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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타 님의 서재입니다.

세상에 나쁜 영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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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타
작품등록일 :
2024.03.21 21:26
최근연재일 :
2024.05.15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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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9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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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사제 (1)

DUMMY

이튿날 아침, 디엘라 영애가 시녀들을 끌고 본채 쪽으로 오자 사용인들 사이에서는 한 차례 난리가 났다. 어지간하면 별채에 틀어박혀서 나오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시녀장 카타리나가 별채 중앙 홀에 나왔을 때는 가신들 사이로 시녀들을 이끈 소녀 하나가 뚱한 표정을 한 채 걸어가고 있었다.

평상복으로 입는 감청색 프릴드레스는 가슴께에 달린 와인색 리본장식 때문인지 우아하다기보다는 앙증맞았다.


별채의 시녀들이 종종걸음으로 따라붙고, 지나가던 가신들은 땀을 삐질 흘리며 얼른 고개를 숙였다.

꼬투리 하나만 잘못 잡혀도 폭언을 들을 것을 각오해야만 했기에 하나같이 긴장한 모습이었다.


본채에 직접 오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기도 하고, 데릭이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도 모르기에 소녀는 지나가던 가신을 하나 아무렇게나 붙잡았다.


“거기 너.”

“네. 디엘라 아가씨. 조, 좋은 아침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정원을 보수하는 데 쓸 밧줄을 나르고 있던 종자는 군기가 바짝 든 채로 바로 선 채 땀을 삐질 흘렸다.


메이드장 카타리나는 숨을 휙 몰아쉬며 재빨리 홀 계단을 따라 내려갔다. 말단 종자는 이른 아침부터 몸 쓰는 정원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지쳐있거나 위생 관리가 잘 되어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땀 냄새가 난다든가, 거지꼴이라든가 하면서 두들겨 패기라도 하면 곤란하기 때문에 얼른 카타리나가 직접 응대하러 갈 요량이었다.


“에벨스타인에서 왔다는 마법사가 어디에 머무는지 알아?”

“에, 에벨스타인에서 왔다는 마법사라면... 아이셀린 영애께서 대동하셨던 요, 용병 말이군요.”

“그래. 대답해.”

“죄,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종자는 차렷 자세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것도 모르냐면서 날아올 주먹이나 발길질에 대비하기 위해 아랫배에 힘을 주고 있었다.

그러나 디엘라는 딱히 그런 곳에 시간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됐어. 메이드장한테 물어볼 테니까 하던 일이나 해.”

“...?”

“표정 왜 그래? 불만 있어?”

“아닙니다! 그, 그, 그럼 가보겠습니다!”


종자는 재빨리 밧줄들을 갈무리해서 뛰쳐나갔고, 교대하듯이 달려 내려온 메이드장이 얼른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종자를 두들겨 패지 않았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면서도, 일단 최대한 예를 갖춰서 이야기했다.


“디, 디엘라 아가씨. 미리 언질을 주셨으면 대비하고 있었을 텐데. 이리 어수선한 상황이라 죄송합니다.”

“됐어. 에벨스타인에서 왔다는 그 마법사한테 안내 좀 해.”

“예. 2층 별실 손님방에서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메이드장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킨 채 3보 앞에서 조신하게 걸어 나갔다.

한 번씩 곁눈질로 디엘라 영애를 살펴보니, 썩 심기가 거슬려 보이진 않았다. 작은 꼬투리 하나만 잡혀도 호통을 쳐대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보였다.


‘오, 오늘은 기분이 좋으신 듯하다. 크게 심기가 거슬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어.’


제 아무리 디엘라라 해도 저택 사용인들 중에서도 서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메이드장까지 함부로 두들겨 패지는 않았다. 적어도 메이드장이라면 희대의 망나니 디엘라를 어떻게든 대응해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총대를 맨 메이드장이 디엘라와 함께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용인들과 가신들은 모두 묵념을 했다. 그녀의 희생정신은 과연 성모라 불림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디엘라와 함께 정적 속에서 한참을 걸어 나가다, 이윽고 손님방으로 쓰고 있는 2층의 별실 앞까지 도달했다.

