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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바달라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현대판타지

올드골드
작품등록일 :
2017.08.03 05:04
최근연재일 :
2021.02.13 21:26
연재수 :
47 회
조회수 :
26,943
추천수 :
1,172
글자수 :
195,944

작성
17.08.03 05:10
조회
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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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글자
9쪽

4.

DUMMY

4.


외화 더빙이라고 하면 기억이 나는지 모르겠다.

어린시절 TV에서 보여주던 외국 영화들은 전부 우리말로 더빙이 되어서 나왔다.

자막방송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주말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보던 TV 영화들은 대부분 더빙이라는 형태로 나오는 게 일반적이었다.

다큐멘터리나 외국 방송을 소개해주는 경우에도 작게 원어민의 목소리가 깔리고 그 위로 더빙된 목소리가 함께 덧씌워져 방송이 되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있으면 분명 저 사람이 외국인이고 저 사람이 하는 말이 외국어라는 걸 알고있으면서도 억양이나 말투, 분위기까지 묘사해 더빙된 목소리는 마치 내가 그 사람의 언어를 듣고 이해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만들었다.

외국인이 자국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는 시대의 사람들이 보기엔 조금 구식처럼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그때에는 그런 것들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요는 이거다.

내가 어떻게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쓰는 언어를 아무렇지 않게 듣고 이해할 수 있는가.

입의 모양과, 귀에 들리는 소리와, 머리에서 이해하는 언어를 비교해보면 어느 하나도 일치하는 것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명백히 이 사람들이 말하는 자칭 ‘공용어’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어떻게? 마치 더빙한 목소리를 듣고있는 것처럼 전혀 모르는 발성에 전혀 모르는 단어들을 전부 알아듣고 있는 것이다.

뇌에 기계장치를 심거나 번역기를 달아놓은 것도 아니다.

내가 이 사람들의 말을 배우기라도 한 것 처럼 말 그 자체가 정말로 귀에 들리고 있었다.

원래 세상에서도 이런게 가능했다면 그렇게 힘들게 영어공부를 하지 않았어도 될 텐데 라는 생각이 스쳐갔지만 당연히 헛소리일 뿐.

그 뒤, 내 상태는 다행스럽게 안정을 되찾았고 지금의 난 조금 피로에 지친 상태로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쌓여있었다.

이들을 사람이라고 불러도 된다면 말이다.


「신기하군요, 저희가 하는 말이나 행동은 전부 이해하고있는 것 같습니다. 의사소통은 이루어지고 있어요.」


엘리트 코스를 쭈욱 밟고 올라와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햇병아리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 한 명이 안경을 고쳐쓰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병실 내부엔 경호원처럼 보이는 검은 양복을 입은 이들이 출입문을 지키고 서 있었고 내 침대 근처엔 다섯명 정도 되는 어른들이 무리를 지어 몰려있었다.

개중에는 흰색 가운을 입은 의사들도 있었는데 처음엔 이들에게 각종 검사나 이름모를 테스트 같은 것들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검사를 끝마친 뒤엔 다시 고급스러운 양복을 입은 인물들이 추가로 들어와 지금의 무리를 이루며 자기들끼리 쑥덕쑥덕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도 몇 번 더 말을 걸어보려 시도를 해봤지만,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 젓거나 하는 수준의 의사표시 외에는 나도 쉽게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정말 눈으로 보고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군요.」


말이 통하지 않는데 연필로 글을 쓴다고 해서 저 사람들이 읽을 수 있을거라고 기대하진 않는다.

결국 얼마 지나지않아 나와 이들 사이의 의사소통은 일종의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들도 자기들 나름대로 어떤 합의에 도달했는지 더 이상 뭔가를 질문하려 들지 않았고 내게서 한 걸음 떨어진 채 명백하게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그 상태가 그렇게 두 시간 가까이 이어진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표현은 참으로 적절하다.

대화만 통했다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는 간절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처음엔 낯선 환경에 떨어진 것에 대한 공포심과 이들의 목적을 모른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적어도 나에게 해를 끼치려는 건 아닌 듯이 보였기 때문에 지금은 작게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 쉴 정도는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나를 병원에 까지 데려와 치료를 해줬을 리 없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이 사람들이 날 찾아온 이유는 알 수 없었고 개중엔 경호원까지 부릴 정도로 높은 직급의 사람도 있는 것 같았다.

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일이 이 지경 까지 흘러온 건지 짐작가는 바가 전혀 없었다.

