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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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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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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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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0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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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쪽

혈귀궁

DUMMY

※※※



밤이 내려앉았다. 어둠 사이로 일렁이는 것은 잔뜩 일그러진 붉은 눈동자와, 희게 튀어오르는 뇌광 뿐이었다.


“다음. 아마 겨울 즈음에 이곳에 비구니 하나가 나타났을거다. 들은적 있나.”

“......”


혈귀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백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은적 있군.”

“......네놈. 무슨 요사한 사술을.”


씹어뱉듯 흩어져 나오는 혈귀의 목소리가 탁했다. 본래 매혹적이다 할 수 있었을 음성은 고통과 분노로 일그러져 그 형태를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허나 그 앞에 선 악예린은 무심한 시선으로 혈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시끄럽군요.”


쿠궁-!


악예린이 손아귀에 쥔 창에 힘을 주었고, 그 순간 혈귀의 다리에 꽂힌 창이 반뼘정도 더 바닥을 뚫고 들어갔다. 뼈가 갈라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허공을 울렸는데, 그럼에도 혈귀는 비명을 지르지 않고 창백해진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허억, 허억......!”

“아직도 그녀를 쫓고 있나?”


혈귀의 눈빛이 흔들린다. 지금 이 순간 백연이 보는 풍경은 다른 무엇과도 달랐다. 극성까지 끌어올린 태청신공 기파가 백회를 채우고 휘돈다. 소년의 머리 뒤로 분분히 튀어오르는 뇌기가 꽃잎처럼 흩어지며 상단전 통찰을 극성에 이르게 한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혈귀가 입을 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화율은 아직 안잡혔군.’


화율이 저들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한편으로는 안심이었다. 허나 또 한편으로는 걱정이 늘어났다.


화율이 붙잡히지 않았는데, 추적망이 줄어들었다. 적어도 교주 본인은 더 이상 기련산을 누비고 다니지 않는다. 사방에 드리워 있던 붉은 하늘이 사라진 것 만으로도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그녀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일까.


“......그녀가 다쳤나?”

“모른다. 그년의 동료라도 되나보지?”


악의가 뚝뚝 흘러나오는 혈귀의 음성에 백연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흐리게 명멸하는 자색 눈동자가 혈귀를 응시했다.


“사실 대답을 듣는것에 네 혀는 필요가 없는데.”

“......”

“궁금하군. 혈귀도 피를 많이 흘리면 죽나?”


한순간 공포로 눈이 커진 혈귀가 입을 다물었다. 뭇 사람들에게 아름답다 평을 들을만한 얼굴이었지만, 소년의 눈에는 커다란 해충처럼 보일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목을 베어야 할 해충.


무공을 위해 다른 것에 몸을 내맡기는 이들은 많다. 그것이 사술이건, 마기건 간에.


정도(正道)를 걷지 않고 무공을 연마하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세월을 넘어 성취를 극단적으로 빠르게 만들어주는 수법은 세상에 많다. 새외 무림을 비롯해 온갖 곳에서 빠르게 강해지고자 여러 방법과 수단을 강구한다. 하다못해 정파 무림에서도 격체전력같은 수단을 동원해 제자를 기르는 곳도 있다.


하지만.


이리 집단 전체가 다른 생자(生者)의 기운을 갈취해 자신들의 힘을 늘리기 위한 용도로 삼는 곳은 드물다.


마기(魔氣)는 세상 모든것을 해한다. 받아들이는 무인 본인조차도.


혈기는 다르다. 빼앗기는 이의 목숨만 스러진다. 어느면에서 보면 더 악질적이다. 다른 이들의 힘을 빼앗아 연명하는 기생충이라는 소리이니.


때문에 당장이라도 혀를 뽑아버리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죽으면 안되지.’


소년은 생각했고, 질문을 입에 담았다.


“혈귀궁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고, 그것을 비구니가 알아차렸다. 그래서 쫓고 있는 것이고.”

