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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디아 님의 서재입니다.

나는 국가와 파혼했다

웹소설 > 자유연재 > 로맨스, 판타지

윤마리
작품등록일 :
2021.05.12 12:49
최근연재일 :
2021.07.20 14:07
연재수 :
39 회
조회수 :
915
추천수 :
45
글자수 :
211,414

작성
21.06.02 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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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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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2쪽

15. 사생아의 데뷔탕트(7)

DUMMY

‘소문’이라는 단어에 가까스로 달아오르던 심장이 식었다.


나는 애써 차분히 숨을 골랐다.


이건 계획일 뿐이다. 나는 왕위계승권을 내려놓기 위해, 그는 사람들의 뇌리에 뚜렷이 각인되기 위해 세운 계획의 일부.


나는 그를 마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마침 또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누가 또 오네.”


나는 침착하게 중얼거렸다. 이번엔 물러서라는 뜻이 아니었다. 클로비스는 내 말을 알아들은 듯 아까보다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제 그와 나 사이는 고작 한 뼘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무심코 한 손을 그의 목에 갖다 댔다.


클로비스는 물러나지 않고 두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쭉 뻗었다.


곧 누군가 파우더룸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잠깐 실례하겠습니.......”


그 순간, 내 입술과 그의 입술이 맞닿았다.


닫혀 있던 두 입술이 빗장을 열고 서로 맞물렸다. 그의 따스한 숨결과 내 떨리는 숨결이 한데 섞였다. 촉촉한 물소리가 정적을 채웠다.


몇 초 후 나는 후다닥 그에게서 입술을 뗐다. 문 쪽을 돌아보자, 웬 하녀 한 명이 경악한 표정으로 우리를 보고 있었다.


“뭐야?”


나는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가, 이내 크게 분노한 척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버러지 같은 게...뭘 훔쳐보고 있어? 당장 꺼져.”


“죄...죄송합니다!”


하녀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나는 뒷걸음질치는 그녀를 덥석 붙잡았다.


“너.”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싸늘하게 내리깔았다.


“이 일을 어디 소문내기라도 하면, 혀가 잘려 궁에서 쫓겨날 줄 알아라.”


“네...네!”


겁에 질린 하녀가 몸을 거의 반으로 접었다. 내가 채 쫓아내기도 전에, 그녀는 순식간에 파우더룸 밖으로 줄행랑을 쳤다.


클로비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너무 겁주신 거 아닙니까? 소문을 내는 게 우리 목적이잖아요.”


나는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


사용인들 입단속이 그렇게 간단하면, 전생에서 내가 그토록 많은 추문에 시달릴 일도 없었을 거다.


“얘기하기 싫어도 얘기하게 될 거야. 사람들은 이런 자극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니까.”


“뭐, 충분히 자극적이기는 하네요.”


클로비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입매가 씰룩거리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그의 입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잘했어.”


말을 내뱉은 순간, 나는 깜짝 놀라 얼굴을 확 붉혔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순간 클로비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잠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이내 짓궂게 웃으며 화답했다.


“전하께선 더 훌륭하셨습니다.”


나는 붉어진 얼굴을 확 돌리며 그를 흘겨보았다. 그런데 별안간 문 밖에서 귀에 거슬릴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주 전하! 공주 전하! 어디 계십니까!”


베르탱 부인의 직속 시녀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나를 찾는다는 건, 진짜 심각한 상황이 벌어졌다는 의미였다.

나는 빠르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가봐야겠어.”


클로비스가 덤덤하게 중얼거렸다.


“얼른 가십시오. 저도 잠시 후면 라미앙 후작의 거처로 돌아가야 합니다. 후작이 펄펄 뛰며 저를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그 말을 듣자 정수리에서부터 찬물이 와르르 쏟아진 것 같았다. 거처로 돌아가면, 후작은 틀림없이 사생아 아들에게 오늘 일에 대한 보복을 할 터였다.


그렇다고 후작의 눈치를 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클로비스를 라미앙 후작의 영향권에서 빼내 오는 게 급선무였다.


나는 클로비스를 마주보며 분명하게 다짐했다.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을게.”


그가 달콤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언제까지고 기다릴 테니, 걱정 마십시오.”


다시금 간질거리는 공기가 파우더룸을 꽉 채웠다. 나는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외침에 집중하며 간신히 표정 관리를 했다.


내가 소리 없이 파우더룸을 빠져나가자, 문이 스르르 닫혔다.


복도는 파우더룸 내부와 다르게 몹시 차갑고 고요했다. 내가 세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시녀가 나를 발견하곤 헐레벌떡 달려왔다.


“공주 전하! 대체 어디 계셨던 겁니까?”


“드레스랑 머리가 좀 흐트러져서 정리하고 있었어.”


“어서 무도회장으로 돌아가시죠. 국왕 폐하께서 찾고 계십니다.”


