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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빙 님의 서재입니다.

팔황마녀와 백팔납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어가빙
작품등록일 :
2023.07.20 01:20
최근연재일 :
2023.08.27 07:05
연재수 :
3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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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34
추천수 :
203
글자수 :
157,600

작성
23.07.2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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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1쪽

26화 : 독안사(獨眼獅-③)

DUMMY

“대형, 선처해 주시오. 소제로선 별 방법이 없소. 만약 가형을 만나게 되면 원 변제금에 은 두 냥을 더 얹어 도합 다섯 냥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하겠소.”


추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는데 그래도 코 평수가 넓어지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다.


“진정이냐?”

“그렇소. 자거를 쓰라시면 백 장인들 못 쓰리까? 진정이오.”


은 다섯 냥. 생각만 해도 좋은지 금세 반달눈이 된 추조가 콧김을 길게 뿜으며 진초에게 이른다.


“바닥도 차가운데 거기서 왜 그러고 있는지 모르겠군. 동생은 당장 일어나 좌정하라.”


그러자 진초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촌놈 아니랄까 봐 몇 마디 감언에 또다시 속아 넘어가는 것이 눈에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가형과 조우할 때까지 보표(保鏢:경호원)로서 제 역할만 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인제 보니 무림의 절정고수라 해도 무방할 정도의 실력자인지라 마음이 더욱 흡족했다.


‘덩치를 보고 힘깨나 쓸 것 같아 고른 것인데 뜻밖의 횡재수를 맞은 셈이 되었구나. 저 곰탱이를 잘 구슬려 내 곁을 지키게 한다면 어찌 그 네 마리 사냥개가 나를 함부로 하겠는가.’


아무래도 진초는 누군가로부터 위협을 당하거나 쫓기는 신세에 놓여 있으며 추조에게 접근, 하품의 철괴를 운철이라 속여 판 것도 그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일종의 방편이었던 듯싶었다.


“형님, 소제가 술 한 잔 따르겠습니다. 양주의 명물인 분주인데 기름진 음식에 이것만큼 어울리는 술도 없다고 하네요.”


추조의 권대로 자리에 앉은 진초가 냉큼 술 단지를 들며 말했다. 그가 내민 술 단지 앞으로 넓적한 술잔을 갖다 대며 추조가 넌지시 묻는다.


“진 아우, 이 우형이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대답해 줄 수 있겠는가?”


추조의 잔에 술을 따른 후 두 손을 맞잡아 내미는 진초.


“인제 우리 두 사람은 형제지간이나 다름없는데 서로에게 감추고 자시고 할 게 무어란 말입니까. 하문하십시오.”

“이 우형이 묻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 바로 아우의 가형에 관한 것인데 먼저 그의 존대성명부터 알고 싶군.”

“가형의 이름도 저와 같은 외자이며 옥 규자(字)를 씁니다.”

“옥 규자? 그렇다면 진규···?”

“그렇습니다, 형님.”


진규.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하기야 중원에 들어온 지 두 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그가 누구인들 제대로 알겠냐마는 그래도 사숭이나 팔해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기에 혹시나 싶어 다시 묻는 추조.


“강호의 친구들이 가형을 이르는 이름이 따로 있을 터인데?”

“아, 별호 말씀이군요. 소제가 듣기에 가형의 별호는 백정상(百靜像)이라고 하더이다.”


백정상이라면, 백 가지 고요한 형상이란 뜻? 역시나 들어본 적 없는 별호였기에 추조는 다만 백정상이라는 글자가 갖는 의미만을 머릿속에서 추려볼 뿐이었다.

이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얼굴로 추조를 바라보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진초. 그의 속내는 이와 같았다.


‘금시초문인 모양이군. 가형의 진명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은 듯해서 넌지시 던져본 것인데 역시나 내 짐작이 맞았구나. 곰탱아, 네가 아무리 촌놈이래도 그렇지 어찌 경월곡(傾月谷) 주인의 직함이 백정상인 것도 몰랐단 말이냐!’


진초는 속으로 웃고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더 맹탕인 데다가 어쩌면 경월곡이란 존재조차 아예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쨌거나 경월곡의 곡주가 진초의 가형이란 사실이 이로써 드러난바, 추조로선 많은 무림인들이 궁금해하는 백정상의 신세 내력 가운데 한 가지를 지금 알게 된 셈인데 다만 그 사실을 자신만 모를 뿐이었다.

