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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행복한 하루

웹소설 > 일반연재 > 공포·미스테리, 전쟁·밀리터리

김다물
작품등록일 :
2023.06.13 09:08
최근연재일 :
2023.08.11 18:00
연재수 :
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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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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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46,860

작성
23.07.2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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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쪽

episode 04. 청명한 밤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2)

DUMMY

노원구가 붕괴되고 1년 뒤. 약 9년 전 오늘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수유리는 전체가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살아본 적은 없지만 그곳 출신인 우림이의 생생한 증언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그녀가 인파에 휩쓸려 동생과 생이별하게 된 것도 그즈음의 일입니다.


수유동 일부와 번동 일부가 뒤섞여 있지만 편하게 수유동이라 하겠습니다.


수유동은 도봉구처럼 자연적인 요새화가 어려웠습니다. 때문에 외곽 전진기지부터 중간 보급기지까지 몇 겹의 군사기지가 외피를 이루고, 주민들은 우이천 변에 오밀조밀 붙어살았죠.


첫 5년은 그런대로 괜찮았습니다. 문제는 노원구 대붕괴였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철창 너머 좀비와 만성적인 보급 부족, 정부의 옥쇄 강요 등. 상황은 이미 최악이었습니다. 사실 1년이나 버틴 게 용하죠.


그 상황에서 비슷한 처지에 있던 노원구가 붕괴됐습니다. 멸망하고 학살당한 상계동 주민들을 바라보며 수유동 내부에서도 거대한 회의론이 돌았습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반란의 시작은 최전방이라고 할 수 있는 월곡산 전진기지에서 벌어졌습니다. 역사 시간에 배웠지만 모의할 시점에 이미 빨갱이들과 내통됐었다죠.


반란군 몇몇 그리고 합류한 빨갱이 빨치산들은 빠르게 송중초등학교를 점거하고 도봉세무서와 총격전을 벌였습니다. 사령부로선 둘 다 중요한 보급기지였습니다. 때문에 쉽사리 들이닥치진 못하고, 다만 화해를 요청하는 신호를 몇 번 보냈으나 묵살됐죠. 무의미한 소모전이 계속됐습니다.


그 시점에서 붕괴는 시작됐습니다.


소리를 들은 미아사거리에서 좀비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약 5만의 초군체였답니다.


5만이라니.


반군이든 진압군이든, 서로의 머리 위로 총알이 날아다니는 와중 그 새로운 습격자들까지 막아낼 리 만무했습니다. 삼양입구사거리는 빠르게 무너졌습니다.


두 진영은 사이좋게 수유동 안쪽으로 피신했습니다. 잇달아 송천동, 미아동, 번2동까지. 시민들을 보호하던 외피는 빠르게 녹아내렸습니다.


머지않아 주민들도 감염체를 목하에 두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잠들 때까지 좀비를 마주하는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상황이 그 지경에 이르자 주민들도 심각성을 파악했습니다.


반란이 터지고 고작 3일 만이었습니다.



*



진압군과 반군의 대치는 그러고도 일주일 동안 이어졌습니다.


진압군은 병력의 증원과 수유동 전체─다시 말해 주민들까지─철수를 요청했습니다. 물론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탄약도 떨어져 가는데 반군 지도자를 생포하라는 터무니없는 지시가 떨어졌죠.


진압군이 반군에 합류하는 건 순식간이었습니다.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수업 때 이 둘이 대치하던 사진을 봤는데, 겉으로 봐선 누가 반군이고 누가 빨갱이고 누가 진압군인지 구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곧 수유동엔 반군 정부가 세워졌습니다. 시민들도 가세했습니다. 이미 노원구 대붕괴 당시 정부에서 시민들을 쏘아죽인 선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큰 적을 앞뒤로 둔 채, 일종의 포개어진 상태로 하루하루 연명해 나갔습니다. 역시 문제는 고립이었습니다. 도시는 금방 굶주렸고, 물과 전기까지 끊겨 짐승만도 못한 상태가 되기까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도시는 버텼습니다. 꿋꿋하게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사건이 터진 것은 2주가 지난 5월 19일입니다.


