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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디아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 국가와 파혼했다

웹소설 > 자유연재 > 로맨스, 판타지

윤마리
작품등록일 :
2021.05.12 12:49
최근연재일 :
2021.07.20 14:07
연재수 :
3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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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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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글자수 :
211,414

작성
21.07.08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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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35.운명의 굴레를 벗어난다면(4)

DUMMY

“......네?”


지금껏 아버지의 말에 단 한 번도 대들거나 반문한 적이 없는 블랑슈였지만, 이번만큼은 놀라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요? 저...이분이?”


“그래. 곧 정식으로 약혼을 공표할 생각이다. 곧 왕궁 개방 행사도 있고 하니, 결혼식은 그 이후에 치르는 편이 좋겠지.”


블랑슈는 어안이 벙벙해서 제 아버지를 한 번, 바리 백작을 한 번 돌아보았다.


결혼을 하라고? 갑자기? 이렇게 나이 많은 사람과?


“잠깐만요, 아버지. 결혼이라니, 이게 무슨.......”


“이 아비가 심사숙고 끝에 맺은 혼담이다. 너의 미래와 가문의 번영을 위해서 내린 결정이니, 아무 말 말고 따르거라.”


라미앙 후작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덤덤해서, 흡사 거래처에 미리 예정되어 있던 내용을 통보하는 것 같았다.


블랑슈는 멍하니 바리 백작을 쳐다보았다. 납득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좀처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라미앙 후작가는 전통적으로 여성에게는 작위를 물려주지 않는다. 때문에 블랑슈도 자기가 언젠가 다른 집안으로 시집간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이렇게 갑자기, 이렇게 불쾌한 방식으로 실현될지는 몰랐다.


“앞으로 바리 백작이 약혼자로서 너의 보호자 역할을 할 거다. 그리 알고 시집갈 때까지 몸가짐을 바로 하도록 해라.”


“아버지, 저는.......”


“이미 결정된 사항이다. 그러니 불평 말고 따르거라. 내가 말했지 않느냐,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게 여자의 의무라고.”


라미앙 후작은 손을 휘휘 내저은 뒤 서류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더 이상의 반박은 불허하겠다는 표시였다.


바리 백작이 블랑슈에게로 성큼 다가왔다.


블랑슈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떨자, 백작이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 모습은 품위 있는 귀족이라기보다는 시장의 난봉꾼 같았다.


“후작님께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블랑슈 양. 듣던 대로 참 아름다우시군요. 왕궁 개방 행사에서는 제가 약혼자로서 그대를 에스코트할 겁니다.”


마음속이 두려움과 혐오감으로 요동쳤지만, 블랑슈는 얼마 안 되는 연기력을 전부 끌어모아 간신히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백작님께서는......재혼하시는 건가요?”


정략결혼하는 이들 사이에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건 흔했지만, 삼십 대 후반이면 이미 블랑슈만한 딸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바리 백작이 요란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것 참, 염려 마십시오. 그대가 내 첫 번째 신부니까요. 아마 블랑슈 양을 만나야 해서 지금까지 결혼을 못했나 봅니다.”


현실적으로 작위까지 있는 귀족 남자가 사십이 가깝도록 결혼을 못 했다는 건, 뭔가 큰 하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블랑슈가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 있자, 바리 백작이 주름진 손으로 블랑슈의 갈색 머리카락 끝을 덥석 움켜잡았다.


“기쁘지 않습니까, 블랑슈 양? 나와 결혼하면 그대는 바리 백작부인이 되는 겁니다.”


백작의 축축한 입술이 블랑슈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어쩌면 그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를 수도 있고요.”


그리고 블랑슈의 아버지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 표정을 한 채 그저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블랑슈는 치맛자락을 꼭 쥐었다.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하는데 자꾸만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인사는 그만하면 됐소. 블랑슈 넌 이만 가 보거라. 가정교사가 올 시간이다.”


