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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슬립 님의 서재입니다.

사관학교의 꼽추 하이엘프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퓨전

빅슬립
작품등록일 :
2021.05.12 22:45
최근연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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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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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2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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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쪽

꼽추 아게르

DUMMY

제도, 코르닉스 가 별장의 유일한 고용인 미루는 오늘도 넓은 문 앞에서 서성인다.


“언제쯤 나오시려나···.”


언제나 괴팍하고 제멋대로인 주인님이 쓰러진 채 발견된 지 일주일.


부르면 들어오라는 말만 남긴 지가 벌써 엿새째다.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곧 부르셔서 무언가를 시키시겠지. 성실한 미루는 언제고 주인님의 부름에 답하기 위해 기다렸으나, 이번엔 달랐다.


창고에서 물건을 가져오라는 부름도, 방을 청소해달라는 부름도 없다. 식사 부름도, 세면 부름도 없으시다. 호출 자체가 없다.


방 안에서 두문불출한 지 닷새째 되는 날. 정 많은 미루는 혹시 주인님이 돌아가신 건 아닐까 덜컥 겁에 질렸다.


‘땀을 뻘뻘 흘리셨지.’


지하 연무장에서 발견된 주인님은 정신을 잃은 채 전신이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몸 전체가 경련했던 것도 같고. 진짜 잘못되신 건가 확인하려 방문 고리를 잡았던 미루는 갈등했다.


‘그 물건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오늘은 식사를 안 하겠다고 했다!’

‘들어오지 말라는 말 못 들었나!’


잘못할 때마다 들어온 그 불같은 노호성을 떠올리면 지금도 정신이 혼미해진다. 이번에도 또 혼나는 건 아닐까.


그렇게 문고리를 수차례 잡았다 놓았다 반복한 미루가 울상을 지었다.


“어떻게 하지···.”


좋아. 딱 오늘까지만 더 기다려보자. 내일에도 호출이 없다면 들어가 봐야지.


성실한 고용인 미루는 그렇게 다짐하며 주인님의 방문 앞에서 총총 벗어나려 했다.


지잉-


“앗!”


진동하는 팔찌. 호출의 반응이다. 미루는 다시 방문 고리를 잡았다.


끼이익-


약간의 마찰음과 동시에 훅 얼굴에 끼쳐오는 불쾌한 악취.


“주인님?”


다섯 개의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빛이 저택의 가장 넓은 방을 비춘다. 한켠에 놓인 서재와 탁자. 정체 모를, 보통 만지면 주인님이 싫어하는 온갖 기구들.


그리고 방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괘종시계. 그 옆 성인 다섯 명은 족히 누울 침대에 주인님이 걸터앉아 계셨다.


“주인님?”

“미루···였나?”


건망증이 심한 주인님은 종종 미루의 이름도 까먹으신다. 친절한 미루는 멍청한 질문에도 성실히 답했다.


“네, 미루에요.”

“내가 정신을 잃은지 얼마나 지났어?”


평소와 달리 부드러운 목소리. 이제 막 일어나 힘이 없으신가보다, 미루는 생각했다.


“오늘이 일주일 째세요.”

“그렇구나.”


그 말을 끝으로 침묵이 흘렀다. 멍하니 생각에 잠긴 듯한 주인님. 한 번 장고에 빠지면 몇 시간이 지나도 그대로임을 익히 아는 미루는 다시 한번 주인님을 불렀다.


“어떤 용무로 부르셨어요?”

“아, 그렇지. 식사 좀 준비해 줄래?”

“물론이에요!”


오늘따라 상냥하시다고 생각하며 미루는 늦은 식사 준비를 위해 주방으로 뛰어갔다.


**


아직도 정신이 멍하다. 머릿속을 헤집는 누군가의 기억을 잡아채 꾸역꾸역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일주일 간의 열병을 통해 혼란을 수습한 나는 비로소 내가 타인의 몸에 들어왔음을 실감했다.


스륵-


침대에서 벗어나 일어선다. 한없이 낮아진 시야 아래로 흘러내리는 잠옷. 나는 괘종시계의 하단, 투명한 유리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좌우 균형이 뒤틀린 얼굴, 고목처럼 앙상한 신체, 굽은 상체 뒤로 볼록 튀어나온 기형적인 척추.


“허···.”


순간 정일영의 신체인 줄 알았으나, 백발에 가까운 은빛 머리카락과 홍채가 이를 부정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생긴 인물을 알고 있다. 내 짐작이 틀리길 바라며, 나는 시야 한구석에 둥실 떠 있는 문구를 확인했다.


[상태 창을 갱신합니다.]


[이름 : 아게르 코르닉스]

[나이 : 22]

[특성 : 시넬의 구, 마이트의 손, 시스템 홀로그램, 하이엘프의 혈통, 뛰어난 이해력, 뛰어난 손재주, 꼽추]


아게르 코르닉스. 이름 창을 확인한 나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꼽추 아게르. 내가 아는 인물이 맞다면, 연방을 위협하는 외계종족 인페스티스의 사천왕에 오르는 네임드다.