결국 감염체가 경비망을 뚫고 들어왔습니다. 운 좋게도 금방 진압됐지만 문제는 장소였습니다.


그들은 어린이집 한가운데에서 진압됐습니다. 교사 셋은 이미 물려 사살됐고 감염된 원아 둘도 그 자리에서 죽었죠.


그것뿐이었다면, 단지 그뿐이라면 안타까운 비극으로 끝나고 말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굶주리고 예민해진 반군은 나머지 원아들을 시체 옆에 하루 종일 가둬뒀습니다. 부모들이 밖에서 소리치고 울건 말건 들은 체도 안 했죠. 마침내 반군 우두머리 양인춘이 명령했습니다. ‘전원 사살 조치하라.’ 수비병들은 기계처럼 원아들을 쏴 죽였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갖고 있던 모든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이 개새끼들!” 반란에 대한 반란. 그건 말 그대로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번져나갔습니다. 먼저 이성을 잃은 부모들이 달려들었고, 그들 중 몇몇이 총을 맞고 쓰러지자 나머지 시민들이 가세했습니다.


곧 시민들은 무기를 빼앗고 민병대를 조직하고 빠르게 반군 정부를 제압했습니다. 심지어 지도부 몇몇은 산 채로 포획됐죠. 시민 대표는 도봉구에 반란이 끝났다고 일렀습니다. 그리고 반군들을 넘기는 조건으로 도봉구 안에 자신들의 피난처를 요구했고, 이는 받아들여졌습니다.


시민들은 일제히 살림을 챙겨 들고 앞다퉈 도봉구 청사로 향했습니다. 우림이가 생이별을 당한 것도 그때 일이죠. 그리하여 반군 수뇌부를 앞세운 이 수만에 달하는 가두행진. 우리가 훗날 비밀행진이라 이름 붙인 조리돌림회가 처음 개최된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에 도봉구는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도시 한복판에 있던 어린이집에서 어떻게 감염체가 나타난 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



벌써 9번째 비밀행진입니다. 우리는 방학사거리에 도열해 있었습니다. 자루에 담긴 콩나물처럼 빽빽이 들어차 서로의 냄새를 맡아가며 앞뒤로 흔들거렸습니다.


이 가두행진의 쓰임새를 깨달은 정부는 반년, 또는 분기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조리돌림회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의미가 남다릅니다.


[전우 여러분. 시민 여러분. 우리의 자랑스러운 일등 시민 전우 여러분.]


거대한 스피커의 울림이 방학사거리 대광장을 가득 메웠습니다.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인파가 그로부터 쌍문역까지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음에도 거리엔 숨소리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굳은 석상처럼 서 있었습니다. 가만히 굳어서 맞은편에 있는 다른 학교 녀석들의 자그마한 얼굴을 바라봤습니다. 코앞에서 경은이의 신경질 섞인 한숨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녀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전부 기세등등했습니다.


[몇 년에 걸쳐 우리는 아주 어려운 난제에 당면해 있습니다.]


쇠약하고 바람 새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에리카의 아버지 최형철 위원님의 연설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병든 노인의 음성으로 말했지만, 그 또박또박한 발음과 숨소리에는 분명 말로 다 못 할 어떤 날카로움, 비유하자면 미천하면서도 속에 날카로운 단검을 품은 현자의 목소리였습니다. 은미는 이를 까마귀 같다고 표현했습니다.


[또다시 짙은 안개가 우리의 숨통을 옥죄고 있습니다. 새까만 밤이 우리네 머리 위에 드리우고 있습니다. 전우 여러분. 오늘 아침에 소식 들으셨을 겁니다.]