라미앙 후작의 말에 블랑슈는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바리 백작의 손아귀에서 그녀의 갈색 머리카락이 스르르 빠져나왔다.


백작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그럼 다음에 뵙지요. 예비 백작부인.”


블랑슈는 도망치듯 응접실을 떠났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바리 백작도 라미앙 후작도 그녀를 굳이 붙잡지 않았다.


자기 방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블랑슈는 좀처럼 진정할 수가 없었다.


항상 아버지의 결정에 군말 없이 따르던 블랑슈였지만, 이건......이번만큼은 정말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결혼상대를 스스로 고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블랑슈는 존경해 마지않는 아버지가 틀림없이 자신을 젊고 훌륭한 남자와 짝지어 줄 거라 믿었다.


저렇게 보기 싫은 남자가 신랑감으로 낙점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블랑슈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꾸만 불쾌한 느낌이 온몸을 뒤덮었다. 다가올 결혼식에 대한 긴장감이라기엔 너무 오싹하고, 불길한 감각이었다.


문득 제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게 딸의 의무다.’


물론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문장이 이렇게 선명하게, 이렇게 섬뜩하게 피부로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블랑슈는 눈을 꼭 감았다. 어린 동생을 위해 스스로 매춘부가 되었다던, 이제는 생테티엔 가의 영애가 되었을 잔의 언니가 생각났다.


마리, 설마 너도 코르티잔이 될 때 이런 기분이었어?


정말 이게 맞는 거야?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 새 계절은 완전한 여름이었다. 무성히 우거진 신록이 왕궁을 푸른빛으로 뒤덮었다.


나는 빡빡하게 짜인 수업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궁 안팎의 정보를 수집하고, 다가올 행사를 준비하느라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냈다.


왕궁 개방 행사를 주관하는 건 오를레앙 공작부인이었지만, 내가 공주로서 접대해야 할 손님들도 제법 많았다.


대표적으로 행사 둘째 날 다과회에 참석할 손님들이 그랬다.


이번 다과회는 열다섯 살에서 스무 살 사이의 미혼 여성들을 위한 자리로, 왕궁 문이 열리는 기간 동안 내가 유일하게 단독으로 주최하는 행사였다.


“이날 다과회에 오는 손님들은 전부 저녁 연회에도 참석하는 거지?”


“네. 시간은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조정하시면 됩니다. 여기, 참석 예정자 명단입니다.”


나는 시녀가 건네준 참석 명단을 건성건성 읽었다.


솔직히 이날은 점심엔 공개 오찬, 저녁엔 연회가 예정되어 있는 터라 내가 주최하는 다과회는 별로 중요한 행사가 아니었다.


아예 행사에 나타나지 않고 손님들을 헛걸음하게 만들면 어떨까?


잠깐 궁리하던 나는 곧바로 생각을 접었다.


이번 행사에는 국내의 유명인사들뿐만 아니라 외국의 귀빈들도 다수 참석했다. 섣불리 행동했다간 외교적 결례가 될 뿐더러, 국가의 명예를 실추시킬지도 몰랐다.


가급적이면 나라에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알렉상드르의 신뢰만 떨어뜨려야 했다.


나는 속으로 고민하며 손님 명단을 쭉 훑었다. 그런데 명단에 뜻밖의 이름이 하나 들어가 있었다.


바리 백작.


나는 이 작위의 주인을 떠올리기 위해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아마도 사십이 가까운 나이의 별 인맥이 없는 가난한 귀족이었다.


이 다과회는 내 또래의 미혼 여성들만을 위해 마련된 모임이었다. 참석자 중 남자라고는 소녀들의 보호자 또는 약혼자밖에 없었다.


딸도 친척도 없고, 여성들에게 인기도 없는 바리 백작이 올 이유가 없었다.


“이 사람은 왜 손님 명단에 있는 거지?”


내가 바리 백작의 이름을 짚으며 묻자, 명단을 건네준 시녀가 대답했다.


