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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사 사중정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무저항
작품등록일 :
2014.04.07 14:59
최근연재일 :
2014.07.24 14:30
연재수 :
35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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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40,507

작성
14.04.18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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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정중사 사중정 -2(5).

DUMMY

판령을 업은 판극의 몸이 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도약했다. 한번 내딛는 걸음에 1장의 거리를 손쉽게 뛰어넘었다.

바람 한 점 없는 지하통로인데도 머리칼이 뒤로 휘날렸다.

“오, 오빠. 갑자기 뭐야?”

갑자기 빨라진 속도에 판령이 목을 더 세게 끌어안았다.

‘됐어.’

실낱같지만 희망이 생겼다. 이 힘의 정체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훨씬 빨라졌다는 사실이다.

이제 판령이 무겁지도 않았다.

“걱정하지 말고 꽉 잡아. 여기서 빨리 나가자.”

“응.”

그러나 희망도 잠시, 한 번에 받아들인 기의 양은 속도를 지속하기엔 많이 모자랐다. 몇 걸음 떼기도 전에 고갈된 기 때문에 얼마 못 가 다시 녹초가 됐다.

다시 기를 받아들여 속도를 내 보았지만 느끼고 받아들이는 더딘 과정에 비해 소모는 너무 빨랐다.

타닥. 타닥.

지하통로에는 판극의 발소리만이 울렸다. 절망과도 같은 어두운 상황에서도 판극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여기만 빠져나간다면.’

일단 하남의 외가를 찾아갈 것이다. 반겨줄지 의문이지만 판극 남매가 의지할 데라고 거기밖에 없다.

외조부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혼인을 반대했었다. 어머니는 타고난 미모 덕에 유명 세가에서 혼담이 들어왔지만 모두 뿌리치고 별 볼 일 없는 젊은 사업가를 선택했다. 그에 대노한 외조부는 연을 끊었고 판극은 태어나서 단 한번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심지어 작년에 어머니가 병으로 죽었을 때도.

유일한 연결고리라면 작년에 받은 어머니의 유품, 은을 녹여 만든 목걸이뿐이었다. 아마 이것이라면 자신을 알아볼 테고 내치지는 않으리라.

“꺅.”

포근한 상상은 판령의 째지는 비명에 산산이 깨졌다.

판극은 판령을 업고 있던 팔이 가벼워진 걸 눈치챘지만, 차마 확인할 자신이 없어 고개도 돌리지 않고 조심히 물었다.

“왜, 왜 그래?”

대답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들렸다.

“어딜 그리 급히 가느냐.”

판극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에 몸이 반쯤 잠긴 곳에서 판령을 품에 안은 남자가 서 있었다. 다행히 판령을 기절했는지 고르게 몸을 들썩이는 게 보였다.

남자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판극과 판령을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이제 너희 둘만 남았구나.”

“누구냐! 숙부님은... 설마?”

“혼자서 통로를 막고 있던 자가 숙부였니? 그자는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고 하더구나.”

정체불명의 남자, 허윤은 농담하듯 가볍게 말했다.

그 태도가 판극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이익, 개자식아!”

푸슛.

판극은 고사리 같은 손을 굳게 쥐고 휘둘렀다.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라 골목싸움 한 번 해본 적 없는 귀한 몸이다. 화를 못 참고 뻗은 주먹엔 지나치게 힘이 실렸고 허점투성이였다.

판극의 어설픈 주먹은 허윤의 한참 앞에서 가로막혔다.

검지손가락 하나로 판극을 막은 허윤이 빈정거렸다.

“이게 전부더냐? 무공을 배운 것 같던데 한번 해 보거라.”

“그딴 거 몰라! 왜 그랬어? 왜!”

“네 숙부를 죽인 것 때문에 화가 났니? 그럴 필요 없단다.”

허윤의 목소리가 다정하게 변했다. 그러나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눈빛을 본다면 누구도 그리 생각지 못할 것이다.

주춤거리는 판극에게 한 걸음 다가간 허윤이 말을 이었다.

“난 말이다. 네 아비도 죽였고 식솔들도 죽였거든. 여기 네 동생도 죽일 것이며 마지막엔 너도 죽일 거란다. 곧 죽을 텐데 뭣 하러 화를 내느냐.”

“사, 살려주시오.”

“응?”

판극이 태도를 돌변했다. 그는 짧은 순간 동안 살 방법을 고민해봤으나 떠오르는 게 이것밖에 없었다.

무릎꿇고 비는 것. 판극은 반나절 만에 가문을 도륙하고 자신이 아는 가장 강한 사람인 석 표두를 순식간에 죽인 자에게서 동생을 빼앗아 도망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주먹을 너무 세게 쥐어 몸 전체가 떨렸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지만, 원수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은 그만큼 힘들었다. 만약 지켜야 할 동생만 없었다면 달게 죽었을 정도로.

“뭐든지 다 할겠습니다. 시키는대로 정말 다 하겠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하하하하하, 뒤로 꿍꿍이를 꾸미는 것까지 지 애비를 닮았구나. 너도 네 애비처럼 죽고 싶은 게냐?”

“나를 죽이시는 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령아는 너무 어리고 착한 아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니 령아라도 제발 살려주십시오.”

허윤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몇 해 전, 운남의 설산(雪山)에 불이 난 적이 있다. 불은 몇 달간 번져 산 전체를 태우고서야 겨우 불을 끌 수 있었지. 그렇지만 뭐하겠느냐. 숲은 다 타고 동물이 죽어 잿더미만 남았는데. 너는 그 불이 왜 났는지 알고 있니?”

