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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님의 서재입니다.

Mr. 할리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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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뤼포
작품등록일 :
2021.12.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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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4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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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7.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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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8쪽

게임의 법칙. (3)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지명, 상호, 단체, 사건 등은 작가의 상상력으로 재구성되고 창조된 허구입니다.




DUMMY

엊그제 미국과 한국의 직원들에게 시원하게 연말 보너스를 뿌린 것 같은데, 어느 순간 앙상했던 용산 게리슨의 나무들이 녹색 잎으로 물들었다.

저 멀리 진해로부터 시작된 연분홍 벚꽃의 향연이 수도권으로 북상하고 있다.


“서전(Sergeant) 류.”


류지호의 군복에 병장 계급장이 달려있다.


“여기 우편.”


미군 부사관이 LA 우체국 소인이 찍힌 봉투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미국 본토에서 미군 부대로 들어오는 우편은 국제우편이 아니다.

미국 국내 우편과 동일한 취급을 받는다.

또한 미군 수송기를 통해 미군부대로 곧바로 배달된다.

국군 소속의 류지호에게 미국우편이 들어올 수 없다.

다만 미군이라고 해서 FM대로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

어차피 보안검열을 통과한 것이라 문제될 것이 딱히 없기도 했고.

류지호가 두툼한 봉투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Collapse>의 슈팅 스크립트(촬영본)와 크레디트 통지서가 들어 있다.

재난휴먼드라마 <Collapse>의 연출은 <영광의 깃발>을 연출한 바 있는 에디 즈워크(Eddey Zwork)가 맡기로 했다.

지난겨울 <가을의 전설> 작업을 마쳤는데, 모리스 메타보이까지 나서서 삼고초려 끝에 감독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다.

에디 즈워크는 모리스 메타보이와 같이 할리우드 유대계 커뮤니티의 일원이다.

게다가 트라이-스텔라 픽처스와는 <영광의 깃발>을 연출하며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

<영광의 깃발>은 62회 아카데미에서 남우조연상과 촬영상, 시각효과상을 수상했으며, 4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는 남우조연상 수상과 감독상 후보에 올랐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트라이-스텔라에 호감을 품고 있었고, 류지호의 <Collapse> 각본도 좋게 봤다.


“완전히 뒤집어엎지 않아서 고맙네.”


슈팅스크립트를 끝까지 읽은 류지호의 감상이다.

에디 즈워크 감독은 <가을의 전설>에서 함께 작업했던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Collapse> 각본을 손 봤다.

다행히 크게 바뀐 것은 눈에 띠지 않았다.

류지호의 제작의도 역시 훼손되지 않았다.

류지호가 한국인이라서 잘 알지 못했던 미국문화, 풍습, 미국식 언어유희, 유머 등에서 주로 윤색이 이루어졌다.


“VFX는 휴즈 앤 리듬과 계약했네.”


FX팀과 스턴트팀의 경력도 나름 만족할 만했다,

동봉된 서류에는 영화 전반에 대한 일정과 함께 주요 스태프들의 경력이 정리된 문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공동 프로듀서 크레디트를 받게 된 류지호다.

당연히 프로젝트 진행에 대해 상황을 보고 받을 권리가 있다.

캐스팅 부분에서도 비교적 만족스러웠다.

전직 소방대장은 패트릭 스웨이스, 쇼핑몰 설계사무소 직원은 니콜라스 코폴라 그리고 엘런 왓츠와 한국계 캐나다 배우 산드라 류가 특히 눈에 띄었다.

패트릭 스웨이스의 큰 아들 역할은 <굿바이 마이 프랜드>의 촬영을 마친 배런 렌프로가 합류하기로 했다.

캐롤코 픽처스의 피터 웰스 사장은 전직 소방대장으로 제라드 깁슨이나 마빈 코트너를 생각했다.

두 사람은 대작영화를 준비 중에 있어 정중히 출연요청을 고사했다.