최형철 위원님은 백운시장에서 있었던 빨갱이들의 사보타주를 입에 올렸습니다. 그는 마치 상사에게 말하듯 사실에 입각한 피해 경과를 조목조목 보고했습니다.


우리의 예상보다 피해가 훨씬 적었습니다. 고작 10명 남짓이라뇨. 사람이 죽었다지만 4월 중에 있었던 우리 반의 피해 등에는 비교되지 못했고, 솔직히 민간인을 대상으로 감행한 테러치고는 그 피해가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딱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연단에선 버럭, 하고 고함이 내리꽂혔습니다.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습니다. 원래도 들고 있었지만 더욱 바싹 들었습니다.


[군 장병 여러분. 말씀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전선에서 보아 온 것들에 비해 어떻습니까? 이게 진짜 유의미한 테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게 그만한 가치가 있는 공격입니까?]


수비병들 쪽에서 열띤 환호성이 파도처럼 일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다가 그만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에리카와 그 주변만 엇박으로 환호했습니다. 우리는 덜컥 겁먹었습니다. 그나마 군장이 아니라 교복 차림이라 다행이었습니다.


최형철 위원님은 이제 군 장병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정확히는 우리 군에 있었던 크고 작은 전투들을 나열한 것인데, 그중 몇몇은 역사 시간에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공격은 여의도에서도 있었습니다. 용답에서도 있었습니다! 삼양동 능선에서도 있었습니다! 아리랑 고지에서도 있었습니다! 천장산과 월곡산에서는 영웅적인 승리가 있었고 마침내 우리는 흥인지문을 탈환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어디입니까?]


15년 전의 일입니다. 동대문까지 이르렀었죠.


물론 그 진격전이 성공적이었으면 지금 도봉구에서 이러고 있지 않았을 겁니다. 그 사실을 유념하듯 최형철 의원님도 입을 꾹 다물었습니다.


DDP. DDP가 공세의 종말점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향하면 DDP였으나 빨갱이들이 우리를 막아섰습니다. 보급 창고가 무너지고, 내부순환로가 붕괴되고, 동묘에 불이 나고, 끝내 노원구가 무너져 우리는 우리가 쌓아 올린 모든 걸 잃어버렸습니다.


더구나 어릴 때부터 들어온 건 그런 패배와 상실의 이야기뿐이었습니다. 즉 태어나서부터 우리는 감염된 세상에 놓여졌고 기억하기 시작할 무렵에 우리는 승리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 우리는 수유리에서 싸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도봉구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칼날 같은 위원님의 목소리가 가슴에 날아와 꽂힙니다. 민지가 울기 시작했습니다. 민지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훌쩍이기 시작했습니다. 곧 도봉구 전체가 눈물바다로 번졌습니다.


한동안 훌쩍이는 분위기가 이어졌습니다. 아이들은 대부분은 시늉만 했지만 에리카는 진심인 모양이었고, 경은이도 진심이긴 했으나 그건 감동의 눈물처럼 보이진 않았습니다. 어쩌면 식은땀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행여나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고개를 떨궜습니다. 그리고 메마른 눈가를 닦았습니다.


높게 쌓인 연단 위로 검붉은 서울해방위원회 깃발이 나부끼고 푸른 저녁에 젖기 시작한 도봉산이 그 뒤에 준엄했습니다. 너무 맑아 모든 것이 또렷한 어둠이었습니다.


밤은 청명했습니다.



*



울적한 분위기는 한동안 지속됐습니다.


곧 위원님의 입을 통해 진짜 피해가 보고됐습니다. 지휘부의 판단에 따르면 우이동의 테러는 애초에 주공이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성동격서였습니다.


진정한 테러는 호원동과 의정부에서 있었습니다. 고립된 기지 안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고 감염체들이 밀려들었다는군요. 특히 의정부시청을 거점으로 삼은 제2의정부 전진기지가 크게 당하여 고립됐다고 합니다.


