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그리스인이 뭐죠?
계획대로.
살다 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날이 올지는 몰랐지만 좋은 게 좋은 거지.
오랫동안 준비해온 계획이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일사천리로 풀릴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아버지에게 돈을 빌리고 그걸 마중물로 삼아 제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모금활동을 했으며, 그것을 그리스에 전달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받은 돈은 그대로 돌아왔지.
이건 반환하는 걸로 당초 내가 큰소리 쳤던 걸 증명하면 될 일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올림픽에 오스만계 그리스인들. 내 표현으로는 룸들이 참가하겠다는 의지를 전했지만 답을 받지 못한 채로 돌아온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가 보인다.
크게 티를 내려고 하지는 않았지만 어딘지 침체되어있는 그 모습이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이야기 해 주는 것만 같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느낀 것이겠지.
아직도 부족하기는 하지만 그동안 사방에서 쏟아지는 욕을 견뎌냈던 보람이 느껴진다.
마음 같아서는 환호성이라도 터트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총독으로써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니 그럴 수는 없다. 그건 퇴근한 이후 관저에서 하면 될 일이겠지.
“그러면 그 건에 대해서는 향후에 추가적인 논의를 한다는 거죠?”
“예,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즉답이 돌아오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그런 일이 상의도 없이 이뤄질 거라고 생각할 만큼 순진한 사람은 아직 동심이 남아있는 테오도라 정도가 아닐까.
정치인으로썬 젊지만 능력이 출중한 내 대리인이 그걸 몰랐을 리가 없는데도 표정이 침통한 것을 보면 거기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지는 예상이 간다.
“그러면 대표단을 꾸릴 계획을 세워야겠죠?”
“답도 안 받고 시작합니까?”
“그걸 언제 받을 줄 알고요? 그리고 이렇게 해도 어차피 저쪽에서는 수락을 할 수밖에 없을 텐데 뭐 그런걸 고민하죠?”
내가 태연하게 말해주자 저쪽에선 날 괴상한 사람이라도 보는 눈으로 쳐다본다.
뭐, 왜, 뭐.
“이렇게 하면 저쪽도 알아서 승낙을 할 수밖에 없겠죠.”
원래 뭘 하든 호감도 관리라는 건 중요한 법이다. 크레타의 그리스인들이 그리스를 갈망하는 만큼 옛 동로마의 고토를 수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의 입장에서도 현지의 그리스인들의 지지가 절실했다.
그랬기에 그것이 정말 그리스인의 돈일지 오스만의 돈일지 구분하기 힘든 상황에서도 그 돈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겠지. 그걸 거절했다가는 오스만의 그리스인. 룸들이 이반할 확률이 적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내가 명분 쌓기 좋게 아버지에게 받은 돈을 얹어줬으니 저쪽에서도 나름의 명분을 쌓으며 받아갈 수 있었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올림픽에 한 푼이라도 보탠 룸들이 참가한다는데 그걸 거절한다고?
나라면 그런 짓 못한다.
결국에 정치라는 건 인기였으니까. 잔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면서도 들이켜야 할 때가 오는 법이다.
“알겠죠?”
우리 명석하신 대리인께서 그런걸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다는 믿음을 담아 시선을 보내주니 저쪽에서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래야지.
“관람이야...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배타고 가든 걸어가든 할 테니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부분이고 선수들만 모집하면 될 일인데.”
“계획에 대해서는 알고계십니까?”
“당연하죠. 그런 것도 모르고 계획을 짜는 멍청이도 있나요?”
역사를 보면 가끔은 그런 멍청이들이 있어서 문제가 되지만. 내가 아무리 진짜로 천재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계획도 다 봤고, 참가조건이 아마추어 선수로 제한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요.”
“알겠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쪽이 언제 그런걸 다 숙지했는지 궁금했지만. 아무튼 유능한 사람이니까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 라고 손쉽게 생각하기로 한다. 도와줘 엘라에몽!
“우선은 각지에 공문을 띄우기만 해도 하겠다는 사람은 잔뜩 구할 수 있겠네요.”