메이드장이 조신한 몸놀림으로 똑똑똑 하고 두들기자, 문 안에서 사람이 죽는 듯 끄어어 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 끼익


그렇게 기다리는 것도 잠시. 문을 열고 사람 모양의 시체, 혹은 시체 모양의 사람이 나왔다.


“무슨 일이시죠.”


데릭은 지난 밤 마력을 난사해가며 추격전을 벌인 참이었고, 그대로 디엘라 영애를 별채에까지 데려다 주고 본채로 돌아와서는 제이든과 향후 행보에 대해 의논을 좀 했다.

그리고 일상적으로 하던 마법서 탐독과 마력 수련까지 마치고 난 뒤에서야 잠에든 것이다. 시간으로 치면 채 3시간도 못잔 상황이었다.


피곤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에는 음영이 잔뜩 서려있고, 이리저리 떡진 백발 머리칼 또한 방금 일어났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메이드장 카타리나는 그런 데릭을 보고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이른 아침부터 나타난 이 디엘라라는 재해를 어떻게 좀 해결해주길 빌었다.

어쨌든 지금 데릭은 디엘라 영애에 대한 교육 권한을 듀플레인 대공으로부터 전권 위임 받은 인물이었다.


“디엘라 아가씨께서 찾으시기에, 안내드리고자 왔습니다.”

“디엘라 아가씨요?”


그렇게 데릭이 반문하자마자, 종종걸음으로 나선 디엘라가 데릭을 올려다보고선 말했다.


“발현된 마력을 다루는 법 좀 알려줘. 혼자 해봤는데 잘 안 돼.”

“...”

“알려준다며.”


카타리나는 디엘라의 말을 듣고 귀를 의심했다. 디엘라의 마법 성취에 대해서는 저택에서 좀 오래 일한 사용인들은 하나 같이 안타까워하고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디엘라 아가씨께서 마력을 발현하셨다고?’


지금 당장 듀플레인 대공한테 달려가서 보고를 올려야 할 사안이었다. 아마 공작가 구성원들은 모두 뒤집어질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본채까지 직접 발걸음을 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이제 막 마력을 발현한 마법사들은 하루하루 늘어나는 성취에 온 정신이 고취되는 듯 한 느낌이 드는 법이다.

그 성취감에 한 번 매료되고 나면 홀린 듯이 스스로 마법단련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그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정만큼은 어지간한 고급술을 마시며 올라온 취기보다도 중독적인 법이다. 성장의 벽에 부딪히기 전까지는 다들 비슷한 양상이었다.


무려 듀플레인 가문의 대공녀가 아침부터 직접 발걸음을 한 이유도 납득이 갔다. 마법에 눈을 뜬 마법사들의 학구열이란 상상 이상인 것이다.

그리고 구태여 사용인들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는 이유도 알 듯 했다. 열중할만한 것을 찾아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카타리나는 반짝반짝 거리는 눈동자로 데릭을 보았다.

이 소년이라면, 이 지옥 같았던 망나니의 손길에서 사용인들을 구원해줄지도 모른다는 그런 마음이었다.

그렇게, 소년에게 뭐라 말을 하려던 순간-


“오후에 다시 오십시오.”


- 쾅!


피곤에 찌들어있던 데릭은 그리 통보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

“....”


닫힌 문 앞.

메이드장과 디엘라는 한참동안 정적 속에 서있어야 했다.


“뭐야?! 장난해?! 날 문전박대한다고?! 네가 뭔데?!”


이윽고 디엘라가 문을 쾅쾅 두들겨대며 언성을 높였지만, 데릭은 그대로 탐험할 때 쓰던 귀마개를 꽂은 뒤 다시 침대에 몸을 묻었다.

이미 스승을 둘이나 둬봤던 데릭은 알고 있었다. 사제관계라는 것은 결국 주도권이 스승에게 있어야 원활히 굴러가는 법이다.

