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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風 님의 서재입니다.

검계(劍契)이야기 첫 번째 -자객(조선, 1680)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일반소설

완결

南風
그림/삽화
渡海
작품등록일 :
2020.11.10 16:49
최근연재일 :
2020.11.14 00:38
연재수 :
96 회
조회수 :
35,393
추천수 :
306
글자수 :
248,789

작성
20.11.10 17:55
조회
675
추천
6
글자
13쪽

前日談 두 개의 가문(家門) -3

DUMMY

-3-


성균관 동문(同門)들과 함께

자신의 대과급제를 축하하던 자리에서,

윤성환이

술주정을 심하게 부리는 것을 본

민유중은,


벗의 상태가 심히 걱정되어 다음날 밤,

그의 하숙방을 찾았다.


윤성환은 그날도 역시 술에 취해

민유중에게 마구 주사를 부리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고,

급기야는

공부하던 서책까지

불태워버리려 하였다.


놀란 민유중이 급히 말려

다행히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으나,

더 이상 방치해선 안 되겠다 생각한

민유중은

그의 옆에서 밤새 술이 깨기를 기다렸다.


아침이 되어서야

맑은 정신을 되찾은 윤성환은

민유중의 마음에 감동하여

자신의 현재 상태와

미래에 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


대꾸도 없이 조용히

윤성환의 말을 듣고 있던

민유중은

이미 윤성환의 결심이

확고한 것을 느끼고,

딱 한 마디를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나가서 세수부터 하고

말끔히 몸가짐을 정돈하여 의관을 갖추게.

아버님께 갈 것이네.”


민유중은 윤성환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기 전,

운종가에 들러

고가(高價)의 옷과 신발을 구입해

윤성환에게 선물하였다.


남에게 선물로 받기엔 너무 비싼 것들이라

윤성환이 한사코 거절하자,

민유중은 진중한 눈빛으로

‘일을 제대로 성사시키고 싶으면

내 말대로 하게.

아버님은

만나는 사람의 외관과 태도를

매우 중요시하는 분이니’

라고 짧게 답했다.


윤성환은

민유중의 사려 깊은 배려에 감동하여

진심으로 감사를 표했다.


민유중을 통해

그의 아버지 민광훈을 만난 윤성환은

별 무리 없이

김기춘의 역할을 물려받았고,


열흘 뒤 한양생활을 정리하고

홍주로 돌아와

본격적인 사업에 뛰어들었다.


본래 김기춘이 하던 일을

주도면밀하고 세심하게 잘 관리하여

자신을 지원하는 민씨 가문이

크게 만족할 만큼

전임자보다 훨씬 나은 실적을 쌓았다.


그 일을 통해

자신의 몫으로 벌어들인 은자에

고향의 얼마 안 남았던 전답까지

모두 정리한 것을 더해,

윤성환은 그것을 밑천삼아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한양 유학시절

각별한 친분을 다져놓은

다방면의 인맥들을 활용하여

왕실과 관청에 물품을 조달하던

시전상인들과 거래를 터나갔다.


윤성환은 한양과 충청을 수시로 왕래하며

홍주 지역의 유명 특산물인 ‘모시’를

대표 물목(物目)으로 삼아,

충청도의 다양한 물품들을

도성으로 납품하면서

사업의 기반을 차곡차곡 닦아나갔다.


과거에 급제하진 못했어도

명색이 사족의 신분이었음으로,

윤성환은 관(官)이나 권세가들에게

청탁을 주로 하러 다니며

‘사업의 머리’ 를 잡았고,


집안의 오랜 충복인 철이 아범이

일꾼들과 고용인들을 부려

‘사업의 실무’를 맡았다.


윤성환의 탁월한 정치력과

사업을 보는 안목이

철이 아범의 성실함과 합쳐지면서

몇 건의 큰 거래를 성공시켰고,


그렇게 윤성환의 사업은

1년이 채 못 되어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민씨 가문의 재산을

운용해주는 대가로 받는

일정량의 배분금과

어느 정도 탄탄해진 사업을 기반으로

윤성환은 더 큰 재물을 벌기 위해

자신만의 특별한 물건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무엇이 좋을까 한참을 고민하던

윤성환은,

절친한 벗 김종현과

봄바람을 쐬러 잠시 들른

백월산 근처의 절에서

민유중에 이은

또 한 번의 귀한 인연을 만나게 된다.


용주사라는 조그만 절의 주지라는,

아주 인상이 온화한

월장(月墻)이란 법명을 쓰는 그 스님은,


윤성환과 김종현에게

차(茶)를 대접하였고

한가로이 차를 마시며

망중한을 즐기고 있던 윤성환의 눈에

절의 뒷마당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나르는

젊은 스님 두엇이 보였다.


저들이 나르는 것이 무어냐 묻자,

월장스님은

‘도련지(擣鍊紙)입니다.

여기서 만든 것이지요.’

라 대답한다.


깜짝 놀란 윤성환이

물건을 좀 보여 달라 청하자,

월장스님은 종이를 가져오게 하였는데,

그가 차분히 살펴보니

운종가의 지전(紙廛)에서

고가로 거래되는

상등품의 도련지보다

훨씬 더 좋은 품질의 종이였던 것이다.