“라미앙 후작님의 영애를 에스코트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블랑슈가?”


바리 백작은 나이도 너무 많고, 소문에 의하면 외모도 성격도 별로였다. 십대 후반의 소녀가 에스코트를 받고 싶어할 남자는 아니었다.


블랑슈 같이 좋은 집안의 영애라면 에스코트하고 싶어하는 남자가 줄을 설 텐데, 왜 굳이 바리 백작이랑 다과회에 오는 거지?


내 의문은 뒤따른 시녀의 소곤거림으로 인해 풀렸다.


“저, 그게...이분과 블랑슈 양이 곧 약혼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진짜야?”


“아직 공식적으로 공표되지는 않았지만, 궁정에 드나드는 귀부인들 사이에는 이미 공공연하게 퍼져 있는 사실이라고 합니다.”


어떤 두 사람이 연애한다는 소문은 대다수가 헛소문이었지만, 두 집안의 자제가 약혼한다는 소문은 어지간하면 진실인 경우가 많았다.


만약 이 소문이 거짓이라면, 궁정 귀족인 라미앙 후작은 절대 가만있지 않았을 거다. 때문에 지금으로선, 블랑슈와 바리 백작이 약혼한다는 소문이 라미앙 후작 본인의 의도와 일치한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라미앙 후작이라면 좀 더 좋은 집안과 혼맥을 맺을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이런 애매한 위치의 귀족을 사윗감으로 골랐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튼 지금은 다과회 준비부터 마무리하는 게 순서였다.


나는 그 의문점을 참석자 명단과 함께 한쪽 구석으로 밀어 두고, 이런저런 행사를 검토하느라 난장판이 된 실내를 가리켰다.


“일단 이것들은 치우고, 주방에 가서 파티시에를 불러오너라.”


내 말에 시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책상 위에 흩어진 서류들, 여기저기 걸쳐진 드레스들, 뚜껑이 활짝 열린 보석함들을 정리했다.


나는 방을 정리하는 시녀들을 별 감흥 없이 지켜보았다. 그런데 불현듯 낯선 얼굴 하나가 내 시선을 잡아당겼다.


“잠깐만!”


나는 처음 보는 시녀를 불러 세웠다.


곧 여신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나를 마주했다. 소녀라고 하기엔 다소 원숙한 인상이었고, 귀부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렸다.


그림처럼 고운 턱선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도 물론 완벽했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혹적인 분위기가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화장도 꾸밈새도 수수했지만 그녀는 그런 거 없이도 유독 눈에 띄었다.


나는 잠시 그녀를 관찰하다가 나긋나긋한 말투로 물었다.


“너는 못 보던 얼굴인데...어디 소속이냐?”


젊은 시녀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미리 인사드리지 못해서 송구합니다, 공주 전하. 저는 베르탱 백작부인을 보좌하는 시녀로 어제 새롭게 입궁했습니다.”


“그렇구나. 이름이 뭐지?”


“마리 앙투아네트 드 생테티엔이라고 합니다.”


생테티엔. 전에 들어본 것 같긴 하지만 영 낯선 성씨였다. 아마도 별볼일없는 남작 가문 출신인 모양이었다.


“그래, 알았다. 앞으로 궁에 잘 적응했으면 좋겠구나.”


“감사합니다, 공주 전하.”


내가 손을 휘휘 내젓자, 생테티엔 남작 영애가 뻣뻣하게 긴장한 자세로 물러났다.


나는 어느 새 깔끔해진 책상 위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베르탱 백작부인 밑에는 이미 직속 시녀들이 많을 텐데, 이젠 안살림 권한도 공작부인에게 넘어간 마당에 새로 아랫사람을 들일 필요가 있나?


그러자 금세 생각이 바쁘게 머릿속에서 달음박질쳤다.


생테티엔 남작은 상식적으로는 자기 딸을 궁정 시녀로 들여보내기는커녕, 본인이 궁정에 자주 출입할 신분도 안 되는 하급 귀족이었다.


