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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래스몽키님의 서재입니다

세레나와 불가사의한 미궁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글래스몽키
작품등록일 :
2017.03.09 18:09
최근연재일 :
2018.12.25 23:38
연재수 :
8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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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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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481,064

작성
17.03.30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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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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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19쪽

4회차 2

DUMMY

비에타의 미궁 2층 탐사대 배치는 세레나가 기억하는 첫 공략 때와 동일했다. 길잡이이자 트레저헌터인 올리브가 가장 앞에 서고 그 뒤를 기사 두 명이, 가운데에 보호 받아야 할 마법사와 궁수, 세레나가, 행렬의 맨 뒤에는 남은 기사가 섰다. 8명이 동시에 걸었다. 적은 인원은 아니지만 20명에 가까운 인원이 미궁을 꽉 채워 걷던 걸 떠올리니 새삼 미궁이 넓어 보이고 인원수는 초라하게 느껴졌다.

‘짐덩이가 없는 건 좋네.’

2회차와 3회차 때 필리아가 내내 세레나의 옆에 들러붙어서 떨어질 줄 몰랐다. 세레나는 따스했던 친구의 온기가 아쉬워졌다. 하지만 그 온기가 미궁에 있어선 안 된다는 점을 떠올리고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세레나 자신이야 목에 현상금이 걸려 있고 니도 여왕의 환심을 사 세라프의 안전을 보장받아야한다는 목적이라도 있지. 필리아는 그저 주인 잘못 만나 따라다니는 것에 불과하다. 필리아가 보내주는 충심과 애정이 무한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품은 감정은 결코 일방적일 수 없다. 부모지간에도 그러한데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라도 그러할까. 세레나가 세라프를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한다고 보이는 이 미궁 탐사도 결국 세레나의 자기만족이 끼어 있다.

난 누나가 정말 미워.

세레나의 머리에 이전 생에서 세라프가 한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왜 하필 그럴 때 철이 들어선.’

한평생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철이 그렇게 팍 들어버릴 줄 누가 알았을까. 대견하기도 하지만 철 든 세라프를 다시 보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세레나는 거듭 고개를 저었다. 철든 죽은 동생보다 누나를 물어뜯으려는 산 동생이 나았다. 암 백배는 낫지.

세라프에게도 동일하리란 생각을 못 하는 것이 세레나의 나쁜 점이었다. 아니, 알면서 자기만족에 무시하는 게 그녀의 단점이라 할 수 있다.

비에타의 미궁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무저갱으로 향하는 입구처럼 어두웠다. 인공적인 빛을 방해하는 조금 특이한 빛이긴 하지만 계단과 초반부엔 아무런 위험이 없다는 걸 아는 세레나는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조심하면서도 약간은 여유롭게 계단을 밟았다. 어둠 속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정도로 육체에 자신이 없기 때문에 벽을 짚은 건 바뀌지 않았다. 장갑을 낀 손끝을 스치는 돌벽의 감촉. 세레나는 내내 어떻게 하면 3층 계단을 무사히 발견하고 이 계단을 내려가지 않고 올라가는 날이 올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파티는 공주의 침묵을 다른 식으로 오해했다.

“조금만 더 가면 밝은 곳이 나옵니다.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공주님.”

몬스터가 없는 미궁의 어둠은 잠들기 좋은 어둠일 뿐이다. 아직 미궁에 홀로 남은 적 없는 세레나에게 초입의 어둠은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않았다. 워낙 어둡다 보니 마법사들이 만든 광구가 있어도 계단이 있는 바닥을 비추는 게 한계였다. 그래서 세레나의 표정이 보이지 않다보니 다들 공주가 무서워하고 있다고 오해를 했다.

무서워하는 공주보단 당당한 공주의 발언권이 강하다. 세레나는 꾸밈없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 두렵지 않다.”

여기서 좀 더 발언권을 얻기위한 양념이 추가.

“우리 흐지엔 선조로부터 이어진 신혈이 내려온다. 그 영향인지 그리 두렵지 않구나. 무엇보다 그 신께선 미궁의 신이시니 말이다.”

“미궁의 신?”

“이름은 전해지지 않는 고대의 신이죠. 모험가 중에도 믿는 사람이 많아요.”

“그러고보니 공주님의 눈동자 색이 주황색이네요. 처음 봤어요. 미궁에선 특히 길한 색이죠.”

“그래. 이 주황색 눈은 오직 흐지 왕가에만 드물게 나타나는 신혈의 증거다. 미궁의 신께선 주황색 눈을 가지셨거든.”