류지호로서는 그들이 합류 불발이 전혀 아쉽지 않았다.

패트릭 스웨이스가 미국에서는 하향세라고 해도 한국에서는 여전히 스타배우다.

영화감독 프랭크 코폴라의 조카이자 배우인 니콜라스 코폴라의 경우는 작년에 트라이-스텔라 픽처스와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작업한 인연이 있다.

참고로 니콜라스 코폴라는 올해에만 <Collapse>를 시작으로 <이중노출>과 <라스베거스를 떠나며>를 차례로 촬영할 예정이다.

엘런 왓츠와 산드라 류 두 여배우는 류지호가 강력하게 추천했다.

호주에서 별 볼일 없는 영화를 찍고 있던 엘런 왓츠는 영국으로 옮겨가 일거리를 찾고 있었다.

에이전트로부터 트라이-스텔라 픽처스에서 오디션 제의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열 일 마다하고 LA로 날아왔다.

류지호와 동갑인 한국계 배우 산드라 류는 캐나다 국립예술대학을 졸업하고, 캐나다에서 연극공연과 단편영화에 간간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녀 역시 처음으로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한다는 기대감으로 LA까지 날아왔다.

두 여배우 모두 대학시절부터 많은 연극무대에 오른 경험이 있다.

연기력 부분에서는 전혀 문제가 없다.

두 여배우는 에디 즈워크 감독이 직접 오디션을 보고 출연을 결정했다.

사실 분량도 많지 않고, 대단한 역할도 아니다.

<Collapse>를 통해 두 여배우가 갑자기 스타가 될 것 같지는 않다.

미래에 뜰 배우와 미리 인연을 맺어둔다는 의미가 있는 캐스팅이다.

또 하나 <Collapse>가 류지호에게 의미가 남다른 점이 있다.

바로 할리우드에서 활동했거나 하고 있는 한국계 1세대 배우들과 인연의 단초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Collapse>의 악역인 쇼핑몰 회장 역할에 오순택이란 이름의 한국인 할리우드 진출 1호 배우가 캐스팅되었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을 한국인 캐릭터로 출연시키지 말라는 지침도 내려둔 상태라서 스크립트에 한국계라고 따로 표기한 캐릭터는 모두 실제 한국계가 캐스팅 됐다.

트라이-스텔라TV 얀 호퍼 말에 의하면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계가 생각보다 많다고 했다.

영화나 TV시리즈에 한국인 캐릭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주로 일본인이나 중국인 때로는 동남아시아 역할까지 맡는다고 했다.


“앞으로 한국계 배우들이 내 영화에 출연하려면 한국말 좀 연습해 둬야 할 거야.”


류지호는 어설픈 한국어를 구사할 바에는 아예 시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다만 오순택 배우는 한국에서 배우 활동하다가 할리우드에 진출한 경우라서 예외다.

한국말은 물론 영어도 수준급이다.

앞으로 류지호 본인이 프로듀싱하는 할리우드 영화에 반드시 한국인 캐릭터를 등장시킬 계획이다.

소닉-콜롬비아스 픽처스에서 투자·제작하는 영화마다 일본인 캐릭터를 반드시 출연시키고, 일본 제품을 PPL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트라이-스텔라 픽처스의 오너가 한국인이면 한국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이 당연한 거다.

애국심 때문이 아니다.

홍보·마케팅 차원에서다.

류지호는 한국에 WaW 픽처스라는 메이저 영화사를 소유하고 있다.

WaW 픽처스가 수입·배급·상영하는 할리우드 영화 속에 한국인이 등장하면 한국관객에게 약간의 호감을 어을 수 있다.

영화흥행에도 도움 되는 건 당연지사다.

<Collapse>의 예산은 2,300만 달러.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그 반타작.

패트릭 스웨이스가 아직도 스타로 대접받는 아시아권에서 선전을 해주고, 부가시장에서 본전치기만 해주면 선방하는 거다.

