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
존댓말, 존칭 없습니다. 어른과 아이에 대한 구분도 모호한 세상, 위계가 흐릿한 기원전 4만년으로 안내합니다.
#8
무치는 그 아이를 왜 저장고에 뒀는지 의아하게 생각했다.
저장고에는 말린 약초나 서늘하게 보관해야 하는 음식들을 두는 곳이었다.
살아있는 아이를 그곳에 두는 이유가 궁금했다.
분명 잡아먹으려는 아닐텐데, 가만히 두면 죽기 딱 좋았다.
올간도 같은 생각을 했다.
세바히쿠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어차피 죽일 인간이었다.
사람들이 사슴 손질을 하는 동안 빠져나와 이난나를 처치할 생각이었다.
올간이 또 안보였다. 선수를 또 뺐겼다.
세바히쿠는 결국 올간이 초를 친데 휘말려 에가에게 들볶이고 있었다.
세바히쿠는 큰 머리 인간 남자치고는 여자를 많이 밝히는 편이었다.
평소에도 다른 여자를 넘보던 버릇이 화근이었다.
“에가, 이제 그만하자. 다른 사람들도 자야하고, 내가 잘못했어.”
“뭘 잘못했는데?”
“어, 그러니까, 저 애를 데려올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죽였어야 했는데···”
원하는 답은 안나오고 엉뚱한 소리를 내뱉는 세바히크를 보니 에가는 기가 막혔다.
“말 참 쉽게 한다. 넌 사람을 그렇게 쉽게 죽이니? 저 애가 누굴 죽였어?”
에가의 목소리가 불규칙하게 오르내렸다.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했다.
“아니, 내 말은···그래그래, 그 자리에서 올간을 말렸어야 하는 건데 생각이 짧았어.”
에가가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세바히쿠는 이럴 때 제일 답답했다.
남무 앞에서 올간을 칠 뻔 했으니 남무 얼굴은 또 어떻게 보나 싶었다.
차라리 혼자 오록스라도 때려잡는 게 훨씬 속 편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오로는 돌칼을 손질하고 있었다.
하르게는 가죽을 벗기고 무치는 고기만 따로 발라내고 있었다.
올간도 함께 해야 하는데, 뺀질이로 워낙 유명한 녀석이었다.
잠깐 빠진다 해도 찾을 사람이 없다.
무치는 올간이 얄미우면서도 가끔 부러울 때가 있었다.
올간은 저장고에 다녀오겠다고 사라졌다.
여자들이 그 아이가 살아 있는 걸 보면 가만히 안 있을 게 뻔했다.
올간이 그 아이를 어디 안전한 데 두려는 것이 분명했다.
동굴 안이 한동안 시끄럽더니 남무와 올간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날이 밝으면 분명 작은 머리 인간들이 저 아이를 찾아 이 일대로 들이닥칠 거다. 세바히쿠가 저렇게 화가 났는데 널 도와주겠니? 아예 그 참에 저 아이를 죽이자고 달려들거다. 세바히쿠를 누가 말리겠니? 너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아이를 건드렸어. 모두 힘들어질거야.”
올간은 엄마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도 누나도 세바히쿠도 여자 아이 한 명 때문에 왜 그렇게 난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계신다면 이렇게까지 반대하진 않을 것 같았다.
들쳐 멘 아이는 아직도 마향에 취했는지 미동도 없었다.
‘향이 너무 강했나?’ 누가 뭐라고 하든 아이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새끼 사슴은 아이들이 동무 삼아 데리고 놀까 싶어 살려뒀다.
잠이 들었는지 모닥불 옆에서 꼼짝도 안했다.
발을 묶어놓은 터라 아이들은 금새 흥미를 잃었고 동굴 앞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이난나를 사슴 옆에 뉘였다.
동굴 안 저장고는 꽤 추웠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한다고 뒀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손을 만져보니 온기가 전혀 없었다.
손을 문지르고 발을 주무르고 나니 피가 도는 것 같았다.
불을 쬐서 그런지 몸도 따뜻해진 것 같았다.
손이 참 부드럽다고 생각했다.
숨을 고르게 쉬는 것보니 겨우 안심이 됐다.
엄마가 한 말이 이제야 생각났다.
올간은 될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그 옆에 벌러덩 누웠다.
아이들은 뛰어놀다 말고 올간을 쳐다봤다.
아이들은 쓰러져 있는 사슴을 툭툭 치다가 이난나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사슴보단 이난나가 더 신기했다.
그녀는 생김새가 조금 달랐다.
살갗도 더 맨질맨질하게 보였고, 얼굴도 갈색 빛깔에 새알처럼 가는 것이 묘하게 시선을 끌었다.
남무 아줌마를 닮은 것 같기도 했지만, 아줌마는 얼굴이 하얀 편이었다.
아이들 눈에는 에가 아줌마나 에흘린, 하오마가 더 예뻐 보였다.
사슴에게 했듯이 똑같이 찰 자세였다.
