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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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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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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2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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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01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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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6쪽

푸른 별(9)

DUMMY

※※※



“음.”


연푸른 무복을 걸친 백연이 스스로의 모습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청성파 도인의 무복이었다. 그 형태나 색채가 과거 청율 사숙이 입고 다니던 것과 꽤나 비슷했는데, 신기한 감각이었다. 다른 문파의 무복을 입게 될 날이 올줄은 몰랐거늘.


“저, 다 입으셨으면 들어가봐도 될까요?”

“예. 괜찮습니다.”


사박.


동혈 입구에서 누군가 불쑥 머리를 내밀었다. 그와 똑같은 무복을 걸친 소녀였다. 막 호수에서 나와 다시 피묻은 옷을 걸치고 걸음하던 그를 급히 멈춰세운 장본인이기도 했다. 막 옷을 가져다 주려 했다면서.


지금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를 바라보는 커다란 눈에 잔뜩 깃든것은 호기심이었다.


“불편하진 않으세요?”

“딱 맞아서 좋습니다. 감사하군요.”


놀랄만큼 딱 들어맞는 옷이었다. 그의 말에 소녀가 배시시 웃었다.


“다행이네요. 제 옷이 안 맞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예?”

“아, 크기가 맞는게 제거 밖에 없어서. 괜찮아요! 한번도 안 입은거에요. 아마도?”


백연은 입을 다물었다.


청성파의 경내로 돌아가는 길은 소녀의 조잘거리는 목소리와 함께였다.


“선소빈이라고 해요. 들어온지는 얼마 되지 않았는데, 늦둥이라 매일 매일이 불안한거 있죠.”

“늦둥이라 하심은......”

“보통 구파의 제자들은 예닐곱살부터 검을 쥐니까요. 저는 막 산에 오른게 열서넛 때라.”

“지금은 나이가 어찌 되시길래?”

“열하고 일곱이에요. 그런데 말을 너무 불편하게 하는거 아니에요?”


백연이 힐끗 선소빈을 응시했다.


그녀가 그를 쳐다보는 눈짓 사이사이에 여러 감정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경외감일까, 아니면 고마움일까. 어찌 되었든 그것이 호의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소년은 입매를 끌어올리며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그럼. 소빈 선배라 부르면 될까요.”

“......제가 선배?”

“예. 이래봬도 지학(志學) 언저리의 나이라.”

“와, 세상은 불공평하네요.”


그리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내려오는 것이 가벼웠다. 백연은 스스로의 몸 상태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곳은.’


동혈 안의 신령스러운 호수. 그 속에서 느꼈던 것들.


어느 순간 소년의 시선이 잠시 흐리게 흩어졌다가, 이내 되돌아온다. 그를 빤히 바라보는 선소빈 탓이었다.


“미안하네요. 방금 뭐라 했죠?”

“......그렇게 목숨을 걸고 싸우는건 어떤 마음일까 궁금해서요. 저는 실력도 없고 용기도 없어서 목숨을 내걸만한 위험한 싸움에는 못 나가봤거든요.”


그리 말하며 고개를 살풋 기울이고 흐리게 웃는다.


“겁나거나 하지 않아요? 원래는 하면 안되는 생각이지만 저는 가끔......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때도 있어요. 제가 막 뛰어나지 못해서 다행이다, 같은.”

“......”

“우습죠. 이런 마음으로 무학을 배운다는게.”

“겁나죠. 지극히 당연한 것을 가지고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말에 동그랗게 떠지는 눈이 커다랬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는지.


허나 백연은 그녀의 반응에 신경쓰지 않고 담담히 뱉었다.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천애고아를 거둬준 유일한 보호자는 아이가 여섯에 이르기 전에 죽었고, 그를 구해준 검객은 심법 하나만을 가르쳐 준채 반년만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강해져야 했던 아이는 어느새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되었고요.”


백연이 중얼거렸다.


누구나 생각해보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날붙이가 번뜩이고, 피가 튀기는 전장 속에서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그렇게 성장하다보니 인연이라는게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곁에 늘어나는데, 검을 휘두르지 않고서 모두가 다음날을 기약할 수는 없더군요. 그리 되었을때, 두려움이나 겁난다는 감정은 가장 나중에 고려할 대상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투명한 시선이 선소빈을 응시했다.


“그렇기에 저는 가장 두려움이 많은 사람만이, 가장 겁 없이 검을 휘두를 수 있다 생각합니다.”


담담하게 내려앉은 풍령같은 음성이 귓가를 간질인다. 바람결에 실린 스스로의 목소리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소년은 문득 생각했다.