류지호는 <Collapse>를 기획한 애초의 의도대로 돈을 벌기 위한 영화가 아니라 한국의 삼봉백화점 참사를 막아보는 것에 중점을 두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왕이면 다홍치마다.

돈까지 벌어다 주면 그것만큼 좋은 것도 없다.


“에디.... 영화만 잘 찍어 줘봐. 내가 비싸고 고급진 시계 쏜다. 스위스 명품으로다가.”


할리우드에서는 제작사가 흥행에 기여한 감독에게 개인적으로 선물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한국처럼 현금 보너스가 아니라 대체로 상품을 선물하는 편이다.


“이 참에 명품시계 브랜드와 디자인 좀 알아보라고 해야겠어.”


❉ ❉ ❉


카투사로 복무하며 가장 좋은 점은 주말마다 외박을 허가(PASS) 받아서 합법적으로 외출 및 외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PT(체력 테스트)와 사격 테스트(전투병과)를 통과 못하면 못 나온다.

PT테스트는 푸쉬 업, 윗몸일으키기, 2마일 달리기다.

사격은 한국군의 사격술 예비 훈련처럼 빡세게 하지 않는다.

탄피 분실 걱정 없이 정말 원 없이 쏠 수 있다.

류지호는 외출·외박을 나가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다.

추석이나 설 명절이 끼어있는 외박 때는 4박 5일 외박을 나온 적도 있다.

오죽하면 장남을 애지중지하는 심영숙마저 그만 좀 나오라고 타박을 할 정도다.

그런 와중에 성격 나쁜 미군병사와 갈등을 겪기도 했고,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못된 심보의 간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다.

용산 캠프에서 근무하는 카투사들은 대부분 대학생이다.

류지호처럼 유학파도 있고, SKY 외에도 최소 서울 소재 명문대학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학력과 인간성은 상관관계가 없는 모양이다.

유학파라고 어깨에 힘을 주던 카투사들이 류지호를 보게 되면 꼬리를 말았다.

UCLA를 다니다 온 것 때문도 중견기업 오너인 것 때문도 아니다.

학생 아카데미 금메달 수상자이자, 무려 아카데미 단편영화상 노미네이트 감독이기 때문이다.

비록 아카데미 단편영화상 수상은 불발 되었지만, 학생이 오스카 후보에 든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Life Goes On>의 수상이 유력하다는 이야기도 있긴 했지만, 결국 칸영화제 단편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옴니버스>란 프랑스 단편영화가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미국의 신문들에서는 류지호에게 영화 ‘신동‘ ’천재‘ 같은 타이틀을 붙이기도 한다.

투자 신동도 빠질 수 없다.

럭키 보이라는 별명도 여전히 따라다니고 있다.

그러니 제아무리 아이비리그 출신이라고 해도 류지호 앞에서 까불 수가 없다.

류지호 입장에서 선임든 후임이든 다들 안타깝게 여겨졌다.

다들 동생처럼 느껴져서 잘 대해줬다.

어쨌든 병장으로 진급하기까지 적지 않은 일이 있기는 했다.

웃기는 일, 어이없는 일, 그리고 진짜 당혹스럽고 분노할 일들까지.

지나고 보니 별스럽지 않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경험해보는 카투사 생활이다.

별다른 사건사고 없이 무난하게 보낸 편이다.

일과 시간 후에 자기 계발에도 힘썼다.

류지호의 삶이 평판한 것과 달리 사회에서는 올 초부터 답답한 일, 안타까운 일 등 많은 일들이 있었다.

특히 올 1월 미국 LA에서 지진이 일어나 LA폭동으로 아픔을 겪은 한인사회에 또 다시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1월17일 새벽 4시.

LA북서쪽 20마일 지점 노스리지에서 시작된 규모 6.7 강진이 단 20초 만에 LA를 덮쳤다.

반경 85마일 내 건물 4만여 채가 무너져 57명이 숨졌고, 5,000여명이 다쳤다.

