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 거세하기

12회 - 불가능한 레퀴엠

12.불가능한 레퀴엠

에피메테우스가 일루리샤트의 작은마을 고트하브에 나타나 마을을 쑥밭으로 만든 사건이 벌어지기 정확히 십오 년 전.

거세학교 지하 고서적 보관창고를 청소하던 슈타이너가 이실딘 막대에 새겨진 이 작은 악보를 발견했을 때 그 가치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게 뭐지? 새겨진 글자는 고대 핀족의 문자와 룬문자인가? 이런 건 처음인데. 장물업자들에게 감정을 받아봐야겠군.’

막대에는 몇 가지 고대어가 뒤섞여 새겨져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사멸된 형태의 기보법으로 적힌 탓에 열댓 마디에 불과한 이 악보를 판독하는 데에만 십수 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사실 악보라는 것을 알아내는데도 몇 해가 걸렸다. 학자들과 장물업자들의 추측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천년 전 일루리사트에 살았던 원주민의 월력(月曆)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다 핀족과 지금은 사라진 북방민족 간의 외교문서 내지는 통행증이었을 것이라는 설도 잠깐 힘을 얻었다.

「슈타이너 경, 보시면 모릅니까? 예나 지금이나 계집들은 사실 음탕하답니다. 호호호.」

심지어 어떤 여류 고고학자는 크기나 길이를 봤을 때 단순히 여성의 쾌락을 위해 만들어진 야릇한 물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아니, 그렇지 않아. 이 물건은 분명 천금으로도 살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슈타이너는 옛 왕궁의 비밀서고나 외교문서실, 실록 보관소가 아닌 하필 드래곤 거세학교 지하 고서적 창고에서 이런 이색적인 물건이 발견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훗날을 기약하려는 왕당파들이 세간의 눈을 피해 이곳에 어떤 보물을 숨겨놓은 것일지도.’

당시는 혁명으로 둠 브링거 왕실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서던 혼란한 과도기였다. 왕실 직속 비밀서고나 문서실은 상당수 자료가 불타거나 유실되는 수모를 겪었다.

오직 드래곤 거세학교만이 상대적으로 큰 타격을 입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50년간의 재산대장을 이 잡듯 뒤져도 이 신비한 막대기와 관련한 기록은 없었다.

모종의 이유를 가진 세력들이 훗날을 기약하며 이곳에 막대기를 숨겨놓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음모론적이만 듣기 따라 그럴듯한 추측이 가능했다.

「그래서 그 막대기가 뭐 어쨌다는 건가? 학교 예산삭감이나 당하지 않게 원로회 감사준비나 잘 해주게.」

권력 교체기였다. 학교장과 운영위원회는 새로운 권력주체들에게도 드래곤 거세학교의 존재이유를 각인시켜야 했다.

서고에 굴러다니던 출처불명의 금속 막대기 따위에 대한 관심은 곧 사그라졌다.

그 와중에 막대기는 은근슬쩍 슈타이너의 소유가 됐다. 그리고 어느새 거세학교 총무과 자산 명단에서도 삭제되었다.

‘틀림없이 이 막대는 옛 뱀을 물리쳤다는 [패트릭 전설]의 비밀을 풀 유일한 단서다.’

그는 직관적으로 이 막대기가 위대한 음유시인이었던 성 패트릭이 남겼다는 옛 뱀을 물리치는 전설 속 주문이라고 확신했다.

‘평생이 걸리더라도 이 전설의 비밀을 풀고 말겠다.’

슈타이너의 집념과 달리 상황은 좋지 않았다.

공화정 초기 공화파와 왕당파의 격렬한 내전으로 드래곤 관련 많은 자료가 유실됐다.

[옛 뱀과 패트릭 신화]를 연구하던 학자들도 대다수가 정파 싸움에 휩쓸려 목이 달아나거나 망명했다.

수도 곳곳에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기존 논문이나 사료도 행방이 묘연해졌다.

슈타이너는 인내를 가지고 금석학자(金石學者), 역사학자, 지역 민담수집가, 신비주의 종파 수도승 등을 만나 자문을 구하며 자신의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분투했다.

그리고 베로니카가 자신의 부사수로 들어온 이년 전 어느 날, 마침내 고대의 기보법을 기억하고 있던 남쪽 해안가의 어떤 늙은 음유시인을 찾았다.

덕분에 천 년간 잊힌 악보의 비밀이 풀렸다. 막대에는 드워프의 왕의 이름을 빌어 [즈베즈다의 악보]라 적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슈타이너는 이것을 ‘불가능한 레퀴엠’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길 더 좋아한다.

악보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승님, 이 악보는 인간이 연주할 수 없는 곡입니다.」

악보를 현대의 표기법으로 온전히 해독한 베로니카가 난색을 표했다.

「이 악보는 절대 한 호흡에 연주할 수 없습니다. 우선 스케일이 너무 넓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신체 조건상 물리적으로 연주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잘 알다시피, 류트나 기타, 만돌린과 같은 발현악기는 코드를 짚어 화음을 넣거나 한 음 한 음 멜로디를 연주한다.