제 아무리 대륙 제일가는 가문의 대공녀라 할지라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어쨌든 듀플레인 대공이 직접 전권을 내주지 않았나.


- 쾅! 쾅! 쾅!


- 문 열어! 문 열라고 당장!


시원하게 문을 두들겨대는 소리 속에서도 데릭은 숙면을 취할 준비가 끝나있었다.

숱한 용병생활을 하다보면, 소음 속에서 잠에 드는 기술쯤은 자연히 생겨나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던 메이드장 카타리나는 얼굴을 쓸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스승이든 제자든, 갈 때까지 간 독종들이었다.



*




“오늘 디엘라 아가씨는 식사를 하시면서 단 한 개의 접시도 깨부수지 않으셨습니다.”

“하, 한 번도 디엘라 아가씨한테 맞지 않았어요. 심기는 불편해 보이셨는데...”

“아침에 일어나셨을 때, 분명 그 손으로 마력을 다루고 계셨습니다.”



대공의 집무실 한 쪽 편의 탁자에 걸터앉아 있던 1공자 발레리안이 놀라운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턱을 짚고 있기에 입가는 보이지 않았으나, 슬쩍 커진 동공만으로도 그의 심리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대로 그는 집무용 책상에 앉아 있는 듀플레인 대공 쪽을 보고선, 눈을 맞췄다.

깃펜을 놀리던 대공은 잠시 내려놓은 뒤, 보고를 올리러 온 메이드들에게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인가?”

“예. 제가 여러 번 교차 검증을 하고 보고를 올리러 온 것입니다. 아무래도 디엘라 아가씨께선 드디어 마력을 발현하신 모양입니다.”

“들으셨습니까, 아버지. 다행이다. 참으로 다행이야.”


발레리안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물론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듀플레인 가문의 피를 타고 났는데, 마력 발현 좀 했다고 해서 경사인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간 디엘라의 행보를 생각해보면 이것만으로도 큰 호재였다.


“아버지. 제가 디엘라는 해낼 수 있다고 말했잖습니까.”

“확실히 진전이 있긴 한 것 같구나. 수도원을 보내는 것은 좀 보류하고, 상황을 지켜볼만한 가치는 있어 보인다.”


듀플레인 대공은 턱을 짚고서 생각에 빠졌다.


“허나,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아직 성취가 모자란 것 또한 사실이다.”

“아버지... 그래도 디엘라가 얼마나 애를 썼는데요. 그 사실을 감안해주세요.”

“그러니 수도원은 없던 일로 하지. 다만, 따로 저택을 증여해서 사교계 준비를 들어가는 건 별개의 이야기다.”


최소 1성급 마법을 하나 정도는 다룰 줄 알아야 어디 가서 마법을 쓸 줄 안다고 할만하다. 귀족들의 사회에서는 그게 당연했다. 그마저도 자랑스러운 게 아니고, 그냥 기본도 못하진 않는다는 것의 증명일 뿐이다.


“확실히, 마력을 발현한 건 축하할 일이지만 정신을 차렸는지는 아직 모를 일입니다. 아버지.”


그 때, 옆에 앉아 있던 레이그가 퉁명스러운 말을 뱉었다. 발레리안은 그 말을 듣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냐, 레이그.”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형님. 원래 처음 마력을 발현하고 나면 신이 나서 다른 게 눈에 안 들어오는 법입니다. 하지만 조금 진정하고, 다시금 상황을 인식하고 나면 언제 본성이 돌아올지 모르는 겁니다.”


마법사로서는 한 걸음 진보했을지 모르나, 귀족 영애로서는 제자리 걸음일지도 모른다. 레이그가 하는 말이었다.