변압기들이 터지면서 LA시내 90%에 전력 공급이 중단되고, 10번, 14번, 210번 프리웨이 등 주요고속도로가 끊어졌다.

장거리 전화는 불통이었고, 국제공항도 셧다운됐다.

한동안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LA는 완전히 고립됐다.


-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 재앙의 도시가 됐다.


LA의 처참한 상황을 묘사한 LA타임스 헤드라인이다.

또 다른 언론이 개탄했다.


- 약속의 땅인 캘리포니아가 실낙원으로 전락했다.


한인 피해도 컸다.

사망자 57명 중 4명이 한인이다.

재산상의 피해는 더 처참했다.

지진의 진앙지가 한인 밀집 거주 지역이었던 탓에 한인 주택 200여 채가 무너졌다.

불행 중 다행스러운 소식은 지난 LA폭동과 달리, 한인들이 똘똘 뭉쳐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류지호는 GARAM Ventures를 통해 50만 달러를 이재민을 위해 긴급히 지원했다.

Pinkerton Corp. LA를 재난지역에 투입해 치안유지와 복구를 돕도록 했다.

류지호의 사업에도 타격이 있었다.


- 5번, 10번 하이웨이는 미서부지역의 동맥 역할을 합니다. 그곳뿐만 아니라 곳곳의 수송망이 붕괴됨으로써 완전복구 될 때까지 꽤 시일이 소요될 것 같습니다.

“얼마나요?”

- 완전복구에 최소 1년을 걸리지 않을까 합니다.

“LIVE의 홈비디오 유통에 타격이 불가피하겠네요.”

- 그렇습니다.


류지호가 어떻게 한다고 해서 자연재해가 막아지는 것도 아니고.

그저 살아남은 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도리를 다할 뿐.


“지난 2월에 금리인상을 한 이후로 얼마나 더 인상할 것 같다고 하죠?“

- 최소 다섯 차례, 최대 일곱 번을 더 금리인상에 나설 것 같다고 합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RB)는 1990년 시작된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1992년 9월부터 1994년 2월까지 17개월간 기준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인 3%로 유지했다.

이 조치로 인해 인플레이션 조짐이 보이자, 1994년 2월에 사전 공지 없이 기습적으로 금리 인상에 나섰다.

물가보다 높은 금리는 물가를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1995년부터 물가 상승률이 3%대 중반으로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이 대두되면서 연방준비제도에서 급속한 금리 인상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대 후반 부동산을 중심으로 한 과도한 레버리지가 문제가 된 바 있는데, 경기침체 발생 이후 낮아진 금리를 기반으로 다시 신용 레버리지 상품이 등장하자 그린스펀 연방준비제도 의장이 예상을 뛰어넘는 강력한 대응을 주도했다.


“Garam Invest에서는 특별한 이슈가 없는 모양이네요?”

- 채권은 주업무 영역이 아니다 보니 이번 조치에 큰 타격을 받진 않은 것으로 압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 의장의 결단에 따라서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가 사전 공지 없이 갑자기 금리를 올려 채권 시장이 패닉에 빠졌다.

예정된 금리를 받는 채권은 시중금리가 상승할 경우 가격이 폭락한다.

훗날 ‘채권 대학살‘로 불리게 될 금리인상 릴레이로 인해 채권 가격이 폭락(채권금리 급등)하면서 금융시장에 큰 충격을 줬다.

참고로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1994년 1월말 5.7%이었다.

연말에는 7.8%로 급등하게 된다.


“목표로 하는 기준금리가 6%랍니까?”

- 상승폭이 0.75%포인트에 이를 정도로 예측 불허의 인상이 이어지고 있어서 6%에서 멈출지 물가를 완전히 잡기 위해 6% 이상까지 올릴 지 예상이 쉽지 않다고 합니다.

“부동산에도 영향이 미치겠네요.”

- 그럴 겁니다.

