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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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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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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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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4.2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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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푸른 별(5)

DUMMY

※※※



부월검(斧鉞劍).


처음 들었을 적부터 독특한 별호라 생각했다. 이제는 왜 그러한지 바로 이해할 수 있을 듯 했다.


“으하하핫!”


부월검 임지승. 광소를 터트리며 검을 휘두른다. 한순간 검신을 타고 막대한 진기가 휘몰아치며 청성파 청풍강기(淸風罡氣)를 형성. 푸르스름한 검풍이 눈앞을 짓이기듯 내리찍는다.


콰아아아앙!


그 여파로 눈을 붉게 물들이고 달려들던 수라궁도 서넛이 단번에 소멸. 잘게 갈린 육편이 사방으로 튀어오른다. 핏물속을 따라 전진하는 임지승의 기세가 수라궁도들보다 더 짐승같아 보이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그의 푸른 도포 자락에는 핏물 한점 묻지 않았다.


치익-


옷 위를 따라 연신 푸르스름하게 일어나는 호신강기가 짙었다. 튀어오르는 핏물이 호신강기에 닿자마자 사라지곤 했는데, 어떤 원리인지 알기 어려웠다.


하지만 한가지는 확실했다. 임지승이 상당한 강자라는 사실.


“괜찮으신 겁니까? 며칠이나 이렇게......”

“걱정 말게. 그간 산문을 기점으로 버티고 있었네만, 한밤에 간간히 튀어나와 진격을 저지하고 돌아가기도 했었으니.”


그리 말하며 일순 흐려진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먼저 간 제자놈들이 안타까울 따름이야.”

“......”

“자네에게는 무한한 감사를 표할 뿐이네. 어찌 알고 왔나?”


퍼억.


검을 휘둘러 또다른 수라궁도의 머리통을 짓이기며 임지승이 물었다.


“그렇잖아도 서주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들었네만.”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드리지요. 우선 무림맹이 탄생했고, 무인들이 중원 전체를 지원하기 위해 제각각 흩어졌습니다.”


쩌정-


벼락이 깃든 검을 휘둘러 눈앞을 베어낸 백연이 말했다.


“별동대를 보내 서주를 지원하는 중입니다. 저도 그쪽에 합류하려 했는데, 오다가 청성산에 관한 소식을 들었지요.”

“......자네와 저 아해 둘이서 말인가? 나머지 사람들은 낭인들로 보이는데.”

“예.”


백연이 흐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각골난망의 은을 입었군. 자네가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다 죽었을 걸세.”

“그래도 잘 버티고 있으시던 것 아닙니까?”

“슬슬 힘에 부치는 시점이었네. 사천에서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많은 탓에.”


그제서야 주변에서 싸우는 이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임지승과 함께 이곳에 떨어진 청성파 무인들. 수십에 달하는 검객들은 대부분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껏해야 이대제자에 이를까.


임지승과 비슷한 배분이나 더 높은 이들은 거의 없었다. 제각기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 검기 하나 뽑아내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표국에서 온 무인들과 함께 섞여 진형을 구축하며 싸우고 있었는데, 검력이 그들과 크게 차이나는 수준도 아니었다.


“조심하시오!”


카각!


황력의 검이 번뜩이며 한 청성파 무인의 등을 찌르려던 수라궁도를 막아서고, 뒤이어 취풍의 검풍이 세갈래로 갈라지며 그 목을 벤다.


“가, 감사합니다!”

“......어린 도장이시구려. 좀 더 안쪽으로 물러나시오.”


일련의 과정들이 재빨랐다. 한켠에서는 조금 더 나이든 도인과 합을 맞추며 적을 격살하고 있는 장중의 모습도 엿보였다.


“이 늙은이가 왼편이외다.”

“그리합지요.”


삿갓을 내리누르며 흐릿하게 전진. 알 수 없는 검법을 길쭉하게 내지르는 순간, 눈앞의 수라궁도의 몸이 난자당하며 시뻘건 혈운(血雲)을 뿜어낸다. 뒤이어 그 사이를 맑은 청풍검법의 검기가 갈라내고.


푸확!


미친듯이 날뛰던 수라궁도의 몸이 바닥을 나뒹굴며 흙을 질척하게 적셔냈다.


