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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빙 님의 서재입니다.

팔황마녀와 백팔납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어가빙
작품등록일 :
2023.07.20 01:20
최근연재일 :
2023.08.27 07:05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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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29
추천수 :
203
글자수 :
157,600

작성
23.07.20 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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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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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6화 : 내자불선(來者不善-③)

DUMMY

“휘친이 스스로 이름을 버리고 고독인을 자처한 사실을 모르느냐? 천애고독인의 진명(眞名)이 바로 휘친이다!” 


이에 추조가 안색을 달리하며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떤다.

몰랐던 사실이기도 하거니와 본인조차 알지 못했던 망사의 진명까지 파악한 자라면 십중팔구 명령동부와 관련된 인물일 터이기 때문이었다. 


‘어떡한다? 이 자가 우연히 여기까지 온 게 아니었구나. 망사께서 이르길 본 신선부와 명령동부는 그야말로 세불양립이라고 했는데 이 거란인의 행태를 보니 틀림없이 그쪽 사람일 것이다!’ 


추조가 비록 천애고독인의 모든 정수를 이었다고는 하나 아직 미숙한 부분이 많았고 무엇보다 내공을 마음껏 쓸 수 없는 상태인지라 더욱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하여 하는 수 없이 모르쇠로 일관하는 추조. 


“천애고독인? 그건 또 뭐요, 먹는 거요?”

“의뭉을 떠는구나. 설마하니 노부가 여기까지 오면서 아무 신식도 없이 왔겠는가. 네 놈은 이 야율치린이 어떤 인간인지 정말로 들어보지 못한 모양이구나!” 


그러면서 손발을 번개같이 움직여 추조의 완맥을 움켜쥐려는데 어디선가 들려온 외침 하나가 그의 동작을 순식간에 얼어붙게 했다. 


“치린! 누구의 명을 받고 함부로 손을 쓰는가!” 


외침이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검은 입의 입구 위에서 이쪽을 내려다보는 일군의 무리가 있음을 확인한 야율치린은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아쉬워한다.

때를 같이해 자줏빛 가사를 걸친 호리호리한 체형의 라마승이 무리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와 소리친다.


“천산의 양치기로 평생을 산 아이가 네가 누군 줄 어찌 알겠느냐? 너는 애먼 사람을 괴롭히지 말라!” 


목소리를 들어보니 조금 전 야율치린을 항한 외침도 이 라마승의 입에서 나온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이에 야율치린이 결코 그렇지 않다는 듯한 눈매로 반박한다.  


“쌍걔(티벳말로 부처를 뜻함), 이놈은 틀림없는 휘친의 제자요. 회흘의 양치기는 이곳까지 올라오는 법이 없다고 들었소. 그리고 행색을 보시오. 마을에서 숙식하는 놈이 저렇게까지 꾀죄죄할 리가 없잖소!” 


“그만하라! 저 아이의 진짜 정체가 무엇인지는 오로지 영후(嶺后)께서 판단하실 일이다. 너는 감히 그녀의 면전에서 목소리를 높일 셈인가!” 


이 말에 화들짝 놀란 야율치린이 대뜸 고개부터 조아리며 하소연한다. 


“그, 그럴 리가. 쌍걔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는 거요? 지금까지 이 야율치린이 그녀의 뜻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본 적 있소? 낭빠(티벳말. 불문의 제자를 이름)로서 사람 목숨을 갖고 희롱함은 온당한 처사가 아니외다.” 


이에 쌍걔라는, 과분한 호칭으로 불리던 라마승이 껄껄 웃으며 오른손을 치켜들자 뒤쪽의 무리 중에서 또 한 사람의 라마승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마치 작은 동산처럼 느껴질 만큼 엄청난 거구였는데 특이하게도 장정 한 사람은 족히 들어갈 크기의 커다란 항아리를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쌍걔가 이윽고 거구의 라마승, 아니 그가 짊어진 검은색 항아리를 향해 머리를 조아린다. 


“영후, 일어나셨습니까?” 


하지만 항아리에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에 쌍걔가 다시 고개를 조아리며 물으려는데 돌연 미약한 말소리가 항아리로부터 새어 나왔다.

재빨리 항아리에 제 귀를 갖다 대는 쌍걔. 잠시 그러고 있던 쌍걔가 어느 순간 숙였던 허리를 펴며 추조를 굽어본다. 


