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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밀르
작품등록일 :
2021.02.13 22:03
최근연재일 :
2021.07.0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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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2.17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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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 - 패트릭 평전 Part.2 드워프의 왕, 즈베즈다

DUMMY

9.드워프의 왕, 즈베즈다


시간이 물방울과 함께 웅덩이에 고였다. 암흑이 패트릭을 감싸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는지 감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평범한 어둠이 아니었다.


그것은 ‘안겨오는’ 어둠이었다.


숨소리에 축축하게 젖어들며 촉감으로 전이된 어둠. 그것은 패트릭의 인식체계를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새로운 감각의 세계로 그를 인도했다.


「나는 살아있나?」


작게 내뱉은 혼잣말이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공간에 가득 찼다.


‘좁은 공간이 아니군. 아니, 오히려 광장이나 원형 경기장 만큼이나 넓은 곳이다.’


하지만 어둠 덕에 어머니의 자궁처럼 푸근하고 야릇한 아늑함이 느껴졌다.


깡.깡.깡.


어디선가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맑고 청아했다. 이 세상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정돈된 A4 - 즉 ‘라’ - 기준음이 세 번 울려 퍼졌다.


패트릭은 귀가 아닌 척추를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꼈다.


‘이 소리는?!’


그는 방랑 연주자로 떠돌며 다양한 문명의 기준음을 귀에 새겨놓아왔다. 그러나 모두 다 어딘가 부족했다.


수학적 절대성에 닿으려는 노력은 가상했지만 이상에 닿기에는 한 없이 열화 된 모작(模作)들이었다.


‘놀랍군. 이런 이상적인 소리는 오직 인간의 마음속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는데.’


달팽이관을 두드린 그 울림은 가감 없이 완벽했다. 신전기둥처럼 든든했다.


‘빛이 있으라’ 명했다던 태초의 신이 선언한 창조의 외침 같이 절대적이었다.


「너, 혼돈과 질서를 잇는 탯줄아.」


갑자기 단단한 피부가 패트릭의 팔에 닿았다. 그리고 억센 힘으로 보름이나 굶어 야윈 패트릭을 일으켜 세웠다.


「누, 누구냐!」


「오랜 세월 그대 같은 자가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의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감촉과 발성이었다.


패트릭은 재빨리 자신이 들어본 숱한 어족(語族)의 발음들을 떠올렸다.


수십 가지 말을 구사할 수 있는 언어의 천재인 패트릭은 목소리의 주인공이 핀(Finn)족의 고어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정체불명의 목소리는 핀족 원어민과 달랐다. 발음이 다소 어눌했다.


‘혹시 이 자는 나와 소통이 가능할 법한 언어를 쥐어짜낸 게 아닐까?’


상대가 적어도 모어(母語)로 말하는 게 아닌 건 확실했다. 패트릭이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드워프다.’


패트릭은 정체불명의 목소리에서 드워프 특유의 흡착폐쇄음을 포착했다.


젊은 시절 대륙의 동쪽 끝 라플란트까지 흘러 들어갔을 때였다. 그곳 족장의 집에서 젊은 드워프를 만났었다. 그 때 그에게서 단 한 번 들어본 적 있는 발음이었다.


흡착폐쇄음. 인간들이 보통 ‘혀 차는 소리’라고 말하는 발음이다. 드워프들은 이것을 그들의 모음으로 쓴다.


그리고 인간의 능력으로는 드워프가 내는 흡착폐쇄음간의 미묘한 발음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그대의 고귀한 재능에 경의를 표한다.」


「너는 누구냐? 인큐버스냐? 그렇다면 신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그는 곧 빛이시니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물러가라.」


패트릭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덤가의 귀신들린 자와 간질 환자에게 편력 수도사들이 읊조리는 기도문을 따라했다.


상대가 코웃음을 쳤다.


「어둠이라고? 이곳은 빛으로 가득하다. 옹에르만(Angerman), 이 어리석은 자의 눈에 광명을 되찾아 줘라.」


이윽고 누군가 패트릭의 눈가에 뭔가를 씌우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수정처럼 투명하고 얇은 돌을 직사각형으로 깎아 만든 일종의 광학렌즈였다.