“......”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잘 모르나보군.”


그렇다는 일은 반대급부로 그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소리. 이 정도 힘을 지닌 혈귀도 아는 것이 없다. 혈귀궁 내에서 뭔가가 일어나고 있으나, 그걸 아는 인원은 소수라는 말이다.


“최근에 사람들을 많이 데려가고 있다고 들었는데, 피가 갑자기 많이 필요한 것인가.”

“......나는 시킨대로 할 뿐이다.”

“많이 데려가는 것 자체는 사실이군.”


백연이 악예린을 힐끗 쳐다보았다. 이제는 가면을 쓴듯 무표정하게 물든 악예린의 얼굴에서 백연은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차갑게 가라앉아 무감한듯 보일 정도의 분노를.


“하면 다른걸 묻지. 천살문이 뭔지는 알겠지.”

“......”

“천살문 대주가 이곳에 왔다 들었는데, 지금 어디 있지? 비구니와 같이 있나?”


혈귀의 눈이 잠시 움직였고, 백연은 미간을 좁혔다.


참월에 대해 보이는 반응과, 화율에 대해 보이는 반응이 다르다. 화율은 정말 아는게 없다는 반응이면 참월은 아니었다. 익숙한 것을 듣는 듯한 기색.


백연은 곧바로 깨달았다.


‘잡혔군.’


일이 골치 아파진다. 허나 동시에 해야 할 것이 명확해지고 있었다. 당장 화율의 행방을 알 수 있는 수단이 없다. 그러나 참월은 아마 마지막까지 화율과 함께 있었을 인물.


그를 찾아낸다면 화율도 찾을 수 있다. 참월이 살아있다는 가정 하에 말이지만.


“그 천살문의 대주는 아직 살아있나?”

“......”

“살아있군. 혈귀궁 안에 있는건가?”


혈귀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백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참월은 아직 살아있었다. 팔다리도 멀쩡하게 붙어있을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그것까지 소년의 관심사는 아니었다.


확인할 것은 다 확인했다. 일은 명확해졌다.


‘혈귀궁 안으로 들어가 참월을 찾아야 한다.’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허나 다른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기련산 전체를 뒤지고 다니며 화율을 찾는 것은 어렵다. 당장에 혈귀들이 화율을 찾으러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닐텐데, 아직까지 잡히지 않았다.


그녀의 은잠행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몰라도 쉬이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소리다. 심지어 교주의 힘에 동원 되었음에도 붙잡히지 않았는데.


‘직접 찾기는 불가능에 가까워.’


기련산의 크기만 생각해봐도 그렇다. 이곳 전체를 돌아보려면 시일이 며칠이 있어도 어렵다. 게다가 이미 부문주가 흔적을 찾으러 떠난 상황. 그들도 산을 돌아다니며 찾는 것은 지극히 비효율적이다.


그렇다고 하면 당장 눈앞에 있는 것은 참월의 흔적. 그라면 화율의 마지막 행방을 알고 있을 것이고, 그곳에서부터 시작하면 훨씬 간편해진다.


그렇게 백연은 결정을 내렸고.


“예린.”


소년이 중얼거림과 동시에 악예린이 반보 물러났다. 천천히 다가오는 백연을 확인한 혈귀의 눈이 커졌다.


“살......”


쩌적.


혈귀가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시린 백광이 허공을 물들였다. 이윽고 혈귀의 머리가 천천히 미끄러져 내렸다. 일검에 혈귀의 목을 베어버린 백연이 악예린에게 시선을 돌렸다.


“혈귀궁에 들어가야겠습니다.”

“무슨 생각이라도 있나요? 그냥 잠입하는 것은 어려울텐데. 게다가 이 혈귀가 실종되었으니, 경계가 강화될거에요.”

“실종된 적 없었던 것으로 만들면 되는거 아니겠습니까.”


백연이 말했다.


“예린이 배우고 싶다던 것, 지금 보여드리지요.”