“웨스트우드 사무실에 LA 위성도시들과 실리콘밸리 지역 부동산 가격을 꾸준히 모니터링하라고 해주세요.”

- 알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년 만에 7차례 금리 인상을 단행함으로써 3.0%였던 미국 기준금리는 6.0%로 상승하게 된다.

이 조치로 인해 전 세계 금융시장이 큰 충격을 받게 된다.

미국의 유동성 유입이 본격화된 1989년부터 1994년까지 멕시코 주가는 약 30배 가까이, 아르헨티나 주가는 약 20배 이상 폭등했다.

하지만 미국의 이번 금리 인상 이후 미국발 중남미행 캐리 트레이드(국가 간 금리 차이에 바탕한 거래)는 청산됐고 유동성은 급속히 감소했다.

주가가 1년 만에 고점 대비 50% 이상 폭락하는 등 중남미 금융시장이 뿌리째 흔들리게 되고, 멕시코는 ‘테킬라 위기’라고 불리는 외환위기를 맞아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받는 신세가 된다.

그것이 끝이 아니다.

자금이 신흥국에서 급격히 이탈하면서 1994년 멕시코 외환위기가 터지게 되고, 1996~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엄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국 역시 1997년 외환위기를 맞으며 ‘채권 대학살’의 희생양이 된다.

아시아 외환위기와 한국의 IMF사태가 발생하게 되는 데는 복잡하고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게 되지만.


❉ ❉ ❉


시간은 자정으로 향하고 있다.

종로의 초고층 빌딩 앞에 영화촬영팀이 운집해 있다.

소품팀이 빌딩 앞에 공중전화박스를 설치해 놓았다.

공중전화 박스를 중앙에 두고 원형 달리(Dolly)가 깔려있었고, 촬영팀이 카메라를 올리고 노출을 재고 스케일을 재고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류지호와 김영철이 양손에 야식을 들고 촬영현장으로 걸어왔다.

권영균이 제작부와 함께 류지호에게 달려왔다.


“이리 주십시오.”


권영균이 류지호가 양손에 들고 있던 간식을 받아들었다.


“오늘도 밤샙니까?”

“특효 때문에 한 방에 가야해서 새벽 2시 안에는 끝날 것 같습니다.”

“새벽에 귀가하려면 여자 스태프들이 곤란하겠군요.”

“제작부가 바래다 줄 예정입니다. 남자 스태프는 충무로 술집에서 새벽까지 술 좀 먹이고 첫차 다닐 때 귀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작부들이 잠시 촬영준비를 중지시켰다.


“야식 먹고 하세요!”


류지호가 야식봉지 하나를 챙겨 모니터가 놓여있는 스테이션으로 걸어갔다.


“밤늦게까지 고생이 많으십니다.”

“류 감독 왔어?”

“회장, 어서 와.”

“간만이네요.”


류지호가 모니터 앞에 놓인 디렉터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는 감독, 촬영감독, 주인공인 박중환과 인사를 나눴다.

이 촬영현장은 현대 한국 느와르 영화의 진정한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게임의 법칙> 현장이다.

이 영화는 자칫 영화화가 되지 못하고 묻혀버릴 뻔했다.

전작 <걸어서 하늘까지>로 주목 받은 장현석 감독은 본격 느와르 시나리오를 써서 충무로 제작사를 노크했다.

진한 비장미, 특유의 잔인 미학 그리고 주인공이 죽는다는 점.

한국영화가 건달을 다루는 방식에서 완전히 다른 시선으로 뒷골목을 바라 본 시나리오였다.

기존 충무로 제작자에게 그 같은 파격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건달의 로망 혹은 소위 ‘다찌마리’(다찌마와리)의 화끈한 액션을 바라는 제작자들과 흥행업자들의 구미에 맞는 영화가 아니다.

기존의 깡패 이야기는 50∼60년대 주먹들의 세계를 그린 영화가 대부분이다.

그 같은 한국의 갱 영화와 선을 긋고 있다.

