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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타 님의 서재입니다.

세상에 나쁜 영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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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타
작품등록일 :
2024.03.2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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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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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쪽

데릭 (3)

DUMMY

- [ 2성급 마법에 접근 가능해졌습니다. ]


- [ 2성급 마법 ‘환청’을 습득했습니다. ]




*



그 날 이후, 카티아는 본격적으로 데릭을 데리고 다니면서 이런저런 마법을 전수해주기 시작했다.

당초엔 기초적인 부분의 틀을 잡아주기만 할 예정이었으나, 데릭의 자질은 카티아의 예상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좋은 제자를 들이고 후진을 양성해보겠다는 그런 거창한 뜻을 품은 건 아니다.

카티아는 그저 데릭에게 다가올 큰 후환이 보였을 뿐이며, 그것을 모른 척 하기가 힘들었을 뿐이다.


"너도 구를 만큼 굴러봤을테니 잘 알겠지만, 용병으로 산다는 게 참 녹록치 않은 일이란다. 그래도 노하우라는 건 있는 법이야."


카티아는 자잘한 마물들을 잡는 의뢰들에 동행하거나, 자그마한 잡일들을 수월하게 처리하는 법도 알려주었다.

의뢰가 널널할 때는 에벨스타인 외곽의 풍경 좋은 곳을 함께 거닐기도 하였고, 품질 좋은 차를 같이 마셔보거나 시장 거리에서 식재료들을 함께 흥정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가능한 선에서 데릭의 견식을 최대한 넓혀주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틈나는 대로 데릭에게 마법에 관한 여러 지식들도 전수하곤 했다. 계절이 몇 번이고 바뀌는 동안, 데릭은 카티아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녀가 전하는 모든 것들을 빠르게 흡수해나갔다.


어느 새인가, 이 용병 바닥에서 초로의 여인과 그녀를 따라 걷는 어린 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알 사람들은 다 알게 되었다. 꽤 긴 시간이 흐른 셈이었다.

카티아는 그 긴 시간동안 데릭에게 과도한 재능은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꾸준히 강조해주었다.


“평민 출신 마법사 중에서 4성급 이상의 영역에 닿은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건 아니란다.”

“그래요...?”

“다만, 그 말로는 대부분 좋지 않아. 그러니 너도 항상 주의해서 처신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렴.”


4성급에 이른 마법사는 이름난 명문가에도 보통 두어 명 정도 밖에 없다.

단순히 좋은 혈통을 타고났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절대 아닌 것이다.


5성급까지 올라가면 한 가문의 가주 급이 되거나, 제국의 핵심 전력이 되고, 6성급은 아예 인류 역사에 몇 명 없는 수준이었다.


혈통 없는 평민의 영역은 제 아무리 비범하더라도 3성급까지다.

그 사실을 꼭 기억하라는 듯이, 카티아는 걱정스런 목소리로 데릭에게 속삭여주었다.


“귀족들은 보통 열여덟 살에 성인식을 치른단다. 성인식을 기점으로 1성급 마법을 뗀 상태면 재능이 괜찮은 편이라고 여기고, 2성급에 입문한 상태라면 가문의 어른들이 눈여겨보는 편이지.”

“...”


데릭은 이제 열 넷이었다.

그 성취가 가지는 의미를 데릭은 알아야만 했다.


그렇게 카티아는 상업구획의 가장 외곽에 있는 자그마한 자신의 집에 데릭을 데리고 돌아왔다.

허름한 방 한 칸에 짐은 거의 없었다. 여인 한 명이 살기엔 부족함이 없는 거처였지만, 호화찬란한 귀족가 저택에서 지내던 자의 보금자리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처량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런 생활에도 이미 익숙해진 카티아였다.

먼지가 풀풀 날리고 가재도구도 거의 없다. 용병은 언제 어디로 떠돌지 모르는 신분이므로, 항상 짐을 가볍게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딱딱한 목제 침대 위에 데릭을 앉혀놓은 채, 카티아는 삐걱대는 소리가 나는 의자에 걸터앉아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네 나이를 생각하고, 어디를 가든 함부로 마법을 쓰지 않도록 조심하렴. 사람이 많은 곳에선 1성급 마법만을 쓰는 게 좋을 거야. 그것만으로도 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성취란다.”

“스승님은 성인식을 치를 때 어느 정도까지 마법을 익히셨어요?”