※※※



피풍의를 둘러입은 여인이 손끝으로 얼굴을 매만졌다.


매혹적이면서도 한없이 예리한 자태였다. 큰 키와 허리춤에 찬 검 한자루. 길게 흘러내리는 머리칼은 달바람을 타고 흩날렸고, 시리도록 새하얀 얼굴은 어두운 밤공기 아래 창백한 빛을 발했다.


혹자의 눈에는 설화를 거니는 요괴로 보일 외양이었다. 혈귀라는 것들이 흔히 그렇다. 여우 요괴를 연상케하는 외양. 매혹적인 자들. 생기를 받아들이는 혈공의 부작용인데, 세간에서는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 외양 탓에 혈공을 익힌 이들도 부지기수였다지.


단점이라면 혈공을 깊게 익힐수록 핏빛으로 물드는 눈동자다. 그 탓에 혈공을 익힌 이들을 분간하긴 지극히 쉽다. 이들이 사람들 사이에 숨어들지 못하고 기련산에 모여사는 이유다.


이 여인은 아니었다.


“이렇게 말하긴 좀 그런데, 백연 지금 정말 아름다운 것 알아요?”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악예린이 한마디 툭 던진다.


“혈귀는 분명 찢어죽이고 싶었는데, 자안이라 그런가.”

“......눈 색도 똑같아야 합니다. 곤란한데.”


중얼거린 여인이 손으로 눈매를 매만진다. 그와 함께 훅 끌어올려지는 진기. 한순간 어둠을 수놓은 불꽃이 거칠게 휘돌며 눈가를 타고 오른다. 화기를 끌어올리자 진한 자색으로 물들어 있던 눈동자가 서서히 붉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깐.


“이제 어떻습니까?”

“......와아. 거의 비슷해요.”


완전히 핏빛까진 아니나 화려한 불꽃의 색으로 물든 눈동자를 확인한 백연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역용술과 축골공(縮骨功)이었다.


기본적인 육체의 형태가 다른 까닭에 몸도 매만져야 했는데, 백연은 스스로가 아직도 이 짓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내심 뿌듯함을 느끼고 있었다.


안쓴지 족히 수십년은 지났건만.


‘아니지, 수백년인가.’


검귀는 커녕 아직 변변찮은 별호도 없던 시절 사용한 것을 제외하면 기억이 없다. 그럼에도 소년은 자신이 있었다. 그때도 완벽했었으니까.


지금 이 순간, 옅은 물가에 얼굴을 비추자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은 곤륜파의 신성이 아니었다. 다만 방금전에 목이 베여 죽은 혈귀가 그 안에서 매혹적인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아, 아. 목소리는 어떻습니까?”

“......기분 나쁜데요.”

“예?”

“아, 혈귀랑 너무 똑같아서 기분 나쁘다는 소리였어요. 완벽하네요.”

“좋습니다. 일은 간단합니다. 제가 혈귀. 그리고 예린이......”

“원래 데려갈 예정이었던 희생자. 이해했어요.”


그들의 계획이었다.


혈귀궁 안에 그냥 잠입하긴 어렵다. 단박에 위험에 처할 것이 뻔했는데, 그 탓에 생각해낸 방법이었다. 백연이 역용술을 이용해 혈귀로 변장하고, 예린을 희생자로 꾸며 안에 들어가는 것.


‘예린이 혈귀로 변장하는게 더 좋았겠지만.’


여인이니만큼 더 편하게 변장할 수 있었을테지만, 문제는 역용술을 지금 당장 익힐 수 없다는 부분이다. 구결은 쉽지만 완벽하게 다루기는 어려운 것이 역용술인 탓에.


“......으. 아직 아프군요.”


얼굴을 매만진 백연이 중얼거렸다.


역용술과 축골공의 가장 큰 부작용이었다. 근맥과 뼈를 실제로 움직여 구조를 바꾸는 무공인데, 당연히 고통이 수반된다. 처음 겪는 사람이라면 바닥을 굴러다닐 정도로 아프다. 차라리 검에 몇번 찔리는게 낫다 싶을 만큼.


