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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61 님의 서재입니다.

타에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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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c61
작품등록일 :
2019.01.01 23:41
최근연재일 :
2019.04.16 21:00
연재수 :
7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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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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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글자수 :
403,780

작성
19.03.08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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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57화

DUMMY

북극엔 칼바람이 불었다. 아무것도 없는 얼음 벌판을 지나, 구름을 뚫고 치솟은 설산 꼭대기까지 단숨에 올라갔다. 매직슈트가 영대의 움직임에 완전히 적응해 이제 자기 몸처럼 자연스러웠다.


“와-. 경치 개쩐다. 카메라 가져올 걸.”


카메라 달린 태블릿 생각은 끝내 못한 채 만년설을 두 발로 꾹꾹 밟으며 돌아다녀보았다. 하늘을 날 수 있는데도 이런 곳에 일부러 찾아오지 않았다니 왠지 손해 본 기분이었다. 하늘요새가 있는 프릴 산맥도 멋지지만 놀러 다닐 생각은 못했었다.


‘근데 여기도 놀러온거 아니잖아. 빨리 가야겠다.’


막 떠나려는데 낯선 발소리가 났다. 너무 조용한 곳이라 사방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칼에 손을 대고 잠시 기다리자 발소리의 주인이 올라왔다.


“증사애 이도내원 함배. 가사애 니원가?”


햇볕에 익은 것처럼 불그스름한 피부와 노란 눈빛을 가진 내원인이었다. 영대는 뒤늦게 태블릿을 꺼내 번역기를 켰다. 노인은 영대의 등장을 알고 일부러 찾아왔다고 말하고선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왠지 좋은 예감이 들어 따라나섰다.


노인은 양인이었다. 생물학적으로는 해유리와 같은 종족이지만 이들은 자신을 양인이라 칭했다. 살아온 환경이 달라 외모도, 가치관도 선인과는 많이 달랐다.


노인이 산을 풀쩍풀쩍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보통이 아니었다. 아래쪽 양지바른 곳에 조그만 평지가 있었고 나무로 만든 작은 오두막집이 보였다. 눈에 짓눌려 약간 찌그러진 모양새였다. 노인의 손짓에 따라 얼른 들어갔다.


“안녀······.”


먼저 와 있는 다른 손님을 얼핏 본 영대는 별 생각 없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려다 뚝 멈췄다.


“반가워요.”


노인이 찬장으로 가는 동안, 영대는 자기 몸뚱이를 그 손님 맞은편에 느릿느릿 앉혔다. 어느 때는 몹시도 보고팠던 사람이었건만 막상 마주하니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 왜······.”

“왜 여기 있냐고요?”

“네! 왜 여기 계세요??”


행운의 여신은 웬일인지 움직임이 멈춰버린 노인 대신 찻잔을 꺼내와 영대 앞에 놓았다. 그리곤 난로에 끓고 있던 주전자를 들어 차를 가득 따라주었다. 진한 복숭아 냄새가 콧속을 헤집었다.


“당연히 영대를 만나러 왔죠. 저 사람은 도원 신령이에요. 여기서 선인이 쳐들어오지 않는지 감시하고 있답니다.”

“신령이요? 신이에요?”

“아뇨. 그렇지만 무공이 대단해요.”


행운의 여신이 손으로 찻잔을 가리켰다. 마시라는 뜻이었다. 영대는 복숭아차를 한 모금, 두 모금 마셨다. 달달하니 맛있었다. 복숭아 건더기가 씹히는 식감도 재밌었다.


“오, 존맛. 직접 만드셨어요?”

“그래요. 난 요리를 좋아해요. 그 복숭아차는 리프레인한테도 먹여줬었죠. 잘 먹더라고요.”


영대는 복숭아차를 후루룩 마셔버린 다음 거의 까먹고 있었던 여신의 얼굴을 확실히 기억하려고 시선을 고정했다. 어른스럽게 예쁘기도 하고, 소녀처럼 귀엽기도 하여 신기한 인상이었다. 이제 보니 눈동자가 고양이마냥 세로로 갈라진 모양새였다.


‘인간 아닌가보네······.’


“근데요, 머리 염색하셨어요?”


하등 쓸데없는 질문을 받은 행운의 여신은 바깥쪽은 까맣고 안쪽은 노란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찰랑거렸다.


“샴푸랑 린스도 했어요. 머리카락은 소중하니까요.”

