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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코코 님의 서재입니다.

온새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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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코코
작품등록일 :
2018.06.24 23:48
최근연재일 :
2018.07.22 00:54
연재수 :
3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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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739

작성
18.07.13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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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8쪽

21,, 부정(아버지의 사랑)

\여배우/




DUMMY

벨을 누르고 눌러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불은 환히 온집안을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기척은 없었다. 아니 없는 척 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초췌하고 비루한 행색에 몸을 사리고 있을 것이다. 경욱은 혜순이 연락처도 받지 않고 넙죽 돈만 받아 신나게 쓸 궁리만 한 것에 대해 새삼 또다시 화가 치밀었다.

빛깔 좋은 삼겹살에 마블링 춤추는 쇠고기, 게다가 주제에 또 외제 맥주라니 .......

경욱이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시커먼 봉다리에 소주와 라면을 사서 덜렁덜렁 들고 들어와 대청마루 끄트머리에 힘겨운 엉덩이를 갖다 쉴 때였다. 혜순이 한껏 부푼 얼굴로 반갑게 방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여보야?"

몇 년만에 듣는 낯간지러운 호칭인가? 돈벼락이라도 맞았던가 아니면 가난에 겨워 완전히 돌아버린 것이리라. 경욱은 들은 체 만 체 하며 라면 봉지를 뜯었다.

"라면은 무슨 ......?"

혜순이 기겁을 하며 뜯던 라면 봉지를 뺏어 내던지다시피 하고는 경욱을 잡아 끌어 방으로 데려 들어갔다. 신발도 채 못벗고 딸려 들어온 경욱의 시야에 진풍경이 펼쳐졌다. 시뻘겋게 물좋은 소고기 돼지고기에다 한국말 한 자 없는 외제 맥주 거기다 과일 안주들까지. 진짜 무슨 돈벼락이라도 맞았나? 설마 먹고나 죽자 생각하고 사채빚이라도 낸 건가? 경욱은 온갖 걱정에 그녀 한번 방구석 한번 번갈아보며 혜순이 입에서 자랑질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앉아요. 이게 다 딸 잘둔 덕이에요. 우리 가온이!"

"가온이가 왔었어?"

경욱은 믿을 수 없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설레고 들떴다.

"여길 어떻게 알고?"

"내가 말을 잘못했네 ... 가온이가 아니라 사돈이 왔었죠. 사돈 잘둔 덕분에 오늘부터 가난 끝 행복 시작이에요, 우리!"

"뭐라고? 사돈?"

"그래요. 사돈! 결혼식만 안올렸지 혼인신고가 됐으면 부부잖아요."

"부부? 니가 제정신이야? 누가 왔었다고?"

경욱은 잠시의 설렘과 들떰을 저주하며 고함을 질렀다. 어리둥절해 하던 혜순은 경욱에게 되려 화를 돌렸다.

"왜 소리를 지르고 난리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뭘 잘못했는지를 모른다고? 정말 몰라?"

"몰라. 내가 뭘 잘못했는지. 난 박 소영이 제 발로 찾아왔길래 만났을 뿐이고 돈을 주길래 받았을 뿐이야. 당신이 평생 벌어온 몇 갑절의 돈이고 사돈이라고 해서 사돈이구나 했을 뿐이라구?"

"이게 ... 그냥 ......! 으으아아악 ......!"

경욱은 차마 혜순은 때리지를 못하고 방바닥에 놓여 있는 밥상을 엎어 버렸다. 지글지글 굽히고 있던 불판 위에 고기들이 기름과 함께 방안을 날아다니고 불판은 또 불판 대로 뒤집어지고 불이 켜져 있던 가스는 조금 타는가 싶더니 제풀에 꺾여 꺼져 버렸다. 혜순이 솜씨를 발휘해 깎아 놓았던 과일들도 고기와 기름에 어우러져 번질거렸다.

그 꼬락서니를 보고 이번엔 혜순이 소리를 질렀다. 나름대로 꾸미고 잘 차려 놓은 밥상을 엎어 놓은 데 대한 원망이고 울분이었다.

"으으아아악 ......! 대체 뭐가 불만이야? 맨날 뭐가 불만이고 못마땅해서 사람을 불안하게 해? 당신이 나한테 뭐 해 준게 있는데? 뭐 잘해 준게 있다고 허구헌날 패악질이냐구?"

