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내가 내 무덤 판 건 아니겠지?
이번에는 애꿎은 노예들이 죽어나가지 않도록 검이 있다는 말은 뺐다.
그리고, 아빠의 측근들도 모두 불렀다.
“아빠, 이건 새로 만든 삽이에요. 농사일뿐만 아니라 땅을 파고, 건물을 짓는데도 나무 삽과는 비교가 안될 겁니다. 아심, 시범을 보여 드려.”
아심은 다시 노예들 연무장의 마른 땅을 파도록 지시했다.
나라의 대부분이 진흙 위주의 땅이라 나무 삽만으로도 땅을 파고 할 수는 있었지만, 쇠 삽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음, 좋아 보이는 구나.”
삽 하나에 대단한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이건 그저 에피타이저에 불과하니까.
쟁기, 써레, 곡괭이, 호미와 낫도 있었다.
“이건 뭐냐?”
아빠가 낫을 들고 물었다.
‘이 양반이 설마 모르고 물을 리는 없는데···’
“낫입니다.”
“낫? 이게? 칼만큼 날카로워 보이는구나. 무기로 써도 되겠어.”
나무에 자잘한 돌날을 끼워 박은 낫과는 차원이 다른 조선낫이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농민들이 무기 대용으로 쓰기도 했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그래서 꺼낼까 말까 고민했는데···
아빠는 어느 새 손에 들고 휘둘러보기 시작했다.
모두가 뒤로 물러섰다.
“아빠, 이 건 일단 전사들의 검을 모두 철검으로 바꾸고 나면 농민들에게 팔 생각이에요.”
행여나 던지면 어떡하나 싶어 얼른 화제를 바꿨다.
“팔아?”
“네, 이 걸 만드는데 아심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요. 철이 흔하기는 해도, 만드는데 오래 걸리기도 하고요. 무기로 쓰일 수도 있어서, 일단 보여드리기만 할 생각이었어요. 아심?”
나는 아심에게 시범을 보여드리라고 고개짓을 했고, 노예들은 밀짚을 세워 들었다.
톱질하듯 벨 필요도 없었다. 한 움큼이 단번에 잘려나갔다.
“훌륭하구나!”
‘하여튼 베고 찌르는 데는 환장하는 사람이야.’
“저것들도 모두 팔 생각이냐?”
“아니요. 나머지는 모두 빌려줄 생각입니다. 아직까지는 살 여력이 안될 테니 일단은 빌려주고, 올해 수확할 때 대여료를 받으려고요.”
“그래? 가격은 어떻게 되니?”
“쟁기나 삽은 개당 빌리는 건 밀 반 포대(5인 가족 1달치 식량), 사는 건 밀 한 포대를 받을 거에요.
써레, 곡괭이, 호미는 쟁기와 삽의 절반 가격이고, 낫은 아직 못 정했습니다.”
“낫은 알겠고. 너무 비싼 거 아니냐?”
“비도 이미 필요한만큼 왔고, 날씨만 작년처럼 받쳐준다면, 이 것들을 빌린 사람들은 그만한 가치를 알게 될 겁니다.”
“왕자님, 날씨가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무상으로 빌려주는 건 어떤 가요?”
귀슈탐 아저씨가 의견을 꺼냈다.
“무상으로 빌려주면, 공짜라 생각해서 빌려간 이가 관리를 소홀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것들을 만들 철광석도 언젠가는 사와야 할지도 모릅니다. 강가에서 검은 돌이 빠르게 없어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이 것들은 모두 왕국의 귀중한 자산입니다.”
에메트였다.
엄마 쪽에 파르잔이 있다면, 아빠에게는 에메트가 있었다.
왕국 최고의 필경사다.
파르잔이 나한테 배우기 전까지는 그랬다.
철광석이야 워낙 흔한 광물이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구리의 원석은 수요에 비해 모자란 건 사실이다.
이번에 창고 장부를 정리하면서 알게 된 사실 중에 하나는 이 나라 자체에서 나는 광물이 매우 적다는 사실이었다.
청동기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행운에 가까웠다.
그리고 의외로 무역도 꽤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 편이었다.
판로가 있다는 사실에 에메트를 얼싸안고 뛸 뻔하기도 했다.
