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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첫 번째 -자객(조선, 1680)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완결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1.10 16:49
최근연재일 :
2020.11.14 00:38
연재수 :
96 회
조회수 :
35,400
추천수 :
306
글자수 :
248,789

작성
20.11.10 18:25
조회
575
추천
6
글자
9쪽

前日談 두 개의 가문(家門) -4

DUMMY

-4-


윤성환에게는 근심거리가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 근심거리는,

근자에 들어 새로운 염장법을 개발하여

‘밥도둑’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맛을 자랑하는,

절인 생선과 젓갈을 만들어낸

최병은이었다.


최병은의 염장고에서 만들어내는,

그만의 비법이 가미된 생선과 젓갈은

그 탁월한 맛 덕분에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엄청난 속도로 팔려나가기 시작했고,


광천장터의

조그만 젓갈 가게 주인에 불과했던

최병은은

단기간에

막대한 부를 쌓아올릴 수 있었다.


처음엔 그저 그러려니 하고

지역의 최고 거부(巨富)다운 여유를 보인

윤성환이었으나,


최병은의 절인 생선과 젓갈이

나랏님의 진상품으로까지 지정되며,

‘만복상회’라는 이름으로,

상품을 도성으로 운송하는

상단까지 직접 차리게 되자


그도 더 이상 잠자코 앉아서

여유를 부리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사실 윤성환의 심기를 가장 건드렸던 것은

최병은의 가파른 성장세보다도,

최병은의 도를 넘어서는 탐욕과

자신을 향한 노골적인 적의(敵意)였다.


물론 최병은도

지역 최고의 명사이자

거부(巨富)인 윤성환에게

처음부터 그런

오만불손한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니었다.


입소문이 나면서

젓갈이 잘 팔려나가기 시작할 때만 해도,

한양의 시전상인들과

큰 규모의 거래를 하며

종이를 비롯한 다양한 지역특산물을

선혜청에 납품하는

‘일청당의 주인 윤성환’은


최병은에게 있어서

엄청난 양을 매입해주는 가장 큰 고객이자

자신의 물건을 한양 땅에까지 소개해준

고마운 은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타고난 그릇의 규모에 맞지 않는

엄청난 부가 단기간에 쌓이고,

차츰차츰

상회의 규모를 키워가면서,

일청당과 겹치는 품목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최병은은

서서히 졸부(猝富)의 저열한 근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넓은 인맥을 바탕으로

두터운 교분을 쌓아

전국 방방곡곡에 신규 거래처를 늘려가며,


산지(産地)에서

한꺼번에 많은 양을 매입하는 대신

단가를 싸게 구입함으로써

상품의 경쟁력을 갖추고,


그것을 다시 시중의 가격보다

다소 저렴하게 되팔아

박리다매의 방식으로 이문을 남기는 것이

윤성환의 거래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풍년일 때는 사는 쪽과 파는 쪽 모두에게

고맙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야말로 상생(相生)의 묘미가 살아있는

좋은 방식이지만


흉년일 때는 관(官)으로부터

사재기 혐의를 짙게 받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방식이기도해서,


이익과 위험이 상시 공존하는

양날의 검과도 같은

미묘한 장사방법이었다.


그러나 윤성환은

‘장사의 본질은

물건의 적합한 이동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이런 운용방식에

어떤 장점과 단점이 있는지를

매우 잘 파악하고 있는

현명한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독특한 염장법을 통해

독점적인 상품을 만들어 내면서

세를 키워온 최병은은


장사의 근본부터가

윤성환과는 생각이 많이 달랐다.


그는

‘장사의 본질은

자신만이 팔 수 있는

특별한 무기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결국 그의 마음에

자신감과 오만함을 심어주었고,

그 결과로 나타난

그의 장사방식은

거침없고 저돌적이었으며

때론 야비하기까지 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단순히 더 큰 이문을 남기기 위해서

상도의를 깨버리는 경우도 종종 있었고,


최병은과 거래를 하다가 사기를 당했다며

관아에 민원을 넣는 사람들도

간혹 나타나곤 했다.


그러나

아전들을 통해 수시로 뇌물을 쓰며

관(官)과 유착해온 최병은은

그런 민원만으로는 결코 처벌받지 않았다.


세인(世人)들은 그런 최병은을

‘돈귀신(錢鬼)’이라 부르며 미워했고,

행여나 소인배의 심사를 건드려

해를 입진 않을까하는 생각에

또 한편으로는

매우 두려워하기도 했다.


둘의 결정적인 차이를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 것은,

12년 만에 찾아온 가혹한 흉년 때였다.


곳곳에서 아사자(餓死者)가 속출하고

돌림병이 돌 조짐이 보이며

민심이 흉흉해지기 시작했다.


윤성환은

재앙이 닥치자

자신이 싼 값에 확보한 대량의 물건들을

큰 손해를 보면서까지

재빨리 처분하여

배고프고 아픈 사람들의 구휼(救恤)에

남김없이 썼다.