발레리안이 레이그의 표정을 보자, 늘 그렇듯 굳건한 모습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레이그는 디엘라를 정말로 싫어했다. 옛날 순수했던 시절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망나니처럼 날뛰며 가족들에게 피해를 주는데 좋아하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발레리안도 그런 레이그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디엘라를 보듬어주는 발레리안이나 아이셀린이 대단한 것이지, 디엘라에게 실망을 품고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는 레이그를 탓하기도 뭣한 상황이었다.


“사람 본성 쉽게 안 변합니다, 아버지.”

“레이그. 그래도 진전이 있었다고 하니 디엘라를 조금 더 믿어봐 주면 안 되겠어?”

“형님 방식은 너무 무릅니다.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더 단호하게 가야죠. 수도원에 보내는 안건을 너무 쉽게 백지화 하지는 마십시오, 아버지. 그래야지 말을 듣습니다.”


듀플레인 대공은 다시 깃펜을 들고 서류에 밑줄을 그으며 이야기했다.


“레이그 말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니다. 그래도, 성취를 이뤄낸 것은 사실이니 조금은 무른 방침을 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아직은 좀 더 지켜보는 것이 좋겠군.”


레이그는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발레리안은 한결 편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듀플레인 대공은 그렇게 잠시 책상을 톡톡 두들기다가, 이윽고 고개를 숙인 채 서류에 집중했다.


‘그 평민 마법사놈. 범상치 않긴 하군.’


대공의 집무실 한복판에서도 기죽는 기색 하나 없이 따박따박 물어볼 때부터 범상치는 않다고 생각했었다.

허나, 범상치 않은 것과 실제로 결과를 내는 것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는 법이다. 듀플레인 대공은 마음속으로 데릭이라는 소년의 평가를 한 단계 격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그래도 결국은 평민이다. 그 출신성분에는 한계라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이에 비해 꽤 높은 경지에 이르긴 했지만, 아직은 그래봐야 평민의 영역인 것이다.


“디엘라 건은 그렇게 결론 내기로 하고,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다음 축일에 있을 회의다.”

“...벨투스 공작가와 벨미어드 백작가도 오겠군요. 듣기로는 벨투스 대공께서는 직접 행차하신다고 했고, 벨미어드 백작가는 가주 대리로 엘렌테 영애가 참석한다고 들었습니다.”

에벨스타인이 있는 제국 서방에서 가장 권위 있는 가문을 3개 꼽아보라면 다들 똑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벨투스, 듀플레인, 벨미어드다.

그 정도 영향력 있는 가문의 가주들이 한 자리에 모인다는 것 자체가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 에벨스타인 근방의 교역로 사업, 그리고 제국의 세법 변동에 따른 대응방안 따위를 의논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자리에 엘렌테 영애를 대리로 보낸다고? 핵심 가신들도 아니고?’


듀플레인 대공은 묘한 모멸감을 느꼈다. 다른 가주들이 한가해서 직접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만큼 중한자리기 때문이다.

허나, 벨미어드 변경백은 현명한 인물이다. 이게 크나큰 결례라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긴 했다.


듀플레인 대공은 그대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저런 식으로 깊은 생각에 빠지면 쉽게 헤어 나오지 않는 인물이기에, 두 아들들은 일찌감치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뭔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레이그는 집무실을 나섰다.

아무래도 그는 디엘라가 수도원으로 보내질 위기를 벗어난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



데릭은 숙면을 취하고 일어나서, 시녀들이 준비해둔 식사도 하고, 몸도 한 번 씻고, 바람도 한 번 쐬고, 차도 한 잔 했다.

그렇게 느지막한 오후가 돼서 별채를 향했더니, 완전히 뾰루퉁해진 디엘라가 침대 구석에서 자기 무릎을 안고 있었다.


“삐지셨습니까?”

“삐진 게 아니라 화난 거야.”

“그런 식으로 토라지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모든 것에는 다 순서가 있는 겁니다.”

“토라진 게 아니라 화난 거야.”

“마력을 발현했다고 신나서 달리다가는 순식간에 고갈되어서 드러눕게 됩니다. 다 경험해보고 말해드리는 겁니다.”