“백성들은 처음 보는 물건일세. 빚까지 져가면서 누가 쓰려고 할까?”
에메트를 보고 하는 말이기는 하나, 내가 들으라고 하는 말이겠지.
‘나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니라고. 하지만 어느 시대나, 어느 동네나 얼리어답터, 프론티어는 있어. 내가 필요한 건 그들이야. 그 정도만 있어도 된다고. 이 아저씨야. 그리고 흉년이 들면, 그 때 가서 대여료를 면제해 주던가 깍아 주면 돼. 처음부터 공짜 이미지를 주긴 싫단 말야. 소중한 줄 알아야 잘 사용하지. 공짜면 받아 놓고 안 쓸 수도 있어.’
“귀슈탐 아저씨 말도 맞긴 해요. 하지만 이런 게 있다는 걸 알면, 가격을 떠나서 써보고 싶은 사람도 있을 거에요. 지금 당장 많이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올해는 딱 그 정도만 있으면 되거든요. 그냥 무상으로 빌려준다고 하면, 받아 가서 안 쓰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어요.”
“둘 다 일리는 있는 말이다. 그래도 나라면 말이다. 효과도 알 수 없는 것을 빚까지 져 가면서 쓸 리는 없다고 본다. 루갈, 올해는 동쪽 구역 사람들에게만 먼저 무상으로 빌려주도록 하거라. 대신 올해 작황이 좋다면 내년에 올해 것까지 같이 받도록 해라.”
“네, 아빠”
동쪽 구역은 대체로 고위 전사들이 많이 살고 있고, 노예들을 부려 농사를 짓는다.
이들이야말로 돈 받고 팔아도 될 만큼 여유로운 사람들이다.
세금도 면제되는 이들이 태반이다.
하지만, 아빠의 생각은 다른 것 같다.
하긴 백성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절대 충성층의 마음을 휘어잡는 게 훨씬 효과적이다.
손쉬우면서도 이 시대에 가장 어울리는 방법이다.
일단 농기구를 살펴보는 일은 끝났다.
“그럼 수고하거라.”
“아빠, 아직 가장 중요한 걸 안 보셨어요.”
이래서, 보고할 때는 핵심 결론을 먼저 말하는 게 좋다.
극적인 효과를 노리고 메인 이벤트를 가장 뒤에 둔 건데, 빛도 못 보고 끝나게 생겼다.
연출이고 뭐시고 다 필요 없다.
“아심, 준비한 칼 가져와”
나는 일단 칼이란 단어로 아빠의 주의를 끌었다.
“칼?”
“네, 철로 농기구도 만들었는데, 칼을 안 만들었을 리 없잖아요.”
“녀석, 머리 좀 썼구나.”
“흐흐, 아빠 아들이잖아요. 칼부터 보여드리면, 다른 게 눈에 들어오기라도 했겠어요?”
“큼, 이 녀석이, 신하들 앞에서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잘못했습니다. 칼을 보여드린다는 생각에 너무 들떠서 그만.”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신하들의 얼굴도 모두 굳었다.
“그래, 나도 안다. 그리고, 앞으로 신하들 앞에서는 너도 아버지라고 부르거라.”
“네, 아버지.”
아무리 구멍가게 같은 나라라고 하지만, 이 나라의 왕이다.
도덕이 희박한 시대이긴 해도 엄연히 규범이란 게 존재한다.
그리고 이 나라는 왕의 말이 곧 법이다.
이제 나도 루갈의 나이에 너무 익숙해졌나 보다.
아버지라 부르니 왠지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듯한 느낌이다.
그래도 폐하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만족한다.
이 시대가 공과 사가 크게 구분되지 않았다는 데에 대해서 항상 불만만 있는 건 아니다. 이런 건 어쩌면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모두가 폐하라고 혹은 주군이라고 불러도, 적어도 가족에게는 강요하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아버지, 아버지 칼을 잠시 빌릴 수 있을까요?”
“왜? 대련을 또 시범 보일 생각이냐?”
‘그건 예전에 아빠가 준비한 거잖아요. 노예들이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냥 속으로만 생각했다.
괜히 이 얼어 있는 분위기에 말 잘못 꺼냈다가는 또 언제 기회가 올지 모른다.