홍콩이나 할리우드 영화 폭력스타일에 익숙한 관객에게 뒷골목의 지질한 삼류 건달 이야기는 굉장한 모험이기도 했다.

김두한, 시라소니는 더 이상 이 시대 우상이 아니다.

<게임의 법칙>은 그 같은 선전포고를 하는 전혀 새로운 갱 영화다.

한 사람은 살해되고 또 한 사람은 다리가 없는 불구.....

게다가 또 한 사람은 애인에 의해 술집에 팔린 호스티스.

건달 세계의 낭만과 의리와 완전히 동떨어진 주인공들이다.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비극적인 결말까지.

기존 충무로 제작자들이 싫어할 요소가 많았다.

그때 <투캅스>의 흥행 성공으로 충무로 탑배우로 올라선 박중환이 이 영화에 꽂히게 됐다.

그리고 발 벗고 나서서 평소 친분이 있는 제작자 몇 명을 설득했다.

그러다가 박건호 대표를 찾아오게 되었다.

자신이 주인공을 맡고 이경용까지 데리고 오겠다며 설득했다.

2년 간 제작사를 찾지 못했던 <게임의 법칙>은 결국 WaW 픽처스의 품에 안겼다.

지난 연말에 촬영을 시작해 막바지 촬영만 남겨두고 있다.


“날 샌다!”


촬영기사의 외침에 야식을 먹던 스태프가 다시 촬영준비에 들어갔다.

WaW 픽처스가 제작하는 모든 영화현장에서 현장모니터는 당연했다.

지금까지 90여 편의 영화를 작업한 백성배 촬영감독이 현장모니터에 대해 반감을 가지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백성배 감독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예상대로 백성배 촬영감독은 현장모니터 시스템에 대해 거부감을 표하지 않았다.

다만 촬영감독협회 차원에서 난리를 치긴 했지만.

올 해 WaW 픽처스는 세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한편을 투자했다.

<게임의 법칙>, <젊은 남자>, <두 여자 이야기>는 인하우스 투자·제작·배급.

기획의 시대에서 제작하는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투자·배급만 한다.

세 편의 WaW 픽처스 인하우스 영화는 당연히 현장모니터 시스템을 쓴다.

촬영감독협회에서 극렬하게 반발했다.

류지호는 단호했다.

현장모니터 시스템을 거부한 촬영기사를 교체했다.

<게임의 법칙>의 백성배 감독은 충무로에서 최고 촬영감독으로 꼽힌다.

촬영감독협회 원로들도 뭐라고 못하는 촬영감독이다.

백성배 촬영감독이 현장모니터 시스템을 환영하진 않았다.

그렇다고 시대의 흐름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현장모니터 사용 문제로 WaW 픽처스가 투자·제작을 포기한 영화도 있다.

씨네-누보가 야심차게 준비한 <구미호>다.

류지호는 <구미호> 투자·배급하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걸었다.

현장모니터 사용과 프로덕션 디자이너 개념을 도입하는 것.

제작사는 받아들였다.

촬영감독과 일부 스태프가 이를 거부했다.

류지호는 씨네-누보 신강 대표가 두 조건을 거부한 스태프를 교체할 것으로 예상했다.

의리 때문인지 기사들의 실력을 높이 평가해서인지 모르지만, 결국 WaW 픽처스의 투자를 단념했다.


“와우인지 바우인지 하는 영화사 작품은 무조건 보이콧이야!”

“지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아! 싸가지 없는 XX!"

“영화촬영이 장난인 줄 알아! 어디서 배워먹은 버릇이야!”


원로촬영감독과 영화인들이 반발했다.

반면에 젊은 촬영기사들은 열렬히 환영하진 않았지만 대체로 수용하는 분위기다.

촬영감독협회 주도로 조명감독협회, 제작자협회까지 WaW픽처스 보이콧 결의가 이어졌다.

류지호는 개의치 않았다.

