 한국전쟁을 전후에 거의 자취를 감춘다.


[주석 2 - 고려교향악단⁽²⁾]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교향악단. 일제 당시 친일단체중에 하나인 조선음악협회의 이사였던 현제명이 해방직후인 1945년 9월 15일 고려교향악협회를 창립하며 그 산하에 조직되었으며 지휘자는 계정식이었다. 첫무대는 창립일 다음날인 9월 16일 창립축하연이며, 이후 미군정청과 서울시민들을 위한 정기공연을 진행했고 주로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의 작품이 연주되었다. 현제명이 1945년 설립한 경성음악학교가 오늘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이며 현제명이 초대 학장이다. 1946년 반창립 멤버였던 계정식과 김생려 등이 탈퇴하여 서울관현악단(서울시립교향악단)의 설립하는 등 조직이 와해되고 적자경영이 이어지며 1948년 해체됐다.


[주석 3 - 효자정(孝子井)⁽³⁾]

지금의 청운효자동. 일제강점기인 1936년 효자정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1946년 다시 효자동이란 지명으로 돌아갔다. 조선 중기 조원의 두 아들의 지극한 효심이 온 나라에 소문나며 선조가 이들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홍살문을 세웠고, 이후 이 일대 효잣골, 효자거리 등으로 불리게 된다. 지금의 청와대 앞 분수대가 있는 곳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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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주홍색 연구(9) - 사건의 결말 +1 21.06.01 260 13 14쪽
8 주홍색 연구(8) - 박완승의 회고록 21.06.01 241 11 26쪽
7 주홍색 연구(7) - 어둠 속의 빛 +1 21.05.31 255 15 20쪽
6 주홍색 연구(6) - 김형사의 활약 +2 21.05.31 317 13 23쪽
5 주홍색 연구(5) - 광고를 보고 온 손님 21.05.30 324 18 17쪽
» 주홍색 연구(4) - 홍주의 추리 +3 21.05.30 446 18 19쪽
3 주홍색 연구(3) - 화천정 살인사건 +3 21.05.30 770 25 30쪽
2 주홍색 연구(2) - 추리라는 학문 +7 21.05.30 1,126 44 27쪽
1 주홍색 연구(1) - 최성록이라는 사나이 +15 21.05.30 2,345 73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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