“대련까지는 안 해도 됩니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번에는 철검이 나무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아빠는 허리춤에서 칼을 빼어 들어 내게 건네 줬다.
“아빠, 아니, 아버지, 저 검이 이제 아버지의 검이 될 겁니다. 잘 봐주십시오.”
나는 아빠의 청동검을 두 손에 쥐고 철검의 날을 향해 있는 힘껏 내리쳤다.
“쨍!”
칼이 부러져 내게 튈 것을 감안해서 몸을 숙였다.
괜한 기우였다.
청동검의 검신이 무 썰리듯 싹둑 떨어져 나간 느낌이었다.
주위가 너무 조용했다.
- 짝짝짝
“하하하하! 그새 힘이 더 좋아졌구나!”
‘칼을 봐야하는데, 왜 내 힘 얘기야?’
혹시나 철검에 문제가 있나하고 급히 시선을 검으로 옮겼다.
멀쩡하게 잘 살아있었다.
청동검은 매끈하게 잘려 나갔다.
오마르 아저씨는 양손으로 엄지척을 하고 있었다.
‘크, 이젠 저 의미를 아시나 보네.’
아예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있는 신하들도 있었다.
“녀석, 참느라 고생했다.”
“네, 아버지. 마음에 드시나요?”
“마음에 들다마다. 네 녀석 말이 맞다. 이 아빠가 이걸 먼저 봤다면, 다른 건 눈에 안 들어왔겠구나. 얼마나 참고 있었던 거냐?”
“뭐를 요?”
“딴 소리 말고, 언제 완성한 거냐?”
“일주일 전에 이 것보다 짧을 칼을 하나 완성했습니다. 이 칼은 이틀 전에 완성한 거구요.”
“아심이 고생했겠군.”
“네, 오늘은 돼야 완성할 수 있는 칼이었는데, 그래도 만들자마자 검증도 없이 갖고 나오는 건 아니라면서, 잠 자는 시간 빼고는 이 칼만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빠는 바로 아심에게 다가가 등을 두드리며 고생했다고 치하했고, 아심은 그 자리에서 엎드려 절했다.
잠시 살얼음 같았던 분위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웅성웅성 시끄럽게 변했다.
아빠는 흐뭇한 얼굴로 창촉과 화살촉까지 시찰을 마친 후,
내게는 대장간 장인들에게 연회를 베풀라는 말을 남기고 신료들과 집무실로 돌아갔다.
아빠의 허리에는 새 검이 손잡이만 드러낸 채 검집에 묻혀 대롱거리고 있었다.
‘참 길어.’
아빠 키에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저렇게 허리에 매달았다가는 검집 끝이 바닥에 질질 끌렸을 거다.
“청동검이 원래 그렇게 잘리는 거였어?”
“저번에 못 봤어? 페쇼탄 특무가 내리쳤을 때는 칼이 부러진 거였잖아. 그런데 오늘은 여기 봐, 이게 부러진 건가. 이건 잘린 거야. 칼날에.”
“칼도 대단하고, 왕자님도 대단하네.”
나는 뒤에서 수근 거리는 소리를 들었지만 그냥 못 들은 척 걸었다.
늦은 오후, 나는 아직 한참 어린 미성년자라 맥주를 눈으로만 구경했다.
‘그래, 이 시대에 이 곳이 맥주의 발상지였지.’
나는 이 곳 우르크가 중동 어디쯤이란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됐다.
그리고 기억이 맞다면, 인류는 이 맥주를 만들기 위해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기원전 거의 만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잡설이 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보는 맥주는 한 브랜드에서 나오는 그런 게 아니다.
뭔가 탁한 빛깔의, 미지근한 그런 맥주인 것 같다. 냉장고를 만들어야겠다.
‘그러고 보니, 맥주가 있다는 얘기는 효모가 있다는 얘기인데, 빵은 왜 그 모양인거야?’
천연효모가 있다면, 이스트가 따로 필요없다.
그럼 반죽만 잘 해도 발효 좀 하고 나면 나름 식감이 부드러운 빵이 나올 것 같다.
도대체 딱딱한 빵만 나오는 게 이해가 안된다.
‘효모가 먹을 당분이 부족해서 그런가?’