“...내 성인식은 너무 먼 옛날이라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생각해보면 1성급 착란계 마법을 두어 개 정도 다룰 수 있었던 것 같구나.”


플레임하트 자작가는 마법명가로 이름을 날린 수준까지는 아니었어도, 귀족은 귀족이었다.

귀족들 중에서도 마법적인 실력을 꽤 인정받는 카티아가 성인식 때 그 정도였으니, 데릭의 마법 능력은 확실히 누가 보든 눈을 휘둥그렇게 뜰만한 것이었다.


“날 기준으로 삼는 건 명확하진 않을 거야. 당시에는 나도 막 성인이 된 여성이었으니, 마법에만 집중하기보단 훌륭한 영애가 되기 위한 교육을 더 많이 받았으니까.”

“플레임하트 자작가의 영애로 산다는 건... 역시 힘든 일이었나요?”

“귀족들 문화에 관심이 있는 거니?”

“...궁금하긴 하잖아요.”


카티아는 냉수를 한 모금 꿀꺽이고선,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데릭의 눈동자를 마주보았다.


순수한 호기심의 발로일까.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어른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소년이긴 하지만, 이럴 때는 또 그 나잇대 특유의 마구잡이식 호기심이 피어오르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세파에 찌든 이 어린 고아에게도 동심이라는 게 남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카티아는 그 모습에 묘한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면서, 한 꺼풀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귀족가 영애들에 대한 이야기는 시장 바닥이나 용병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많이 돌잖니?”

“그리 좋은 이야기는 많지 않았어요. 자고로 귀족 영애들은 열 명 중 다섯은 싸가지가 없고, 나머지 다섯은 머리에 꽃밭밖에 없다고 그러더라고요. 예의가 없거나, 현실 감각이 없거나, 둘 중 하나라는 이야기겠죠.”

“확실히 이해는 가는 말이긴 하지만, 그건 너무 가혹한 평가로구나. 살아온 환경이 다르면 가치관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거란다.”


늘 용병 일 얘기를 하거나, 마법 얘기만 하던 사제지간이다.

함께 이 살풍경한 용병 바닥을 노닐다보니 무겁고 우중충한 이야기만 주고받게 되지만, 때때로 그런 무거움도 내려놓을 때가 필요한 것이었다.


별하늘을 올려다보며 저 먼 신화시대의 이야기를 읊조려주거나, 자기 전 동화책이라도 읽어주는 것. 그런 아련한 유대를 동경이라도 하는 듯, 카티아는 지그시 내리깔린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


“대부분 그렇겠지만, 또 다들 그런 건 아니야.”

“스승님께서 귀족가에서 영애로 지내실 때는 좀 달랐나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비슷했지. 그 나잇대의 귀족 영애라는 아이들은 다 다른 것 같으면서도 비슷비슷한 부분이 있거든. 특히 성인식을 치를 때 쯤에 데뷔탕트도 준비하게 되니, 세상의 주인공이 자기인 것 같은 기분에 빠지곤 하지.”

“데뷔탕트요?”

“사교계에 입문하는 걸 말한단다.”


카티아는 목제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서는, 먼 과거를 추억하듯 이야기했다.


“예쁜 드레스를 차려입고, 숙녀의 예법으로 무장한 채 수도의 제국까지 가서 황제를 알현하는 거야. 그 뒤 자택에서 무도회를 열어 본격적으로 사교계에 데뷔했음을 성대하게 알리는 거지. 귀족가의 숙녀가 가장 화려함을 뽐내는 시기란다.”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아요.”

“그 시기 쯤 해서 귀족가의 영애들은 배우고 준비해야할 게 참 많거든.”


마치 동화책이라도 읽어주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카티아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대로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이젠 지나간 옛 풍경을 회상했다.


“우아한 자세와 걸음걸이, 고위 귀족들 간의 예절이나 에티켓. 또 대화의 풍성함을 위한 교양을 주로 익히곤 했지. 예술, 역사, 정치 등 다방면의 교양을 쌓아두어야만 했단다. 그 외에도 고상한 취미생활도 있어야만 했어. 꽃꽂이나 자수, 승마, 악기 연주 따위를 익히곤 했지.”

“...적성에 맞으셨어요?”

“전혀. 지금 이렇게 용병 생활을 하는 걸 보면 대충 예상이 가지 않니? 나는 말괄량이였단다.”