그리고 두번째는 기감과 집중도의 하락이 찾아온다. 무공 실력도 하락한다. 간합이 전부 바뀌고 신체 구조마저 일부 변형되는 까닭이다.


물론 그 자신이 간합이 바뀌는 것이나 그런것에 쉽게 적응할 수 있다면 상관없을 일이나, 처음 겪는 이들이 그러하긴 어렵다.


백연이 혈귀의 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예린은 괜찮겠습니까?”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백연 자신은 검을 차고 들어갈 수 있다. 예린은 불가능하다. 그녀의 무구인 장창. 어딜가도 곧바로 눈에 띄는 거대한 물건이다. 키보다 훨씬 큰 창을 쥐고 휘두르는 악예린을 알아보지 못할 사람이 없다.


때문에 장창을 들고가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다. 단창 한두개를 몸에 숨겨서 들고가야 하는데 그것이 전부.


“확실히 위험합니다. 저 혼자 들어가서 참월대주의 신변만 확인하고 나오는 것도......”


희생자를 데려오지 못한 변명은 어떻게든 만들면 그만이다. 허나 악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창 한자루 없다고 무력해지는 것도 아니고.”


백연을 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단단했다.


“그리고 제가 같이 있는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그야 당연하죠.”

“그럼 결정이네요. 같이 들어가서 빠져나와요.”


백연은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그로써도 악예린이 동행하는 것이 훨씬 좋은 일이었으니까. 애초에 그녀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준비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의 허름한 옷 몇개를 찾아 걸쳐입은 악예린은, 외양도 지저분하게 문대어 바꾸었다. 얼굴에 가벼운 상처를 내는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오랜 기간 고생을 한 듯이 지친 얼굴의 소녀가 되어 있었다.


“어때요?”

“대단하네요.”


백연은 감탄했다. 물론 저리 했음에도 미모를 완전히 죽일 수는 없었지만, 이제 누구도 그녀를 보고 곧바로 뇌룡 악예린을 떠올리지는 못할 일이었다.


그렇게 커다란 달이 휘영청 머리 위에 떠오를 무렵. 한밤의 길을 따라 한 혈귀와 겁에 질린 듯 보이는 소녀가 걸음을 내딛었다.


불안한 얼굴로 건물 곳곳에서 눈만 내놓고 그들을 힐끔대는 마을 사람들을 뒤로 하고서였다.


그때였다.


“......저기!”


문이 발칵 열리더니, 덥수룩한 머리칼의 아이가 뛰쳐나왔다. 막 마을을 떠나려던 백연과 악예린을 향해서 황급히 달려온 아이가 숨을 몰아쉬며 무언가를 건네었다.


“주, 죽지 마세요!”


그렇게 말한 아이가 건넨것은 작은 단검이었다. 싸구려 쇠붙이가 달빛을 받아 흐리게 빛을 내었다. 그것을 받아든 악예린이 픽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품에 단검을 갈무리한 예린이 몸을 일으켰다. 마을을 힐끗 응시한 두 사람이 가볍게 걸음을 떼었다. 한순간 바람결이 크게 휘돌았고.


화아악!


이내 혈귀와 소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산맥의 안쪽으로 흩어지는 두줄기 달바람만을 뒤에 남긴채였다.



※※※



달빛 아래.


후우우우웅-


바람이 흩어져 내린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타고 떨어지는 바람이 마치 폭포 같았다. 그 앞에 선 백연이 중얼거렸다.


“혈교의 근거지를 궁(宮), 궁 거리길래 왜 그런 표현을 쓰나 했더니.”

“정말로 궁이네요.”


휘이-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극도로 화려한 건축물이었다. 이런 산맥에 지어졌다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장대한 구조물.


