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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빙 님의 서재입니다.

팔황마녀와 백팔납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어가빙
작품등록일 :
2023.07.20 01:20
최근연재일 :
2023.08.27 07:05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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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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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글자수 :
157,600

작성
23.07.20 0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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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5화 : 내자불선(來者不善-②)

DUMMY

천애고독인이 추조에게 남긴 공부는 크게 세 가지였는데 여일어선현공(濾日馭仙玹功)과 조천검법(鏪天劍法), 그리고 의신구형(擬身九形)이 바로 그것이었다.

여일어선현공은 신선부의 유일한 내공심법인 홍하심결을 천애고독인이 각고의 노력 끝에 진일보시킨 것이었고, 조천검법 또한 그 얼개는 현공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의신구형은 적수공권인 상태에서 사지를 쓰는 무공을 총칭함이었는데 매괴권(埋魁拳)과 반산육매장(反山戮魅掌), 요운수(繞雲手)와 국섬조(掬晱爪), 철령퇴(徹嶺腿)와 일지분상술(一指焚像術), 미린개(微鱗鎧)와 표류간진보(漂流瞯震步), 그리고 칠보추광(七步追光) 같은 절기가 이 네 글자 아래 묶여 있었다.

놀랍게도 이 모든 절학의 초식과 구결은 이미 추조의 머릿속에 각인된 상태였는데 이는 내공뿐 아니라 전승자의 의념까지 언령(言靈)의 형태로 넘겨줄 수 있는 이령체근술의 특성 때문으로 이로 인해 신선부의 무공은 문자로 기록된 예가 거의 드물었다.


“머릿속의 목소리를 따르라고 하셨다.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면 희미한 빛이 공상(空相)으로 있다가 이내 사람의 형태를 띠게 될 것이라고···그러나 나는 이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르겠구나.”


아직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추조. 하지만 그는 근기부터가 남달랐고 매우 총명한 편이었으며 거친 자연과 벗하며 성장한 탓인지 그 의지 또한 암석처럼 굳건했다.

이런 사람의 특성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으니, 이날로부터 시작된 추조의 무공수련은 하루하루가 맹렬한 불길에 새로 짠 기름을 끼얹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사 년의 세월이 쏜살같이 지났다. 이 무렵 그의 신장은 육척에 이르렀는데 체구 또한 건장하기 이를 데 없어 도저히 열네 살짜리 소년으론 보이지 않았다.

늦가을의 짧은 햇살이 황량한 비탈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비탈 너머에서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돌연 나타났다. 그림자의 정체는 건장한 체구의 소년.

그는 나타나기가 무섭게 아주 빠른 속도로 산정을 향해 내달렸는데 그 속도가 웬만한 네발짐승은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윽고 콰라 이에흐스 앞에 이른 소년은 이내 걸음을 멈추고 들고 온 무언가를 바위 위에 툭 던져놓는다. 던져진 것은 이미 손질까지 끝낸 한 마리 죽은 토끼였다.

아마도 소년에게 붙잡혀 저 모양이 된 듯. 소년이 씩 웃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감히 이 어르신의 눈에 띄고도 살아남길 바랬느냐? 이제 내 뱃속이 네 놈의 무덤이 될 것이다. 잘 묻어주마. 흐흐흐”


오랜만에 맛보는 육고기라서 그런지 소년은 절로 웃음이 났다. 소년이 이곳에서 홀로 생활한 지도 벌써 사 년째가 되었다.

이 소년이 바로 추조인바,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느껴질 만큼 그의 성장은 남달랐다.

상술했다시피 키는 벌써 육 척에 달했고 떡 벌어진 어깨는 웬만한 장정 둘을 합쳐놓은 듯 장대했다.

추조는 입맛을 다시며 꼬챙이로 꿴 토끼를 갓 피운 모닥불 곁에 비스듬히 꽂아둔다. 그러곤 품속에서 조그만 가죽 주머니를 꺼낸 다음 그 안의 것을 한 움큼 집어 고기 위에 솔솔 뿌린다.