최형철 위원님은 현 사태를 마치 베개 밑에 놓인 폭탄으로 비유했습니다. 핀이 뽑힌 수류탄을 머리로 꾹 누르고 있지만 떼는 순간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아마도 복구를 시도하겠지만, 최악의 경우 친애하는 위원장님으로부터 큰 결단이 내려질지도 모른다며 무섭게 질책했습니다.


위원님은 격노했습니다.


[호원은 예로부터 우리의 도시였습니다! 의정부도 예로부터 우리의 도시였습니다! 전우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서둘러 “예 그렇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노원구는 예로부터 우리의 도시였습니다! 강북구도 예로부터 우리의 도시였습니다! 성북구도 예로부터 우리의 도시였습니다! 전우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서둘러 “예 그렇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또 어디, 또 어디입니까? 김포도 예로부터 우리의 도시였습니다. 저 망할 부산 놈들이 짓밟고 유린하고 난도질한 공항은 우리의 하늘이었습니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한강 또한 사실은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바다도 우리의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한반도가······ 전우 여러분, 아십니까! 부산도, 원래는 우리의 땅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둘러 박수쳤습니다. 한동안 뜨거운 박수와 우레같은 함성이 이어졌습니다. 위원님은 잠시 물을 삼키며 그 소동이 가라앉기를 기다렸습니다.


[적은 부산에 있다. 그런 말을 했었던가요.]


목소리는 잠잠해졌지만 우리는 조금 겁먹었습니다. 수만 수십만에 달하는 군중에 몸을 숨겨놨지만 어째선지 그와 눈이 마주친 것만 같았기 때문입니다.


위원님이 가만히 저를 노려보며 말했습니다.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빨갱이가 아닙니까?]


우리는 앞다투어 소리 질렀습니다. “아뇨! 아닙니다!”


맹렬한 문답이 오갔습니다. 여러분 중에 빨갱이가 없습니까? 없습니다! 진짜 없습니까? 진짜 없습니다! 진짜 없는 게 맞습니까? 진짜 없는 게 맞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의정부를 공격했단 말입니까! 도대체 누가! 저 파렴치한 괴물들을 시민으로 받아들였단 말입니까!]


우리 왼편 멀리서부터 고함과 시끄러운 소란이 점차 다가왔습니다. 멀리서 보면 열병식 퍼레이드나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박수와 환호보단 욕설과 투석이 대다수라는 게 차이점이었습니다.


치안대원들이 우르르 몰려와 우리에게 묵직한 포댓자루를 건넸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자그마한 자갈을 꺼내 든 뒤 옆으로 넘겼습니다.


최형철 위원님은 지치지 않고 피를 토하듯 소리쳤습니다.


[저자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악마! 저들은 인두겁을 뒤집어쓴 악마입니다!]


퉁 퉁.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군악대가 스산한 불협화음을 일으켰습니다. 투구둥. 투구두구둥. 작은 북이 조금씩 발굽을 빨리하며 기다란 조리돌림 행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순간 발걸음과 북소리 박자가 맞아떨어지며 오스스 소름이 돋았습니다. 감동, 아뇨 전율이었습니다.


[전우 여러분, 적은 바로 옆에 있습니다!]


우렁찬 반주가 시작됐습니다.



*



마치 번개 치는 밤을 묘사하듯 맹렬한 관악기 소리가 회장을 휩쓸었습니다.


그리고 또 폭풍처럼 가라앉았습니다. 최형철 위원님은 그 악단과 문답을 주고받듯 반주가 멎기 무섭게 마이크를 가져다 댔습니다.


[악마들의 속삭임이 들리십니까? 전우들이여 고개 돌리지 말고!]


다시 반주가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가라앉았습니다.


[세상은 이치에 맞지 않고, 우리는 굳건한 성벽을 쌓았습니다!]