“영후께서 보자고 하신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추조는 이 일군의 무리가 명령동부와 관련이 있음을 이미 짐작했고 이들의 행태가 오만불손하매 아까부터 그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의 처지를 망각하고 이들과의 일전을 불사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아 그저 관망할 따름이었는데 갑자기 자신을 호명하는 소리를 듣자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졌다. 

이때 쌍걔가 항아리에 제 뺨을 다시 갖다 대더니 그 안의 인물이 이르는 말을 서너 번의 고갯짓으로 경청한 다음 추조를 향해 허리를 편다.


“영후께서 물으셨다. 너는 휘친의 제자인가?” 


추조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번에 잡아뗀다.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요? 휘친이건 천애고독인이건 나는 만나본 적이 없소!”  


추조의 입장에선 무조건 잡아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쌍걔가 항아리 쪽을 바라보며 뭐라고 말한다.

그러자 항아리 밖으로 한 사람의 그림자가 솟구쳐 올랐다. 그림자의 정체는 우물이라고 봐도 좋을 만큼 아름답기 그지없는 소녀였다.



#



소녀의 나이는 열 살 남짓. 키가 또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으며 큰 눈망울과 오뚝한 코, 반듯한 이마와 함께 햇빛을 빻아 바른 듯한 하얀 피부를 자랑하고 있었다.

머리에 전두(纏頭:여성용 터번)를 썼고, 여러 갈래로 땋은 머리를 허리 아래까지 늘어뜨렸는데 몸에 비해 품이 큰 흑자색 저고리와 치마가 이상할 정도로 잘 어울렸다.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과 어른의 도도함, 그리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서늘함이 으름덩굴처럼 한데 엉긴 얼굴이었고 무엇보다 아름다웠다. 

소녀는 라마승의 뒤통수와 어째죽지를 밟고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고, 이를 위해 라마승은 허리를 계속 숙이고 있어야 했다.

추조는 사람을 저와 같은 항아리에 넣어 데리고 다니는 것을 이번에 처음 보았다. 

지금까지 야율치린과 쌍걔는 추조를 상대할 때만 회흘의 말을 썼고 그 외엔 파사어(波斯語:페르시아어)를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추조는 그들의 대화 내용이 무엇이었지 전혀 알 수 없었으며 다만 항아리에서 튀어나온 저 미소녀가 이들에게 있어 꽤 소중한 인물임을 짐작할 뿐이었다. 

이때 소녀가 입술을 달싹거렸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쌍걔가 추조를 보며 대뜸 이른다. 


“영후께서 휘친의 제자도 아닌 네가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다고 하신다. 어서 내려가거라. 내가 볼 때도 그러는 편이 좋을 듯싶구나.” 


추조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 쌍걔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내려가라면 응당 그리해야겠지요. 하지만 그전에 알고 싶은 것이 한 가지 있소이다. 휘친인지 천애고독인인지 하는 인물은 도대체 왜 찾는 겁니까?” 


그러자 쌍걔가 심드렁한 얼굴로 반문한다. 


“네가 그것을 왜 궁금해하지? 애당초 너와는 아무 상관 없는 일 아닌가?”

“그, 그야 그렇긴 합니다만···.”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한 추조가 이내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이때 자의소녀가 쌍걔를 보며 또 한 번 입술을 달싹거렸다. 쌍걔가 그녀를 향해 조아린 후 야율치린에게 외친다.


“치린, 영후의 명이시다. 너는 당장 동굴 안으로 들어가 우리가 제대로 찾아왔는지부터 살펴라.”  

“아레(آره:예)!” 


야율치린이 이렇게 대답한 뒤 쏜살처럼 검은 입의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주지하다시피 동굴 안엔 천애고독인의 유해가 육태의 형태로 보존되어 있었다. 

대경한 추조가 야율치린을 향해 몸을 날린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추조의 몸놀림이 평범한 양치기의 그것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음이 드러난다.

야율치린이 그거 보라는 듯 입구 위쪽의 쌍걔를 힐끔 올려다보며 크게 웃는다. 


“하하하, 이래도 저놈이 그냥 양치기란 말이오? 쌍걔의 혜안이 어쩌다가 그 지경이 되었는가.”

“내게 혜안이란 게 있었던가? 몰랐구나.”


쌍걔는 담담하게 대꾸한 뒤 돌연 몸을 날렸는데 그랬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느새 추조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추조가 두 눈을 부라리며 외친다. 