‘장문인과 사형들은 별일 없을까. 곤륜산에 남은 사람들은.’


상념이 끼어든다.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때 잠시간 입술을 달싹이던 선소빈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학 맞아요?”

“아하하.”

“하지만 덕분에 무슨 소리인지 바로 이해했어요. 두려움......그렇구나. 임 사숙조는......”


그녀의 눈매가 잠깐 휘어들었다. 눈가에 스친 이슬같은 물기를 백연은 못본척 걸음을 옮겼다.


흘리듯 말을 남기면서였다.


“그런 의미에서는 소빈 선배도 누구보다 충분한 자질이 있어보이네요.”


몇걸음 더 걸어내려가자 사람들이 북적이는 경내의 풍경이 보인다. 비스듬히 걸친 햇살을 배경으로 둔 채였다. 아직 이른 시간임에도 곳곳에서 음식의 냄새가 풍겼다.


기운을 소진한 사람들이 많은 까닭일 터이다. 건물들을 지나쳐 처음 청진과 대화를 나눴던 의약방 근처에 도착하자 선소빈이 입을 열었다. 전과 별다름 없이 활기찬 목소리였다.


“조언 고마웠어요! 옷은 나중에 돌려줘야 해요?”

“예?”

“농담이에요. 하지만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싶네요.”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말끝을 흐린 그녀가 눈매를 휘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고마워요. 저희 문파를 구해줘서.”


그리 말하고 훌쩍 뒤도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등을 응시하면서 백연은 생각했다. 나중에는 이곳의 아이들이 저 등을 바라보고 있게 될 것도 같다고.


“빨리 돌아왔구려.”


바삐 움직이던 청진이 백연을 보고 고개를 끄덕인다. 임소백과 함께 환자들을 보살피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대의 사형은 저 안에 있으니 들어가시오.”


저벅.


백연이 의약당의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방을 지나자 어느 한켠에서 느릿하게 휘도는 진기가 느껴졌다.


“......”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방 안에서 천천히 걸음을 내딛고 있는 소홍이 눈에 들어왔다. 한걸음, 한걸음을 딛을때마다 몸 주위의 진기가 크게 맥동하며 육신으로 스며든다. 호흡에 섞인 기운이 한없이 짙게 흩어져 나오고, 팔을 내뻗을 때마다 진기가 휘감겨 몸을 감싼다.


흐릿한 운무(雲霧)마냥 주변을 감싸고 일어나는 진기 파동.


방 안에 있음에도, 한순간 끝없는 운해가 펼쳐진 곤륜산의 봉우리에 발을 들인것만 같다.


‘운연동공의 성취가......’


얼핏 어림잡아도 드높았다. 어쩌면 사형들 중에 운연동공을 가장 먼저 대성할 사람은 소홍 사형이 아닐까.


보신경을 다루는 것에 탁월한 이가 단휘라면 소홍은 모든 기본기를 깊게 파고든다. 몸을 만드는 운연동공은 단연코 그가 가장 열심히 수련하고 있겠지. 평소에는 존재감 옅은 사형의 기척에 흐려, 그 기운마저 약하다 착각하기 쉽지만......


‘태청을 가장 먼저 손에 쥘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렇게 지켜보기를 잠시. 백연은 문득 주변의 진기가 끊이지 않고 계속 부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대체 그 사이에 뭘 먹은거지?’


생각하던 순간, 소홍이 마지막으로 손을 내뻗으며 숨을 크게 들이쉬었고.


화아아아아악-!


주변의 운무가 산들바람처럼 소홍의 몸을 향해 회전하며 빨려들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곧이어 천천히 눈을 뜬 소홍이 한숨을 내쉬며 주저앉으려던 순간이었다.


“후......으악?”


그제서야 백연을 발견했는지 보기 드물게 큰 소리를 내며 놀라는 사형이었다. 픽 웃은 백연이 그에게 다가갔다.


“끝났어?”

“......응, 놀랐어. 너는 괜찮아?”

“멀쩡해졌지. 이거 봐.”


백연이 팔을 크게 휘저었다. 맹화의 반동으로 부서졌던 팔은 이미 다 아물어 있었다. 뒤틀린 근맥마저 어루어만지던 기운이 신묘하더랬다.


“어디서, 뭐를 했길래......?”

“산속에서 신선 놀음좀 하고 왔지. 아니, 선녀 놀음인가.”

“너, 눈이.”


스윽 손을 뻗어낸 소홍이 백연의 눈매를 매만졌다. 조용한 사형의 얼굴에는 적잖이 놀란 표정이 깃들어 있었다.