“....”

“모르는 것 같으니 알려주마. 한 사냥꾼이 토끼를 구워먹고 채 끄지 못한 불씨가 되살아났다고 하더구나.”

“그래서 불씨를 제거한다는 말이겠군.”

“맞다. 티끌만 한 불씨가 천 길 설산을 태우는 세상이다. 나는 불씨를 남겨둔 사냥꾼처럼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허윤이 손가락을 판령의 사혈로 가져갔다.

저 손이 닿는 순간, 판령은 숨이 멎는다. 그것은 판극도 눈치껏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차앗!”

차마 더 두고 볼 수 없던 판극이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시간을 끌며 기를 흡수했기 때문에 힘은 충분했다. 거기에 어둠이 더해져 체감속도는 훨씬 빨라 보였다.

“크하하, 재밌는 놈이로구나. 역시 무공을 익히지 않앗단 것도 거짓이었어.”

텅.

사력을 다한 판극의 몸통 박치기는 허윤이 오른발을 축으로 살짝 비틀자 허무하게 끝났다. 오히려 제힘을 이기지 못한 아이가 땅에 곤두박칠치는 모습이 더 처량하게 보였다.

판극은 다시 달려들기 위해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어느새 코앞에 다가온 허윤에 의해 무릎을 꿇은 상태로 멈추고 말았다.

“이, 이 악적!”

“훗. 더 할 말은 없겠지? 잘 가라.”

허윤이 내기를 머금은 손을 판극의 몸통으로 천천히 가져갔다.

붉은빛이 도는 손이 다가올수록 판극은 끝을 직감했다. 분통하고 억울한데 한 편으로는 빨리 이 끔찍한 상황이 끝났으면 하는 비겁한 생각도 함께 들었다.

‘령아, 미안해.’

판극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배에서 느껴지는 흉수의 손길에 모든 희망을 버렸다.

“크크...크크크큭.”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실성한 듯한 흉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크하하하하. 천무지체. 정녕 천무지체란 말인가!”

광소를 터뜨린 허윤이 얼굴에 홍조까지 띠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기적이다. 전설로만 존재한 줄 알았던 천무지체를 직접 만나게 되다니. 어쩌면 이건 운명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천무지체다. 내공을 익힌 흔적이 없어. 그런데도 아까의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니. 전설이 과장된 게 아니었어. 이토록 대단한 근골과 혈도라니.....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다.“

허윤이 빠르게 판극의 온몸을 어루만져 본 결과,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빠르게 두뇌를 회전해 앞으로의 쓰임새까지 결정했다.

‘이 아이는 대업을 이루는 열쇠가 될 것이다.’

스르륵.

자신이 죽을 것이라 여기며 모든 걸 놓았던 판극은 기다려도 아무 일이 생기지 않자 서서히 눈을 떴다.

“왜...?”

“분명 시키는 건 모두 한다고 하였지?”

“동생은? 동생의 안전부터 보장해.”

“물론이다. 나는 너희 남매를 살려준 은인이지 않느냐?”

“뭐, 뭐라고?”

당장에라도 찢어 죽이고 싶은 원수가 눈앞에서 자신을 은인이라고 칭한다. 처음에는 귀를 의심했는데 저 당당한 표정을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그래도 가만히 있는 건 저자가 자신과 동생의 목숨을 쥐고 있기 때문이었다.

허윤이 나직이 대답했다.

“내가 너희 남매를 살려준 은인이라는 말이 틀렸느냐?”

“닥쳐! 내가 뭘 해야 하는지나 말해.”

“살려달라고 빌 땐 간도 쓸개도 빼 줄 것처럼 굴더니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는군. 뭐 그런 점도 도움이 되겠지.”

그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데도 더욱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간단해. 너는 차기 사도련의 주인이 되면 된다.”

사도련이 동네 상가라도 되는 것마냥 쉽게 얘기했지만, 그 이름의 무게는 판극도 잘 알고 있었다. 천하 무림의 양대 산맥이며 천하제일인이 주인으로 있는 곳이라는 사실도.

그러나 동생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깟 사도련이 문제인가. 지옥이라도 가져다줄 수 있다.

“그거면 돼?”

“그래. 사도련의 주인이 돼 한가지 물건만 내게 가져오면 네 동생을 돌려받을 수 있을 게다. 아주 공정한 거래야. 그렇지 않니?”

“그렇게 해주지. 단, 약속 꼭 지켜.”

“물론이다. 그것은 나에게도 아주 중요한 물건이니까. 네 동생처럼.”

“...잊지 마. 만약 당신 말을 안 지킨다면 나를 살려둔 걸 뼈저리게 후회할 거야.”

탁.

허윤이 가볍게 혈을 짚어 판극을 재웠다.

육체와 정신이 모두 고단했던지 옅게 코까지 골며 잠든 아이를 허윤은 신기한 듯 바라봤다.

‘내게 이 아이의 재능이 있었다면.’

잠깐 솟아났던 분노와 질투심을 애써 억눌렀다. 하늘이 선택한 이 아이를 자신이 얻었으니 결국 하늘도 자신의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는 내 불씨다. 그러나 고작 산 하나를 태우기에는 너무 아까운 불이로구나.”

그의 눈이 천장을 향했다.

“나는 이 천하를 태울 것이다. 온 천하를 말이다.”


작가의말

세월호 사고가 너무 안타깝네요. 부디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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