그 말에 데릭이 허탈한 듯 웃었다.

이 소년도 웃을 줄 아는구나. 그런 독백을 삼키고선, 카티아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 외에도 무도회에서 간단하게 맞춰서 출 수 있는 춤도 연습해야했고, 복잡한 가문의 역사와 가풍도 익혀야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마법이긴 했던 것 같구나.”

“그럴 것 같긴 했어요.”

“다만 귀족들의 마법은 데릭 네가 생각했던 것과는 좀 다르단다. 너는 실전지향적인 마법을 구사하겠지만, 귀족들의 마법엔 예법과 규율이 더 중시되거든.”


귀족들은 마법을 단순히 힘의 과시를 위한 수단이나 실용적인 도구만으로 여기지 않는다. 일종의 예술이자 고상한 취미 같은 것으로 여기는 느낌이었다.


주문을 영창할 필요가 있을 땐 시를 읊조리듯 한다.

마법진 또한 단순한 도형의 조합이 아닌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설계하곤 했고,

교본도 고급스러운 재질로 만들어졌고, 세련된 삽화와 더불어 우아한 문체로 서술되어있었다.


“...네 표정을 보니, 참으로 유난 떤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구나.”

“...티 났어요?”

“항상 실전 속에서 살았던 너랑은 좀 동떨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예법과 규율에도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어.”

“스승님이 그렇다고 하신다면, 저도 그렇게 생각해보려고 할게요.”

“아니, 됐어. 또 그렇게 억지로 생각을 맞추겠다고 말하면 내 입장이 이상해지잖니.”


그렇게 말하고, 잠시 데릭과 카티아는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가 동시에 픽하고 웃음을 흘렸다.


두 사람은 나이도 다르고, 출신 성분도 다르고, 가치관도 완전히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 속 깊은 부분들은 일맥상통하는 듯 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카티아는 로브 자락을 탁탁 털어 내리고서는, 한결 더 가벼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데릭. 이런 것들이 전부 허례허식이며 유난이라고 여기는 너도, 언젠가 한 번쯤은 다른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거야.”

“다른 생각이요?”

“품위를 갖춘 귀족가의 영애는 마치 피어나는 꽃처럼 보인단다. 그토록 많은 숙녀들이 모두 동경하며 손을 뻗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야.”


카티아는 데릭의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내리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언젠가, 너도 꼭 그걸 이해해주었으면 좋겠구나.”




*



“더 이상 네게 마법을 가르쳐 주기 힘들 것 같다.”


카티아와의 이별은 그 다음해에 찾아왔다.

늘 그렇듯 자잘한 의뢰들을 수행하고 카티아의 거처에 돌아왔을 때, 불현 듯 그런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


네게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 그런 의미가 내포된 것이라면 기쁜 일이겠지만, 데릭이 구사할 수 있는 2성급 마법의 가짓수는 아직 그대로였다.

다만, 기본기를 더 체계적이고 깔끔하게 다듬었기에 1성급 마법의 기술적인 완성도는 거의 완벽에 가까워져 있었다.

사용할 수 있는 1성급 마법의 가짓수도 눈에 띄게 늘어나있었으니, 조만간 2성급 마법을 깔끔하고 원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


카티아는 마음을 다부지게 먹은 듯 힘이 들어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누가 뭐라해도 그녀는 데릭을 가장 걱정하던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통보를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엘베스터 변경백으로부터 서신이 와있더구나. 백작령에 개인 교사로 날 추대하고 싶다고 요청을 보냈어.”

“엘베스터 변경백이라면...”

“그래, 동부 지방에서는 가장 유명한 영웅이지. 엘베스터 백작가의 영애가 사교계 데뷔를 위한 교육에 들어갔다고 하니, 스승이 필요한 모양이야.”


어디 자잘한 하급 귀족도 아니고, 수도의 대공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 엘베스터 변경백이다.

카티아의 입장에서는 쉬이 거절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비슷한 제안이라면 대부분 거절했지만, 설마 변경백이 직접 서신을 보낼 거라고는 생각을 못했구나. 아마 용병바닥에서 널 데리고 다니며 마법을 가르친 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퍼져 나간 거겠지.”


