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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디아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 국가와 파혼했다

웹소설 > 자유연재 > 로맨스, 판타지

윤마리
작품등록일 :
2021.05.12 12:49
최근연재일 :
2021.07.20 14:07
연재수 :
39 회
조회수 :
912
추천수 :
45
글자수 :
211,414

작성
21.06.11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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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22.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7)

DUMMY

수선화 정원은 캄캄하고 고요했다. 아직 꽃이 만개할 시기가 아니었기에, 밤에는 좀처럼 정원에 불을 환하게 밝혀 놓지 않았다.


시녀들 몰래 혼자 나온 나는, 캄캄한 정원 한가운데서 혼자 손님을 기다렸다.


얼마 후 드디어 기다리던 발소리가 정적을 깼다. 고위 귀족다운, 규칙적이고 품위 있는 발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그 발소리에서 미묘한 불안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


나는 부채로 반쯤 얼굴을 가린 채 헤르데르 백작을 맞았다.


“공주 전하를 뵙습니다.”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헤르데르 백작님.”


약식 인사를 올린 백작이 나를 마주보았다. 나는 흐릿한 조명 아래 드러난 백작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진짜 속마음이 어떻든 간에, 그의 표정은 평소처럼 차분하고 품위가 넘쳤다.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셨습니까?”


나는 가식적으로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백작님께서 요즘 염려하시고 있는 문제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서죠. 저도 그 문제에 대해 지금 걱정이 많거든요.”


헤르데르 백작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자, 나는 더없이 나긋나긋한 말투로 그의 역린을 쿡 찔렀다.


“백작부인께서는 잘 지내시나요?”


밤의 호수처럼 고요했던 백작의 표정에 순간 파문이 일었다. 그러나 그는 쉽게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혹시 요즘 수도에 떠도는 이야기 때문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 부부는 문제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헛소문은 금방 사라질 겁니다.”


나는 눈썹을 한껏 치켜세우며 되물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럼 제가 걱정해야 될 이유라도 있습니까?”


아주 잠깐, 백작의 눈동자에 불안감이 스쳐지나갔다. 나는 능청스럽게 부채를 팔락이며 말을 이었다.


“음...저는 당연히 백작님께서 근심이 크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버지께서 헤르데르 백작부인을 정부로 삼는 걸 진지하게 고려하고 계시니까요.”


그 말에 견고하던 백작의 표정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게 무슨......!”


“어머, 정말 모르셨나요?”


나는 순진한 척 눈을 깜빡였다. 백작의 눈매가 마구 일그러졌다. 그의 목소리에서 온갖 감정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공주 전하께서,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얼마 전에 아버지께서 절 부르셔서 그 이야기를 하셨거든요. 메트레상티트르를 들일까 생각 중인데, 헤르데르 백작부인이 후보로 적합한 것 같다고.......”


헤르데르 백작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아니야...그럴 리가 없어.......”


“지난번 제가 다과회를 열었을 때, 아버지께서 저 대신 잠시 백작부인을 안내하셨거든요. 아마 그때 부인을 무척 좋게 보신 모양이에요.”


“그럴 리가 없어!”


별안간 백작의 외침이 공기를 흔들었다.


나는 놀라서 얼른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근방에 엿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겨우 평정심을 되찾은 후작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송구합니다, 공주 전하.”


“아니에요.”


나는 상냥하게 대답하곤, 곧바로 본론을 향해 대화를 틀었다.


“지난번 다과회 이후에, 아버지께서 갑자기 저한테 헤르데르 백작부인이 궁정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물으시더라고요. 제 진지한 의견을 듣길 원하셨어요.”


백작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헤르데르 백작부인께선 분명 친절하고 좋은 분이에요.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척을 하며 그를 마주보았다.


“백작님께선, 그래도 괜찮으신가요?”


헤르데르 백작은 이를 악물었다. 꽉 쥔 주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나는 백작이 생각을 정리하기 전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왕실에서 오래 일한 시종답게, 그는 이 대화의 목적을 단박에 눈치채곤 바로 본론으로 직행했다.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나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싹 거두고 진지하게 말했다.


