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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첫 번째 -자객(조선, 1680)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완결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1.10 16:49
최근연재일 :
2020.11.14 00:38
연재수 :
96 회
조회수 :
35,396
추천수 :
306
글자수 :
248,789

작성
20.11.10 17:06
조회
2,124
추천
9
글자
6쪽

前日談 두 개의 가문(家門) -1

DUMMY

-1-


충청 일대에서 만마지기가 넘는

광대한 토지를 경작하며,

한양에 사는 윤씨 일족과 연계해

많은 물품들을 도성으로 올려 보내는

상단(商團) ‘일청당(一靑堂)’까지

운영하고 있던

홍주목(洪州牧)의 윤씨 가문은,


직접 데리고 있는 노비들만 해도

백 명이 넘었고,

본가에 머물지 않고 바깥에 나가 사는

외거 노비들과

고용된 하인들까지 합하면

넉넉잡아 천 명이 족히 넘어가는,

모름지기 충청지역에서

가장 큰 자산을 보유한 가문이었다.


이러한 윤씨 가문의 가주(家主)인

윤성환은

조상에게 물려받은

소소한 전답 몇 마지기를 밑천 삼아

한양에서 맺은 귀한 인연을 바탕으로

당대에 엄청난 부(富)를 일궈낸,

타고난 장사꾼이자

비범한 능력을 지닌 남자로,

그야말로

입지전적(立志傳的)인 인물이었다.


윤성환은

원래 열아홉에 소과(小科)에 합격하여

진사(進士)자격을 얻은 뒤,

고향을 떠나 한양유학을 왔다.

성균관 옆 반촌(泮村)에 하숙하며

유생(儒生)신분으로

대과(大科)를 준비하던 그는,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과거급제를 통해 입신양명을 꿈꾸던,

수많은 지방 사족(士族)가문의 자제들 중

한 명일뿐이었다.


그러나 전답(田畓)까지 팔아

유학비용을 대며

자식의 출세를 오매불망 바랬던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윤성환은 공부엔 재능이 없었다.


십년 가까운 유학기간 동안 그는,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정기시험인

식년시(式年試)는 물론이요,

별시(別試)인 증광시(增廣試)나

알성시(謁聖試)에서도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아홉 번째 과거시험에서 떨어지던 날,

그의 나이 서른 즈음에,

무언가를 결심한 윤성환은

반촌의 하숙집 뒷마당에서

가지고 있던 책을 모조리 불태우고

미련 없이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자신의 아내에게 조차 아무런 상의도 없이

아예 붓까지 꺾어버리고 낙향해버린 그를,

늙은 부모를 비롯한 주위의 사람들은

걱정스럽게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으나,


윤성환은 낙향한지 일 년이 채 안되어

뛰어난 장사수완을 발휘하며

몇 건의 큰 거래를 성공시키고

삽시간에

충청 지역의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사실, 그가 이렇게 짧은 기간에

큰 거래를 성공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최고의 권세가 중 하나인

민유중 가문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과거시험을 포기하고

낙향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도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했던

민유중1)과의 인연 덕분이었다.


유학생활이 9년차에 접어들 무렵에

고향의 어머니로부터

‘날로 가세가 기울어

이젠

끼니를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는

편지를 받은 윤성환은


자신이 더 이상은 안정적으로

공부를 계속할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상황인식과

자신의 문재(文才)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급제할 실력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뼈아픈 성찰을 거쳐,

사족(士族)의 신분임에도

장사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게 된다.


당시 충청지역에서 머물며

민씨 가문의 재산을 운용해

이문을 취하고,

그 결과물을 한양으로 올려 보내던,

김기춘은


민씨 문중의 재산을

외방(外方)에서 불려주던

수완 좋은 장사꾼 중 한 명이었다.


그랬던 김기춘이

본래 자신의 몫으로 정해진 재물 이외에

상당 부분의 상납분을 몰래 착복하여

오랜 기간 동안 빼돌렸다는 사실이,


그에게 원한을 품은

가노(家奴) 인규의 고발을 통해

민씨 일문에게 발각되고 만다.


김기춘은

관에 붙잡혀가 모진 문초를 받고

석 달 만에 겨우 풀려났으나,

장독(杖毒)이 심해져

결국 그해 겨울 사망하였다.


민씨 가문의 입장에서는

김기춘을 대신할 새로운 사람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윤성환이

무리 없이 맡을 수 있었던 것은


본시 홍주 사람이고,

그 지역의 사족출신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균관에서 인연을 맺은 이후,

윤성환과 두터운 교분을 쌓았던

민유중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윤성환은 유학생활 7년째가 되던 해에,

진사시에 합격하며 성균관에 갓 입학한

민유중과

연을 맺게 되었는데,


새로운 임금께서 즉위하신

그 해 여름에 발생한,

성균관 유생들의 권당(捲堂)2)에

함께 하면서

두터운 교분을 다지게 되었다.


나이는 윤성환이 민유중보다

일곱 살이나 위였지만,

서로 기질이 잘 맞았는지

단식(斷食) 때도,

공관(空館) 때도 함께 하며

여러 날을 주야(晝夜)로 어울리면서

둘은 돈독한 우정을 쌓게 되었다.


마음이 통하는 벗이랄까...

암튼 둘은 공부에 대해서도,

삶의 태도에 있어서도,

무척이나 잘 통했다.




주석


1) 민유중(閔維重,1630~1687)은,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민광훈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이조판서 이광정의 딸이다.


1649년(효종 1년)에 진사가 되고,

1651년 21세에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한다.

훗날 숙종의 비(妃)

인현왕후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며,

대사헌 민기중과

좌의정 민정중의 동생이기도 하다.


2) 권당(捲堂)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의 집단시위의 하나.

공관(空館)이라고도 한다.


성균관 유생들은

국가의 정책이나

당시의 시무(時務)에 대한

자신들의 집단의사 표시로서

유소를 올리게 되는데,


이에 대한 왕의 회신인 비답이

만족스럽지 못하거나,

유소의 방법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

식사거부의 표시로

학교식당에 들어가지 않는

일종의 동맹휴학인 권당을 행사했다.


이러한 권당이 있으면

동지관사(同知館事)나

대사성에게 보고하고,

이들이 유생들을 집합시켜

권당의 이유를 묻고

이를 위에 상신하게 된다.


이후에도 역시

만족할 만한

왕의 비하(批下)가 내려오지 않고

사태가 악화되면

기숙사에서 물러나는

공재(空齋)를 행하여

수업이 중단되고,

유생들이 각자의 짐을 싸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서

성균관을 비우는 공관을 감행하게 된다.


공관이나 권당이 장기화될 경우

조정에서는

개유사(開諭使)를 보내어

이를 수습했다.


공관에 관한 기록은

세종 대부터 숙종 대까지 보이나

정조 이후에는

권당에 관한 기록만이 발견된다.


조선시대에는

모두 96차에 걸친

공관 및 권당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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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계(劍契)이야기 첫 번째 -자객(조선, 1680)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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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前日談 두 개의 가문(家門) -5 20.11.10 485 7 2쪽
5 前日談 두 개의 가문(家門) -4 20.11.10 575 6 9쪽
4 前日談 두 개의 가문(家門) -3 20.11.10 676 6 13쪽
3 前日談 두 개의 가문(家門) -2 +2 20.11.10 933 8 11쪽
» 前日談 두 개의 가문(家門) -1 +1 20.11.10 2,125 9 6쪽
1 목차 +1 20.11.10 2,169 8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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