데릭은 디엘라의 침대 맞은편에 있는 탁자에 가서 목제 의자를 하나 빼왔다.

그리고 침대 옆에 대충 놓은 다음 그 앞에 앉아서 바지 끝단에 묻은 풀들을 탁탁 털어냈다.


“배우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게 규칙적인 휴식입니다. 무언가를 할 때는 항상 만전의 상태를 기해야 함을 잊지 마십시오.”

“데릭의 말을 듣고 있다 보면 꼭 고리타분한 교과서나 읽어대던 도덕 교사들 생각이 나.”

“,..그럼 고리타분하지 않은 방식으로 해드립니까?”


숲에서 고리타분하지 않은 방식으로 쫓겨 다니던 밤의 기억이 생각나서, 디엘라는 움찔 몸을 떨었다. 굳이 그리 스펙터클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됐어.”

“어쨌든 이 쪽으로 오십시오. 슬슬 마력의 발현을 연습하면서, 1성급 마법의 기초를 쌓아가야 합니다. 마법 배우고 싶은 거 아니십니까?”


자존심 센 디엘라는 한낱 평민 나부랭이의 요청대로 움직여야만 한다는 사실이 썩 맘에 들지 않았다.

소녀는 조심성 많은 고양이처럼 눈을 부릅뜨더니, 이내 그 풍성한 금발 머리칼을 몇 번 쓸어내리고서는 침대를 가로질러와 앉았다.


불만이 많은 듯한 세모 입을 하고서는 당장이라도 툴툴댈 것처럼 굴고 있었지만, 데릭이 손에서 마력을 발현하자 금방 영롱한 두 눈을 뜨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마력이 작용하는 방식이 자신의 가족들이 쓰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 빛깔도 다양했고, 요동치는 패턴도 다채로웠다.


“야생학파의 마법을 배우려면 일단 고정관념과 규율을 깨셔야만 합니다.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익숙해지면 혼자서 상급 마법들을 독학할 수 있게 되지요.”

“데릭은 전부 독학했어?”

“아니요. 저도 스승님이 있었습니다. 규율학파 계열의 스승님이셔서 절반은 독학했지만.”


데릭은 마력이 자유롭게 손 위에서 노니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런 식으로 자유롭게 기운을 다루는 것이 첫 번째 목표라는 사실을 확실히 각인시켜주었다.


“새, 생각보다 어려워 보이네.”

“괜찮습니다. 어차피 야생학파의 기본 기조는 독학을 중심으로 깔려있습니다. 체계가 없다는 건 이럴 때는 장점으로 작용하는 법입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기분 좋으라고 드리는 말씀이 아니고, 솔직담백하게 말씀드리자면 디엘라 아가씨는 재능이 좀 있는 편입니다.”


그 말에 디엘라가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내, 내가?”

“그간 노력의 방향이 좀 잘못되긴 하였으나, 암기한 마법 지식이나 여러 번의 실습들이 아예 무의미 하지는 않았지요. 애초에 마력을 인식하고 발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시작하자마자 냉기를 부여해서 얼음기둥을 만들어냈지 않았습니까.”

“으, 응...”

“그거 보통은 바로 못합니다. 조금만 다듬으면 1성급 마법이 될 겁니다.”


재능 있다.

그 말에 뭔가 한이라도 맺힌 듯, 소녀는 가만히 곱씹고 있었다. 소녀의 과거사를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재능이라는 그 짧은 한 단어에는 사람의 마음을 걸쭉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자만심이 되지 않는 선에서 자부심을 가지는 건 좋은 일입니다. 그러니 자부심을 좀 가지셔도 됩니다.”

“난 살면서 한 번도 자만해본 적 없어.”

“거짓말 하지 마십시오.”

“왜 이렇게 말을 신랄하게 해? 죽을래?”

“입도 너무 험하십니다. 품위를 좀 유지하세요.”


데릭은 손에 모인 마력을 휙 흩뿌리면서 시범을 종료했다.