흉년이 닥치면서

쌀을 비롯한 생필품의 시중 가격이

나날이 폭등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를 리 없었다.


이 시기를 잘만 이용하면

풍년 때보다 몇 배,

어쩌면 몇 십 배의 이문을 남길 수도 있는

좋은 기회를 마다하고,


굳이 손해를 보면서까지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윤성환에게,

세간에서 붙여준 대인(大人)의 칭호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으리라.


반면 최병은은

이때다 하고 쾌재를 부르며

사재기로 큰 이문을 남긴 것은 물론이요,


구휼은커녕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사촌형제들마저

냉정하게 문전박대한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면서


체면을 구기고

전형적인 소인배로 전락하였다.


장사치들의 셈법이나

거래의 이치를 한참 벗어나

“인간의 도(道)”를

손해를 보면서까지 행한

윤성환의 이러한 선행은


재앙의 시기가 지나면서

훗날 좋은 일들로 되돌아와

그에게

더 많은 이익과 명성을

가져다 줬지만,


최병은은

관리에게 인정(人情)9)을 쓰고

접대까지 해가며 사재기 혐의를 무마시킨

‘고름 같은 종자’라는

세간의 혹독한 평판을 들어야했다.


흉년이 지나고 얼마 후,

최병은이

주력상품인 젓갈을

윤성환 측에

더 이상 팔지 않겠다 선언하고


사재기로 불린 큰 이문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상단인 ‘만복상회’를 꾸려

한양과의 직거래를 시도하던 무렵,


그는 자신과 윤성환의 근본적인 차이를

비로소 깨닫고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 차이란 바로

‘땅’과 ‘그 땅을 경작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잘 팔리고

아무리 맛이 뛰어나다 해도

젓갈은 어차피 반찬의 하나 일뿐,


인간사의 가장 근본이 되는

쌀을 생산할 수 있는 땅은

단순히 돈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다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그 땅을 일구며 먹고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품을 아무도 찾지 않는다면

장사라는 것 자체가

아예 성립될 수가 없었다.


몇 차례 우여곡절을 거쳐

결국 최병은은 윤성환에게

오히려 전보다 더 싼 가격으로

다시 젓갈을 팔 수 밖에 없는

처절한 굴욕을 맛보았다.


어찌 보면

윤성환과의

첫 번째 싸움이었을지도 모를 이 사건은

최병은의 자존심에

회복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민유중으로 대표되는,

윤성환이 한양유학 시절부터 쌓아온

다양한 사람들과의

깊고 두터운 교분은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는

막강한 인맥을 형성했고,


충청지역의 기름진 전답은

거의 다 소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윤성환의 강력한 힘은


최병은을

단번에

우물 안 개구리에 불과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그 굴욕적인 패배 이후부터

최병은은

절치부심하고 땅을 사러 다니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또 한편으로는

한양의 높은 분들에게 선을 대어

자신만의 단단한 동아줄을 만들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성도 아닌

외방(外方)의 장사치가

중앙정계에 동아줄을 만든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자신이 누구의 조카입네,

누가 우리 종친이네 하는 사기꾼들에게

돈을 날린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것만이

윤성환을 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최병은이 윤성환에게

귀기어린 적의를

대놓고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넘어서기 힘든

둘 사이의 커다란 차이를 깨닫고

그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이 무렵부터였을 것이다.


하여, 윤성환의 일청당에 비하면

최병은의 만복상회는

아직까지는

크게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의

군소세력에 불과했지만,


도성에 든든한 동아줄을 잡아보려

백방으로 노력하는

최병은의 모습을

윤성환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윤성환의 마음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 것은,

언젠가는 최병은이

튼튼한 동아줄을 잡을 것이란

미래의 사실보다도


그의 탐욕스럽고 야비하며

때론 독하기까지 한 성품이었다.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위협보다는

앞에 마주한 현실의 칼날이 더 무서운 법,


관아에서 주최한 회합이나

지역 유지들의 모임에서

가끔씩 마주칠 때마다


자신을 향해 대놓고

증오와 적의를 드러내는

최병은의 귀기(鬼氣)어린 태도는

마치 목에 걸린 가시처럼

윤성환의 심기를 무척이나 불편하게 했다.


이러한 저간의 복잡한 사정으로 인해,

언젠가 또 다시

최병은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윤성환은 예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마땅히 뾰족한 수도 없어서

그저 최병은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는 것밖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주석


9) 인정(人情)

뇌물의 옛말,

예전에, 벼슬아치들에게 몰래 주던 선물.

후포(後布),후전(後錢),정채(情債)라는

유사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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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前日談 두 개의 가문(家門) -5 20.11.10 486 7 2쪽
» 前日談 두 개의 가문(家門) -4 20.11.10 576 6 9쪽
4 前日談 두 개의 가문(家門) -3 20.11.10 676 6 13쪽
3 前日談 두 개의 가문(家門) -2 +2 20.11.10 933 8 11쪽
2 前日談 두 개의 가문(家門) -1 +1 20.11.10 2,125 9 6쪽
1 목차 +1 20.11.10 2,170 8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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