미궁의 신에 대해 모르는 비에타의 기사, 마법사들과 다르게 두 모험가는 세레나의 말에 바로 반응했다. 세레나는 당당했다. 미궁의 신이 주황색 눈인 것도 진짜, 그녀의 선조 중에 미궁의 신이 있는 것도 진짜, 두렵지 않은 것도 진짜. 거짓은 하나도 없었다.

“미궁의 신이라니, 마이너하네요.”

“존재한다는 기록은 있소. 마법사들의 기록에도 존재는 언급되니까.”

“그래도 모험가들 사이에서 흐지 왕실 얘기가 나올 법 한데 처음 들어~.”

투위블이 감탄하고 아루파가 기억하고 있는 사실을 전했다. 올리브는 뜻밖이라는 듯 얘기 했다. 세레나는 대충 둘러댔다.

“마이너한 신이라 왕가에서 쉬쉬했지.”

“아하하! 알아요! 저기 어디더라. 어디 왕실엔 오수의 신이 조상이라 필사적으로 숨긴다고 들었어!”

‘그런 신도 있어?’

세레나는 기가 막혀서 한숨을 쉬었다. 하여간 이놈의 판타지 세계. 미궁이란 기상천외한 공간이 있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하여간 없는 신이 없었다. 어지간한 개념과 사물엔 대부분 신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됐다, 신경 쓰지 말자. 중요한 건 신의 수가 아니라 여길 무사히 공략하는 거니까.’

세레나의 얘기가 계기가 되어 파티는 세상에 존재하는 기괴한 신들을 대화 주제로 삼았다. 확실히 수가 많았던 이전에 비해 파티원끼리 오가는 대화가 많았다. 미궁을 탐사하는 파티원끼리 사이가 좋아지는 건 긍정적인 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조상인데, 왕가에서도 쉬쉬하는 건 좀 이상한가?’

세레나는 잡신이 조상인 게 부끄러워 쉬쉬했다는 의견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지만 새삼 생각해보니 오수의 신도 모시는데 미궁의 신이라고 부끄러워 숨긴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일단 세상에 미궁이 엄연히 존재하고 미궁이 해가 되진 않으니 부끄러울 정도의 신은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귀족과 왕족은 혈연을 중시한다. 괜히 가계도를 엄중하게 보관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세레나가 대충 흘겨보았던 왕실 족보의 어디에서도 미궁의 신은 발견할 수 없었다. 신혈이 내려오는 시작이니 중요하게 강조해도 모자란데 일부러 감추기라도 한 것처럼 흔적이 없었다.

‘내가 대충 보긴 했지만 진짜 없었어.’

뭔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세레나의 머릿속은 이미 포화상태였다. 눈앞에서 필리아와 세라프가 죽는 걸 목격한 스트레스는 풀리지 않은 채 압축되어 언제 터질지 모르는 상태였다. 괜히 미궁 속에서 미친년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세레나는 일부러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골치아픈 건 치워버리고 좋은 일만 생각하기에도 모자랐다.

‘일단은 앞으로 나가자. 계단을 찾고 나가는 것. 그게 전부야.’

어깨에 짊어진 가방은 무거워도 공주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끝나지 않을 듯 사람을 숨죽이게 만들었던 완벽한 어둠이 끝나고 빛이 도래했다. 영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오 마이 아이즈!를 외칠 때 오네가 진중하게 세레나에게 보고했다.

“공주님, 이 빛이 이어진 복도를 지나면 다시 어두운 복도가 나타나고 거기에서부터 몬스터가 출몰합니다.”

오네는 세레나가 기절하는 동안 생긴 일주일의 공백기에 왕실에서 미궁 수색을 좀 더 했다고 부연설명했다. 세레나가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출몰하는 몬스터는 하급 언데드. 공주님께서 보시기에 힘드시겠지만 저희를 믿고 버텨주십시오.”

“그대들을 믿네.”

오네는 세레나에게 언데드에게 절대 가까이 가지 말라 신신당부하고는 올리브와 영에게 더 자세한 정보를 알렸다. 올리브는 혀를 내둘렀다.

“미궁 2층에서 언데드? 와, 진짜 최악. 돌아가고 싶어졌어.”

“대단한 언데드는 아니다. 하급 좀비와 스켈레톤 병사가 나온다고 들었다. 어지간한 전투는 우리들이 맡을테니 그대는 함정에 집중하도록.”