무려 천년도 넘는 시간 만에 부활한 첫 올림픽에 참가할 기회다. 룸. 어쩌면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람이라도 한번쯤 욕심이 날법한 자리다.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크레타에서만 모집을 할 수는 없으니까 다른 지역에도 공문을 보내서 협조를 요청해야겠네요.”
그 사이에 겸사겸사 코스탄티니예에 선 조치 후 보고라도 이야기를 전해야 하고.
그리스가 그랬듯 이정도로 일을 키워버린 시점에서 그런 성품을 가지신 황제폐하께서 나를 제지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 이 건에 대해서는 아주 자신만만했다. 거기에 더해 그리스에서 돌아온 돈까지 얹어 보낼 테니 성공확률은 100%. 그 이상이라고 봤다.
“그러면 사람들은 어디로 모이라고 해야 할까요. 역시 크레타인가?”
“그것도 섭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편한 쪽으로 해 보세요. 크레타에서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으니까. 총독부에 그 정도 뱃삯도 못 내줄 만큼 곤궁하진 않으니까 돈은 걱정하지 말고요.”
“고려하겠습니다.”
어쩌면 나보다도 총독부의 행정상황을 잘 알 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것 같기도 했지만.
“아, 아예 우리도 경기장 하나를 마련하는 건? 언젠가 라도 크레타에서 올림픽 경기가 열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물론 나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한번 찔러보자 우리 유능한 대리인 분께서는 단칼에 잘라버리신다.
“이 섬에 그럴만한 자원이 없는 건 알고 계시잖습니까.”
“...말 한 번도 못하게 만들고.”
“어쨌든 지시하신대로 예선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잠깐.”
아직 중요한 것 한 가지가 빠져있었다.
“중요한 것 한 가지가 빠진 것 같은데.”
“무엇을 말씀하시고 싶은 겁니까?”
“이번에 올림픽에 참가하는 건 그리스인... 룸으로 한정되는 거 기억하고 있죠?”
“예, 총독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이야기라면 이미 엘레프테리오스가 그리스에 다녀오기 전에도 이야기가 되었던. 아니, 내가 일방적으로 통보했던 이야기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하지 않았었지.
“그렇다면 그 룸의 정의는 뭐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상대가 나니까 막 뭐라고 하지는 못했지만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일그러지는 상대의 얼굴이 그 감정을 효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스인은 그리스인입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 룸이냐고 물어보는 거겠죠?”
처음 그에게 룸으로 이뤄진 대표단을 올림픽에 출전시킨다고 말했을 때 까지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이야기다. 하지만 그가 그리스로 떠나있던 사이에 한가지의 의문이 생겨났다.
대체 그놈의 룸(그리스인)이 대체 누구를 말하는 건데?
“룸의 정체성은 어디서 나오는 거죠?”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스스로가 룸이라고 생각하면 룸이 되는 건가요? 그러면 저도 룸이 될 수 있는 건가요?”
“그건.”
내 저돌적인 질문에 저쪽에선 말문이 막힌 것인지, 할 말이 없는 것인지 말이 끊긴다. 개인적으론 전자였으면 좋겠지만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이건 너무 극단적인 예니까 조금 예시를 바꿔보죠. 자신이 룸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무슬림이라면 그 사람은 과연 룸인가?”
“...”
“그렇다면 룸은 정교회라는 정체성에서 나오는 것인가요? 하지만 정교도라고 전부가 자신을 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
“잘 알지는 못하겠습니다.”
“새로운 기준은 뭐가 있을까요? 이렇게 그리스어를 쓰는 사람들?”
내가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그리스어로 물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조롱하는 구도로 비출지도 모르겠는 모습이다.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은 겁니까?”
“어떤 사람을 룸이라고 정의해야 할지 확실히 하자는 거죠.”
“그렇게 사람들의 기준을 나눌 필요가 있습니까?”
“그들을 위한 거죠.”
“그것이 어째서 그들을 위한 것이 되는 겁니까?”