추조가 가득 채워진 술잔을 입술에 대고 고개를 꺾으려는 찰나, 계단 쪽에서 돌연 바람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곧이어 한 사람의 모습이 그의 시야 속으로 들어왔다. 아는 얼굴이었다.


“오랑캐야! 내가 분명 따라 나오라고 말했거늘 여기서 술잔이나 기울이고 있으면 대체 어쩌자는 거냐. 사람 말이 말 같지 않더냐!”


얼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애꾸눈. 추조더러 따라 나오라고 한 뒤 창척을 통해 밖으로 나가버린 바로 그 인물이었다. 추조가 입안의 술을 넘긴 후 손등으로 입술을 닦으며 이른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 어르신은 너의 이름 따위 전혀 궁금하지 않다. 궁금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왜 따라나선단 말이냐!”


그러자 일순 말문이 막힌 애꾸눈이 두 눈만 껌벅거린다. 하기야 궁금하지도 않은 것을 가르쳐주겠다는 사람의 말을 굳이 따를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잠깐의 궁리 끝에 애꾸눈이 버럭 소리친다.


“싸움이 시작되면 승부를 내는 것이 당연한 상리인데 너는 어째서 그것을 회피하려 하느냐! 비겁한 놈! 그러고도 고환 달린 사내랄 수 있는가!”


대놓고 고환이라고 하는 통에 진초의 두 뺨이 살짝 붉어진다. 추조는 그런 진초를 보며 별스럽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승부? 승부야 벌써 났지. 안 그런가, 아우?”


갑작스런 추조의 물음에 잠시 머뭇대던 진초가 이내 작심한 듯 일어나 애꾸눈을 향해 두 손을 맞잡는다.


“선배, 외람된 말씀이오나 소생이 봤을 때도 승부는 이미 난 듯합니다. 그러니 부디 자중자애하시는 것이···”

“닥쳐랏! 어디서 한낱 책상물림 따위가 무부들의 상사에 함부로 입을 대는가. 서생은 가서 경전이나 외워라. 그게 마땅한 일이다!”


하나 의외로 속대가 여문 지 애꾸눈의 윽박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진초.


“선배의 애검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우리 형님의 신력에 엿가락처럼 된 게 불과 일다경 전 일입니다. 한두 번도 아닌 무려 여덟 번이나 매쳐짐을 당한 어른이 무슨 승부를 얼마나 더 보겠다고 이리도 강짜랍니까? 바라건대, 제발 우길 걸 좀 우기세요!”


말문이 막힌 애꾸눈은 그저 얼굴만 붉힐 뿐인데 듣고 있던 추조가 크게 손뼉을 치며 쾌재를 부른다.


“그렇지! 잘한다, 우리 동생. 역시 서생이라 그런지 입심이 보통이 아니구만. 동생,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얼마든지 시켜라. 값은 이 우형이 다 치를 것이다.”


애꾸눈이 그런 추조를 힐끔 쳐다본 후 손가락으로 진초의 얼굴을 가리킨다.


“책벌레야, 보아하니 송인이 틀림없는데 어째서 오랑캐와 한편을 먹고 같은 동포를 몰아붙인단 말이냐. 에잇, 조상 제사에도 부르지 못할 망종 같으니라고!”

“선배, 무릇 사람을 사귐에 있어 출신을 따지는 것은 그야말로 천박한 습성입니다. 호인이라고 다 같은 호인이 아닐진대 어찌 그 모두를 한 파라(笸箩)에 담고 무조건 배척하라 하십니까. 답답하네요.”

“뭐, 답답? 거란과 달단에게 목숨을 빼앗긴 대송의 병민(兵民)이 탁발난수라고 해도 과하지 않거늘 감히 뉘 앞에서 습성이니, 배척이니 하는 것이냐! 아무래도 네놈부터 손을 봐야 할 것 같구나. 서생 놈, 네 이름이 뭐냐? 뭐라고 부르면 되느냐?”


이에 난처한 신색을 감추지 못하는 진초. 손을 봐주겠다는 엄포에 절로 주눅이 든 것인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추조가 작정한 듯한 얼굴로 애꾸눈에게 이른다.


“그렇지, 자고로 화풀이란 엉뚱한 자에게 해야 제맛이지. 오늘 밤, 자시초(子時初). 장소는 그쪽이 알아서 정하든가 말든가.”


말뜻을 알아차린 애꾸눈이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끄덕인다.


“흥, 진즉에 그럴 것이지. 네 바람대로 금만(今晩) 자시초, 서령탑(栖靈塔)에서 보자꾸나. 늦지 말거라.”