"패악질? 패악질은 누가 부렸니? 맨날 돈타령 밥타령 패악질에 잘사는 우리 가온이한테까지 손벌일 궁리만 하는게 당신 아냐? 대체 니가 무슨 자격으로 가온이를 들먹이고 걔랑 아무 상관도 없는 상종 못할 인간한테 돈까지 받느냔 말야?"

"딸인데 딸한테 손 좀 벌리면 안돼? 지는 잘 살잖아? 잘 살면 못사는 부모한테 용돈 명목으로 조금씩 줄 수도 있는 거지, 기부니 성금 모으기니 남한텐 잘 쓰면서 지 아빠 엄마나 좀 도우라 그래, 나쁜 기집애?"

"염치 좀 있어라! 양심 좀 챙기라구. 우리가 무슨 낯짝으로 부모야? 당장 내놔! 그 더러운 돈 당장 내놓으라구!"

"못 줘! 아니 안 줘!"

이렇게 서로를 할퀴고 패악질을 부리고 실랑이를 벌인 후에야 경욱은 혜순에게서 소영의 돈을 되돌려 받을 수가 있었다. 꼴보기 싫다고 다시는 집으로 기어들 생각 말라고 마지막까지 기세를 꺾지 않는 혜순을 등 뒤에 두고 처량하게 집을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소영에게 가까이 다가설수록 혜순을 이겨먹던 분노와 노여움이 다시 기세등등 치솟았고 그녀에게 당당히 맞설 용기가 들끓었다.

그런데 아무리 초인종을 누르고 대문을 미친 듯이 두드려도 대문도 사람도 묵묵부답의 냉대였다. 손목이 시큰하도록 두드리고 목이 쉬도록 목청껏 외쳐도 묵살이요 무시였다.

그 때였다. 자동차 불빛이 경욱의 초라한 몸뚱이 위에 비치는가 싶더니 눈속으로 달려 들다가 꺼졌다. 윤 현철의 차가 집 앞에 멈춰 섰던 것이다. 차에서 내려 서며 현철은 수상한 남자에게 적의를 품은 표정으로 물었다.

"누구시죠?"

경욱은 대답을 잠시 미루고 현철 앞으로 천천히 다가섰다.

"여기 사십니까?"

"그렇소만 ......."

현철은 경욱의 차림새를 아래 위로 의심스럽게 훑어내렸다.

"대체 누굴 찾아오신 거요? 당신이 찾는 주소가 여기가 맞소?"

"흥 ... 내가 여기랑 차림새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 거기도 구린내가 나기는 마찬가지 아니요? 이 따위 돈지랄 하고 싶으면 딴데 가서 알아보라구. 알겠소?"

경욱은 소영의 돈봉투를 현철의 가슴 위에다 던졌다.

"남의 귀한 딸을 가지고 장난질을 쳐도 정도껏 쳐야지 ... 혼인신고라니? 내가 이 길로 당장 방송국이고 신문사로 찾아가서 제자식 위해 남의 자식 망치려드는 당신들 같은 악취나는 쓰레기 오물 덩어리들을 죄다 일러 바치고 말겠소. 어디 할짓이 없어서 그 따위 개수작들이야? 버러지들 같으니라구!"

"버러지? 쓰레기 오물 덩어리라고?"

"왜, 당신네들 실체를 들키고 나니 찔립니까?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우리 딸을 ....... 우웁!"

경욱은 말을 하다 말고 뒤로 나자빠졌다. 현철의 주먹에 안면을 가격 당해 꼬꾸라졌다.

"거렁뱅이 주제에 ... 돈을 줘도 지랄이야? 공짜 돈은 싫어하는 것 같아서 맷값이라고 생각하라고. 이 돈은 치료비니까 갖고 꺼져, 이 거지 새끼! 퉷!"

밭은 침으로도 모자라 잔인한 발길질로 남아 있던 분노를 마저 표출한 현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정하게 인터폰에다 자신을 밝혔다.

"나예요, 아줌마!"

"아아 ... 네, 감독님? 이상한 사람이 있어서 ......."

"내가 처리했으니까 염려 마시고 문 여셔도 됩니다."

철커덕! 대문이 열리자 현철은 일어서려고 발버둥치는 경욱에게 비웃음을 던지며 집안으로 사라졌다. 경욱은 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도 한참을 일어서지를 못했다.