「여기는?」


옹에르만이라는 이름의 드워프가 씌워준 렌즈를 쓰자 패트릭은 동굴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창백한 푸른빛으로 사물을 밝히 보게 있었다.


렌즈는 아마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파장의 빛을 보게 하는 기능이 있는 것 같았다.


렌즈를 씌워준 드워프 옆에 또 다른 드워프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는 보통 드워프들 보다 털이 두 배는 많았다. 눈 말고는 얼굴에 털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드워프의 왕 즈베즈다의 궁전. 하지만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 이 발음은 인간에겐 감춰진 비밀이다. 나는 그의 사자(使者)인 타루큅 이눅이다.」


즈베즈다.


서쪽 동토에 사는 민족들의 고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단어로 ‘별’이라는 뜻이다.


‘아마 왕을 뜻하는 드워프 고유의 표현이겠지.’


하지만 실제 정확한 발음은 베일에 쌓여있다.


인간의 문자와 성대구조로는 이 음가를 정확하게 발음할 수 없기 때문이다.


「타루구입 이노크?」

「타루큅 이눅. 내 이름도 두루마리에 인봉하라. 인간에겐 감추어진 비밀이다.」


타루큅 이눅이라는 이 괴상한 이름 역시 지난 천 년 동안 전승되면서 각 지역과 문명마다 타나토스, 디투스, 허메 등으로 변주되었다.


때문에 천년 전 그들이 만났을 때 발음했을 실제 음가는 알 길이 없다.


패트릭은 옹베르만이 씌워준 렌즈를 통해 자신이 빛으로 가득한 드워프들의 거대한 회랑 가운데 누워 있음을 깨달았다.


통제강박의 극치를 보여주는 정밀한 좌우대칭 열주(列柱)들이 사파이어 빛을 뿜으며 회랑 끝 제단을 소실점 삼아 웅장하기 서있었다.


백 미터를 훌쩍 넘기는 천장은 거대한 돔형 구조로 천체의 위치를 형상화한 보석들이 박혀 있었고 오색빛을 머금은 채 영롱하게 반짝였다.


‘아까 그 청아한 음색은 저 모루를 내려친 소리였군.’


제단 정중앙에는 얼음처럼 투명한 수정 모루가 놓여있었다. 그 곳에 비늘갑옷을 입은 털복숭이 드워프가 망치를 들고 서 있었다.


패트릭은 본능적으로 그가 즈베즈다, 즉 드워프들의 왕이라 생각했다.


「너의 음악은 질서와 혼돈 사이에서 절묘하게 춤을 추고 있구나. 결코 무저갱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며 불과 얼음 사이를 줄타기하는 우주의 발걸음과 같도다.」


모루 앞에 서 있는 드워프의 우두머리가 말했으나 결코 입을 벌리는 일은 없었다.


성대가 아닌 색다른 발성기관을 쓰는 듯했다.


사실 타루큅 이눅이 그들 사이를 통역해 주지 않았다면 패트릭은 즈베즈다가 말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대왕께서 그대가 누구에게 악기를 배웠는지 궁금해 하신다.」


「나는 스승이 없소. 자연을 통해 스스로 배웠소.」


물론 스승이 아예 없던 건 아니다.


유일한 스승은 가정교사 노예들보다 실력 없는 뜨내기 집시였다.


패트릭은 열두 살 때 기근으로 굶어 죽기 직전 팔려 스승의 손에 거세를 당했다.


처음엔 싸구려 술집과 부두가의 매음굴에서 웃음과 노래를 팔았다. 밤에는 스승의 더러운 욕망도 채워줘야 했다.


도박판에서 진 빚 때문에 스승이 삼류 악단에 들어간 뒤로는 하루의 절반을 헥센바인에 취해있는 스승대신 류트를 배워 대타를 뛰었다.


어느 날, 스승이 신전에 들어가 디튀람보스를 연주하다 튜닝을 반음 낮추는 바람에 손목이 잘리자 악단의 정식 연주자가 된 이후부터는 평생 독학으로 끝없이 소리의 세계를 탐구해왔다.