무한정에 가까운 마력과 까다로운 개성으로 기사단과 정예 병력을 학살하는 인페스티스의 2위. 연방의 배신자. 인류 청소기. 그게 꼽추 아게르, 몸의 원주인이다.


‘아게르가 엘프, 그것도 코르닉스 가의 사람이었나?’


VR 게임을 몇 번이고 플레이했지만 오늘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침식된 아게르의 외형은 이미 크리쳐화되어 괴물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어째서 하이엘프의 후손이 인페스티스의 편에 서게 된 것일까.


나는 괘종시계 위의 년도를 확인했다. 연방력 336년. 게임의 메인 에피소드가 시작되기 4년 전이다. 아마 이후에 벌어진 사건들로 인해 아게르가 인페스티스로 넘어갔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아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 모든 가정과 짐작은 하나의 전제하에 쌓아 올린 탑이다. 이 세계, 지금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공간이 VR기기로 접속하던 게임과 동일함을 확인해야만 한다.


“···시스템?”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이 기이한 현상을 설명해줄 사람은 그녀뿐이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 시스템의 목소리는 진짜였을까, 아니면 환청이었을까. 지금 이 세계는 게임 속 세계일까, 아니면 진짜 세계일까.


추측만으로 이루어진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지금의 각오, 부디 잊지 말길 바랍니다.]


나는 시스템의 마지막 문장을 곱씹었다. 그녀는 내게 무엇을 원하는 걸까.


“주인님, 식사하세요!”


때마침 들어온 메이드 복장의 엘프, 미루의 등장에 고민의 사슬이 끊긴다.


“오랫동안 아무것도 안 드셨을 거 같아서, 부드러운 음식으로 준비했어요!”


세숫대야 만한 접시에 가득 담긴 스프와 약간의 빵이 담긴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는다.


꼬르륵-


여태껏 잊고 있던 허기가 동시에 밀려온다. 뱃속을 울리는 부끄러운 소음에 나는 감동했다.


병상 신세 이후 신체 활동은 점차 쇠퇴해갔다. 종국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할 만큼 신경 또한 무뎌져 갔다.


지금 내가 느끼는 허기는 VR게임에서도, 현실에서도 느끼지 못하던 살아있음의 증거였다.


나는 시중까지 들려는 미루를 물리고 내 손으로 수저를 들었다.


몇 년 만에 느껴보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 조심스레 스프를 한 숟갈 떠먹은 나는 입안을 가득 메우는 맛에 눈물을 흘렸다.


“아앗, 그 정도로 맛있으세요?”

“아니.”


스프는 거짓말로도 맛있다고 할 수 없는 맛이었다. 소금 한 통을 들이부은 건지 대야에 어울리는 바다맛 스프가 되었다.


다만 내가 기쁨의 눈물을 흘린 건, 내 스스로 밥을 먹을 수 있단 사실 때문이었다.


누구의 도움 없이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고, 거동하는 것. 줄곧 바라고 또 바라왔던 소원이 늦게나마 이루어졌다.


“으웩, 이거 왜 이렇게 짜지?”


손가락에 스프를 찍어 먹어본 미루가 인상을 쓰든 말든, 나는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스프를 흡입했다.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경건한 동작으로 끝까지 음식을 마무리한 나를 미루가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 건 덤이었다.


“고마워.”

“자, 잘 드셔주시니 저도 기뻐요. 참.”


쟁반에 식기를 정리한 미루가 내게 두 통의 편지를 건넸다.


“하나는 세무청에서, 하나는 사관학교에서 왔더라구요.”


나는 먼저 빨간색으로 큼지막하게 취급주의 마크가 박힌 연방세무청의 편지를 뜯었다.


「고지서」


저택 자체로 수급하는 마력을 제외한 수도세, 토지세부터 아게르 개인의 재산세, 상속세 등에 이르기까지.


이 저택과 내 앞으로 달린 모든 세금이 밀려있었다. 갖가지 항목의 세금 미납액수와 그에 따른 벌금까지 합산해 마지막에 적힌 금액에 나는 순간 잘못 봤나, 눈을 비볐다.


3,200만 리브.


리브가 달러와 비슷한 화폐 가치를 가졌음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액수를 체납하고 있는 것이다.


[연방력 337년 12월 31일까지 완납하지 않을 시 추후 법적 절차를 따름을 알립니다.]


나는 아게르의 기억을 뒤졌다. 그러나 세금 관련된 내용은 전무한 상태.


“이게 뭔···.”


졸지에 어마어마한 빚쟁이가 되었다. 지금이 336년 겨울이니 유예 기간은 고작 1년 남짓.


나는 다급히 사관학교에서 온 편지도 뜯었다. 다행히 이쪽은 빚 독촉이 아니다.