비틀거리며 비실비실 올라온 길을 걸어 내려가던 경욱의 두 눈엔 눈물이 맺혔다. 애비의 자격을 버리고 살아온 벌을 받는 것 같아 고통도 달게 느껴졌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도 부끄러운 길이었다. 애비로서 무언가를 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박 소영의 돈을 돌려 주고 돌아서 나올 때의 뿌듯함과 떳떳함이 속죄의 의미가 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박 소영을 만나기는커녕 병신처럼 쥐어 터지고는 처량하게 발걸음을 돌리고 있었다.

멀리서 또 다시 강렬한 전조등을 밝히며 고급스런 외제차 한 대가 당당하고 뻔뻔스럽게 달려 올라왔다. 그리고는 너덜너덜한 경욱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배를 움켜 잡고 겨우 걸음을 내디디고 있던 경욱은 차를 피해 비껴 서느라 열려진 차창을 통해 보이는 여자가 박 소영인지 볼 겨를이 없었다. 차 안의 소영도 겉모습만 힐끗 보고서는 그가 홍 경욱인지 알아 보지를 못했다. 단지 그녀는 이런 동네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 들락거린다고 민원을 넣어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새벽녘에서야 촬영을 마치고 주차할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돌던 세훈은 할 수 없이 아파트 건물 통로 앞에다 차를 댔다. 차에서 내리던 세훈은 현관 구석에 자지러져 앉아 있는 술취한 듯한 취객을 발견하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저기요, 선생님?"

세훈은 그의 어깨를 흔들다가 취객이 아님을 알았다. 술냄새는 전혀 나지를 않았다. 다만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의 행색은 남루하기 그지 없고 오랫동안 제대로 씻지 않은 듯 자릿내를 풍겼다. 하지만 여느 사람들과 달리 세훈은 크게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낯선 남자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가 졸고 있다고 생각하고 어깨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저기 ...선생님? 댁이 어디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홍 ... 가온이를 ... 만나러 ... 왔는데 ....... 집을 몰라서 ......."

"누구요, 선생님?"

신음 소리와 함께 기어 들어가는 낯선 사내의 목소리에 세훈은 다시 되물었다.

"조금만 크게 말씀해주세요, 선생님?"

"홍 ... 가온! 홍 가온 ... 이 ... 말이요."

"......."

세훈은 홍 가온이라는 말에 잠시 말을 잃었다. 고개를 드는 그는 누구한테 맞은 것처럼 입술이 터지고 피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가온이를 찾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말을 아끼던 세훈은 누군지 알 듯도 같았다. 그래서 확인차 입을 다시 열었다.

"누구시죠? 가온이랑 어떻게 되시는 관계이신지 ......."

"우리 가온이를 아시오? 나는 ... 홍 가온이 ... 먼 친척 ... 아제되는 ... 사람이요."

그는 자신의 진짜 신분을 속이고 있었다. 가온이라고 부르고 들을 때마다 흔들리는 그의 눈빛으로 세훈은 그가 가온의 아버지란 사실을 눈치챘다. 세훈은 그가 당황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희 집에 있었습니다."

"지금은 없단 말이요?"

경욱은 당혹감에 몸을 일으키려다 통증을 느꼈는지 얼굴을찌푸리며 다시 현관 구석 벽에 몸을 기댔다. 염려스럽게 바라보며 세훈은 자신의 차를 힐끔 돌아보았다.

"네. 지금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제가 모셔다 드릴 수도 ......."

"아니 ... 그럴 필요까진 ... 없소."

경욱은 세훈의 말을 자르며 거절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그리고는 부시럭거리며 바지 주머니에서 둘둘 말린 흰 봉투를 꺼내 세훈의 손에 손수 쥐어 주었다.

"이걸 ... 좀 갖다 ... 줘요."

"이게 뭡니까?"

"박 소영이란 ... 여자를 만나서 .... 꼭 ... 돌려 주라고 ......."

삐죽하게 찢어진 틈새로 보이는 또다른 종이의 실체는 틀림없이 수표인 것 같았다.

박 소영이 가온의 아버지까지 찾아내 돈을 쥐어 주고 사탕발림을 하고 왔음에 틀림없다. 그걸 나중에서야 알고 돌려 주려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어디서 이 지경이 되도록 맞은 걸까? 혹시 직접 되돌려 주려다 봉변을 당한 걸까? 그러고도 남은 인간들이니까. 우선 병원에 모셔다 드리는 게 먼저일 것 같다. 세훈은 봉투를 얼른 주머니에 챙겨 넣고 경욱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겨드랑이 밑으로 팔을 집어 넣었다.

"선생님, 일어서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나는 ... 괜찮으니 ... 염려 마시오."