“그렇게 말 안 해도 그럴 거야, 기사 나으리. 그런데 언데드를 우습게보지는 마. 언데드는 말이지, 최악에 최악에 최악이라고.”

언데드가 최악이란 얘기에 세레나는 절로 동의해 고개를 끄덕였다. 언데드는 정말로 최악이었다. 개중에서도 리치가 제일 최악이다. 층보스인 리치를 상대할 걸 생각하니 그야말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세레나는 머리를 꾹꾹 지압했다.

‘왼쪽길이 답이 아니면 어떡하지? 차라리 오른쪽 길을 가면서 코카트리스를 상대하지 않도록 우기는게...’

어두컴컴한 길로 가자고 주장하는 공주와 몬스터를 죽이지 말라고 주장하는 공주. 어느 쪽 주장이 더 파티에게 들어 먹힐 것인가. 세레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차피 랜턴을 얻기 위해선 오른쪽 길로 먼저 들어설 필요가 있다. 이때에도 코카트리스를 죽이지 않도록 파티를 회유해야 한다. 새끼 코카트리스의 깜찍한 외모에 혹한 바보 공주로 오해받지 않으면 좋겠는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미궁에서 몬스터를 앞에 두고 그냥 가자고 하는 게 어리석다는 건 세레나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 주장이 말도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면 빛의 복도가 등장하고 새끼 코카트리스가 출몰할 것이다. 그 삐약삐약 우는 작고 귀여운 것들을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공주는 고심하고 파티는 이동한다. 칼로 잘라먹은 것처럼 선명하게 구분되는 어둠을 앞에 두고 오네가 지도를 펼쳤다. 올리브가 자신이 그리던 지도와 마법 지도를 비교해가며 미궁의 대략적인 크기를 추정했다. 기사들은 언데드를 상대하기 좋은 둔기류로 무기를 바꾸고 마법사들은 전투시 시야 확보를 위한 빛마법을 시전 했다. 영은 화살을 조율했고 세레나는 고심을 중단하고 영을 노려봤다.

‘저 사람이 제 실력만 발휘해줘도.’

영이 신성력을 보일 때는 세레나와 단 둘이 남았을 때거나 혼자 살아남았을 때 뿐이다. 세레나는 영을 설득할 수 있을까 재보았지만 바로 포기했다. 저 정체불명의 모험가를 무엇으로 설득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두운 데로 가려니 영 꺼림칙하네. 안에 있는 게 언데드란 걸 알아서 그런가 더 꺼림칙해.”

언데드를 극혐하는 올리브가 투덜거렸다. 영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둠은 모두를 포용하는 공평함. 만인에게 평등하게 내려앉는 암흑을 사랑해봐.”

“하나도 안 공평하거든! 언데드한테만 유리하거든!”

“어둠에서 시작하여 어둠으로 돌아가리. 우리는 결국 어둠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 것이지.”

중2병 환자라고 생각할 땐 손발이 오글거리는 대사였는데 암흑신의 성직자라고 생각하니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세레나는 새삼 깨달았다. 사람은 어떻게 보이느냐에 따라 같은 말을 해도 느낌이 다르다. 그걸 떠올린 세레나는 자신의 모습을 점검했다. 일단 고개를 아래로 숙이지 육감적인 흉부가 드러난다. 똑바로 섰을 경우, 세레나는 고개를 아래로 숙여서 자신의 발을 볼 수 없었다. 가슴이 가렸다.

‘몸매만 좋은 아가씨잖아.’

이 거대한 가슴은 까칠한 남동생의 입을 틀어막는덴 효과적이나 파티원들을 설득하는 데엔 이점이 없다.

‘역시 신의 사도 흉내를 내야 하나.’

세레나는 두 손을 꽉 쥐고 다시 한 번 사기를 칠 것을 다짐했다. 이미 계단을 내려오며 신혈이네 뭐네 밑밥도 깔았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나쁜 짓을 하자는 것도 아니다. 귀한 생명 살리겠다는 희생정신 아닌가.

이미 언데드가 출몰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뒤이기 때문에 첫 번째 전투는 싱겁다 싶을 정도로 쉽게 끝났다. 세레나는 빛의 길에 도달하기 전 사기를 쳐야 한다고 거듭 다짐했다. 긴장 탓에 몸이 흔들리는 걸 스라이가 뒤에서 받쳐줬다.

“공주님, 저희들은 믿으십시오. 대장 한 명으로도 충분합니다.”

“고맙네.”

“공주님이 언데드처럼 흉측한 것을 보셨으니 놀라는 게 당연하지.”