현재 충무로는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

권위적인 태도와 도제 시스템에 젖어있다면, 충무로에서 살아남지 못할 시대로 진입했다.

WaW 픽처스와 충무로 기득권의 갈등의 승패는 정해진 것이다.


“슛!”

“조용!”


류지호가 디렉터 체어에 앉아 감독과 함께 모니터를 봤다.

오늘 촬영은 <게임의 법칙>의 명장면이자, 한국 느와르의 기념비적인 장면이다.


“레디! 스피드! 카메라! 롤!”

“액션!”


카메라가

원형으로 깔린 레일 위에서 카메라가 공중전화박스를 빙글빙글 돌며 촬영했다.

공중전화박스 안에서 용대 역할의 박중환이 연기를 시작했다.


[사이판 가는 거야! 태숙아! 태숙이니? 태숙이 바꿔 새꺄! 으하하하!]


용대 역할에 완전히 몰입한 박중환이 한껏 들떠서 수화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 지른다.

평소에 용대에게 구박을 받았던 똘마니가 그런 용대를 지켜보며 묘한 미소를 입가에 그린다.

용대는 잠시 멈칫 거렸지만, 계속해서 애인 태숙만 찾을 뿐.

똘마니가 품에서 권총을 뽑아 용대에게 겨눈다.

이 권총은 과거에 용대가 광천파 보스에게 바쳤던 것이다.

용대는 광천파에 이용만 당하다 결국 버려지는 소모품이란 것을 암시한다.


탕!


박중환 너머 공중전화 박스 유리창이 터져나갔다.

그리고....

박중환이 붕대로 감겨있는 손을 들어 이마에 가져다 댔다.


주르륵.


손바닥 사이로 피가 흘러나왔다.


스르르.


박중환이 무너졌다.

허망한 듯, 어딘가 아련하게 응시하는 듯 한...

두 눈을 부릅뜨고 공중전화 박스에 기대 죽은 박중환의 연기는.... 단연 압권이다.

좋아했던 영화의 명장면을 실제 현장에서 보게 되다니.

류지호의 감정은 남달랐다.


후우.


한편으로 충무로 특수효과에는 한숨이 절로 삐져나왔다.

충무로 최고 특수효과팀이라는 김철수팀이 참여했음에도 실망스러웠다.

충무로에서는 이런 농담 아닌 농담이 있다.


“특수효과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다.”


다 된다고는 하는데 해보면 딱히 되는 거 없다.

그렇다고 하긴 해야 하는데 아예 안 되는 것도 없고.

대충 그런 의미다.

이 장면의 콘티는 용대가 공중전화 안에서 전화 받고 있다가 바깥의 똘마니가 총을 쏘면 총알이 관자놀이를 관통하면서 반대편으로 피가 팍 터지며 유리창이 깨지는 거다.

그걸 촬영하기 위해 총열이 긴 사제총에 피 묻은 쇠구슬을 넣고 쐈다.

카메라에 잡히지 않기 위해 배우의 눈 바로 옆으로 조준해서.

자칫 대형사고가 벌어질 수 있는 위험천만한 촬영이다.

쇠구슬이 배우 너머 유리를 깨트리며 피구슬이 터지는 것인데, 배우가 조금이라도 움직이거나 총을 쏘는 특수효과 기사의 조준이 잘못되면 쇠구슬이 배우의 눈을 때릴 수도 있다.

더 웃긴 것은 배우가 특수효과의 모자란 부분을 채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연기하기도 바쁜 와중에.

유리창이 터지고 나면 배우가 한손에 숨겨두고 있던 빨간 물감이 적셔진 붕대를 카메라에 안 잡히게 슥 올려서 머리 옆을 꾹 누른다.

그러면 붕대의 물기가 짜내지면서 피가 주르륵 흐른다.

특수효과인지 연기인지 경계가 모호한 기법이다.

류지호만 실소를 흘리며 촬영을 지켜보고 있다.