그를 보며 백연이 중얼거렸다.


“이곳의 사냥개는 저게 전부였습니까?”


흑표자라 불리던 사내. 아마 수라궁의 세번째 사냥개인 듯 보였다. 일전 그가 사살한 금안나찰과, 종남파의 손에 죽은 광뢰야차를 포함해 셋.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닐 일이었다. 죽어버린 이들을 대신해 새로운 이가 자리를 차지했겠지.


“그러하네. 내 며칠동안 저놈과 수백번은 검을 겨룬듯 하군. 몇차례 죽을 뻔 한 적도 많았는데, 자네 덕분에 드디어 골통을 쪼개버리니 속이 다 시원해.”

“다른 사냥개는......”

“사천에서 다른 둘을 보았네. 아마 지금은 서주에 있겠지. 다만.”


파아아앙!


검을 한차례 크게 휘두르며 공간을 확보한 임지승이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이곳의 가장 큰 문제는 사냥개가 아닐세.”

“들었습니다. 부궁주 본인이 이곳에 있다고. 헌데 지금 어디에......?”


부궁주 남평(南坪).


궁주 아래 홀로 오롯한 괴물이라 들었다. 그 무위를 짐작해보았을 때, 이 전장에서 가장 큰 변수가 될 인물이다. 어디 있는지 알아야 했다.


“부궁주는 지금쯤 저 위에 있을걸세.”


스윽.


임지승의 손이 산의 위편을 가리켰다. 길다랗게 이어진 산맥의 능선 위, 청성파의 도관이 자리잡은 방향.


“본래도 전장에 잘 나오지 않던 놈이네. 부하들만 보내어 끊임없는 소모전을 강요했는데, 자기보신이 철저한 놈이더군.”

“경계하는 것이라도 있었습니까?”

“사천에서 살아남으신 분이 있으시지. 청양진인(靑陽眞人)께서 계시니 놈도 쉬이 목을 들이밀 수는 없었네.”

“그럼 지금은......?”

“아래가 크게 혼란하게 되었으니 둘의 일대일 구도겠군. 청양진인께서 위에서 버티고 계신한, 놈은 이곳으로 오지 못하네.”


임지승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이었다.


“......!”


한순간 공기가 가라앉았다. 나무들 사이 가려진 시야 너머. 청성산의 봉우리를 따라 맑은 기파가 한차례 물결처럼 퍼져나왔다.


동시에 봉우리 전체를 따라 푸른 구름과 불그스르함 노을이 돌연 현현. 봉우리 주변을 따라 한차례 커다란 출렁임이 일었다.


“......시작되었군.”


백연이 입술을 베어물었다. 소년의 시선이 빠르게 전장을 훑었다.


“청양진인께서 승리하실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알 수 없네.”


망설임이 섞여있는 답변. 거기에서 백연은 깨달았다.


‘질 가능성이 높다.’


청양진인의 무위가 어느 정도일지 알기 어려웠다. 허나 방금전 펼쳐진 청운적하검(靑雲赤霞劍)의 여파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것은 있었다. 구파의 장로급에 다다른 인물이긴 하나, 그렇다고 부궁주를 압도할 수 있는 무위는 아닐 것이다.


아니, 외려 밀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럼에도 무시할 수는 없는 수준의 차이이기에 나찰극마는 안전한 싸움을 위해 기회를 노리고 있었겠지.


그런 이가 갑자기 청양진인을 상대로 일대일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럴 이유는 하나였다.


‘진인을 죽이고 밑으로 합류해 우리를 쓸어버리기 위함인가.’


그말인즉슨, 결론은 간단했다.


‘지금부터 시간 싸움이다.’


어떻게든 이 자리의 수라궁도를 뚫어내고 올라가, 나찰극마와의 싸움에 힘을 보태야 한다. 그것을 인지한 백연이 임지승을 쳐다보았다.


“이곳을 뚫어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쉽지 않네.”


그 말대로였다. 지금 백연과 임지승이 백여명에 달하는 수라궁도의 사이에서 날뛰며 분투하고는 있었으나, 다른 이들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도 위험했다.


“흐읍!”