경욱은 세훈을 올려다보며 힘겹게 웃음을 지었다.

"내가 직접 ... 돌려 주려고 ... 했더니 ... 거지꼴이다 보니 ... 상종을 않더이다 ... 보아 하니 ... 우리 가온이와 ... 많이 ... 친하신 ...모양인데 ......."

"말씀 그만하시고 저와 병원부터 가시죠."

역시 그 인간들이 이 지경으로 만들었군. 세훈은 조급한 마음에 그의 말을 가로채 말을 이어 나갔다.

"몹시 힘들어 보이십니다, 선생님?"

"아니 ... 됐수다... 자랑은 ... 아니지만 ... 하도 ... 맞고 다녀서... 맷집은 좀 ... 있수, 내가 ......! 그런데 ... 뭐하는 양반이 ... 이렇게 밤늦게 ... 다니시유? 우리 가온이랑 ... 같이 ... 있었수?"

"아닙니다. 저는 드라마 만드는 사람입니다. 촬영이 늦어져 지금 오는 길이구요. 가온씨와는 오는 길에 잠깐 통화 밖에는 못했습니다. 오지 말라 그래서요."

"허허허 ... 여자 말을 ... 곧이 곧대로 ... 다 듣진 ... 마시유. 여자들 말은 ... 99프로가 ... 반댓말이니까."

"그렇습니까? 그럼 이걸 전해주러 간 김에 얼굴이라도 보고 와야겠네요. 보고 싶어서 미칠 뻔 했는데 말입니다."

"그러시유."

그러면서 경욱은 희미한 불빛을 도구 삼아 세훈을 유심히 관찰했다. 여느 사람들 같으면 취객이라고 널브러진 자신을 못 본 체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인간은 된놈인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군. 얼굴도 체격도 직업까지도 ... 이 정도면 나무랄 데 없는 남편감이군. 경욱은 고통스러운 통증을 이를 악물고 견디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안심이 된 듯 어설프지만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일어섰다.

세훈은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고 혼자 일어서려는 그를 억지로 부축했다. 손을 뿌리치고는 있었지만 그는 몹시 쇠약하고 많이 아파 보였다. 그리고 혼자는 몸을 가누기가 버거워도 보였다. 그는 세훈의 도움이 못내 미안한 듯 결국 사과를 했다.

"미안허우. 좀더 반듯한 꼴로 만났어야 하는데 ... 아무튼 고맙수. 이름이?"

"주 세훈입니다."

"오호 ... 주 PD 양반! 부디 우리 가온이 ....... 아니 ... 집안 어른으로서 그냥 부탁하는 거요. 우리 가온이 잘 부탁허우."

경욱은 먼 친척이라 소개해 놓고 정도를 지나 오지랖 넓은 부탁을 하는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어색했는지 어설픈 변명과 웃음으로 어물쩡 넘기고 있었다. 세훈은 그런 경욱을 보니 언젠가 주차장에서 아버지를 만난 가온이 하염없이 펑펑 울기만 했던 이유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기적어기적 발품을 팔아 어떻게 알고 여기까지 왔는지 ....... 또 다시 왔던 길을 저렇듯 애틋하고 병약하게 돌아서서 가는 경욱이 세훈도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다.

흐르는 눈물속에서도 경욱은 웃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어린 딸자식에게 든든한 버팀목 같은 남자 친구가 곁에 있어 얼마나 안심이고 다행한 일인가. 혼자 모진 세상을 살아 나온 것도 대견하고 기특할 일인데 ... 조금 이르긴 해도 뒤에 아무도 없는 것보다 지켜줄 누군가가 하루 빨리 있는게 가온의 입장에서는 훨씬 나을 것이다. 저 정도의 됨됨이라면 걱정없이 가온이 할머니 곁으로 떠나도 될 것 같다. 아무것도 해준 것도 없이 그저 살아서 딸자식에게 민폐이고 오욕으로 남느니 이젠 그만 가도 될 듯 싶다.

세훈은 뒤늦게 차를 끌고 경욱을 쫓았다. 그가 염치를 차리느라 거절을 했어도 자신이 억지로라도 병원이나 댁으로 모셨어야 했다고 늦은 후회를 했다. 하지만 그 발걸음으로 멀리 가지 못했을 것 같던 그가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내려서 큰소리로 불러 보기까지 했다.

"아버님? 아버님? 가온이 아버님? 아버님?"