이 동네는 달달한 것을 찾기가 힘들다.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생일 때 얘기고, 지금 나는 한참 초콜릿을 좋아할 그런 여덟 살(이 곳 나이로는 일곱 살)이다.
달달한 게 땡긴다.
아심과 대장간 장인들 그리고 노예들까지 취할 때까지 먹고 마시고 떠들었다.
대장간의 창고는 어느새 밤이 깊어갔다.
나는 페쇼탄과 후탄에게도 아심과 함께 있으라 하고, 번개와 함께 초병과 시녀들의 안내를 받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농기구를 빌려주든 팔든 상관없었다.
철제 농기구의 효용성만 증명되면 그 다음 단계는 일사천리다.
문제는 에메트가 지적했듯이 원자재의 수급이 원활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강변에 널린 돌멩이만 채취해서는 당장 일이 년을 버틸까 말까 하는 매장량(?)이었다.
석회석 산지도 찾아야 하고, 외부 활동을 늘려야 하는 상황인데, 직책은 왕국 창고 담당이다.
이름만 내건 직책이라고는 하지만, 밤다트처럼 맹하게 아랫사람들한테만 맡겨도 되는 그런 한가한 자리가 결코 아니다.
재벌회장 아들이 낙하산을 회사 재무금융부서장으로 왔다고 생각해 보라. 모르는 업무라고 가만히 있으면, 회사 재정이 어떻게 흘러가겠나?
‘대차대조표, 부서손익표, 배부경비··· 흐흐 젠장, 나 여기서 겨우 일곱 살인데, 뭐 벌써부터 일을 시키고 그래?’
내 무덤 내가 팠다.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데, 창고 관리 업무를 모두 파악할 때까지는 ‘꼼짝마라’다.
이제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웬만해서는 밤다트에게 안 밀릴 거다.
그래도 몸이 근질근질 하니 이건 병이다.
몸에서 피가 끓는 것 같다.
전생과는 확실히 다른 체질이다.
‘내가 외부활동을 자주 할 수 없다면, 방법은 종류대로 모아서 가져오라고 할 수밖에. 그 것도 아닌가? 철광석과 구리, 주석 원광은 샘플이라도 있으니 어디서 많이 보이는지 찾아오라고 하면 되고, 석회석은 샘플을 하나라도 찾아야 돼. 그래야 보여주면서 이런 거 비슷한 걸 찾아오라고 하지.’
대장간에서 새로운 아이템을 만드는 것은 잠시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일단 지금까지 개발된 것만 해도 이 시대 오버 테크놀로지다.
우선 개발된 것만 반복 제작하도록 해서 숙련도를 높이는 데 치중하기로 했다.
자재수급은 아직 일년 정도 시간이 남은 듯하니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외부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릴 것이냐는 문제에는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페쇼탄, 이제 대장간은 당분간 크게 신경 쓸 일이 없을 것 같고, 왕국 창고 서당도 마찬가지야. 넌 이제 내 대신 밖으로 좀 돌아다녀야겠다. 이 근처에 가장 가까운 산이 어디쯤 있는 지 아나?”
“산은 갑자기 왜요? 여기서 가까운 산은 움마 왕국 쪽에 있습니다. 보름은 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멀어?”
내가 가본 곳은 기껏해야 반나절 남짓 되는 곳이 가장 먼 곳이다.
“움마 왕국은 커?”
“아마 우리나라와 비슷할 겁니다.”
“우리나라와 비슷하게 큰 나라들이 많아?”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대략 일곱 여덟개 정도가 우리와 비슷하거나 조금 작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움마 왕국이 제일 가깝나? 비슷한 크기의 나라들 중에서 말야.”
“아마 그럴 겁니다.”
“걸어서 보름 거리란 말이지···”
페쇼탄더러 단독으로 돌아다니라고 하기엔 너무 위험하다.
“알았어. 너는 그럼 아미라하고, 아자니라고 했나? 그 종이 만든다는 녀석 있잖아?”
“아자니도 여자입니다.”
“응? 뭐, 그럼 잘 됐네. 아미라하고 아자니를 좀 불러와. 일단 그 둘하고 왕국 재산 좀 불려보게.”
“언제 오라고 할까요?”
“내일, 아니다. 걔네들한테 모레 올 수 있는지 물어봐.”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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