“백작님을 보좌하는 하급 귀족 중 한 사람이 지난달에 그만둔 걸로 알고 있어요. 제가 그 빈자리를 채울 만한 사람을 하나 알고 있는데.”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클로비스 드 오르슈팡 남작이에요.”


헤르데르 백작이 문득 미간을 좁혔다.


“오르슈팡 남작이라면...라미앙 후작의 사생아 말씀이십니까?”


“네, 맞아요.”


나는 내가 진심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초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백작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내가 이런 부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치였다.


물론 나는 그 이유를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때문에 나는 백작의 의문을 해소해 주는 대신, 그의 불안감을 더 증폭시키는 쪽을 택했다.


“백작님도 아시다시피, 아버지께선 한 번 결심하면 좀처럼 마음을 바꾸지 않는 분이세요. 더군다나 십 몇년 만에 처음으로 정부를 들일 생각을 하신 거잖아요. 아마 설득하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겠죠. 어쩌면 제게 실망하실지도 모르고요.”


전부 사실과는 매우 어긋나 있는 소리였지만, 나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백작님께서도, 절 위해 조금만 힘써 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처럼 이야기했지만, 실은 협박이었다.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간 당신의 아내가 진짜로 남의 정부가 될 거라는 협박.


헤르데르 백작은 침을 삼키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백작님.”


“왜 하필 오르슈팡 남작입니까?”


합리적인 의문이었다. 클로비스 드 오르슈팡은 사교계 경험이 많지도, 공주에게 청탁을 할 수 있을 만큼 인맥이 넓지도 않았다.


그에게 걸린 저주 탓일까, 우리가 밀회를 나눴다는 소문 역시 예상보다 크게 퍼지지 못하고 금방 사그라들었다. 공식적으로 그와 나 사이에는 아직 어떤 접점도 없었다.


당연히 헤르데르 백작 입장에선 내가 왜 하필 그를 추천하는지 이해가 안 될 터였다.


나는 잠깐 망설였다. 어차피 소문을 퍼트리려고 위장연애를 하는 거, 지금 헤르데르 백작에게 그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해버릴까?


그러나 나는 얼른 그 생각을 접었다. 헤르데르 백작은 훌륭한 시종답게 입이 무겁고 왕에 대한 충성심도 깊었다. 잘못하면 내가 밀회를 즐긴다는 사실이 추문으로 퍼지지 못한 채 알렉상드르의 귀에만 들어갈지도 몰랐다.


따라서 나는 진실을 아주 조금만 말하기로 했다.


“제 친구와 약속한 게 있거든요. 그것까지만 말씀드릴게요.”


그 친구는 물론 클로비스 드 오르슈팡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진심을 다해 한 가지를 약속해 주었다.


너를 반드시 되찾겠다고.


헤르데르 백작은 잠깐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수선화 정원에 침묵이 흘렀다. 고작 몇 분 동안의 침묵이었지만, 나에겐 그 시간이 꼭 며칠처럼 길게 느껴졌다.


얼마 후, 드디어 백작이 내가 고대하던 대답을 내놓았다.


“알겠습니다.”


나는 치미는 기쁨을 간신히 억눌렀다.


“공주 전하의 추천이라면 믿을 만하겠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돌연 헤르데르 백작이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우리는 미소나 가식 없이 그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대신 공주 전하께서도, 꼭 약속을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걱정 마세요, 백작님.”


하나씩 짜맞춰 놨던 모든 계획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


-에른스트.


달처럼 빛나는 금발, 유리구슬처럼 영롱한 눈동자, 꾀꼬리의 아침 노래처럼 가늘고 사랑스러운 목소리.


소년, 에른스트는 숨이 턱에 찰 만큼 달려와 드디어 소녀를 마주했다.


-에른스트? 진짜로 너야?


소녀가 환하게 웃자 햇살이 주변에 내려앉았다. 그 미소가 너무도 사랑스러워서, 에른스트는 숨이 가쁜 것도 잊고 따라 웃었다.


“응, 나야. 오래 기다렸지?”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이제 준비는 다 끝났어. 나랑 같이 가자.”


-같이?


“그래, 같이.”


에른스트는 의기양양하게 소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소녀가 그의 손을 휙 뿌리쳤다. 따스했던 공기가 순간 싸늘하게 식었다.


-누가 같이 가? 내가? 너랑?


