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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디아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 국가와 파혼했다

웹소설 > 자유연재 > 로맨스, 판타지

윤마리
작품등록일 :
2021.05.12 12:49
최근연재일 :
2021.07.20 14:07
연재수 :
3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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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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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글자수 :
211,414

작성
21.06.10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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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12쪽

21.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6)

DUMMY

시녀들의 입이 실룩거렸다. 다들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게 얼굴에 온전히 드러났다.


나는 그들의 반응을 못 본 척, 일부러 찻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이건 이제 가져가. 좀 쉬고 싶어.”


“네, 공주 전하.”


시녀들이 고분고분하게 다과상을 치우고 물러났다. 나는 휴게실을 나서는 그들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왕궁의 시녀와 시종들에겐 전부 비밀스런 연결고리가 존재했다. 그건 1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동쪽 궁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으면, 적어도 몇 시간 안에 그 이야기는 서쪽 궁의 끝까지 퍼져나갔다.


이제 저 시녀는 종달새처럼 돌아다니며 오늘 들은 이야기를 전할 것이고, 그 이야기는 틀림없이 오늘 안으로 헤르데르 백작의 귀에도 들어갈 터였다.


그의 불안감을 최대한으로 증폭시키는 것, 그래서 왕이 제 아내를 정부로 들일지도 모른다고 믿게 만드는 것, 그게 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그래야 백작과 클로비스의 처우를 두고 협상을 할 수 있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소문이 잠잠해지기 전에 모든 계획을 끝내야 했다.


하지만 내겐 백작의 심경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그의 불안감이 충분히 증폭되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자극했다간, 오히려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시녀들이 종종 사교계 정보를 물어다 주었지만, 나는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필요 이상으로 믿을 수가 없었다.


믿을 만한 측근 시녀가 하나쯤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퍼뜩 죽음 이전의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내가 가장 믿었던 나의 배신자, 그가 정성들여 끓여다 준 독이 든 죽, 그와 모두 한통속이었던 내 신하, 내 시녀들......!


“우욱......!”


갑자기 무언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나는 급히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숨을 삼켰다. 토해낼 것이 없는데 자꾸만 속에서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화려한 침실 안이 갑자기 끔찍할 정도로 갑갑하게 느껴졌다.


누굴 믿는단 말인가? 내가? 이 배신과 음모가 가득한 궁정 안에서?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나는 다리를 모아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고 숨을 들이쉬었다.


괜찮아. 다 지나간 일일 뿐이야. 생각하지 마. 잊자, 잊어버리는 거야.


나는 최선을 다해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배신의 기억을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으려고 기를 썼다.


그때,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어 창문을 돌아보았다.


새였다. 예쁜 깃털도 날카로운 부리도 없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초라하고 작은 새. 그 새는 발목에 하얀 종이 매듭 하나를 달고 있었다.


내가 창문을 휙 열어젖히자, 창턱에 앉은 새가 기다렸다는 듯 다리를 내밀었다.


종이 매듭은 지난번 것과 달리 제법 크고 두꺼웠다. 나는 빠른 손놀림으로 새의 다리에서 매듭을 풀어 종이를 펼쳤다.


편지의 서두는 아주 간결하고 직설적이었다.


「에스텔. 며칠간 블랑슈에게 사교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해서 정리해 보냅니다.」


거친 종이의 재질, 작지만 힘찬 글씨체, 존칭을 생략한 첫머리, 깔끔한 말투, 모든 게 지난번에 왔던 편지와 똑같았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편지의 내용은 놀라웠다. 공주를 모시는 시녀들도 모르는 사교계의 정보가, 고작 종이 한 장에 깨알같이 쓰여 있었다.


수도의 사교계 전체에 헤르데르 백작부인에 관한 추문이 돈다는 것, 평소 백작 부부를 싫어했던 파벌이 앞장서서 소문을 부풀렸다는 것, 그걸 알아챈 헤르데르 백작이 며칠 전 하급 귀족들에게 역정을 냈다는 것.