문제는 이 악보가 현악기인 칸텔레 하나로 매우 복잡하고 손가락이 꼬이는 화음과 멜로디를 동시에 연주하게 명확히 지시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뿐만 아니라 열두 현을 모두 이실딘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었다.

미스릴보다 구하기 힘들다는 전설 속의 금속인 이실딘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황당한 조건은 또 있었다.

「우리의 해석이 정확하다는 가정입니다만, 이 악보에는 칸텔레의 프렛 여섯 개를 동시에 누르는 코드도 있습니다.」

「뭐? 프렛 여섯 개를 동시에?」

십오년 만에 기껏 해독을 했는데 이 무슨 넌센스란 말인가. 황망해 하는 슈타이너에게 베로니카가 고갤 끄덕였다.

「그렇죠. 저나 스승님이나 손가락은 다섯 개 입니다.」

시중에서 팔고 있는 양창자 줄로 만든 칸텔레의 현을 직접 눌러 보이며 베로니카가 말을 이었다.

「프렛을 여섯 개 짚으라니요? 이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

베로니카는 궁드르디의 팔목을 잡은 상태로 그의 손가락을 유심히 보며 말했다.

「이걸 연주할 수 있는 인간은 매우 드물지. 대부분의 인간은 손가락이 다섯 개 뿐이니까.」

궁드르디의 손가락은 참으로 기묘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새끼손가락이라고 부르는 다섯 번째 손가락이 검지만큼 길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에게서 볼 수 없는 여섯 번째 손가락이 있었다.

그 여섯째 손가락은 엄지손가락처럼 크고 굵었다.

하지만 마녀사냥에 처해지는 불쌍한 ‘육손이’들의 손가락과는 달랐다.

튼실한 굳은살이 박혀있는 것만 봐도 궁드르디의 여섯 번째 손가락은 기형이 아니라 제 몫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일루리사트 정착민들 중 남쪽 대륙에서 온 전사를 조상으로 둔 소수의 남성들은 대대로 손가락이 여섯 개인 경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프레데릭슨의 말에 궁드르디가 그게 무슨 대수냐는 듯 어깰 으쓱했다.

「구경났어? 여기 남자들은 손가락 여섯 개인 경우가 왼손잡이만큼 흔해. 길포프, 윈드폴, 뤼딩, 랑겔 그리고 우리 아버지. 덕분에 나는 바늘을 두 개 써서 시침질이랑 감침질을 동시에 할 수 있고.」

「그리고 칸텔레도 더 복잡하게 연주할 수 있겠지?」

베로니카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궁드르디가 코웃음을 쳤다.

「왜? 서커스 구경하고 싶어? 쓸데없는 짓이잖아. 그냥 둘이서 이중주를 하면 되는데.」

「할 수 있어, 없어?!」

베로니카가 언성을 높였다.

스승님과 게이세리크의 용병단은 이제 에피메테우스에게 반마일 거리까지 다가가 있었다.

믿기 어렵지만 모두의 목숨이 지금 이 북쪽 촌구석 마을의 돼지 거세사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이것저것 복잡한 연주도 해본 적은 있긴 하지. 혼자 양을 치다보면 유월의 백야는 너무 지루하니까.」

베로니카가 자기도 모르게 손뼉을 탁치며 말했다.

「좋아. 그럼 이제 닥치고 내가 치는 코드와 멜로디를 잘 들어. 나는 손가락이 다섯 개라 부분 부분 따로 나눠 칠거야. 하지만 넌 이걸 한 번에 연주해야 해. 프릭, 조율 다 됐어?」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아가씨!」

프레데릭슨이 베로니카에게 조율은 끝낸 칸텔레를 건넸다. 그러자 악기를 건네받은 베로니카가 이실딘 막대기에 새겨진 악보의 프레이즈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

게이세리크와 그의 부하들은 죽음도 두려워않는 전사 중의 전사였다. 하지만 결코 무모하거나 만용을 부리지는 않았다.

「양각 나팔 준비!」

천천히 일렬횡대로 에피메테우스에게 접근하면서 게이세리크와 열한 명의 용병들은 일제히 안장에 차고 있던 양각 나팔을 꺼내 들었다.

부우우웅~~

거대한 울림이 사탕무우밭에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뇌수가 흘러내리는 녹각룡의 두개골을 씹어 먹던 에피메테우스가 동시다발적인 소리에 당황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전진하던 용병단은 간격을 유지한 채 멈춰선 뒤 계속해서 나팔을 불었다.

「놈이 걸려 든 것 같습니다.」

훈네릭의 말에 게이세리크가 고갤 미소를 지었다.

이것은 원래 반달족 기마대가 니므롯 제국의 비밀병기인 맘모스 군단에 맞서기 위해 고안한 전술이다.

니므롯인들은 야생 맘모스 새끼를 포획해 눈을 지져 장님으로 만든다. 이 후 혹독한 사육과정을 거친 맘모스들은 성체가 되면 바로 전쟁에 투입됐다.