모두가 제법 그럴싸하다고 느끼며 촬영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이 장면은 무조건 한번에 OK가 나와야 한다.

공중전화박스 유리창이 깨져나가기 때문에.

일단 여벌의 유리를 준비하려면 제작비가 든다.

제작자가 큰마음 먹고 준비해줘도 교체하는데 시간이 꽤 많이 소모된다.

그렇다면 아예 공중전화박스 하나를 통째로 준비해주고 여분의 유리도 준비해 주면 된다.

그럴 정도로 자상한 충무로 제작사는 단 한군데도 없다.

리허설 내내 뭔가 고민에 싸여있는 박중환이 감독에게 제안을 했다.


“마지막에 내 얼굴 한 번 클로즈업해주세요.”

“얼굴 클로즈업?”

“얼굴 잡아주면, 피눈물을 한 방울 흘려볼게요.”

“좀 오바 같은데....”


그때 촬영기사가 나섰다.


“장 감독, 카메라 뒤집어서 중환이 말 대로 한 카트만 더 찍어봅시다.”


촬영기사까지 힘을 실어줬다.

즉각 박중환은 분장팀을 불러 피효과를 내는 안약을 준비시켰다.

그렇게 용대가 스르르 주저앉는 걸 카메라가 팔로우 하며 두 눈을 부릅뜨고 죽는 용대의 얼굴에서 끝나는 명장면이 만들어졌다.


“.....!”


류지호는 촬영장에 잠시 앉아 있는 것만 해도 오늘 촬영 진행비를 얼추 계산할 수 있다.

WaW 픽처스는 허투루 쓰지만 않는다면 진행비에 그다지 인색하지 않다.

그럼에도 무작정 제작비를 많이 투자할 수도 없다.

현재 충무로는 되는 것도 없고, 되지 않는 것도 없는 그런 곳이니까.

돈을 아무리 때려 박아도, 노하우와 시스템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 법이다.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저 정도라도 해낸 건 정말 칭찬해 줘야 하지.’


류지호는 영화 <게임의 법칙>의 클라이맥스를 떠올렸다.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멋진 시퀀스다.

사기꾼 인수가 도박판에서 돈을 따는 것과 용대의 살인 장면을 교차로 보여준다.

일종의 상승과 추락을 동시에 묘사한 거다.

포커 판을 묘사한 것이 자본주의 게임의 법칙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용대의 죽음은 인생의 법칙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포커게임이든 금융투자 같은 자본주의 게임이든.

룰이 있고, 시스템이 있다.

류지호는 Young & Rich다.

영화 속 용대는 깡패다.

둘이 차이는 별것 아니다.

깡패 용대는 자신이 직접 무엇인가를 해야만 돈을 벌 수 있다.

반면에 류지호 같은 부자는 직접 일을 하지 않아도 시스템에 의해 돈이 벌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용대는 돈을 벌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반면에 류지호는 가지고 있다.

류지호 같은 부자는 본인이 직접 머니 게임이란 전쟁터에서 피 흘리며 싸울 필요가 없다.

깡패든 평범한 사람이든.

그들은 자본주의 전장에서 직접 몸을 부딪치며 피를 흘려야 원하는 것을 쟁취할 수가 있다.

게임에는 승자와 패자만 있다.

중간은 없다.

인생의 게임은 어떠한가.

비굴하고 비겁하고 비열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시궁창 속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인생.

한 번 화려하게 날아보겠다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삶.

그런 눈물겨운 자들에게 영화가 말하고 있다.


“게임의 승자는 이미 정해져 있으니 희망 따위 품지 말기를.....!”


토사구팽.

평범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쓸모가 다하면 버려진다.

그것이 인간이 만든 사회·경제 시스템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류지호 역시 그 같은 게임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

버려지는 사람이 아니라, 버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작가의말

일주일 내내 장맛비가 오락가락했습니다. 한 주 마무리 잘 하시고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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