「너의 소리는 태고의 질서와 혼돈을 동시에 담고 있다.」


자신의 소리를 이해하고 알아주는 자를 만난다는 것은 연주자에게 있어 최고의 행운이다.


[옛 뱀에 대한 애가]를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세상의 끝에서 지음(知音)을 만나다니.


패트릭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렇다면 드워프의 왕이여, 기억해 주겠는가? 내가 죽은 뒤에도 [옛 뱀에 대한 애가]를 후대에 남길 수 있도록 너희들의 문자로 악보를 만들어 다오.」


어리석은 주문이었다. 즈베즈다는 가만히 고갤 저었다.


「한 지점에서 만난 두 직선은 다시 만날 수 없다. 그대의 연주는 지금 이 시대, 이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패트릭은 실망했다.


드워프들의 놀라운 건축양식과 정밀한 비례, 범상치 않은 제련기술에 잠시 기대를 품었다.


아마 패트릭은 인류 역사상 가장 암기력이 뛰어난 인간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한 달 밤을 내내 불러야 끝날 서사시 몇 편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단번에 줄줄 욀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문맹이었고 악보를 볼 줄도 몰랐기 때문에 모든 기억을 자신의 몸이 기억하고 있을 뿐 체계적인 전수가 곤란했다.


‘제자를 길러내지 못한 것이 한이다.’


변변한 스승에게서 사사받은 적이 없던 그는 체계적인 교수법을 알지 못했다.


종자로 몇 번 데리고 다녔던 소년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여비를 훔쳐 달아나거나 전염병으로 죽었다. 혹은 끔찍할 정도로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 는 제자를 두지 않게 되었다.


‘이들의 문명이라면 분명 내 노래를 후대에 남길 수 있을 텐데.’


화성학이나 대위법 등이 발명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자신의 음악적 야심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할 토대도 없었고 기보법도 형편없었다.


그래서 패트릭은 불현듯 인류의 문명수준을 뛰어넘는 드워프들이 작품의 가치를 이해하고 전수해 줄 수 있으리란 막연한 희망을 품었던 것이다.


「왜 안 된다는 것이오? 그대들은 악보나 문자가 없습니까?」


「기록은 진리를 부식시킨다. 그리고 해석은 진실의 사생아를 낳는다.」


동굴 속 드워프들은 문자를 증오했다.


그들은 문자를 통한 지식의 전수는 탕자의 발자국과 같다 여겼다.


시간이 지나면 결국 그들이 진리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지를 깨닫게 해줄 뿐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드워프의 왕은 패트릭의 연주와 달리 그의 목소리를 혹평하며 그의 마지막 기대를 짓밟았다.


「태초의 울림을 간직한 네 연주와 달리 목소리의 떨림은 너무나도 추하고 조잡했다.


그 목소리를 얻기 위해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이냐? 실로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소리다.


네 목소리만으로도 네가 얼마나 더러운 것들을 마시고 음란한 것들을 말하고 부정한 것들을 삼키며 살아왔는지 우리는 알 수 있다.」


패트릭은 자신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크나큰 수치심을 느꼈다.


원해서 카스트라토가 된 것은 아니었다.


가난 때문에 강제로 거세당했지만 그는 좋은 원석을 연마하듯 자신의 목소리를 부단히 다듬어 왔다.


어느 왕국, 어느 문명권에서도 한결같이 그의 목소리를 천상의 것으로 칭송했기에 약간의 자부심도 있었다.


하지만 드워프들의 왕은 그의 마음 속 아물지 않은 상처를 꿰뚫어 보았다.


그의 목소리를 ‘인위적, 작위적, 음란, 조잡함’으로 정의함으로써 패트릭의 내면 깊이 숨겨진 자격지심을 벌거벗겨 드러낸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원하는 게 무엇이냐?」


캉!


즈베즈다가 다시 모루를 내리친 뒤 입을 열었다. 그가 내린 주문은 참으로 기묘하고도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너는 우주가 태어날 때 내던 태초의 소리를 만들어라. 그리고 그것으로 옛 뱀을 죽여라.」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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