아루파가 스라이의 눈치 없음을 책망했다. 세레나는 가만히 서서 숨을 골랐다. 몇 번이나 마주친 언데드에 데스나이트의 사기도 느껴봐서 그런지 하급 좀비와 스켈레톤 병사는 그리 무섭지도 않았다. 물론 보기에만 그렇다는 거지 직접 싸우겠다 소리는 아니다.

쓸데없이 눈만 높아진 전투불가능 짐덩이는 짐덩이에서 신의 사도로의 도약을 꿈꿨다.

“그대들에게 할 말이 있네.”

전투가 끝난 뒤 세레나는 오네를 불렀다.

“내가 미궁의 신 얘기를 꺼냈던 건 사실 이유가 있어서다. 잠깐 마법 지도를 보여주지 않겠는가.”

“여기 있습니다.”

세레나가 지도를 잡자 마법 지도는 소유자가 알고 있는 미궁 2층의 정보를 드러냈다. 갑자기 절반 이상이 꽉 차버린 지도에 파티는 경악했다. 세레나는 저번처럼 과하게 사기를 치기 위해 숨을 몰아쉬다 오네를 보고 숨이 멎었다.

부하를 잃고 자신을 원망하던 기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또 그런 원망을 받기는 싫었다.

‘신의 사도 말고 다른 거. 규모를 줄이자.’

“공주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지도의 절반이 찼어!”

“어떻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건...”

‘계시니 뭐니 말고 좀 규모를 줄여서.’

“실은 내가 미궁에 들어서면서 무언가 알게 된 게 있다. 갑자기 미궁의 절반이 머리에 주입된 것이지. 아마 미궁의 신께서 내게 알려주신 게 아닌가 싶어.”

“신의 계시인 겁니까?”

“아니,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니야. 후손이 미궁에 들어왔으니 공략이 쉽도록 힌트를 주신 것에 가깝다고 할까...”

“그럼 여기 이 지도에 나온 대로 가면 되는 거군요.”

“그렇지 않아. 미궁의 신께선 이미 알려준 재미없는 길로 가지 말고 모르는 길로 가야 네가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고 알려주셨네. 그야 그럴 것이, 그 분은 미궁의 신이 아니신가. 길을 아는 미궁은 돌아다닐 이유가 없지.”

말하고 보니 그럴싸했다. 세레나는 새삼 뿌듯해졌다. 역시 거짓말은 하면 할수록 늘었다.

“흐지의 왕족은 모두 이런 계시를 받을 수 있는 거예요?”

올리브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모험가인 그녀 입장에서 엄청나게 부러운 신의 가호일 것이다. 세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마 이건 내가 가진 초심자의 행운이 더해져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닌가 싶구나. 솔직히 살면서 미궁의 신을 느껴본 적은 한 번도 없거든.”

밑밥을 깔아둬서일까, 공주님이 미쳤다고 흐느끼는 필리아가 없어서일까. 파티는 이전보다 쉽게 세레나의 말에 수긍했다. 아무래도 세레나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거창한 사기를 안 쳐서 더욱 수긍이 쉬웠을 것이다.

파티는 세레나의 주장대로 새끼 코카트리스를 건드리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갈림길에서 오네가 휴식을 선언했다. 세레나는 미리 오른쪽 길로 가 보물 상자에서 랜턴을 얻어야 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한 뒤 왼쪽 길로 가자고.

몬스터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에 안절부절 못했던 파티는 갈림길에 도착하는 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기에 세레나의 말을 이전보다 신뢰했다. 아마 보물 상자에서 그녀가 말하는 대로 랜턴이 나오면 세레나의 말을 백퍼센트 믿게 될 것이다.

‘잘 될 거야.’

세레나는 침낭을 펼쳐 안으로 들어가 누웠다. 가슴이 두근거려 쉽게 잠이 들 것 같지 않았지만 머리를 바닥에 대자 놀랄 정도로 쉽게 잠들었다. 육체적 피로는 둘째치고 정신적인 피로가 상당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아무 꿈도 꾸지 않은 숙면을 취하고 싶었지만 꿈속에서조차 세레나는 쉴 수 없었다. 세레나는 억지로 끌려나온 듯한 꿈속에서 이제는 익숙한 사람을 발견하고 아랫입술을 질겅질겅 씹었다. 세레나의 부모를 죽이고 세레나의 목까지 베려하는 리처드는 세레나를 발견해놓고서도 멀뚱멀뚱 보기만 했다. 세레나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냥 되는 대로 말했다. 현실 일을 신경 쓰기도 바쁜데 꿈속의 일까지, 대륙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로 고민하기 싫었다.