올간은 눈을 부라렸다.
아이들은 엄마에게로 쪼로록 도망갔다.
여자 아이의 숨이 고른 걸 봐서는 이제 안심해도 될 것 같았다.
동굴을 나오는 순간, 남무도 에흘린도 여자애를 온전히 돌려보낸다는 것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쏠린 것이다.
무치는 올간을 쳐다보며 이를 부득 갈았다.
‘아 저 새끼는 또 탱자탱자 놀고 있네!’
#9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었다.
장작불의 온기도 느껴졌다.
머리도 살짝 지끈거리고 뭔가 불편했다.
낯선 목소리들, 분명 아므하네 부족은 아니었다.
예전에 엄마한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할머니는 엄마가 다섯 살 무렵 낯선 아저씨들한테 잡혀갔다고 했다.
그 후로 엄마는 할머니를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사리나는 자신의 엄마가 납치된 것이 트라우마가 됐다.
이제는 그녀의 딸마저 없어진 것이다.
이난나는 그런 엄마가 걱정됐다.
자신의 생명이 오락가락 했다는 것은 미쳐 깨닫지도 못하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일어났던 일이 자신에게 또 생긴 거다.
본능적으로 침착해야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기 사슴냄새, 그래 사슴한테 다가 가고 있었지.
얼굴 오른쪽은 바닥에 붙어 있다. 왼쪽 눈을 살짝 떴다.
아기 사슴의 발이 보였다. 이 녀석도 발이 묶인 채 눕혀져 있었다.
‘우리 둘 다 구워먹으려는 것일까?’
가슴이 사정없이 뛰는 걸 느꼈다.
침착하자. 할머니는 잡혀가긴 했지만 죽은 건 아니라고 했다.
큰 머리 부족에 있던 할머니를 본 사람이 있다고 했다.
손발이 묶여 있으니 들키지 않고 도망치는 건 당장 불가능하다.
이난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혼자 도망칠 수 있다고 한들,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살아서 에르호쪽에 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파호를 본 게 엊그제 같은데...'
파호가 왔으면 하고 바랐다.
#10
“이난나~?! 이난나가 안보여.”
수드라는 한참 산딸기를 따다가 더 이상 담을 주머니가 없어 고개를 들었다.
이난나는 분명 곁에 있었다. 크게 부르지 않아도 될만큼 가까이 있었다.
워낙 동물을 좋아하는 아이라 다람쥐 같은 동물을 쫓아서 종종 숲 속으로 혼자 들어갈 때도 많았지만, 친구들 시야를 벗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아까 아카시아 숲쪽으로 걸어들어가는 걸 봤는데···”
이시르가 한창 땅을 파다 말고 대꾸했다.
“또 어디 늑대나 만나러 갔겠지.”
댕기는 빈정거렸다.
이난나에게만 쏠리는 관심이 은근히 신경 쓰이는 요즘이다.
며칠 전 늑대 사건이 있은 후로는 약간 두려운 마음도 생겼다.
늑대와 얘기하는 아이다. 신령이 보호하는 아이다. 어른들은 별 얘기를 다 했다.
차라리 늑대가 잡아갔으면 속으로 기도할 때도 있었다.
울케르는 늑대라는 말에 놀라 수드라 팔을 잡아끌었다.
숲에서 나가자는 얘기다.
“알았어, 울케르 손 좀 놔! 그게 언제야?”
수드라는 동생 손을 뿌리치며 이시르에게 물었다.
“글쎄, 내가 땅 파기 시작하니까, 같이 파기는 좀 그랬나봐.”
“넌 이난나가 가든 말든 가만 있었고?”
이시르 발 밑에는 칡뿌리 같은 것이 시커먼 살을 들어내고 있었다.
수드라는 이시르를 어이없는 표정으로 흘겨봤다.
- 작가의말
네안데르탈인 주요 등장인물
(네 : 네안데르탈인, 사 : 호모 사피엔스)
올간 : 주인공, 네 75%, 사 25%, 남성, 만 14세
남무 : 올간의 엄마, 네 50%, 사 50%, 여성, 만 35세
세바히쿠 : 에가의 남편, 네 100%, 남성, 만 26세
무치 : 올간의 친구, 네 100%, 남성, 만 14세
하오게 : 네 100%, 남성, 만 23세
테오로 : 네 100%, 남성, 만 30세
에흘린 : 올간의 친누나, 네 75%, 사 25%, 여성, 만 19세
에가 : 알라하의 딸, 올간의 사촌누나, 네 75%, 사 25%, 여성, 만 22세
호모 사피엔스 주요등장 인물
(전원 호모 사피엔스 100%)
이난나 : 주인공, 여성, 만 13세
사리나 : 이난나의 엄마, 아므하의 전처, 여성, 만 43세
아므하 : 사리나의 전남편, 남성, 만 49세
수드라 : 여성, 만 14세
댕기 : 여성, 만 12세
이시르 : 남성, 만 12세
울케르 : 남성, 만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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