흩뿌린 그것은 근처 동굴에서 채취한 암염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고기가 익길 기다리며 앉아있던 추조가 돌연 등 뒤의 너럭바위에 벌렁 드러눕는다.


“하아, 왜 내공을 끌어올 수 없는 걸까? 내공을 끌어오지 못하니 매괴권이건 육매장이건 제대로 익혀낸 것 같지 않구나. 어떡한다?”


이것이 요즘 들어 소년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고민의 실체였다.

원래 천애고독인이 추조에게 자기 내공을 넘겨줄 때 첫째 날은 십년 분의 내공만 넘겨 사둔혈의 정위를 파악했고 그렇게 드러난 사둔혈에 나머지 공력을 불어넣었던 게 둘째 날이었으며, 마지막 셋째 날에 제자의 단전을 훼분할 요량이었는데 그만 기력이 쇠한 나머지 그 최후의 과정을 온전히 이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여 완전히 훼분하지 않은 추조의 단전은 흡사 찌꺼기처럼 남아 혈맥에 막게 되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사둔혈에 적루(積累)된 그 막대한 진기를 그는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생살을 찢고 장부를 뜯어내는 고통이라더니···그 사흘 가운데 이틀은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단 말이지. 결국, 받아야 할 고통을 덜 받았다는 뜻이런가?”


착잡한 심정으로 누워 있는 추조의 시야로 광활 창대한 푸른 하늘이 스미듯 밀려왔다. 생각하면 한바탕 거한 꿈을 꾼 듯한 느낌도 아예 없지 않았다. 사 년 전 그는 한낱 흐어디치로 하루 한 끼조차 배부르게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툭하면 얻어맞기 일쑤였고 짐승처럼 몰이를 당한 끝에 절벽에서 굴러떨어진 적도 있었다. 어쩌면 이런 일들이 있었기에 그가 천애고독인의 제안을 그토록 쉽게 수락한 것인지도 몰랐다.

요컨대 단 하루라도 좋으니 어딘가에 속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흐흐흐, 이따금 옷가지와 신발 따위가 사라지곤 했던 것이 전부 이 몸의 소행임은 생각도 못 하고 있겠지? 그러기에 날 왜 그토록 괴롭혔느냐! 그게 다 당신들의 업보···이크, 고기 다 탄다!”


코를 찌르는 매캐한 냄새가 그를 벌떡 일으켰다. 검게 탄 부위가 면적을 넓히던 중이었으므로 추조는 얼른 꼬챙이의 위치를 반대로 했다.

고소한 풍미가 입맛을 자극했다. 그러고 있는데 돌연 철사로 만든 솔로 뒤통수를 긁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에 잽싸게 고개를 돌려 배후를 살피는 추조. 그러자,


“소형제, 거 냄새 한번 구수하구먼. 무슨 고기인가?”

“······!”


검은 입의 입구 위에 한 사내가 우뚝 서 있었다. 중년의 사내였다. 흰 원령포에 연청색 바지를 입은 그는 한 손에 검은 모자를 쥔 채 뒷짐을 지고 있었다. 

곤발(髡髮). 뒷머리와 구레나룻만 남기고 정수리 근처를 면도로 싹 밀어버린 두발형태로 봐선 적어도 한족이나 회흘 사람은 아닌 듯싶었다. 

어쩌면 요인(遼人:거란족)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추조의 뇌리를 스친다. 사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흐어디치···? 그런데 양이나 염소라곤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으니 만약 소형제의 소임이 그렇다면 오늘은 그냥 마실이라도 나온 모양이군.” 


이에 공손한 태도로 묵례한 후 눈앞의 사내를 올려다보는 추조.


“소인 놈은 양치기가 맞사오며 마실 나왔으리란 존장의 짐작 또한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말에 그처럼 능숙하신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이에 사내가 껄껄 웃으며 허공으로 한 발짝 성큼 내딛는데 그 떨어지는 모양새가 흡사 봉황의 깃털처럼 느릿하면서도 우아했다.