“자색(紫色)......”


백연이 미소를 지었다.


소홍이 당황한 이유는 지금 이 순간, 백연의 눈이 투명한 자색으로 물들어 있는 까닭이었다.


자령안을 일으키고 있지 않았음에도.


“그렇게 되었네. 마음에 안들어?”

“......아니, 잘 어울려. 예쁘다.”


그 말만을 하고 소홍은 금새 표정을 가라앉혔다. 놀란 기색이 역력함에도 그리 경위를 신경쓰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곧장 손을 내려 백연의 볼을 쥐는 동작까지도 날랬다.


“사형? 그건 놔주지 않을래......”

“얼굴도 맑아졌고.”


그의 볼을 주욱 늘린 소홍이 천천히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옅디 옅은 미소를 지은 사형이 백연의 머리를 툭툭 두들겼다.


“고생했어.”

“그 전에 사형은 대체 뭘한 거야? 축기량이 배는 늘어난 듯 했는데.”

“먹었어. 삼뿌리 하나.”


짤막한 대답이 가벼웠다. 하지만 내용은 아니었다.


“삼? 영약을 먹었다고?”

“받았어. 천년은 묵었다던데.”

“청성파에서 그런 귀한걸 내줬다고? 하긴 이해가 안될건 아니지만......”


당장 그에게 제공한 것이 수배는 더 불가사의한 비고였음을 감안하면, 그와 함께 나찰극마를 막아선 소홍에게 영약을 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본디 가지고 있는것을 쉬이 내주기는 어려운 법이다. 청성의 도인들은 그런것에 인색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 정도 축기량에, 운연동공의 성취가 그 정도면.”


백연이 중얼거리며 소홍을 가늠했다.


“아무래도 백자배에서는 사형이 제일 먼저 태청신공에 닿지 않으려나?”

“......사숙은?”

“청율 사숙은 모르겠네. 워낙 오래 운연공을 연마했으니까. 세월의 간극은 메우기 힘든 법이지. 환골탈태라도 하는게 아니면 말이야.”


백연의 말에 무언가 생각하듯 미간을 천천히 좁힌 소홍이 말했다.


“그건 어떻게 해?”

“환골탈태? 네가지 정도 조건이 필요한데......왜. 궁금해?”

“응.”

“알아도 쓸모는 없을거야. 내가 성공한 것은 어디까지나 이례적인 경우였으니까. 그래도 알고 싶다면 어려울 건 없지.”


백연이 손가락을 들어올려 하나하나 접어내렸다.


“첫째로 온몸 신체의 경혈이 막힘없이 뚫려 있어야 해. 임독양맥의 타통은 물론이고, 기경팔맥과 십이경맥, 그리고 모든 세맥에 기를 흘림에 막힘이 없이 자유자재로 운용이 가능한 수준이 필수적이야. 둘째는 주화입마에 빠져도 스스로 이지를 되찾을 수 있을 정도의 굳건한 신(神). 즉 상단전 영성이 단단해야 하고 셋째는 막대한 양의 내공이 필요해.”

“......”

“사실 앞의 셋은 어떻게든 만들 수 있는 조건이지. 간혹 가다 갓난아이에 벌모세수를 해 무도에 적합한 육신을 미리부터 엮어내는 경우가 있기도 하고. 내공이야 영약으로 벌충하면 되고, 상단전이야 사형은 될 것도 같고. 하지만.”


백연이 소홍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필요한게 경지를 넘어서 다다른 무학이라서. 일신의 무(武)가 한번 극에 달했을때, 정기신중 둘이 앞서나가는 것을 따라가기 위해 몸이 재구성되는게 환골탈태야.”

“......하아.”


한숨을 내쉬는 소홍을 보며 백연이 쿡쿡 웃었다.


“필요 없는 정보였지? 자 그럼 환골탈태는 생각하지 말고 성실히 무공을 연마하도록.”

“그런 이유는 아니었지만......”

“알아. 나도 사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백연이 고개를 숙였다. 소홍의 몸을 휘감은 진기가 터럭처럼 흘러나온다. 어딜가도 당당히 뛰어난 전력으로 취급받을 기재. 그 검끝은 구파의 무력대에 비해도 이제 위협적이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사형한테는 사형의 싸움이 있는거고, 나한테는 내 싸움이 있는거니까.”


소홍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그냥 아쉬워서.”


옷자락을 갈무리한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홍 또한 그 사이 상처 치료까지 전부 받고 새로 옷을 받은 모양이었다. 말끔해진채로 검을 매고 의약당을 걸어나오자 모여있는 무인들이 많았다.