그 사이 또 다른 하녀가 닫힌 파우더룸 문 앞으로 다가갔다. 하녀가 문고리를 잡으려고 손을 뻗자마자, 나는 빽 소리를 질렀다.


“뭐 하는 거야?”


일부러 꾸미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놀란 하녀가 같은 자세 그대로 입만 움직여서 대답했다.


“파우더룸을 정리해 놓으려고.......”


“안 돼!”


나는 다급히 하녀를 제지했다.


“내가 쓰던 곳이야. 오늘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들여보내지 마.”


“예? 하지만 다른 손님들도 쓰셔야.......”


“어디서 감히 말대답이지?”


내가 눈을 치켜뜨자 하녀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주위에 있는 시녀, 하녀들을 슥 둘러보며 단단히 일렀다.


“누구든 저 안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무도회가 끝나고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모두가 순순히 물러나는 걸 보고 나서야, 나는 휙 돌아섰다.


물론 정말로 무도회 내내 아무도 저길 못 들어갈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잠깐의 틈만 있으면, 클로비스는 알아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내가 바라는 건, 내 말을 듣고 불타오를 시녀들의 호기심, 좀 더 정확히는, 그 호기심이 만들어낼 근거 없는 소문이었다.


공주님이 저 안에 뭘 숨겨 놨을까?


무슨 짓을 했기에 이렇게 필사적으로 하녀들을 막으려고 할까?


어때, 흥미롭지?


자, 가서 모두에게 전해. 그 하녀를 만나서 말을 맞춰. 소문이 더 자극적으로 변해서, 그를 더 많은 사람이 기억할 수 있도록.


나는 슬쩍 웃으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만하면 성공적인 데뷔탕트였다. 그러나 내겐 아직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았다.


*


새벽 세 시가 되어서야 무도회는 완전히 끝났다.


먼 곳에서 온 손님들이 먼저 왕궁을 떠나고, 왕궁에 거주하는 귀족들도 하나 둘 국왕에게 하사받은 거처로 돌아갔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데뷔탕트였다. 그러나 그 뒷수습이 문제였다. 아니나 다를까, 클로비스가 후작의 거처로 돌아왔을 땐 모든 면에서 끔찍한 상황이 그를 반겼다.


“대체 네가 왜 그 자리에 있었던 거냐.”


분노로 부글거리는 후작의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클로비스는 시선을 살짝 올려 아버지와 이복동생을 바라보았다.


서재 안, 라미앙 후작이 고풍스러운 흑단나무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꼿꼿이 허리를 편 그는 마치 망자를 기다리는 저승의 군주 같았다. 그 오른편에는 잔뜩 신경질이 난 블랑슈가 죄인을 기다리는 악마처럼 서 있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있자니, 흡사 지옥에 끌려와 심판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이미 수없이 겪어온 일이라, 그는 능숙하게 아버지의 분노에 대처했다.


“국왕 폐하께서 절 초대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대? 널 무도회에 데려갈지 말지는 내가 정한다. 꿈도 꾸지 말고 조용히 방에 틀어박혀 있으라고 했을 텐데.”


“혹시나 폐하께서 절 찾으시기라도 하면 아버님께서 곤란하실까 봐 염려했습니다. 제 나름대로 생각해서 내린 결정인데, 오히려 아버님을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라미앙 후작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사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만일 클로비스가 무도회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국왕을 기만한 죄로 왕궁 거주권을 박탈당했을 수도 있었다.


하필 왜, 그 자리에서 왕이 클로비스의 존재를 떠올렸단 말인가.


애초에 국왕이어도 수많은 귀족의 식솔들을 전부 다 알지는 못한다. 사생아는커녕 당당한 적자도 왕의 기억에 남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런데 어떻게 왕이 한낱 남작을 기억할 수가 있지? 작위만 내려줬을 뿐, 단 한 번도 사교계에 정식으로 소개한 적이 없는 사생아를?


한참 꽉 막혀 있던 후작의 머릿속을 뚫어 준 건, 오늘 아버지보다 더한 수모를 당한 그의 외동딸이었다.


“아버지, 공주 전하께서 제 뺨을 치셨어요. 얘가 감히 공주님과 춤을 춘 걸로도 모자라, 그분과 제 사이를 이간질했다고요.”


딸의 쫑알거림이 후작의 머릿속에 확 불을 밝혔다.


생각해 보니 처음 오르슈팡 남작의 존재를 언급한 건 국왕이 아니라 공주였다.


외국에서 온 왕비를 똑 닮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궁을 떠난 적이 없는 공주, 그녀가 클로비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래, 맞아. 네가 공주에게 춤을 청했었지.”


별안간 후작이 클로비스를 향해 눈을 치켜떴다.


“너, 예전에 에스텔 공주를 만난 적이 있느냐?”


클로비스의 어깨가 순간 굳었다. 일전에 예전 생과 다음 생의 경계에서 만난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걸 과연 후작의 기준에서 ‘만났다’고 할 수 있을까?