그런 남자가 기어코 양녀를 들여 왕궁의 시녀로 밀어넣었다.


지금 수도의 사교계는 국왕이 정부를 고른다는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벌써 대놓고 메트레상티트르 자리를 노린다는 여인들도 수두룩했다.


하필 지금, 생테티엔 남작은 외모가 출중한 소녀를 양녀로 들였고, 베르탱 백작부인은 그 소녀를 자신의 보좌관으로 추천했고, 오를레앙 공작부인은 그 추천을 받아들여 생테티엔 남작 영애를 왕궁 시녀로 들였다.


그리고 최근 클로비스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이 셋은 모두 라미앙 후작과 한패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건 틀림없이 자기 사람을 궁의 안주인으로 앉히려는 라미앙 후작의 술수가 분명했다.


나는 방을 나가는 생테티엔 남작 영애의 뒷모습을 힐끔 쳐다보았다.


아직 자신감은 부족해 보였지만 자세도 걸음걸이도 완벽했다. 얼핏 봐서는 태생이 귀족인지 평민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거기다 외모 하나만큼은 어디서든 단연 눈에 확 띌 정도로 출중했다.


알렉상드르가 과연 저 여자를 마음에 들어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렇지만 만약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보인다면, 라미앙 후작은 그녀를 메트레상티트르에 앉히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막아야 했다.


나는 방을 마지막으로 나서는 어린 시녀에게 재빨리 지시했다.


“너, 폐하께 가서 오늘 저녁식사를 함께 해도 되겠냐고 정중히 여쭤보아라. 바쁘신 줄 알고 있지만 꼭 뵙기를 원한다고.”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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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37.운명의 굴레를 벗어난다면(6) 21.07.15 13 0 13쪽
36 36.운명의 굴레를 벗어난다면(5) 21.07.09 13 0 12쪽
» 35.운명의 굴레를 벗어난다면(4) 21.07.08 16 0 12쪽
34 34.운명의 굴레를 벗어난다면(3) 21.07.07 13 0 12쪽
33 33.운명의 굴레를 벗어난다면(2) 21.07.06 11 0 13쪽
32 32.운명의 굴레를 벗어난다면(1) 21.07.01 15 0 12쪽
31 31.왕실의 안주인(8) 21.06.30 15 0 12쪽
30 30.왕실의 안주인(7) 21.06.29 11 0 12쪽
29 29.왕실의 안주인(6) 21.06.22 14 0 13쪽
28 28.왕실의 안주인(5) 21.06.21 11 0 12쪽
27 27.왕실의 안주인(4) 21.06.18 17 0 12쪽
26 26.왕실의 안주인(3) 21.06.17 12 0 13쪽
25 25. 왕실의 안주인(2) 21.06.16 11 0 12쪽
24 24. 왕실의 안주인(1) 21.06.15 16 0 12쪽
23 23.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8) 21.06.14 16 0 9쪽
22 22.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7) +1 21.06.11 20 1 11쪽
21 21.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6) +1 21.06.10 24 1 12쪽
20 20.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5) 21.06.09 20 2 11쪽
19 19.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4) 21.06.08 18 2 12쪽
18 18.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3) 21.06.07 17 1 12쪽
17 17.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2) +1 21.06.04 22 1 12쪽
16 16.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1) 21.06.03 21 1 12쪽
15 15. 사생아의 데뷔탕트(7) +1 21.06.02 26 3 12쪽
14 14. 사생아의 데뷔탕트(6) 21.06.01 18 0 12쪽
13 13. 사생아의 데뷔탕트(5) 21.05.31 23 1 12쪽
12 12. 사생아의 데뷔탕트(4) 21.05.28 21 0 12쪽
11 11. 사생아의 데뷔탕트(3) 21.05.27 22 1 14쪽
10 10. 사생아의 데뷔탕트(2) 21.05.26 21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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