기합성과 함께 수라궁도의 몸에 검을 꽂아넣는 무인. 깊숙하게 박혀 들어간 검이 궁도의 복부를 찢어놓으며 치명상을 입혔다. 본래라면 단번에 쓰러졌어야 할 일격이었다.


그러나.


“안죽었네. 조심......!”

“끄아아악!”


장기가 흘러나오는 와중에도 눈을 시뻘겋게 물들인 수라궁도의 손이 흉포한 장법을 형성. 그에게 검을 꽂아넣은 무인의 팔을 쥐고는 그대로 뽑아버린다. 직후 재빠르게 옆에 착지한 예화가 도끼를 휘둘러 목을 날려버렸으나 이미 피해는 가해진 상태였다.


“으으.......”

“정신 차려!”


공력이 깃든 목소리로 기합성을 넣으며 도끼를 휘두르는 예화. 그녀의 곁을 따라 모여든 표국의 무인들이 이를 악물고 검을 펼치며 수라궁도들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왠만하면 목을 노리시오!”


황력과 장중도 대열에 붙어 제각기 검을 펼친다. 늙은 검객들의 검이 검진(劍陣)과 유사한 영역을 형성하며 시간을 벌어낸다.


그 옆을 따라 앳된 청성파의 검객들이 푸르스름한 진기를 뽑아올리며 검을 휘두른다.


본래대로였다면 능히 수라궁도를 상대하며 버틸 수 있는 이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달랐다.


‘짐승들이다. 저 붉은 눈.’


흑표자의 괴성 이후 전황이 뒤집혔다. 청성파 무인들의 합류로 잠깐 시간을 벌었으나 그것 뿐. 목숨을 아끼지 않고 덤벼드는 수라궁도들에 의한 피해가 점차 생기기 시작한 것이었다.


‘수라궁의 의미라고 했나.’


무슨 술수인지 몰라도 궁도들이 모두 익히고 있는 절기인 모양. 백연은 생각했다. 저들의 행태가 꼭 강제로 주화입마를 일으킨 것만 같다고.


“흐읍!”


키잉-


그 사이 곁에서 일어난 시퍼런 강기가 하나의 거대한 검로를 형성했다. 얼굴이 창백해질 정도로 힘을 끌어올린 임지승이 그대로 검을 휘두르는 순간.


콰아아앙!


굉음과 함께 앞의 궁도들이 잘게 육편으로 찢어져 흩날렸다.


“일단 함께 움직이지!”


두 무인이 그대로 땅을 박찼다. 점차 몰려드는 수라궁도가 많은 까닭이었다. 한순간에 도약한 두 검객이 진을 치고 있는 무인들의 사이에 합류했다.


“괜찮아?”


그 속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던 소홍이 물었다. 백연은 살풋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를 매만지면서였다.


“전황을 뒤집어야 해.”

“......죽이기 어려워.”


가장 큰 문제였다. 쉼없이 몰려드는 수백명의 무인들이 전부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달려든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몸을 검에 들이대며 덤벼드는 이들.


“이놈이......?”


노지심이 내지른 선장이 한 수라궁도의 몸에 틀어박힌다. 그러나 비명도 지르지 않고 이를 드러내며 오히려 그것을 붙잡는다. 스스로의 몸을 방패삼아 잠시간 노지심의 움직임을 봉인한 것이었다.


직후 그의 뒤에서 수라궁도가 권격 기파를 휘감고 크게 도약. 노지심이 눈을 부릅뜨는 순간-


쩌저저정!


시린 백광이 그의 시야를 갈랐다. 한순간에 공간을 격하듯 수 장이 넘는 거리를 뛰어넘은 백연이 착지하며 검을 그어냈다. 단번에 목이 잘려나간 수라궁도의 시체가 뒤따라 바닥에 나뒹굴었다.


“젠장, 고맙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을새도 없이 백연은 다시 보법을 내딛고 있었다. 직후 수십보가 넘는 거리를 따라 한줄기 백광이 새겨졌고, 어느새 소년의 신형은 황력의 옆에 서서 검을 베어내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일검에 황력의 목으로 검을 찔러넣던 수라궁도 서넛이 그대로 갈라진다. 그 여파를 채 갈무리하지도 않은채로 백연은 재차 걸음을 내딛었다.