온통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점철된 거대한 건물은, 절벽 위를 따라 굳건하게 그 자태를 드리우고 서 있었다. 달빛 아래에서도 화려하게 빛나는 것이 마치 하늘에 떠오른 만월을 곧 삼켜버리기라도 할 것 같다.


드높은 혈귀궁의 꼭대기는 칼날처럼 치솟아 있었고, 드높게 치솟은 벽마다 언뜻언뜻 수십의 인영이 오가는 것이 보인다.


가히 장대하다 할법했다. 눈에 담자마자 압도된다는 기분을 느낄만큼.


잠시간 그 풍경을 눈에 담은 두 사람이 이윽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창은 그렇게 꽂아놓고 와도 되는겁니까?”

“괜찮아요. 여기에는 사람이 오간 흔적도 없고, 잘 숨겨놨으니까.”


혈귀궁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신의 물건들을 숨겨놓은 악예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만일 전투가 벌어지면 가까운 곳에 무구가 있는편이 낫죠.”


그렇게 품에 쥔 것은 두개 뿐이었다. 아이가 준 단검 하나와, 평시 투창으로 쓰던 철야방도가 만들어준 단창 하나. 들키지 않게 품속에 숨길 수 있는것이 그정도였다.


반면 백연은 여휘를 매고 있었다. 천마의 검은 풀어서 악예린의 창 옆에 내려놓고 왔다. 두자루 검을 모두 차고 다니면 너무 눈에 띄는 까닭이다. 특히 그것이 천마의 검처럼 어딜가나 한번에 눈길을 끌어댈 검이라면.


“백연은 실수만 하지 않게 조심해요.”


혈귀궁을 향해 걸으며 악예린이 속삭였다. 백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이 홍예라 했었지요.”

“이제는 백연의 이름이니까요.”

“기억하고 있습니다.”


행여나 실수가 있으면 안될 일이었다. 그리 뇌리에 단단히 새긴 두 사람이 산길을 걸어 한참을 올랐고.


“......돌아왔나? 문을 열어라!”


혈귀궁 앞에 도착할 무렵 그들을 알아본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직후였다.


그그그극-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문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직후.


쿠구구구구궁-!


거대한 굉음과 함께 혈귀궁의 앞을 막고 있던 외성(外城)의 문이 서서히 들어올려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흩어져 나오는 것은 화려하게 춤추는 불빛.


붉고 노란 빛살들이 춤추며 시야를 희롱한다. 동시에 사방을 가득 채운 혈향이 기감을 아릿하게 잠식해온다.


그렇게 문이 서서히 들어올려지던 순간.


[조만간 또 뵙기를 희망하지요. 살펴 가시길 바랍니다.]

“노부에게 잠자리 하나 주지 않고 내쫒는군. 끌끌. 요새는 혈귀궁의 인심이 이리 야박해졌나.”

[하룻밤이면 이곳에 당신이 끌고 온 원혼들이 수없이 깃들텐데,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귀성(鬼城)을 만들것도 아니고.]

“여튼 알겠네. 조만간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

[간만에 만나 즐거웠습니다. 노군.]


시야 너머, 막 열리고 있는 문 사이로 세 명의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한순간 백연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드는 감각을 느꼈다.


혈귀궁 안쪽에서 성큼성큼 걸어나오는 회색 장포의, 가히 초월적인 기도를 지닌 노인과, 그 바로 뒤에서 걷고 있는 흑의의 사내. 그리고......


[음? 막 재료를 수확해온 이가 있었군요. 홍예입니까?]


고개를 갸웃 기울이는 큰 키의 사내. 호리한 몸에 달라붙은 백색 장포는 티끌 한점 없는 순백이다. 얼굴을 뒤덮은 매끈한 가면에는 웃는 듯한 눈구멍 두개만이 남아 기괴한 각도로 움직이며 휘어진다.


[빨리 들어오시지요. 바깥 공기는 기분 나쁘니.]


백색 가면의 사내가 태연히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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