확실히 카티아 같은 스승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애초부터 출신 성분도 특이한 인물인데다가, 빈민가의 꼬마 아이 하나를 건실한 마법사로 만들어 놓았다는 살이 덧붙여졌을 터다.

그것은 데릭 본인이 비범한 마법적 재능을 가진 영향이 컸겠지만, 주변 인물들에게는 카티아의 공로로 보이기도 할 것이다. 실제로 데릭이 생각하기에도 그녀는 훌륭한 스승이 맞았다.


어쨌든, 제 삼자 입장에서 보자면 이런 경사가 또 없다.

엘베스터 백작가의 개인교사라면 돈도 명예도 충분히 보장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엘베스터 영지의 프레이아 백작 영애는 그 지방 사람들은 모두 알 정도로 단아하고 방정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이 내려준 축복에 가까운 일이다.


“...”


그럼에도 카티아의 표정이 무거운 이유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동부지방 사교계의 총본산이나 다름없는 엘베스터 백작저에 머물면서 빈민굴 출신의 천민을 대동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작별을 준비해야할 때였다.







그 뒤 에벨스타인을 떠나기 전까지 카티아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모아놓은 돈 중 일부를 털어서 데릭에게 간단한 장비들을 마련해 주었다.

평소에 쓰던 생활감 느껴지는 옷가지들이나 마법용품들이 아닌, 제대로 된 용병물품들이었다.


카티아가 사용하던 거처도 떠나기 전까지 데릭이 원하는 만큼 사용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었고, 간단한 마법이론이 적혀있는 마법서도 한 권 건네주었다.

마법적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서적은 그 가치가 귀하다. 당장 데릭의 이전 스승부터가 마법서를 훔치려다가 맞아죽었다.

데릭은 그 가치를 알고 있었기에, 책을 건네받고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정도 마법서는 몇 년 안에 금방 뗄 수 있을 거야. 직접 가르치는 것보단 덜하겠지만 네 습득력을 생각해보면 나쁘진 않을 테지. 완벽하게 습득한 것 같으면 내다 팔아서 자금에 보태렴.”

“스승님. 그래도 이건...”

“어차피 난 엘베스터 백작가에 들어가고 나면 금전적인 고민은 거의 하지 않아도 돼. 그러니 받아두렴.”


그렇게 두 달이 지나고, 백작령으로 떠나는 날.

짐을 전부 챙긴 카티아는 늘 입고 다니는 회백색 로브의 끝단을 잘 정리하고선, 단출한 짐이 들어있는 주머니를 챙겨들었다.


거처 앞 길가에는 늘 그렇듯 수많은 에벨스타인의 시민들이 어딘가로 발걸음을 향하고 있었다. 카티아도 그 사이에 섞여 부유하듯 이 도시를 떠날 것이었다.


두 달 동안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했지만, 여정 길을 앞두고 있는 카티아의 표정엔 여전히 근심이 서려있었다.

데릭을 돌아보며 무거운 마음을 드러내는 카티아에게, 데릭은 차분하게 웃어보였다.


“너무 그런 표정을 짓지 마세요. 스승님은 아무런 대가도 없이 몇 년이나 절 가르쳐 준 사람이잖아요.”

“데릭.”

“저를 보세요, 스승님.”


데릭은 양팔을 들어 올리고 보란 듯이 능청스럽게 이야기했다.

아직 열다섯 나이의 소년은 어른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이르다. 그럼에도 데릭은 빈민가를 굴러다닐 때에 비해 많이 건실해져있었다.


질 좋은 가죽으로 된 로브와 양모 튜닉, 깔끔한 바지에 버클이 번쩍이는 가죽벨트까지. 적어도 어디 가서 굶을 것 같은 인상은 절대 아니었다.


“전 이미 어른이에요. 제 앞가림은 할 수 있어요.”


한 없이 어린 나이임에는 변함없지만, 용병 주점 구석에서 싸구려 빵을 입에 우겨넣을 때와는 많이 달랐다.

그런 데릭을 보고 있으면 이 나잇대 아이에게서는 볼 수 없을 믿음직스러운 면모가 드러난다.


카티아는 조용히 자세를 낮추어 데릭의 어깨를 감싸 안아주었다.

그리고 나서 일러준 말은 데릭의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될 필요는 없단다. 데릭.”


가혹한 현실은 네게 빨리 어른이 되라고 종용해댔겠지만, 그런 진흙탕 속에서나마 품었던 동심을 꼭 기억하고 살아가렴.