이편에서 검을 지르고 있던 취풍부터, 저편에서 도끼를 쥐고 날뛰는 예화의 옆까지. 벼락같은 검격이 위험할때마다 번뜩이며 허공을 갈랐다.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움직임이었다. 허나 그럼에도 부족했다.


“으윽?”


예화의 곁에서 검을 내지르며 그녀를 구해주던 백연의 귓가에 일순 앳된 목소리가 틀어박혔다. 삽시간에 길게 돌아간 소년의 시야에 수라궁도들의 일격에 나뒹구는 청성파의 어린 검객이 보였다.


동시에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수라궁도의 거검(巨劍)도.


‘늦었......!’


그 순간, 수라궁도의 양쪽에서 두 명의 인영이 재빠르게 움직여 앞을 틀어막았고.


“커헉......!”


어깨가 반으로 갈라진 노검객이 핏물을 뱉어내었다. 동시에 옆에서 달려든 황력의 검이 크게 휘어지며 수라궁도의 목을 날려버렸다.


그러나 이미 피해는 컸다.


“쿨럭. 황가놈아. 검이 왜 이리 느리다냐.”

“......미안하오.”


흐릿한 목소리로 킬킬 웃은 노검객이 이윽고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바로 알 수 있었다. 황력의 일행중 하나가 죽었다는 사실을.


그러나 그것을 오래 살필새도 없이 공격이 이어졌다.


“흐읍!”


기합성과 함께 검을 휘두르다 어깻죽지에 길쭉한 상처가 남는 검객들. 청성파의 무인과 함께 검을 휘두르다 팔다리의 살이 큼직하게 패이는 이들.


파도처럼 몰아치는 수라궁도들의 기세가 점점 주변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언뜻언뜻 소홍의 적화검류가 크게 몰아치며 간합을 벌었으나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괴물들.”


사형이 뱉는 목소리가 귀에 틀어박힌다. 적화검류의 검로에 온몸이 난자당하면서도 전진하는 수라궁도들 때문이었다. 적화검류는 빠르고 예리한 검이나, 모든 검로로 일격에 목을 날리는 그런 검법은 아니었다.


공간을 장악하고 수많은 검로로써 상대를 베어내는 검법.


반드시 일격에 목을 날려야 하는 지금의 상황에 효용성이 낮아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밀릴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인지한 백연이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눈매에 손을 가져다 대면서였다.


스윽.


소년의 손이 느릿하게 눈가를 스쳤다. 직후였다.


잠시 내려앉았던 눈꺼풀이 들어올려지는 순간, 그 아래에는 투명하게 물든 자색 눈동자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 안에서 휘몰아치는 진기가 전보다 수배에 달하는 양이었다.


키이잉-


시야가 이지러진다. 한순간에 감각이 압축을 반복하며 일점으로 수축한다. 휘몰아치는 자색 안광을 눈물처럼 뚝뚝 흘리며 백연이 여휘를 납검했다.


“음? 자네. 진기가 너무 과밀한데 그거 괜찮은건가?”


곁에서 검을 휘두르던 임지승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지만, 백연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한손에 쥔 천마의 검을 꽉 쥐어냈을 뿐.


“모두.”


우웅-!


맑은 소년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일어났다. 단숨에 전장의 모두에 닿는 음성이었다.


“제 뒤로 물러나십시오.”


그의 말에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앞에서 검을 휘두르며 진형을 사수하고 있던 이들조차 그것을 듣자마자 한차례 크게 검을 내치고 뒤로 훌쩍 몸을 날렸다. 삽시간에 백연을 앞에 두고 다시금 구축되는 진형.


그와 함께 몰아치는 수라궁도의 파도가 일제히 백연을 향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붉은 안광을 빛내며 돌진하는 이들의 기세가 흉포했다.


그러나 그들을 앞에 두고서도 백연은 천천히 숨을 들이쉴 뿐이었다. 옆에 서 있는 임지승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을 만큼.


“괜찮나? 내 선천진기를 뽑아서라도 한번은 막아낼 수......”


스윽.


소년의 손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시린 백색 검신이 나무 사이로 흩어져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났다.