이로써 사내의 빼어난 경신술 솜씨가 드러나매 추조의 두 눈에 일순 이채가 어린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하하하, 소싯적에 상단을 쫓아 이곳저곳을 쏘다녔는데 그때 쓸모가 있을까 싶어 배워둔 것일세. 회흘사람은 실로 오랜만이로군.”

“그렇습니까? 소인도 요나라 사람은 오랜만입니다. 이 일대에서 요인을 만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러자 중년사내가 짐짓 놀란 표정으로 추조를 바라본다.


“노부더러 요인이라고? 왜 그렇게 생각했지?” 

“아닙니까? 단순한 짐작일 따름이니 만약 아니시면 소인이 큰 결례를 저지른 셈입니다. 부디 용서하시오.”


이에 중년사내가 크게 손사래를 치며 추조 쪽으로 다가온다. 


“아닐세. 소형제의 눈이 매우 정확했네. 나, 야율치린(耶律治驎)이 요나라 사람이 아니라면 과연 누가 요인임을 자처할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허리춤에 매단 가죽 주머니를 풀어 추조에게 냅다 던지는 야율치린. 


“이것도 인연인데 어찌 나만 목을 축이겠나. 아르히(ᠠᠷᠢᠬᠢ)라고, 조복(阻卜:거란인이 타타르를 낮추어 부를 때 쓴 말)의 술이라네. 세 모금만 하게. 대신 노부는 그대의 고기를 탐하겠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야율치린은 불 앞에 쭈그려 앉더니 노랗게 익은 토끼의 뒷다리를 우악스레 뜯어내 제 입으로 가져간다.

받아 든 가죽 주머니를 관심 없는 눈으로 힐끔 쳐다본 후 추조가 그의 옆으로 가 곁불을 쬔다. 


“시장하셨나 봅니다. 끼니도 거른 채 이런 험지까지 올라온 이유가 무엇인지요?” 

“그러는 소형제는 뭐 먹을 게 있다고 예까지 올라왔지? 고작 토끼 한 마리 얻자고 동포가 정한 금역조차 안중에 두지 않았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실로 괴이한 일이 아닐 수 없군.” 


야율치린의 은근한 추궁에 추조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예상 밖이다. 이 탕리의 산기슭에 터를 닦고 사는 회흘족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것을 사내는 알고 있었다. 


“소형제의 이름은?” 


밝히지 않을 이유가 추조한텐 없었다. 


“쿠스라고 합니다.” 

“흠, 회흘의 이름치곤 제법 운치가 있군. 쿠스, 너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새겨들어라. 원래 나는 성질이 불같고 참을성이 없어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때려죽였는데 그 수가 어느새 삼백을 헤아린다. 내가 볼 때 너는 영웅이 되고도 남을 관상인데 만약 이런 오지에서 죽는다면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느냐. 너로 인해 이 늙은이가 안타까움을 느끼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구나.”  


추조의 두 눈이 대번에 휘둥그레졌다.

난데없이 나타나 기껏 사냥한 고기를 낚아챈 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들먹이며 협박을 일삼는다? 배알이 있는 사내라면 어찌 이 꼴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추조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벌떡 일으킨다. 그러거나 말거나 야율치린이 누런 뼛조각을 퉤 뱉으며 입을 연다.


“그 늙은이는 지금 어디 있느냐?” 


늙은이? 늙은이라면, 혹 사 년 전에 돌아가신 사부님을 말하는 것일까? 그런데 이 거란인이 어찌 그 어른을 안단 말인가. 이렇게 머뭇대는 사이 멋대로 짐작한 야율치린이 사나운 눈매로 추조를 올려다본다. 


“내 인내심의 형편없음은 이미 밝힌 바 있다. 그 능구렁이 같은 후이친, 아니 휘친(褘親)은 어디 있느냐? 설마 죽어버린 건 아니겠지?” 