그런 말을 남기고서, 카티아는 손을 흔들며 인파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또 봬요.”


데릭은 조용히 손을 흔들며 그녀를 떠나보냈다.



*



그렇게 카티아와 작별을 고한 데릭은 그녀가 사용하던 거처로 조용히 돌아왔다.

문을 닫고 들어오니 자그마한 공간에 목제 침대 하나와 허름한 탁자 하나, 그리고 고요만이 남겨져 있었다.


이런 고요를 의식해본 것은 이런 세계로 날아온 뒤로는 처음이었다. 예전부터 이 세계는 데릭에게 있어서 그저 옛날에 했던 게임의 일부였을 뿐이다.

허나, 지금에 와서는 이 곳이 이미 하나의 세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


목제 머그잔에 냉수를 담아 몇 모금 들이키고 탁자 앞 의자를 빼서 앉았다.

그렇게 시간이 멈춘 듯 한 정적 속에서 잠시간 가만히 앉아있었다.


이윽고 한 번씩 창문을 타고 넘어오는 소리들.

동네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 상인들의 짐마차가 다각다각 지나가는 소리. 정오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 길 건너 빵집 주인이 가게 앞을 빗자루질 하는 소리.


카티아는 떠났음에도, 세상은 여전히 활기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스승의 부재는 가슴 속에 작은 공허함을 남겼지만, 여전히 세상은 흘러가고 삶은 계속되는 것이었다.


그런 잡다한 세파의 잡음 속에서, 홀로 멍하니 방에 앉아있던 데릭은 이윽고 마법서를 꺼내어 펼쳤다.


- 사각, 사각, 사각.


책장이 물 흐르듯 넘어가고 있었다.

세월 또한 마찬가지였다.









[ 습득 마법 일람 ]


✦ 전투 마법


★☆☆☆☆☆ 마력 화살

★☆☆☆☆☆ 전력 발현

★★☆☆☆☆ 화염구



✦ 변환 마법


★☆☆☆☆☆ 빛 생성



✦ 착란 마법


★☆☆☆☆☆ 소리차단

★★☆☆☆☆ 환청



✦ 소환 마법


★☆☆☆☆☆ 소환 - 길잡이 요정



✦ 탐색 마법


★☆☆☆☆☆ 방향 감지

★★☆☆☆☆ 투시





- 탁.


데릭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마법 일람들을 살피며 마법서를 덮었다.


“...슬슬 나가야지 단장 아저씨한테 시간을 맞출 수 있겠네.”


오랜 시간 매일 일과처럼 해오던 마법서 탐독을 마치고, 오후에 잡아놓은 의뢰 약속에 나가기 위해 테이블에서 일어섰다.


대충 입에 샌드위치 하나를 우겨넣은 채, 가죽부츠의 끈을 묶고선 나가는 문을 열었다. 대낮의 태양빛이 데릭의 거처에 스며들어왔다.


단 1년 동안, 데릭은 2성급 마법을 두 개 더 독학해냈다.


그 나이 고작 열여섯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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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3성급 (3) +93 24.05.03 25,237 1,097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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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엘렌테 (4) +58 24.04.29 24,004 1,151 25쪽
28 엘렌테 (3) +65 24.04.22 27,676 1,120 19쪽
27 엘렌테 (2) +44 24.04.19 28,362 1,068 23쪽
26 엘렌테 (1) +45 24.04.18 27,803 1,086 23쪽
25 벨미어드 (5) +68 24.04.17 28,996 1,149 20쪽
24 벨미어드 (4) +69 24.04.16 29,470 1,183 20쪽
23 벨미어드 (3) +69 24.04.15 29,650 1,214 21쪽
22 벨미어드 (2) +67 24.04.12 31,021 1,147 17쪽
21 벨미어드 (1) +63 24.04.11 31,815 1,182 21쪽
20 여정 (4) +72 24.04.10 30,684 1,373 21쪽
19 여정 (3) +50 24.04.09 29,987 1,279 16쪽
18 여정 (2) +47 24.04.08 30,499 1,218 17쪽
17 여정 (1) +37 24.04.06 31,557 1,207 18쪽
16 사제 (6) +79 24.04.05 30,280 1,224 16쪽
15 사제 (5) +45 24.04.04 29,966 1,190 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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