자기가 그리스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기준을 씌워서 나누겠다. 내가 지금 한 말을 나쁘게 해석하면 이렇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 말이 그들을 위해서인지 알 수 없겠지.
하지만 생각을 바꿔보면 다르다.
“자기가 룸이라고 생각하고 그리스에 갔는데, 정작 그리스에서는 그 사람을 룸이 아닌 오스만 사람이라고 해 버리면 그 사람들의 심정은 어떨까요?”
“...”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상처를 받기 전에 미리 조치를 취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요?”
물론 이게 거기에 걸러질 사람들에게 잔인한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잔인함이 사람들에게 덜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거다.
“그러니까 여기서 확실하게 정의를 내려 보도록 하죠.”
그렇게 말한 나는 주먹을 쥐어서 내 대리인의 앞에 보인다. 그리고 그 중에서 검지를 피며 첫 번째 사례를 든다.
“첫째, 스스로를 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걸로 한다.”
어찌 보면 가장 이상적인 방안이다. 적어도 참가하는 과정에서는 그 누구의 불만도 없겠지.
“하지만 그리스어를 하지 못하거나 무슬림인 사람이 룸이라고 하더라도 인정해주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그렇게 간단한 평을 마치고 이번에는 중지를 펴 보인다.
“둘째, 정교회 신도들의 참가만 가능한 것으로 한다.”
“이쪽도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리스에 가서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불편하겠죠?”
거침없는 내 말의 뒤를 따라 이번에는 약지를 펴 보인다. 벌서 세 개의 손가락이 펴졌다.
“셋째, 그리스어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참가만 가능한 것으로 한다.”
이 경우에는 재밌는 상황도 생긴다.
“어? 이러면 그리스어를 할 수 있으면서 아마추어 운동선수인 저도 참가할 수 있겠죠?”
하고 싶은 말을 그걸로 대신하며 킬킬 웃어 보인 나는 마지막으로 소지를 펴 보인다.
“마지막.”
“그리스어를 사용할 수 있는 정교도만을 허가한다.”
그렇게 말을 꺼낸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날 보고 있는 대리인을 향해 지을 수 있는 최선의 미소를 보내준다.
물론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최선이었는지는 보는 사람이 판단을 내릴 것이겠지.
“이리저리 불합리한 이야기 같아 보이기는 한데 결과적으로 문제는 제일 덜 생길 것 같은 구성이 되겠죠?”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내가 답을 정해놓고 그것을 밀어붙이는 모양세가 되어버린 기분이지만. 결코 그럴 생각은 없었다.
이 일에 대해서 나는 일체의 결정을 그들 스스로에게 맡길 거니까.
스스로가 결정하고 그 결과역시 스스로 맞이하는 것이 그들에게도 가장 만족스러운 과정이겠지.
그런 내 질문에 답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으니까.
“혹시 지금 답하기는 힘들 까요?”
“애초에 제 생각으로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그러면 시간은 더 드리도록 하죠. 필요하다면 더 많은 사람의 의견을 모아도 상관없고요. 그 경우에는 가능한 많은 사람의 의견이 모이면 좋을 텐데.”
필요하다면 그걸 가지고 이 섬의 사람들과 국민투표도 할 의향은 있었다.
물론 저쪽에서 별로 바라지는 않을 것 같지만.
뭐, 과정이 중요한가.
“그러니까. 모집 전에 그 의견을 가져오도록 하세요.”
나는 이것만 받아내면 될 것이었으니까.
- 작가의말
이번편의 모티프는 실제 역사에서 1920년대에 있었던 그리스-터키 인구교환에서 나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터키와 그리스는 자국내 터키/그리스인을 종교를 기준으로 추방했습니다. 그 결과 무슬림이지만 터키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과 그리스인이지만 그리스어를 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속출했고 그 사람들이 받아야 했던 고통은 막대한 것이죠.
사실 저도 오르한이 제시한 네가지 방식 중에서 뭘로 할지를 결정하지는 못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의견도 한번 들어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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