잠시 생각한 후 추조가 전혀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모로 누인다.


“휘친? 그가 누구요? 그런 이름 생전 처음 듣소. 모르긴 몰라도 야울 대부가 잘 못 짚은 것 같구려.”   

“너, 몇 살이냐?” 


뜬금없는 물음. 그러나 추조의 입장에선 대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열넷 먹었소.” 

“열넷이라···하면 계집을 품어본 적도 아직 없겠구나. 그렇지?” 


이에 추조가 아무 대꾸 없이 멀뚱멀뚱 쳐다만 보자 대번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껄껄 웃는 야율치린. 


“크하하하, 하기야 휘친처럼 고리타분한 자의 밑만 닦으며 살았다면 계집의 살맛이야 당연히 모를 터. 그래, 그자 밑에서 몇 년을 굴렀느냐? 설마하니 계집 맛도 모른 채 죽고 싶은 것은 아니겠지?”

“소인은 존장이 하는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군요. 도대체 휘친이 누구이며, 왜 그자와 나를 한 실에 꿰려는 것이오?”


그러자 야율치린은 벌떡 일어서는가 싶더니 들고 있던 토끼 뒷다리로 추조를 가리키며 호통치듯 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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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31화 : 비사문천(飛使文玔-①) +1 23.08.27 65 4 11쪽
30 30화 : 피랍진초(被拉陣梢-③) +2 23.08.06 101 4 11쪽
29 29화 : 피랍진초(被拉陣梢-②) 23.08.05 84 5 11쪽
28 28화 : 피랍진초(被拉陣梢-①) +4 23.07.29 119 4 11쪽
27 27화 : 독안사(獨眼獅-④) +2 23.07.28 104 5 11쪽
26 26화 : 독안사(獨眼獅-③) +6 23.07.23 125 5 11쪽
25 25화 : 독안사(獨眼獅-②) +5 23.07.20 126 5 11쪽
24 24화 : 독안사(獨眼獅-①) +1 23.07.20 124 4 11쪽
23 23화 : 강남행(江南行-③) +1 23.07.20 119 4 11쪽
22 22화 : 강남행(江南行-②) +1 23.07.20 119 4 11쪽
21 21화 : 강남행(江南行-①) +1 23.07.20 122 3 11쪽
20 20화 : 부세삼존(浮世三尊-④) +1 23.07.20 122 5 11쪽
19 19화 : 부세삼존(浮世三尊-③) +1 23.07.20 129 5 11쪽
18 18화 : 부세삼존(浮世三尊-②) +1 23.07.20 132 5 11쪽
17 17화 : 부세삼존(浮世三尊-①) +1 23.07.20 135 5 11쪽
16 16화 : 독타신개(禿駝神丐-②) +2 23.07.20 139 6 11쪽
15 15화 : 독타신개(禿駝神丐-①) +2 23.07.20 140 7 11쪽
14 14화 : 외문기공(外門氣功-②) +4 23.07.20 143 7 11쪽
13 13화 : 외문기공(外門氣功-①) +4 23.07.20 150 8 11쪽
12 12화 : 식통천(食通天-②) +3 23.07.20 155 7 11쪽
11 11화 : 식통천(食通天-①) +3 23.07.20 161 7 11쪽
10 10화 : 우중남녀(雨中男女-②) +3 23.07.20 269 7 11쪽
9 9화 : 우중남녀(雨中男女-①) +3 23.07.20 176 7 11쪽
8 8화 : 내자불선(來者不善-⑤) +3 23.07.20 162 9 11쪽
7 7화 : 내자불선(來者不善-④) +2 23.07.20 170 9 11쪽
6 6화 : 내자불선(來者不善-③) +1 23.07.20 174 8 11쪽
» 5화 : 내자불선(來者不善-②) +3 23.07.20 190 10 11쪽
4 4화 : 내자불선(來者不善-①) +1 23.07.20 194 9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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