이윽고 데릭의 시범을 보고 있던 디엘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직접 해보라는 뜻이었다.


한 번 보고 따라할 수 있는 그런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디엘라는 나름대로 자기 손에서 뻗어져 나오는 마력을 느껴보고자 열심히 힘을 썼다.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해가면서, 조금씩 자신에게 내재된 마력에 익숙해져가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확실히 진전이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재미있다.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꽤 오랜 시간 잊고 살았던 감각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입꼬리가 올라가 있기에, 디엘라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는 다시 새침한 표정을 지었다.


“화, 확실히 감은 좀 잡은 것 같네! 데릭 네 말마따나 난 좀 천재일지도.”

“...”


데릭은 턱을 괴고서 말했다.


“재능이 좀 있는 편이지, 천재라고까지는 말 안했는데요.”

“...너 진짜 비호감이다.”



*



그 뒤 디엘라는 틈이나는 대로 데릭에게 마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툴툴 거리다가도 금세 마법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과연 처음부터 이런 개망나니는 아니었었다는 사실이 실감이 가곤 했다.


매일 별채에서만 수업하는 것도 좀 그렇기에, 이따금씩 별채 옆의 장미정원이나 본채 쪽 정원에서 따사로운 햇빛을 받으며 수업하기도 했다.

시간이 좀 나면 저택 근처 숲이나 개울에 다니기도 했고, 그런 곳에서는 좀 규모가 큰 마법 따위를 시범으로 보여줄 수도 있었다.


이렇게 저렇게 왔다갔다 하다보니, 종종 돌아다니는 가신들이나 사용인들의 눈에도 띠곤 했다.


정원에서 걸어나가는 데릭의 뒤를 쫄래 쫄래 따라다니며 이것저것 따박따박 물어보고 있는 디엘라 영애의 모습이, 종종 옛날에 보던 그 모습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듀플레인 공작가의 별채에서도 곡소리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사용인들 입장에서는 이보다 감사할 수 없는 일이었던 셈이다. 정신을 차려보니 데릭은 저택 사용인들의 구세주 비스무리한 게 되어있었다.



“흠...”


듀플레인 공작가 차남의 개인 집무실.

디엘라에 대한 소문을 듣던 레이그는, 홀로 다리를 꼬고 앉아서 검지로 책상을 툭툭 두들기고 있었다.


디엘라에 대해서 호의적인 소문이 조금 돌고 있었으나,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디엘라가 이리 쉽게 갱생하리란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가장 악독하던 시절의 디엘라에게 크게 당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틈만 나면 으르렁 거리며 험담을 해댔고, 가장 아끼는 전속 사용인들을 괴롭혀서 내쫓곤 했다. 그 중에서는 레이그와 10년 넘게 함께한 인물도 있었다.

이제와서 개과천선 한다고 해봐야, 축적된 원한이 사라지는 일은 없다. 업보라는 건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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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엘렌테 (1) +45 24.04.18 27,678 1,083 23쪽
25 벨미어드 (5) +68 24.04.17 28,877 1,148 20쪽
24 벨미어드 (4) +69 24.04.16 29,354 1,183 20쪽
23 벨미어드 (3) +69 24.04.15 29,535 1,214 21쪽
22 벨미어드 (2) +67 24.04.12 30,904 1,146 17쪽
21 벨미어드 (1) +63 24.04.11 31,709 1,180 21쪽
20 여정 (4) +72 24.04.10 30,577 1,370 21쪽
19 여정 (3) +50 24.04.09 29,882 1,275 16쪽
18 여정 (2) +47 24.04.08 30,397 1,213 17쪽
17 여정 (1) +37 24.04.06 31,446 1,204 18쪽
16 사제 (6) +79 24.04.05 30,179 1,219 16쪽
15 사제 (5) +45 24.04.04 29,862 1,189 20쪽
14 사제 (4) +30 24.04.03 29,633 1,123 15쪽
13 사제 (3) +66 24.03.31 30,562 1,190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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