세훈은 자신을 책망하며 다시 차에 올랐다. 이대로 가온을 만나러 간다는 것이 부끄럽고 미안했지만 박 소영의 돈봉투를 핑계 삼아 가온을 안을 수 있다는 것이 그래도 기쁘기만 했다.

아파트 근처 건물 후미진 곳에서 마지막 몸을 쉬고 있던 경욱은 세훈의 애절한 목소리에 울음을 토해냈다. 소리없는 절규였다. 아버니님이라고 불렀다. 가온이 아버님이라고 불러 주었다. 경욱은 세훈의 외침에 최후의 용기를 끌어낼 수 있었다. 그는 인적이 드문 어둠만이 찐득하니 깔려 있는 도로로 겁없이 걸어 나갔다.

이 시간이면 술취한 미친 운전자 하나 정도는 있을 시간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냥 운전에 광분한 매니아도 하나 정도는 있을 법 하다. 인내하고 있는 기운이 곧 소진될 것 같다. 아까 발길질에 속과 장이 죄다 터져 버린 것이 분명하다. 속에서 피가 들끓는 걸로 봐선 얼마 못버티지 싶다. 경욱은 자신의 몸이 조금씩 땅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세훈은 현관 앞에서 가온을 기다리는 게 새삼 설레일 일인지 웃음이 새어나왔다. 늦은 시간까지 영화 대본을 섭렵하느라 티셔즈에 반바지가 다였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느라 대문 열어 주는 시간이 조금은 더디었다.

"오지 말라니까 오셔서는 ......."

가온은 대문을 열어 주러 현관 앞에까지 나서면서도 투덜거리며 그를 나무랐다. 늦은 밤촬영으로 세훈이 얼마나 피곤하고 힘든지 모르는 가온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대문을 열자마자 세훈은 가온의 책망을 무시한 채 그녀를 있는 힘껏 꽈악 껴안았다. 가온은 지은이 신경쓰여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가 어찌나 세게 안고 있었던지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이 형언할 수 없이 기쁜 일이면서도 또 한 편으로서는 죄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애기 같은 나의 감독님, 어떡해?"

"어떡하긴 ... 빨리 결혼식 해야지. 혼인무효소송 끝나는 대로 하자, 가온아?"

"영화 때문에 ......."

가온이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집안 거실에서 가온의 핸드폰이 울렸다. 가온은 지은이 깰까봐 세훈에게서 빠져 나오기 위해 버둥거렸다.

"지은 언니 깨요! 잠깐만요, 감독님?"

세훈은 그냥 놓기 싫어 그녀의 입술에 짧게나마 입을 맞추고 놓았다. 그리고 급히 달려 들어가는 가온을 뒤따랐다.

"여보세요? 네? 제가 홍 가온입니다만?"

"여긴 신촌 병원입니다. 혹시 홍 경욱씨 아십니까?"

"네. 제 아버지 되십니다."

"찾고 계십니다. 홍 경욱씨가 홍 가온씨를. 시간이 얼마 없으니 빨리 오셔야 할 겁니다. 그럼."

가온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창백하게 주저앉았다. 부모님이란, 그리고 아버지란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사라지는 순간 후회만 가득 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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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5,, 다름과 틀림 18.07.17 63 0 19쪽
24 24,, 엄마 18.07.16 57 0 18쪽
23 23,, 사랑의 한계 18.07.16 58 0 20쪽
22 22,, 남은 자의 몫 18.07.14 69 0 17쪽
» 21,, 부정(아버지의 사랑) 18.07.13 55 0 18쪽
20 20,, 가족 18.07.12 64 0 17쪽
19 19,, 작별 18.07.11 69 0 18쪽
18 18,, 악연 18.07.10 61 0 18쪽
17 17,, 거짓은 거짓을 낳다 18.07.09 68 0 18쪽
16 16,, 터져버린 거짓 18.07.09 61 0 18쪽
15 15,, 파괴의 시작 18.07.07 70 0 17쪽
14 14,, 사랑이 무섭다 18.07.06 302 0 17쪽
13 13,, 천륜 18.07.05 72 0 17쪽
12 12,, 첫경험 18.07.04 86 0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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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0,, 불청객 18.07.02 66 0 17쪽
9 9,, 라이벌 18.07.02 69 0 17쪽
8 8,,사랑이 걸어오다 18.07.01 67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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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성인이 되다 18.06.29 93 0 16쪽
5 5,, 홀로서기 2 18.06.28 88 0 16쪽
4 4,, 홀로서기 1 18.06.27 84 0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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