이 즈음이면 맘모스들은 사육사가 고삐를 쥐고 움직이지 않으면 좌우이동조차 스스로 하지 못할 정도로 수동적인 성격으로 변한다.

훈련된 맘모스 열 마리를 중무장 시킨 뒤 일렬횡대로 세워놓고 돌격작전에 들어가면 평원에서의 전투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맘모스들은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맹목적으로 전진해 몹시 위협적이었다.

「부우우우웅~」

「좋다. 이대로 계속 서로의 호흡을 유지해라.」

압도적인 맘모스 군단의 돌격진용에 둔전(屯田)할 토지를 모조리 빼앗긴 반달족 전사들은 시행착오 끝에 한 가지 묘책을 고안했다.

바로 소리로 녀석들을 교란시키는 전술이었다.

시력을 상실해 소리에 몇 배나 예민한 맘모스들에게 거대한 동물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려고 동시 다발적으로 양각나팔소리를 내는 것이다.

호흡을 정확히 맞춰 부는 양각 나팔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겁먹은 맘모스들이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갑자기 멈추거나 뒷걸음질 쳤다.

이윽고 대열이 흐트러지면서 혼비백산한 맘모스들에게 니므롯 병사들이 서로 밟고 밟히며 자중지란에 빠졌던 것이다.

전투가 끝나고 보니 전사한 니므롯 병사보다 압사당한 병사들이 갑절은 더 많을 정도였다.

「성공입니다! 저 괴물이 어리둥절해 하는 거 같습니다.」

다소 흥분한 훈네릭을 진정시키며 차분히 게이세리크가 명령을 내렸다.

「방심하지 마라. 맘모스를 기만할 때처럼 하나의 동물이 내는 소리로 들리게 해야 된다. 자 다시 발사!」

「부우우웅~」

에피메테우스. ‘뒤늦게 깨닫는 자’라는 이름답게 녀석은 확실히 당황하고 있었다.

경험 많고 능숙한 드래곤들은 보통 단번에 상대의 숨통을 끊기 위해 목덜미를 노린다.

하지만 동시다발로 사방에서 울리는 양각나팔소리는 앞이 보이지 않는 에피메테우스가 공격할 목덜미 지점을 헷갈리게 만들기 충분했다.

「간격을 유지하며 천천히 뒤로 물러나라. 이대로 사일로 쪽으로 놈을 유인한다.」

게이세리크의 명령에 따라 기마술의 달인인 용병들은 간격의 흐트러짐 없이 말들을 뒷걸음질하며 천천히 물러났다.

에피메테우스도 몸을 움츠린 채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적과 거리를 유지하며 신중하게 한 걸음 한 걸음 사일로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긴장한 놈의 숨소리가 멀리서도 들릴 정도로 컸다.

피융.

프롬의 사일로 쪽에서 푸른 불꽃의 불화살이 하늘로 솟구쳤다. 준비가 되었다는 프레데릭슨의 신호탄이었다.

신호를 확인한 슈타이너가 모래시계를 보았다. 정확히 한 소짚이 지나있었다.

슈이너는 숨을 고르며 다시 양각 나팔을 불려는 게이세리크에게 손짓하며 외쳤다.

「시간 끌어주느라 수고했네! 철수하시오! 자, 이제 우리는 사일로에 불을 지르! 앗?!」

그때였다.

뒷걸음질하며 양각나팔을 불던 용병 중 하나가 그만 타고 있던 말이 다릴 헛딛으면서 말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말이 고랑 아래 미처 뽑지 않은 사탕무뿌리를 밟고 스텝이 꼬인 것이었다.

크어어어!

정교하게 싱크를 맞춘 음이 엇나가자 에피메테우스는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눈치 챘다.

신중함을 상실한 에피메테우스는 그대로 소리가 나는 방향 아무 곳이나 머리를 들이밀고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으아악! 대장!」

「요르그!」

이마에서 턱까지 번개 형상 문신을 새긴 용맹한 반달족 전사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순식간에 에피메테우스의 입속으로 삼켜졌다.

그 정도로는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에피메테우스는 교회회랑만큼이나 긴 꼬리를 휘둘러 왼쪽렬에서 달아나던 다섯 용병을 동시에 덮쳤다.

「아악! 대장!」

「안돼!」

그렇게,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게이세리크를 좇아 생사를 함께했던 베테랑 용사 절반이 은퇴를 코앞에 두고 시체도 수습하지 못할 만큼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돌프! 젤러펠트! 클라우스!」

드래곤의 턱에 끔찍하게 짓이겨진 부하들의 사체를 바라보며 게이세리크가 기수를 돌려 놈을 응시했다.

놀란 훈네릭과 알라릭이 달려와 놈에게로 달려가려는 게이세리크의 말고삐를 끌며 말했다.

「대장! 무모합니다! 빨리 위대한 슈타이너에게 맡기고 이탈합시다!」

휙~!

게이세리크가 훈네릭이 쥐고 있던 말고삐를 잘라 버렸다. 그리고 좀처럼 뽑지 않는 쌍검을 뽑아 들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저 놈은,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이겠다.」

작가의말

매일 저녁(토, 주일 제외) 7시에 업데이트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