소녀는 코웃음을 치더니 곁에 있던 다른 남자의 손을 잡았다.


-꿈도 꾸지 마. 난 이 남자와 결혼하기로 했어.


남자가 의기양양하게 소녀를 자기 쪽으로 끌어 당겼다. 검은 머리카락을 단정히 넘기고, 휘황찬란한 예복을 입은 남자였다. 그는 에른스트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에른스트는 절망에 휩싸여서 물었다.


“테레즈, 그게 무슨 소리야?”


소녀는 그를 단호하게 밀쳐내곤 손을 흔들었다.


-난 이 사람과 같이 떠날 거야. 너는 나한테 어울리지 않아. 잘 있어, 에른스트.


“가지 마, 테레즈!”


에른스트는 간절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시린 바람 말고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포근했던 햇살이 그의 곁에서 훌쩍 떠나 버렸다.


별안간 소녀를 붙잡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바뀌었다.


칠흑색 외투를 뒤집어쓴 그 남자는, 뼈다귀 손에 날카로운 낫을 들고 있었다. 검은 모자 안에서 앙상한 해골이 눈을 번뜩였다.


“안 돼, 안 돼. 테레즈. 제발 가지 마. 안 돼!”


필사적으로 울부짖으며 소리쳤지만, 소녀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에른스트는 문득 자기 발밑이 축축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였다. 검붉은 피가 그의 발밑을 흥건하게 적셨다.


고개를 돌리자 전신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건장한 청년, 가녀린 처녀, 어린 소년과 소녀. 하나같이 모두 앳된 얼굴이었다. 그들이 쏟아낸 선혈이 한데 모여 발밑에 거대한 웅덩이로 고였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도련님?


한 청년이 구슬프게 웃자 피가 입에서 주르륵 흘러내렸다. 뒤이어 다른 사람들도 피 한 모금에 말 한 마디씩을 토해냈다.


-꼴좋게 실패하셨네요, 저희를 다 죽여 놓고서는.

-그래 놓고 혼자만 살아남으셨군요.

-도련님 때문에 우리는 다 이렇게 됐어요. 어때요, 보기 좋아요?


피 웅덩이가 늪처럼 에른스트를 삼켰다. 겁에 질린 그는 사력을 다해 팔을 허우적거리며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다가오지 마라. 내 탓이 아냐. 다 너희들 탓이란 말이다.”


그러나 망령들의 피와 원망은 좀처럼 멎지 않았다.


-그거 알아? 너 때문에 우린 이렇게 됐어.

-뭘 위해서 아직도 살아 있는 거야?

-우리를 죽게 만든 건 너야.

-왜 우릴 도와주지 않았어? 왜 우릴 구해주지 않았어? 왜!


“아니야!”


순간 에른스트는 비명을 지르며 번쩍 눈을 떴다.


“허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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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35.운명의 굴레를 벗어난다면(4) 21.07.08 16 0 12쪽
34 34.운명의 굴레를 벗어난다면(3) 21.07.07 13 0 12쪽
33 33.운명의 굴레를 벗어난다면(2) 21.07.06 11 0 13쪽
32 32.운명의 굴레를 벗어난다면(1) 21.07.01 15 0 12쪽
31 31.왕실의 안주인(8) 21.06.30 15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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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9.왕실의 안주인(6) 21.06.22 14 0 13쪽
28 28.왕실의 안주인(5) 21.06.21 11 0 12쪽
27 27.왕실의 안주인(4) 21.06.18 17 0 12쪽
26 26.왕실의 안주인(3) 21.06.17 12 0 13쪽
25 25. 왕실의 안주인(2) 21.06.16 11 0 12쪽
24 24. 왕실의 안주인(1) 21.06.15 16 0 12쪽
23 23.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8) 21.06.14 16 0 9쪽
» 22.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7) +1 21.06.11 21 1 11쪽
21 21.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6) +1 21.06.10 24 1 12쪽
20 20.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5) 21.06.09 20 2 11쪽
19 19.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4) 21.06.08 18 2 12쪽
18 18.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3) 21.06.07 17 1 12쪽
17 17.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2) +1 21.06.04 22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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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3. 사생아의 데뷔탕트(5) 21.05.31 23 1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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