짧은 고민 끝에, 클로비스는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거짓말하지 마라! 만난 적이 없는데 왜 공주가 난데없이 네 이야기를 해!”


갑자기 후작의 화가 확 치솟았다. 물처럼 고요히 끓던 그의 감정이 한순간에 뜨거운 불길이 되어 제 아들을 덮쳤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공주에게 춤을 신청한 거냐? 너 따위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감히 에스텔 공주의 손을 잡아!”


“죄송합니다, 아버지.”


“입 다물어!”


후작이 주먹으로 책상을 쾅 하고 내리쳤다.


“너 같은 게 에스텔과 말을 섞은 것 자체가 잘못된 거야!”


순간 클로비스는 퍼뜩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무리 사적인 자리지만, 공주를 호칭도, 작위도 아닌 이름으로 부르다니?


그러나 그의 시야에 들어온 건 아버지의 경멸 가득한 표정뿐이었다.


“불결한 사생아 따위가.......”


라미앙 후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모습을 감추고 있던 건장한 하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책상 주위로 달려왔다.


후작이 클로비스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명령했다.


“이 놈을 당분간 다락방에 가두고 식사로 검은 빵과 감자만 주어라.”


“예, 주인님.”


하인들이 클로비스를 우악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방 밖으로 끌려 나가기 직전, 후작은 클로비스를 향해 매섭게 경고했다.


“너, 앞으로 공주 옆에 얼씬도 말아라.”


클로비스는 저항 한 번 하지 않고 순순히 다락방으로 끌려갔다.


식객보다 못한 도련님이 질질 끌려가는 소리에 귀족 출신인 시종들은 킥킥 웃었고, 평민 출신인 하인들은 쯧쯧 혀를 찼다.


하인들은 계단 꼭대기에 있는 다락방까지 도련님을 끌고 갔다.


다락방은 창문이 없었고 천장도 불안할 정도로 기울어 있었다. 하인들은 방 안에 클로비스를 대충 던져 넣고 문을 걸어 잠갔다.


클로비스는 대충 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이미 각오했던 일이었다. 매질을 당하거나 당장 몰래 밖으로 쫓겨나지 않은 걸로만 해도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여기에 얼마나 갇혀 있어야 할까? 며칠? 몇 주? 몇 달? 그 생각을 하니 또다시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그때까지 과연 사람들이 날 기억해 줄까?


클로비스는 본능적으로 장갑을 벗고 오른손을 들여다보았다. 잠깐 사이에 약간 투명해지긴 했지만, 손은 여전히 제대로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아직 나를 기억하고 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단 한 사람만 나를 기억해 주면 된다.


클로비스는 꽉 쥔 주먹을 가슴께에 가져다 댔다. 어느 틈에 빨라진 심장소리가, 다락방을 가득 채울 것처럼 선명히 들려왔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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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36.운명의 굴레를 벗어난다면(5) 21.07.09 13 0 12쪽
35 35.운명의 굴레를 벗어난다면(4) 21.07.08 16 0 12쪽
34 34.운명의 굴레를 벗어난다면(3) 21.07.07 13 0 12쪽
33 33.운명의 굴레를 벗어난다면(2) 21.07.06 11 0 13쪽
32 32.운명의 굴레를 벗어난다면(1) 21.07.01 15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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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30.왕실의 안주인(7) 21.06.29 11 0 12쪽
29 29.왕실의 안주인(6) 21.06.22 14 0 13쪽
28 28.왕실의 안주인(5) 21.06.21 11 0 12쪽
27 27.왕실의 안주인(4) 21.06.18 17 0 12쪽
26 26.왕실의 안주인(3) 21.06.17 12 0 13쪽
25 25. 왕실의 안주인(2) 21.06.16 11 0 12쪽
24 24. 왕실의 안주인(1) 21.06.15 16 0 12쪽
23 23.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8) 21.06.14 16 0 9쪽
22 22.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7) +1 21.06.11 21 1 11쪽
21 21.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6) +1 21.06.10 25 1 12쪽
20 20.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5) 21.06.09 20 2 11쪽
19 19.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4) 21.06.08 18 2 12쪽
18 18.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3) 21.06.07 17 1 12쪽
17 17.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2) +1 21.06.04 22 1 12쪽
16 16. 그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1) 21.06.03 21 1 12쪽
» 15. 사생아의 데뷔탕트(7) +1 21.06.02 28 3 12쪽
14 14. 사생아의 데뷔탕트(6) 21.06.01 18 0 12쪽
13 13. 사생아의 데뷔탕트(5) 21.05.31 23 1 12쪽
12 12. 사생아의 데뷔탕트(4) 21.05.28 21 0 12쪽
11 11. 사생아의 데뷔탕트(3) 21.05.27 22 1 14쪽
10 10. 사생아의 데뷔탕트(2) 21.05.26 21 1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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