귀부인들 사이에 도는 헤르데르 백작부인이 왕의 정부가 될지도 모른다는 의혹, 그것을 둘러싼 귀족 여성들의 파벌 싸움, 그리고 블랑슈가 국왕이 진짜로 메트레상티트르를 선발할지도 모른다고 은밀히 소곤거린 일까지.


궁 안에서는 알 수 없었던 수많은 정보들이 편지 한 통에 모두 들어 있었다.


온갖 귀중한 정보가 아낌없이 쏟아진 편지의 내용은, 꾹꾹 눌러 쓴 단 한 문장으로 끝났다.


[저를 기억하십니까?]


정갈하고 힘 있는 글씨체로 적힌 다른 부분에 비해, 유독 그 문장만큼은 글자가 삐뚤삐뚤하고 잉크가 군데군데 튀어 있었다.


불안에 떨며, 수신인 서명도 생략하고, 내게 이런 질문을 할 만한 단 한 사람.


클로비스였다. 이 편지는 그의 것이 틀림없었다.


배신당했던 기억이 일시에 흩어졌다. 채 사라지지 않았던 불안감이 순식간에 눈 녹듯 사라지고, 따스한 자신감이 그 빈자리를 채웠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여기 있다.


그가 특별히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알고 지낸 시간이 많아서 신뢰가 가는 것도 아니다. 단지 내가 그의 존재를 담보로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놓고도 나는 지난번 편지를 의심했다. 나를 이렇게 헌신적으로 돕는 사람을, 내가 유일한 희망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의심했다.


눈물 한 방울이 똑, 편지에 떨어졌다.


따뜻한 눈물이 마지막 문장 끝을 적셨다. 물에 젖은 글자가 번져서 뭉그러졌다. 갈고리 모양이 망가진 물음표가 태연스럽게 묻는 것 같았다.


뭘 그렇게 의심해? 뭘 그렇게 걱정이 많아?


나는 흐려진 글자들을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래, 할 수 있어. 틀림없이 클로비스를 내 곁으로 데려오고 말 거야.


나는 서랍을 뒤져 희고 질 좋은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깃펜에 잉크를 찍어, 단번에 답장을 써내려갔다.


[클로비스. 미안해. 편지는 잘 받았어. 지금 널 꺼내 줄 방법을 찾는 중이야. 조금만 기다려.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 거야.]


실은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를 내 곁으로 데려오는 게 급선무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모두 털어놓아도 되리라.


나는 편지 마지막 줄에 내 이름 머리글자를 꾹꾹 눌러 쓴 다음, 편지를 접어 비둘기의 다리에 묶었다. 비둘기는 곧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날아갔다.


비둘기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자, 나는 다른 종이를 꺼내 편지 한 통을 더 썼다.


*


[염려하시는 문제에 대해 의논하고자 합니다. 오늘 자정에 수선화 정원의 테라스로 나와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에스텔 엘리자베트 마리 엘렌.]


헤르데르 백작은 편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아주 직관적이고 간결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그는 도무지 이 편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편지는 ‘피에트라어’로 쓰여 있었다. 철자도, 문법도 정확했다. 그리고 편지 아래쪽에 적힌 이름은 분명 공주의 것이었다.


공주 전하께서, 피에트라어에 이렇게 능숙하셨던가?


애초에 엘렌드릴에서는 피에트라어를 구사하는 사람을 좀처럼 보기 힘들었다. 거기다 그가 알기로, 에스텔 공주는 원래 외국어에 재능이 있는 편도 아니었다.


거기다 ‘염려하는 문제’라니, 그는 에스텔 공주에게 자기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최근 백작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당연히 젊은 아내에 관한 소문이었다.


공주의 다과회 이후로, 사교계엔 국왕 폐하와 헤르데르 백작부인이 비밀연애 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평소라면 단순한 헛소문이라 여기고 잊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하필 국왕에게서 직접 정부 후보를 물색해 달란 명을 받은 뒤라, 도저히 소문을 그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의 아내는 젊고 아름다웠다. 사교계 경력도 화려하고, 나이 든 남편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여러모로 왕이 탐낼 만한 여자였다.


그런 그의 아내가, 정원에서 왕과 단 둘이 산책을 했다. 심지어 에스텔 공주가 직접 왕에게 백작부인의 에스코트를 부탁했다고 했다.