“방금 농담하신 거예요?”

“진담이에요. 타에라드에선 고생이 많았어요. 날 아쉬워했던 순간들도 나름대로 잘 넘겨줬군요.”


마리아 생각이 났다. 영대는 연둣빛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지금 엄청 화나고 그런 건 아닌데요, 마리아가······그렇게 죽었어야 했어요?”

“마리아는 해유리가 죽였어요.”

“아니, 다 알고 계셨으면 마리아는 안 죽게 도와주셨어도 됐잖아요.”

“왜 그래야 하죠?”

“예? 뭔······마리아는 좋은 사람이었다고요! 얼마나 좋은 사람이었는데······.”


당황스러운 와중에 영대는 어떻게든 여신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애썼다. 소중하게 품어왔던 무언가가 방금 깨져버린 것처럼 참담한 기분이 저 밑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표정이 안 좋군요.”

“어떻게 좋을 수가 있어요? 일부러 죽게 놔두셨다는 말이잖아요.”

“그렇게 내 책임으로 돌리고 싶은가요?”

“그게 아니고요, 여신님은 제 편 아니에요? 착한 사람들 편 아니에요?”


대답을 듣기가 무서웠다. 행운의 여신은 아무렇지도 않게 찻잔을 새로 채워주었다.


“내가 한쪽을 편들기 시작하면 어떻게 될까요?”

“평화가 찾아오겠죠?”

“당신들 스스로 그걸 유지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계속 나에게 의지하게 될까요?”

“······.”


머리가 띵해졌다. 자꾸 도움만 받으면 어떻게 될지 눈에 선했다. 영대는 기억의 전당을 떠올렸다. 평화를 떠받치는 반석이 된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그러한 삶에는 숭고한 가치가 있었다.


“미안해요. 너무 풀죽게 했네요. 하지만 이해했죠?”

“저희가 알아서 해야 된다는 거네요. 그래야 저희들끼리 계속 유지할 수 있으니까요.”

“맞아요.”


그 말을 하면서 영대는 왠지 모르게 예전에 비슷한 얘길 들었던 기분이 났다. 그리고 행운의 여신이 개입하지 않은 이유를 납득했다. 안타까운 마음은 여전했지만 신에게 의존해선 안 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근데 해유리한테는 뭐라고 하셨어요?”

“전쟁에서 질 거라고 했어요.”

“그렇게 하면 해유리가 하늘요새 포기할 거 어떻게 아셨어요?”

“몰랐어요. 그렇지만 당신들을 몰살시키지는 말았으면 싶었어요. 그래서 패배라는 결과를 받아들이도록 암시를 줬어요.”

“해유리한테 저흴 다 죽일 능력이 있었어요?”

“그럼요. 하늘요새를 자폭시켰다면 타에라드 전역에 화산폭발이 일어났을 거예요.”

“와-. 감사합니다.”


행운의 여신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깊이 관여하게 되면 내가 손을 놓을 때 세상도 망가질 거예요. 그래도 살짝 밀어줘서 선악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건 괜찮을지 몰라요. 악이 득세하게 놔둘 수도 없잖아요.”

“저랑 해유리 얘기에요?”

“빤하지 않은가요?”

“그냥 확실하게 말씀해 주세요.”

“맞아요. 영대랑 해유리 얘기에요.”


용사의 마음에 새로운 용기가 차올랐다. 확실히 여신은 선이 실현되길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소환된 진짜 용사였다. 처음부터 알았다면 현실감도 못 느끼고, 너무 부담됐을 것 같았다. 지금은 자신감이 차올랐다.


“만약에 제가 죽으면 어떻게 돼요?”

“죽으면 끝이랍니다.”

“안 살려주실 거예요?”

“영대가 죽을 때마다 되살려서 용사를 시키면 좋을까요?”


얼마 고민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 번쯤은 괜찮겠지만 반복하다보면 언젠가 지치겠다 싶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영대의 죽음을 하찮게 대할 것 같았다.


“안 좋을 것 같아요. 한 번만 살아야 진짜 최선을 다해서 살 수 있겠죠? 그리고 그렇게 살아간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이 본받을 거고요.”

“정말 많이 성장했군요. 상을 줄게요.”


행운의 여신이 소매에서 뚝배기를 하나 꺼냈다. 펄펄 끓는 김치찌개가 가득 담겨있었다. 영대의 눈이 번뜩 뜨였다.