“비켜서라, 망사(亡師)의 유해는 그 누구도 건들지 못한다!”

“망사? 그렇다면 휘친이 죽었다는 뜻인가?”


성실하게 대답이나 하고 있을 여유 따위 추조에겐 없었다.

그는 단전에 남은 얼마 되지 않은 진기를 끌어올려 양 손바닥에 보낸 다음 큰 호흡 두 번과 짧은 호흡 세 번으로 정신을 명징하게 밝힌다.

그러곤 일호의 망설임도 없이 쌍장을 내뻗는데 그 기세가 흡사 산맥을 끊어와 집어던진 듯했다. 의신구형 가운데 하나인 반산육매장이었다.


“이크, 어린놈이 무서운 재주를 지녔구나!”


아직 뼈가 영글지 않은, 고작 열 몇 살 남짓한 소년에게서 분출되는 그것이라곤 믿기지 않는 기세였기에 쌍걔는 밀교의 비전인 구함진기(九含眞氣)로 요혈을 보호하며 황급히 물러났다.

한마디로 소년과 손바닥을 맞댈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 그러자 저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자의소녀가 대뜸 소리친다. 


“쌍걔, 속지 말라. 그는 단지 기세만 등등할 뿐이다!” 


이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쌍걔가 작심하고 쌍장을 내뻗는다. 요혈을 보호하느라 진기를 나눈 탓에 그가 가진 공력의 삼 할만이 겨우 동원되었다. 하지만 소년을 날려버리는 데 있어 그 정도도 차고 넘칠 지경이었으니, 


- 퍼-엉!

“으윽!” 


답답한 신음성을 토하며 저 멀리 나가떨어지는 추조. 쌍걔는 그제야 소년의 공격이 그저 기세만 맹렬했음을 깨닫는다. 

요컨대 조금 전의 기세는 내공이 전혀 뒷받침되지 않은,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였던 것. 

이때 어느 틈엔가 날아온 자의소녀가 쌍걔의 왼쪽 어깨를 밟고 다시 도약했다.

빨랐다. 본디 사람의 동작이란 게 아무리 빨라도 강궁에 먹인 화살을 능가할 수 없음인데 자의소녀는 그러한 상리마저 아주 간단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쌍걔가 혀를 내두른다. 


‘영후의 공력이 대단하구나. 태존(太尊)으로부터 금납(金軜)을 하사받은 우리 백팔납(百八軜)조차 흉내 내기 힘든 재주로다. 그녀가 고작 열한 살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네 배로 놀랄 일이 아닌가!’


이렇게 쌍걔가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자의소녀는 거꾸로 떨어지던 추조의 발목을 낚아채는가 싶더니 그것을 다시 끌어당기는 듯하며 뿌리친다. 

이 뿌리침으로 인해 추조의 위치는 반전했고 그렇게 정수리부터 떨어지는 일은 없겠거니 했는데 일합의 여파가 너무 컸던 탓인지 발이 땅에 닿자마자 중심을 잡지 못하고 기우뚱 쓰러지려는 소년.

이에 어느 순간 나타난 자의소녀가 그의 손목을 재빨리 낚아채며,


“으, 사비두어대에뎀(سر دادندرد:성가시게 하는군)!” 


냉담한 표정의 자의소녀가 내뱉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추조는 알 도리가 없다. 다만 그녀의 표정으로 짐작건대, 좋은 뜻으로 한 말이 아님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문득 자신의 손목이 자의소녀의 수중에 있음을 알게 된 추조는 저도 모르게 기분이 고양되어 얼굴빛이 대번에 붉어졌다.   

자의소녀의 미모는 꿈에 나와도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그 절정의 미모가 제 또래 계집아이와의 교류가 거의 전무했던 추조로 하여금 상황에 걸맞지 않은 감상에 빠지게 한 것이었다.


“체라쏘흩미쉬(چرا سرخ میشی:얼굴은 왜 빨개졌지)?” 


물론 이 말 또한 추조가 알아들었을 리 만무했다.

다만 속이 메스꺼운 느낌과 함께 세 모금의 핏물을 바닥에 뿌릴 뿐이었는데 이것을 본 자의소녀가 한 쌍의 고운 아미를 찡그리며 작은 목소리로 뭐라고 계속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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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5화 : 독타신개(禿駝神丐-①) +2 23.07.20 140 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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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화 : 내자불선(來者不善-②) +3 23.07.20 190 1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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