우리는 곧 왼쪽에서 다가오는 고함에 동화되듯 가슴을 부풀렸습니다. 인파 사이로 포승줄에 묶인 채 걸어가는 남루한 죄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들은 성문을 열어 준 자들입니다! 전우들이여 들리십니까? 우리의 안전, 미래, 아이들, 우리의 꿈이 짓밟히고 물어뜯기는 소리가! 전우들이여 고개 돌리지 말고!]


그들은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핏자국이 도시를 천천히 가로질렀습니다. 오래전에 흘린 피와 지금의 피가 서로 뒤엉켜 강을 이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걸로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결속은 우리의 가장 큰 무기이고, 질서는 우리의 가장 큰 방패이니! 반성을 통해 담대해진 우리, 투쟁을 통해 승리하리라! 달리 무엇이 있겠습니까! 전우들이여 외치십시오! 반성의 밤, 승리의 함성을!]


그래서 입을 열었습니다.


“♪ 승리의 함성 드높이 외쳐 이제는 전진이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용암이 되어 서로를 부둥켜안고 소리쳤습니다.


“♪ 저 부패한 죄인들 짓밥고 나가 해방을 맞으리라!”


우리는 불꽃이었습니다.


“♪ 시체 불사르는 불길 되어, 청결한 세상 해방 서울에!”


우리는 하나의 불꽃이었습니다.


“♪ 지난 세월의 과오 깨끗이 씻고 전진 투쟁 또 전진한다!”


앞에서 화연이와 몇몇 신병이 돌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서로 누가 더 잘 맞추는지 내기했습니다. 결은 그 모습을 말리려고 손까지 올렸지만 차마 말리지 못했습니다. “죽어!” 화연이가 본보기라는 듯 힘껏 던졌습니다.


퍽.


그녀가 던진 자갈은 정확히 한 노인의 왼쪽 눈두덩에 명중했습니다. 노인은 비틀거리다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포승줄에 매달린 채 행렬에 질질 끌려갔습니다. 그 모습에 관중들이 환호했습니다. 화연이가 으스댔습니다.


“♪ 지난 세월의 과오 깨끗이 씻고 전진 투쟁 또 전진한다!”


어디서 봤나 했더니 몇 주 전 도봉산 가는 길에 봤던 부랑민이었습니다.


그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습니다.


“죽여라!”


여기저기서 스파크처럼 번뜩이는 고함이 튀어나왔습니다. 반주와 함성, 그리고 노래는 그들이 광장 한가운데 도열 된 뒤로도 계속됐습니다. 우리는 목이 터져라 쉼 없이 노래 불렀습니다.


광장 한가운데로 군인들이 우르르 달려 나왔습니다. 그리고 선두에서 발버둥 치는 한 발가벗은 남자를 밧줄로 묶고 쇠사슬로 칭칭 동여맸습니다.


곧이어 횟대가 높이 섰습니다. 장작과 폐타이어, 고물을 쌓아 올린 언덕 위로 거대한 기둥이 올라서고 그 끝에는 살려달라며 핏대를 드러낸 채 악을 쓰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발가벗은 채 기름에 젖어 축축했습니다.


시민들은 다시 연호했습니다.


“죽여! 죽여!”

“개새끼! 진드기 같은 새끼!”


그러자 잠잠해진 반주가 다시 거세졌습니다. 우르릉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나팔이 무대를 찢고 튀어나왔습니다.


우리는 더욱 고조되어 아까보다 힘껏 소리쳤습니다.


─ ♪ 승리의 함성 드높이 외쳐 이제는 전진이다!


최형철 위원님이 연단 위에서 횃불을 꺼내 들었습니다. 우리는 환호했습니다. 그리고 감격에 젖어 울었습니다.


─ ♪ 저 부패한 죄인들 짓밥고 나가 해방을 맞으리라!


아아, 그 무정(無情)의 광기란.


분노와 증오로 점철된 뜨거운 밤의 포효란.


무책임하게 표류하는 도시 속 축제란.