[성적 고지서]

[·········]

[최종 성적 : 유급]

[올해 안으로 담당 교수와 상담 바랍니다.]


“주인님, 괜찮으세요?”


어질어질하다. 미루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 앉은 나는 냉정하게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잘잘못을 따지기 전에 사태 해결책부터 찾아야 할 상황이고.


세금 문제는 당장 해결하기엔 너무 큰 사안이고, 먼저 사관학교에 들러 아게르의 유급에 대해 알아봐야 할 듯 싶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이 지경에 다다른 건지.


나는 미루를 내보내고 희미하게 머릿속을 맴도는 아게르의 기억들을 수습하고 정리하는 데 몰두한다.


째깍- 째깍-

댕- 댕- 댕-


괘종시계의 묵직한 알람이 자정을 알린다.


“하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마치 한 편의 꿈을 꾸다 깬듯한 기분이다.


지구에서 정일영이 겪은 기억과, 이곳에서 아게르가 겪은 기억이 갈등(葛藤)처럼 얽히며 서로를 공유한다.


자칫하면 기억의 홍수에 이성이 잡아먹힐 뻔했던 게 수십 번.


결국 나는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합치기를 포기하고 떼어놓아야 했다.


타인과 자신의 기억이 교차하는 괴리감, 특히 하이엘프와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오는 인식의 혼동을 분리하는 게 고역이었다.


산산이 부서지고 재조립되는 기억. 그 과정에서 무결성은 사라지고, 손안에 남은 한 줌 모래의 흔적처럼 아스라한 잔향만 남았다.


다행이 그 정도로도 한 인생의 윤곽을 그리기엔 충분했다.


나는 파노라마처럼 재생되는 아게르의 과거를 차분히 감상했다.


평범한 하이엘프의 삶, 갑작스런 개성의 발현, 그 후 이어지는 좌절의 나날들.


조금씩 드물어지다 종국에는 완전히 끊겨버린 비극의 파편. 나는 아게르의 개성, 그리고 내 개성을 열람한다.


[시넬의 구]

[티어/등급 : 고유/S]

[모든 성질을 당기는 인력의 힘.]

[경고! 마이트의 손 효과로 등급 보정 중]

[경고! 과도한 등급 효과로 신체에 악영향을 미치는 중]

[S등급 특전 ‘시넬의 눈’ 개방]


[마이트의 손]

[티어/등급 : 고유/B]

[모든 성질을 밀어내는 척력의 힘.]

[경고! 시넬의 구 효과로 등급 보정 중]

[경고! 비정상적인 특성의 습득으로 등급 보정]


하나는 아게르의 몸과 마음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시넬의 구. 다른 하나는 정일영의 삶을 망가뜨린 마이트의 손.


많은 의문이 해소된다. 어째서 사회초년생에게 현대의학으로 분석 불가능한 불치병이 생겼는지, 어째서 강골인 하이엘프의 신체가 망가지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었는지.


그리고 어째서 내가 아게르의 몸에 깃들게 되었는지까지.


[지금의 각오, 부디 잊지 말길 바랍니다.]


시스템은 내게 한 번의 기회를 준 것이다. 후회를 되돌리고,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어느새 흐른 눈물이 얼굴을 잔뜩 적셨다. 방안에 딸린 화장실에서 세수로 감정의 편린을 털어낸다.


“이번에는, 반드시.”


천금으로도 살 수 없는 기회, 여기에는 아게르의 몫까지 얹혀있다.


“그런데 빚은 좀 아니지 않냐. 망할 놈아.”


나는 거울을 보며 피식 웃다 특전을 떠올렸다.


고유 티어의 특성이 존재한단 사실도, 특성 등급이 오르면 특전이 생긴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얼마나 좋은 특성이길래 특전까지 주어지는 건지.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특성의 이해와 활용은 필수. 나는 시넬의 눈을 활성화했다.


[경고! 특전 ‘시넬의 눈’이 ‘시스템 홀로그램’과 연동합니다!]


붉은색 시스템 문구와 함께 시야가 반전한다.


세상의 진리를 강제로 끌어오는 시넬의 눈에 플레이어 전용 특성인 홀로그램이 합쳐진 결과는 열화였다.


강한 반동을 동반하는 시넬의 눈을 강제로 플레이어의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덕분에 읽어낼 수 있는 정보는 제한된 대신 플레이어의 의지에 따라 켜고 끌 수 있게 되었다.


시넬의 눈으로 읽어낸 내 몸은 시한폭탄이었다.


단전 부근에 자리 잡은 무지막지한 양의 검은 마력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고 있다.


심장 부근에서 흘러내리듯 흐르는 흰 마력이 검은 마력을 감싸며 그 역동성을 제어하고 있다.


마치 막 터지려는 물풍선을 양손으로 꽉 누르고 있는 모양새.


아게르가 남긴 유산은 빚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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