“신께서 그러시길 네가 세계를 멸망시키려 한다는데 사실이야?”

“그래, 세레나. 미궁에 들어갔구나.”

“그딴 말 집어 치워. 난 3번이나 죽었어. 내가 묻는 말에나 대답하라고.”

“건강해보이니 다행이란다.”

리처드는 사촌 누이를 아끼는 사촌 오라비처럼 웃었다. 세레나는 울컥하여 외쳤다.

“지금 이 몰골이 건강해보여?”

세레나의 모습은 현실 그대로다. 고생해본 적 없는 공주님의 육신은 고작 하루를 걸었을 뿐인데도 만싱창이였다. 절대 건강해 보인다곤 할 수 없는 모습일텐데 리처드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건강해 보인다고 말했다.

“몇 번 죽었는지 셀 수 있는 건 아직 건강하다는 증거지.”

무심한 어조였으나 세레나는 그 안에 담긴 무게를 알아챘다. 결코 가볍게 해선 안 되고 가볍게 들어선 안 되는 말이었다.

“리처드... 너 몇 번 죽었어?”

“세라프는 건강히 잘 있고?”

“말 돌리지 말고 내 질문에나 대답하란 말이야! 내 목에 현상금을 걸었잖아!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잖아! 난 대답을 들을 권리가 있어!”

세레나는 결국 리처드의 멱살을 잡았다. 리처드는 나이 어린 사촌 동생에게 멱살을 잡혔음에도 화내지 않았다. 리처드가 살포시 웃더니 세레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레나, 내 소중한 사촌 동생. 난 너희를 친동생처럼 여겨.”

“말도 안 되는 소리 작작해!”

친동생처럼 소중하게 여기는데 숙부 내외를 죽이고 목에 현상금을 걸어?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분노한 세레나가 리처드의 따귀를 올려붙이려 들자 리처드는 세레나의 손목을 잡아 저지했다. 세레나가 발로 공격하자 고스란히 맞아주긴 했다.

“신들의 장난에 놀아나지 말고 흐지로 돌아오렴. 숙부님 옆에 묻어줄게.”

그에 대해선 세레나도 할 말이 있었다. 세레나가 이를 갈았다.

“세라프의 안전을 책임지겠다고 하면 못 돌아갈 것도 없어.”

“어차피 망할 세계, 며칠 더 산다고 달라지는 건 없단다.”

세레나는 일순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녀가 처음으로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이 돌아왔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니 얼마나 당찬 포부인가. 영의 말에 따르면 암흑신과 불의 신이 결합하여 낳은 흑염룡도 멸망시키지 못한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니. 일개 인간이 품기에 얼마나 큰 소망이냐.

“그딴 게 가능할 리 없잖아.”

“가능해.”

내내 무심하던 리처드의 하나 뿐인 눈이 위험하리 만치 생기있게 반짝였다.

“난 이 세계를 없앨 거야.”

“말도 안 되는...”

“그래, 세레나. 날 막을 수 있는 건 너뿐이란다. 막고 싶다면 네 마음대로 하렴. 아마 미궁의 신도 그걸 원해서 이 꿈을 꾸게 만드는 것이겠지.”

무어라 말을 해야 하는데 리처드의 눈을 보니 말문이 막혀 세레나의 혀가 움직이지 않았다. 하나 뿐인 그의 주황색 눈에 꿈틀거리는 기이한 기운. 종류는 다르지만 세레나는 저런 눈을 가진 자들의 특징을 알았다.

그녀의 어머니가 저런 눈을 하고 있었기에.

“미친 놈.”

빼어난 용모, 훤칠한 장신에 멋진 몸매. 못하는 게 없는 선량한 리처드 공. 숙부와 숙모를 죽이고 사촌 동생들에게 현상금을 건 것은 보통 사람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세계를 없애버리겠다는 헛소리는 아무나 하기 힘들었다.

리처드는 미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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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공주가 다시 미궁에 가야하는 사정 1 17.04.15 597 36 12쪽
53 리처드 외전 +3 17.04.15 604 38 9쪽
52 4회차 9 +2 17.04.01 605 42 14쪽
51 4회차 8 +4 17.04.01 579 3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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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4회차 6 +1 17.04.01 596 40 9쪽
48 4회차 5 +4 17.04.01 579 43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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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회차 2 +2 17.03.30 587 37 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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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3회차 10 +1 17.03.21 575 35 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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