─ ♪ 시체 불사르는 불길이 되어, 청결한 세상 해방 서울에!


마침내 위원님이 입을 열었습니다.


[♪ 지난 세월의 과오 깨끗이 씻고 전진······ 투쟁! 또 전진한다!]


그리고 횃불을 집어던졌습니다.


거대한 폭발이 치솟았습니다. 불은 인간의 비명을 먹으며 자랐습니다.


─ ♪ 지난 세월의 과오 깨끗이 씻고 전진 투쟁 또 전진한다!


모르겠습니다. 저는 너무 행복해 하나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남은 거라곤 사람 타는 냄새와 기괴한 역광을 받아 번뜩이는 위원님의 인자한 미소. 그의 독특한 단발머리. 나부끼는 검붉은 깃발과 불씨를 쪼아먹는 도봉산의 모습.


그 모든 모습을 명백히 내리쬐는 달빛의, 그런 진부한 밤의 풍경이었습니다.



*



항상 이 비밀행진이 끝난 날은 분노의 해소가 온몸에 각인됩니다. 그 참혹함에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나른한 쾌감이 잔상처럼 남아있습니다. 진흙탕에 몸을 푹 담갔다 꺼낸 것처럼, 구름 위를 떠다니는 기분입니다.


까놓고 말해 극단적인 종교와도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그렇지만 규율이냐 믿음이냐 하면 규율이었습니다.


우리 수도는 광신에 가까운 극단적인 법치를 믿습니다. 물론 신앙으로 향했어도 철저한 질서가 뒤따랐을 테니 어느 쪽이 됐든 극단으로 향했음은 분명합니다.


즉 투명한 폭력이 돼 버린 우리네 권력이란 맹목적인 종교와도 별반 다를 게 없는 것입니다.


아뇨, 실은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


작가의말

다음 주 월(7/31), 금(8/4) 2회차는 휴재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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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pisode 04. 청명한 밤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2) 23.07.28 11 0 19쪽
18 episode 04. 청명한 밤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1) 23.07.24 10 0 12쪽
17 episode 03. 유쾌한 세 친구가 전차에 타고 (7) 23.07.21 10 0 16쪽
16 episode 03. 유쾌한 세 친구가 전차에 타고 (6) 23.07.17 10 0 16쪽
15 episode 03. 유쾌한 세 친구가 전차에 타고 (5) 23.07.14 13 0 18쪽
14 episode 03. 유쾌한 세 친구가 전차에 타고 (4) 23.07.10 14 0 18쪽
13 episode 03. 유쾌한 세 친구가 전차에 타고 (3) 23.07.07 16 0 18쪽
12 episode 03. 유쾌한 세 친구가 전차에 타고 (2) 23.07.05 17 0 16쪽
11 episode 03. 유쾌한 세 친구가 전차에 타고 (1) 23.07.03 16 0 14쪽
10 episode 02. 이 봄날을 잊어선 안 되리 (6) 23.07.01 14 0 16쪽
9 episode 02. 이 봄날을 잊어선 안 되리 (5) 23.06.28 14 0 15쪽
8 episode 02. 이 봄날을 잊어선 안 되리 (4) 23.06.26 15 0 13쪽
7 episode 02. 이 봄날을 잊어선 안 되리 (3) 23.06.23 15 0 16쪽
6 episode 02. 이 봄날을 잊어선 안 되리 (2) 23.06.20 21 0 17쪽
5 episode 02. 이 봄날을 잊어선 안 되리 (1) 23.06.19 19 0 16쪽
4 episode 01. 초원이여, 드넓은 초원이여 (3) 23.06.16 21 0 13쪽
3 episode 01. 초원이여, 드넓은 초원이여 (2) 23.06.14 28 0 13쪽
2 episode 01. 초원이여, 드넓은 초원이여 (1) 23.06.13 37 0 14쪽
1 prologue. 깊은 밤만이 알고 있다 23.06.13 46 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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