서령탑은 양주의 명찰 대명사(大明寺) 경내에 위치한 목탑을 말함이었다.

과거 수양제가 자신의 환갑을 맞아 전국 삼십 개 주(州)에 삼십 개의 탑을 지으라는 조칙을 발했는데 그때 건립된 삼십 개의 탑 가운데 하나였던 것.

말인즉, 그만큼 이름 높은 명소인 탓에 설령 이곳이 초행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못 찾아올 공산이 아주 현저한 그런 장소라는 뜻이었다.



#



“젠장, 뭐 한다고 거기까지 처 올라간 것이냐? 당장 기어 내려와라, 오랑캐!”

“싫다. 이왕 예까지 올라온 거 조금 더 있다가 내려갈 테다. 밤바람이 시원스레 부니 아주 좋구나. 상쾌하다.”


저 아래에서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애꾸눈에게 추조가 이렇게 대답했다.

때는 벌써 자시에 이르렀고 대명사 넓은 경내를 뚜껑처럼 덮은 밤하늘이 은빛의 쌀알 같은 눈을 반짝인 채 구 층 높이의 목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령탑이었다.

그 서령탑하고도 칠 층 처마에 걸터앉은 추조는 밑에서 계속 소리치는 얘꾸눈의 보챔 따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자니 흡사 천산의 어느 자락에 있는 듯해 감정이 제법 고양되었던 탓이다.


“좋다. 네가 내려오지 않겠다면 내가 올라가면 될 일. 오랑캐 너, 거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라.”


그런 다음, 팔각 모양의 처마 안쪽으로 냉큼 사라지는 애꾸눈.

십중팔구 예까지 올라오려 함인데 때아닌 장난기가 발동한 추조는 잠시 앉아 있는 듯하다가 이내 허공으로 한 발짝 크게 내디딘다.

범인 같으면 죽음을 각오해야 할 높이였으나 이미 부세삼존에 필적하는 실력을 지닌 추조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얕은 담에서 뛰어내리는 듯한 느낌만 들 뿐인 추락이었다.

의신구형 가운데 하나인 표류간진보를 펼치니 흡사 바람에 감겨 휘도는 나뭇잎인 양 계속해서 원을 그리며 떨어지는데 어찌 보면 나선의 계단을 밟고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곧이어 땅바닥에 발을 붙인 추조가 몇 걸음 걸어가는데 저 위에서 애꾸눈의 카랑카랑한 외침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미친놈아! 지금 뭐 하자는 것이냐? 장난하냐? 와, 뭐 저런 놈이 다 있는가.”


추조가 씨익 웃으며 올려다본다.


“그 좁은 데서 싸우잔 말인가? 눈알은 생각이란 걸 아예 안 하고 사는 모양이군. 이 절의 화상들을 다 깨울 작정이 아니라면 잠자코 내 뒤나 따르라.”


애꾸눈은 기가 막혔으나 작금의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추조의 말마따나 그의 뒤를 쫓는 것 말고는 없었다.

계단을 타고 내려오면서 애꾸눈은 추조가 무슨 방법으로 그토록 빨리 바닥에 내려설 수 있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필시 밧줄 같은 걸 지니고 있었겠지? 이렇게 지레짐작하면서도 만약 그렇지 않다면, 하는 생각에 이르자 저도 모르게 모골이 송연해지는 애꾸눈이었다.

이윽고 서령탑 뒤편에 자리한 청죽림까지 나아간 두 사람. 돌연 걸음을 멈춘 애꾸눈이 앞서 걷던 추조를 향해 소리친다.


“어디까지 갈 셈이냐? 내가 볼 땐 여기도 그리 나쁘지 않은 듯싶구나.”


추조가 뒤돌아보며 이른다.


“낮에도 말했다시피 내 이름은 추조. 천산에서 왔다. 눈알 너는?”

“천산? 뭐 먹을 게 있다고 거기서 예까지 기어 왔느냐? 나는 독고상진이라고 한다. 본의 아니게 독안사(獨眼獅)란 별호로 불리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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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8화 : 피랍진초(被拉陣梢-①) +4 23.07.29 119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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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25화 : 독안사(獨眼獅-②) +5 23.07.20 126 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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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23화 : 강남행(江南行-③) +1 23.07.20 119 4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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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11화 : 식통천(食通天-①) +3 23.07.20 161 7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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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화 : 내자불선(來者不善-②) +3 23.07.20 191 1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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