“와! 김치찌개! 겁나맛있겠다!!”


하얀 쌀밥도 함께 제공되었다. 영대는 맛깔스런 냄새를 풍기는 김치찌개를 한 숟가락 푹 떠보았다. 껍질과 비계가 붙은 두툼한 돼지고기 조각이 고운 자태를 뽐냈다. 입에 넣고선 행복에 겨워 신음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이었다.


‘완전 엄마손맛이네 눈물날거같다!’


여신은 됐다고 할 때까지 그릇을 계속 채워주었다. 영대가 숟가락을 내려놓자 냉수 한 잔을 놓아주었다.


“잘 먹었습니다. 근데 저를 어떻게 소환하셨어요? 과거에서 데려오신 거 맞죠?”

“지금 밝힐 내용은 아니에요.”

“그럼 나중에요?”

“네. 나중에요. 조급해하지 말아요. 이제 통역 능력을 줄게요.”


영대의 머릿속에 통역 능력이 각인되었다. 내원에서 원어민 수준으로 읽고 쓰고 말할 수 있게 됐다. 대략적인 배경지식도 들어왔다. 처음 소환됐을 때와 같았다.


“이게 타임스톱보다 더 쩌는 것 같은데요.”

“그런가요? 모험을 계속하세요. 다시 만날 날이 올 거예요. 난 이만 갈게요.”


행운의 여신은 눈 한번 깜박하자 그 자리에 없었다. 거짓말 같았다.


도원 신령이라 불린 노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찻잔을 어디다 놨는지 원. 음? 처자는 또 어디로 갔는가?”

“가셨어요.”

“가셨다? 역시 아는 사이였구만. 참 신기한 인연이야. 바람처럼 나타났다 바람처럼 사라지다니.”


노인은 자리에 주저앉아 자기 잔에 복숭아차를 따라 마셨다.


“흐흠. 이 차를 마시니 수명이 늘어나는 기분이 드는구만. 좋구나-.”


‘맛있다는 소리를 뭐 저렇게 하냐. 어쨌든 통역 존나 잘되네. 개꿀이고 이름이나 까자.’


“전 용사 최영대입니다.”

“젊은이가 용사라고?”

“대단한 뜻은 아니고요, 착한 사람들 도와주고 다녀요.”

“좋군. 좋아. 거짓 한 점 없이 정직한 눈이야.”

“거짓말 아니니까 당연히 거짓 한 점 없죠.”

“헐헐헐! 난 도원 신령일세. 보다시피 이빨 빠진 늙은이지. 그저 오래된 흉을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고 있다네. 선인이라고 들어봤는가?”

“네. 마지막 선인이 3년 전에 죽었어요.”

“뭣? 그게 대체 어찌된 영문인가?”


영대는 해유리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도원 신령은 흐트러짐 없이 단어 하나하나 경청하고 나서 박수를 쳤다.


“대단한 용사가 맞구만! 이런 날이 올 줄은······.”


울먹이는 노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영대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도원 신령은 금방 헛기침을 하고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내 평생 한이 오늘 풀렸어. 다 젊은이와 친구들 덕이야. 이제 세상을 떠나도 여한이 없지. 그 전에 젊은이가 하는 일에 도움을 줄 수가 있다면 꼭 그러고 싶구만. 내원엔 어쩐 일로 왔는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영대는 마틴의 전신 초상화를 보여주며 사정을 설명했다.


“그런 악랄한 놈이 있나! 내원이 원체 넓어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발 닿는 데까지 다녀보겠네. 날 찾을 걱정은 말게. 내가 자네, 최영대를 찾을 걸세. 자네의 기운은 잘 기억했으니 걱정 없지.”

“그냥 영대라고 하셔도 돼요. 갑자기 민폐 끼쳐서 죄송해요.”

“섭섭하게 그러지 말게! 나는 집이나 정리하고 내일쯤 떠나겠네. 영대는 지금 갈 텐가?”

“네.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어요.”

“천운을 빌어줌세! 허허허!”


영대는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허리에 힘을 바짝 넣어 기지개를 켰다. 큰 짐을 덜어내어 홀가분해진 느낌이었다. 가장 중요한 마틴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는데도 그랬다.


‘중요한 분기점 하나 지난거같다.’


친구들이 있는 거처는 꽤 멀었다. 서둘러 설산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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