막상 그의 아내는 왕과 관련된 추문을 걱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약간 즐기는 눈치였다. 그 모습이 헤르데르 백작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사실과 소문이 섞여 불쾌한 상상을 만들어냈다. 망상에 망상이 꼬리를 물고, 불안감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하지만 백작은 왕실 시종이라는 위치 때문에, 치미는 불안감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서만 끙끙 앓아야 했다.


그런데 지금 공주의 편지는 흡사 그의 고민을 다 알고 있다는 말투였다. 심지어 같이 의논하자고까지 말하고 있었다.


헤르데르 백작은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편지를 가져온 시녀를 돌아보았다.


“이걸 정말 공주 전하께서 보내셨느냐?”


“네. 기다렸다가 꼭 답장을 받아 오라고 하셨습니다.”


백작은 시녀를 한 번, 공주의 편지를 한 번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의 주군은 메트레상티트르가 갖춰야 할 덕목으로 희한한 조건을 제시했다. 하나뿐인 딸과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일 것.


다시 말해, 이번 정부 선발에 에스텔 공주가 보이지 않는 심사위원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그의 고민을 해결해 줄지도 몰랐다.


헤르데르 백작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마침내 펜을 들었다. 시녀가 답장을 갖고 돌아가기까지는, 채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


시계가 열한 시를 쳤다.


나는 헤르데르 백작이 보내온 답장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편지에는 다른 질문 없이 오직 승낙의 뜻만 간단히 적혀 있었다.


모든 게 계획한 대로 착착 돌아가고 있었다.


사실 클로비스를 라미앙 후작의 손아귀에서 빼내오겠다는 계획은, 원래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불가능한 게 맞다. 딸린 식솔들의 거취를 결정하는 건 온전히 가주의 권한이니까.


유일한 방법은 클로비스를 왕궁에서 일하게끔 하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이미 궁에서 일하는 귀족의 추천이 필요했다.


헤르데르 백작은 하급 귀족 하나 정도는 자기 보좌관으로서 궁정에 데려올 수 있는 거물이었고, 마침 젊은 아내의 사랑을 받지 못하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나는 난데없이 다과회를 열어 왕실과 가까운 귀족들을 모조리 초대했다. 그리고 헤르데르 백작부인을 일부러 내 아버지와 마주치게 만들었다.


예상대로 백작부인은 국왕과의 교류를 은근히 반겼고, 사람들은 그런 그녀를 사교계의 뼈다귀로 삼아 열심히 물어뜯었다.


클로비스가 편지로 알려준 정보에 따르면, 이미 백작부인과 국왕의 관계에 대한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진 상태였고, 때문에 헤르데르 백작은 평정심이 깨진 게 외부로도 티가 날 정도로 미친 듯이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헤르데르 백작과 담판을 짓는 일뿐이었다.


나는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심호흡을 했다.


그때 창가에서 푸드덕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열린 창문 앞에 전에 봤던 그 비둘기가 어느 샌가 앉아 있었다. 비둘기의 발목에서 하얀 종이 매듭이 반짝였다.


벌써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고? 이렇게 빨리?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본능적으로 종이 매듭을 풀어 편지를 펼쳤다.


[저를 꺼내 주신다니,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당신께 부담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저 스스로 여기서 나가 보겠습니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글씨 크기가 들쑥날쑥했다. 서체가 어지럽고 군데군데 잉크 얼룩도 튀어 있었다. 불안에 떨면서 썼다는 게 티 나는 편지였다.


그는 지금, 자기 존재가 내게 폐를 끼칠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나는 깃펜과 종이를 꺼냈다. 그리고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주 정갈하고 또렷한 글씨체로 답장을 완성했다.


[널 다시 데려올 거야. 반드시.]


나느 일부러 ‘반드시’라는 글자를 꾹꾹 눌러 썼다.


편지를 접어 비둘기의 다리에 묶자, 비둘기는 금세 내 손을 떠나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저 편지는 나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었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사흘 안에, 그 다짐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만들 작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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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33.운명의 굴레를 벗어난다면(2) 21.07.06 11 0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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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9.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4) 21.06.08 18 2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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