“왔군. 헌데 자네 그 사이에 조금 더 헌앙해진 느낌일세......?”


장중이 삿갓을 기울이며 갸웃 의문을 표하고, 어느새 성큼 다가온 예화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때. 와서 식사나 하자고.”

“드시고 계셨군요. 다들 몸은 괜찮으십니까?”

“구파의 의술은 어딜가나 중원에서 손을 꼽는다 하더니, 그 말이 진실이더군. 아니, 진실일 수 밖에 없는 노릇이야.”

“온갖 영약과 갖가지 약초를 물쓰듯 사용할 수 있으니 말이오. 덕분에 기력을 금방 회복했소이다.”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바깥에 급하게 마련된 듯 보이는 커다란 식탁에 여러 무인이 둘러앉아 음식을 나누는 모습이었다. 청성파의 아이들과 무인들도 함께 섞여 앉았는데, 이제는 그 기질을 따로 구분할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와중, 문득 백연은 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분명 살아남아 이 자리에 와 있었어야 할 무인이.


“황 검객은 어디 가셨습니까?”

“......황가?”


되물은 외팔의 노인이 한쪽을 가리켰다.


“혼자 궁상떨러 갔는디.”

“그렇습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슬며시 일어난 백연이 걸음을 옮겼다.


일보를 떼는 순간, 주변의 시야가 진창 일그러지더니 다음 순간.


화악-!


“여기서 무엇하고 계십니까.”


족히 수백보는 떨어진 자리. 청성파 경내가 끝나는 지점이었다. 나무들 사이로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한 노인이 정좌해 앉아 있었다.


기묘한 일이었다.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 정지해 있었는데, 백연조차 다가서는 순간에서야 느꼈다. 황력의 깡마른 몸에서 터럭 하나의 진기도 흘러나오지 않는 까닭에.


“함께 가서 식사라도......”


그리 말하던 백연은 문득 알아차렸다.


항시 일정하던 검객의 호흡이 더 이상 바람을 타고 섞여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


백연이 황력에게 다가갔다. 그의 옆에 바로 서자 눈을 뜨고 정좌해 앉은 황력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은 전에 없이 후련하고, 또 성취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무언가 커다란 것을 얻어내기라도 한 양.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노인의 앞, 주름진 손아귀가 한평생 쥐었을 낡은 검이 바닥에 꽂혀 있었다. 그 앞으로 어지러운 검흔을 바위틈 위로 하얗게 남긴채였다.


“......검(劍).”


소년은 보자마자 읽어내었고, 이해해냈다.


내공 한점 실리지 않은 검흔이었다. 실어낼 수 없었던 것이리라. 그럼에도 하얗게 긁힌 자국으로만 남은 검로는 선명하게 뇌리에 틀어박힌다.


독문무공일까. 들은적 없는 검이다. 그럼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고민의 흔적이 가득했다. 그의 기세와 검끝이 향하고자 하는 바. 찰나에도 수백, 수천에 달하는 가능성과 방향이 소년의 머릿속에서 뻗어나간다.


이 검이 초월에 다다르면 어떠한 모습일지.


무극에 이르면 어떠한 검으로 탈바꿈할지.


그러나 소년은 그 어느것도 끝까지 생각을 마무리 짓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엮이고 몸을 부플리는 검로를 전부 길다란 호흡에 엮어 내뱉었을 뿐.


그리고 다음 순간, 백연의 손가락은 여상히 황력의 검파를 감아쥐고 있었다.


직후였다.


카각.


한번의 손짓이 바위틈 위를 스쳤다. 찰나지간의 검격이 노인이 남긴 검흔을 정확히 똑같은 형태로 파고들어 그 흔적을 더욱 깊이 새겼다.


분명히 바꿀 수 있었다. 완성에 이르러 더 완벽한 검법이 되도록 조금씩만 수정하면 될 일이었다. 허나 백연은 그러하지 않았다.


다만, 황력이 내공 한점 없이 남긴 검흔이 세월의 풍파에 씻겨 나가지 않도록 선명하게 덧칠했을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년의 손이 멈췄고, 황력의 검은 처음과 같은 자리에 꽂혀 조용히 청성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없이 선명한 검흔을 앞에 둔 채로였다.


그제서야 백연은 황력이 보고 있던 산맥의 풍광을 함께 응시하며 나직히 중얼거렸다.


“만족스러우셨습니까? 일평생 걸은 검도(劍道)는.”


뒤이어 허허 웃는 것 같은 바람이 귓가를 스쳤다.


충분한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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