그 아래에서 백연은 생각했다.


‘무연.’


그때 느꼈던 감각을 찰나라도 재현할 수 있다면.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 그는 그 경지와 무공을 온몸으로 느꼈었다. 아직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의 것으로 만들지 못했을 뿐.


‘검신을 부드럽게 쥐고.’


자령안이 거칠게 일어난다. 한계까지 일어난 감각이 시야 앞에 있는 모든 정보를 흡수하고 뇌리에 때려박는다. 그로 인해 확장된 인지가 아득하게 쪼개지며 찰나를 수천으로 바꿔낸다.


그렇게 수없이 쪼개진 찰나. 백연의 검이 비스듬히 허공을 갈랐고.


쩌억.


옅은 소음이 귓가를 스쳤다.


직후였다.


“......이 무슨.”


기괴할 정도의 적막 속에서 임지승의 목소리가 내리깔렸다. 그들에게 달려들던 수백명의 수라궁도가 모조리 제자리에 멈춰선 상황이었다.


새하얀 검은 시간을 건너뛴 듯이 상단을 격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치켜든 소년의 입가를 따라서는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번은 못쓰겠군요.”


백연이 중얼거렸고.


쿠구구궁-


수백명에 달하는 수라궁도들의 목이, 일제히 떨어져 내렸다.


“쿨럭.”


직후 백연이 검을 짚으며 자리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타버릴 듯 달아오른 머리가 아파온다.


‘아직, 안되는건가.’


구결과 무공에 대한 이해를 버리고 그저 따라한 것이었다. 그때 일기장 속에서 무연이 내뻗었던 일검. 그 근육의 움직임과 진기의 흐름, 형태, 검을 쥐는 방식까지.


세세한 기억과 감각을 바탕으로 한없이 비슷하게 재현해냈다. 그 위력은 백분지 일이나 될까.


하지만 그럼에도 눈앞의 수라궁도들을 일거에 제압할 수 있는 위력이었다. 허나 동시에 소년은 깨달았다. 다시 한번 이해 없이 천마의 무공을 펼치면 죽을지도 모른다고.


지금 이 순간도 온몸의 근맥이 뒤틀린 듯 느껴졌다. 혈도가 불타는 듯 하고, 머리는 뜨겁게 달아올라 제대로 된 사고가 어려웠다.


그러나 원하는 목적은 이루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린 백연이 입을 열었다.


“지금 즉시 올라가야 합니다. 부궁주를 여기서 죽이고 가야......”


그때였다.


“호오.”


날카로운 음성이 귓가를 파고들었다. 한없이 흥미롭다는 감정이 담긴 목소리였다.


“그런 것을 숨기고 있었나. 모르고 당했으면 위험했겠어. 헌데 상태를 보아하니 두 번은 못쓸것 같고......”


끼익.


불현듯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나뒹구는 수라궁도들의 시체 사이에 가볍게 착지한 한 인영.


호리호리한 신형과 늑대처럼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길쭉한 팔다리가 긴 간합을 형성하고 있었고, 어깨에는 기형적으로 생긴 쌍극(雙戟)을 비스듬히 걸치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에는 살육을 즐기는 이 특유의 흉포함과 잔인함이 묻어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임에도, 누군지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곁에서 외치는 임지승의 분노한 목소리가 확신을 더해준다.


“부궁주, 네놈이......! 스승님을 어찌 했지?”

“스승? 아, 그 짜증나는 늙은이가 네 스승이었나.”


늑대처럼 이빨을 드러낸 나찰극마(羅刹戟魔)가 손을 휙 휘저었다.


툭.


임지승의 앞에 둥그런 머리통이 떨어졌다. 희끗한 수염을 지닌 노인의 머리였다.


“퍽 애먹었다. 내 옆구리를 잘게 다져놓더군. 꽤 강하긴 했는데......”


저벅.


나찰극마가 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직후였다.


콰득.


“음......?”


의문섞인 노지심의 목소리와 함께, 그의 거대한 머리가 통째로 뽑혀나갔다. 머리 잃은 노지심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나찰극마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제 너희를 지켜줄 그 늙은이는 죽어서 없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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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흔적(3) +6 24.04.02 2,106 65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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