경찰차가 망가진 것 때문인가?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건 불가항력이었고 따지고보면 나도 피해자인 셈이니까 불만이 있으면 가급적 나 말고 날 여기로 데려다준 쪽에다 항의하라고 말하고 싶다.

말도 안통하는데 퍽이나 알아듣겠구나.

씁쓸한 자괴감이 밀려왔고 동시에 조금은 서러운 감정마저 느끼고 있었다.

정말 지치고 힘들어서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울고싶어졌다.

그때였을까.


「교수님이 도착했습니다.」


「오오오. 마침내.」


경호원들 중 하나가 귀에 걸린 인이어 장비에 손을 올리며 보고하자 무리지어 모여있던 어른들은 마치 구세주라도 등장한 것처럼 기뻐했다.

대체 또 뭐가 온다는 것일까.

그걸 확인하는 데는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바깥에서부터 약간의 소란스러움이 퍼지기 시작했다.


「뭐야? 왜 이리 시끄러워. 어떻게 된 거야?」


이 자리에서 제일 높은 직급의 사람으로 보이는 배불뚝이 중년남성이 자기 옆의 햇병아리 엘리트에게 신경질적으로 묻자 당황한 그가 재빠르게 경호원들에게 다가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눴다.


「기자들이 모여있습니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낌새를 챈 모양입니다.」


「뭐? 어떻게.」


「지금 확인 중에 있습니다만....」


「됐어, 확인해서 어쩔래? 여기에 며칠이나 있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하여튼 냄새 하나는 귀신 같이 맡고다니는군.」


젊은 사내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교수를 모셔오는 걸 최우선으로 하고, 이왕 이렇게 된 거 할 수 있는 인력들 총동원해서 주말까지 만이라도 어떻게든 보도를 막아봐.」


「알겠습니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병실 구석으로 가더니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휴대폰도 있구나. 이젠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병실 바깥에서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온 건가?」


경호원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병실 문이 묵직한 느낌으로 느리게 열리기 시작했다.

그 뒤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조금 작은 체구의 중년 여성이었다.

그 인물에 대한 첫인상은 한마디로 무척이나 날카로워 보인다는 것이었다.

기품있게 뒤로 묶은 머리는 완연한 백발이었고 차가운 눈매와 다가가기 힘들 정도로 완고한 표정은 굳이 말을 나눠보진 않아도 이 인물이 무척이나 엄격한 성격일 것 같다는 느낌을 전해주었다. 체구는 작았지만 그 인물의 몸에서 느껴지는 당당한 분위기 같은 것이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그녀를 몇 배나 더 커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엄청 깐깐하고 말을 섞기 힘든 할머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바로 다음 순간.

병실 안으로 들어온 그녀가 방 안에 있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단번에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눈을 크게 뜨고 잠시 숨이 멎을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입을 가린다.


음... 저기요...?


간호사들이 보인 것과 같은 익숙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지만 이쪽이 좀 더 리액션이 강해서 내가 느끼는 당혹감이 더 큰 것 같다.

나를 알고 있을리 없고 내가 알고있는 사람도 아닌데 내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저런 반응들을 보이면 아무리 둔한 나 라고 해도 조금 상처받는다.

그렇게 몇 초간 제자리에서 굳어버린 듯 가만히 서 있던 그녀가 뒤이어 뚜벅뚜벅 나를 향해 걸어오더니 내 머리에 조심스레 양 손을 가져다 대었다.

뭐... 뭐지? 페이탈리티?

오래된 비디오 게임의 확인사살 기술을 떠올리며 굳어버리던 찰나.

그녀는 그대로 자신의 품 안으로 나를 껴 안아버렸다.


「오, 신이시여....」


이름을 알 수 없는 옅은 향수와 오래된 책의 냄새가 퍼지며 따뜻한 체온이 얼굴에 파묻혔다.

이쪽 세계에서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가 날 여기로 보낸 이가 맞다면 제대로 부른 것 같긴 하다.

난데없이 자신의 품안에 나를 껴안은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당황스러웠던 건, 이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오히려 힘을 주면 부서지기라도 할 것처럼 정말로 소중하다는 듯이 내 머리를 꼬옥 안아주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결국 뿌리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말을 걸기도 뭐한 마음에 그냥 눈을 감고 오랜만에 와닿는 체온을 느껴보기로 했다.

물론 난 변태가 아니다.

그냥 원래있던 저쪽 세계에서도 사람의 체온이란 걸 느껴본지가 조금 오래돼서 그렇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길래 나를 보며 신을 찾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기하게도 방금 전까지 느끼던 이쪽 세계에 대한 불안감 같은 것들이 조금씩 조금씩 옅어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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