깜짝 놀란 윤성환이

‘이것을 여기서 만드느냐’ 묻자,

월장스님은

‘제가 직접 도련(刀鍊)7)을 하고

다듬이질을 합니다.

미천한 재주이나

주변에서 꽤 좋은 평을

듣고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


윤성환은 드디어

자신만의 무기를 발견했다 여기고

바로 새로운 사업에 착수하였다.


윤성환은

그 해에 벌어들인 이문을

모두 투자하여

용주사를 거점으로 삼아

종이제조업을 시작했다.


월장 스님에게 지급하는,

종이를 만드는 스님들의 삯 이외에도

상당한 양의 재물을 용주사에 시주하여

큰 불사(佛事)를 행하였고,


월장 스님은

본인이 가진 기술을

충분히 발휘하여

최고의 품질을 가진 종이를 만들어냈다.


종이제조업을 시작한 지

일 년을 넘어설 무렵,


운종가의 지전상인들 뿐만 아니라

한양과 경기 일대에서

지물포(紙物鋪)를 경영하는

난상(亂商)들까지

앞다투어 윤성환을 찾아와

거래를 청하였다.


물건이 없어 못 팔 지경이 되자

윤성환과 교분을 쌓으며

깊은 친분을 다진 월장스님은,

자신이 가진 기술을

제자 다섯 명에게 전수해

공방(工房)의 수를 늘렸고,


이로 인해

윤성환은

단기간에 막대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낙향한지 3년 만에

종이를 팔아

충청지역의 거부(巨富)로 성장한

윤성환은

이제 주변을 차분히 돌아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전임자였던

김기춘의 전례에 비추어

자신이 권력자들에게 어떻게 처세를 해야

사업을 순탄하게 이어나갈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고민하여,


도성의 정치상황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열심히 모았고,

민씨 가문 이외의 다른 권세가들에게도

천천히, 조심스럽게 연줄을 만들어나갔다.


물론 자신의 가장 든든한 뒷배인

민씨 가문에 대한 인사로,

예전보다 훨씬 더 신경을 많이 써서

상납의 양을 두 배로 늘려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당시 관직에 올라

중앙관료로서

탄탄대로를 걷고 있던 민유중은

윤성환의 이런 성의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선혜청(宣惠廳)에

적절한 영향력을 행사해,

그가 납품사업을 통해

안정적인 이문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다.


물론 남들의 오해를 살 수 있는,

이런 종류의 ‘특혜 같은 배려’는

그가 다루는 종이가

워낙 질이 좋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의 구설수에 오르지 않아

가능한 것이기도 했지만,


윤성환은

자신의 뒤를 봐주는 민씨 가문의 힘이

이런 모든 것을 실현시켜주는 근원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몸가짐에 있어

겸손함과 진중함을 항상 잊지 않았다.


이렇게 거부(巨富)로 성장한 윤성환은

거기서 만족하지 않고

한양의 윤씨 일족들과 연계해

마포나루에 ‘출장점포’를 내고,


열한 척의 배를 구입해

뱃길을 통한 운송업에도 직접 뛰어들었다.


유통의 영역으로 사업을 확대하자

사업의 규모도 자연스레 커졌다.


윤성환이 다루는 물목은

대표물목인 종이와

충청지역의 다양한 특산물외에도

조선팔도 각지에서

진상품이나 공물(貢物)로 지정된

유명특산물이 포함되었다.


그는 뛰어난 처세술과 정치력을 발휘해

물건의 시세차를 이용한

능수능란한 거래로

예전보다 두 배 이상의 거대한 재물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운용하는 거래의 영역이

‘도성-충청의 육로와 해로’에서

조선팔도의 모든 지역으로 확대되자,


윤성환은 큰돈을 들여

한양의 마포나루에 있는

여각을 하나 인수하고

홍주의 광천나루에 있던

기존의 객주를 증축하여


도매·유통업뿐만 아니라

환전업무까지 다루는

거대한 물산객주(物産客主)8)로

성장하였다.


이렇게 도성의 분점과

충청의 본진이 긴밀하게 연결되고

사업의 체계가 탄탄하게 정비되면서,


자신이 거느린 노비와 고용인이

삼백 명이 넘어가자,


그 해 가을,

윤성환은 정식으로 관에 신고하여

홍주 땅에 상단(商團)을 설립하고,

그 이름을 ‘일청당(一靑堂)’으로 지었다.


겉으로 드러나는 신분이

충청의 양반인 사족(士族)이었던 관계로,

자신이 직접 장사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상인(商人)에 더 가까웠던

윤성환은,

그에게

장사꾼으로서 최고의 덕목을 꼽자면

단연 ‘탁월한 처세술과 인간관계’였다.


자신의 윗사람이던 아랫사람이던,

그는 ‘원한을 쌓지 않고 호의를 쌓아가는’

부드럽고 호혜(互惠)적인 태도로

사람들을 대했다.


윤성환의 거래원칙은,

자신의 몫을 조금 덜 받고

자신이 포기한 몫만큼을

거래상대에게 더 쥐어주는 것이었다.


물건의 시세나 당시의 거래관행보다

상대에게 이문을 더 쳐주는

윤성환의 이런 방식은

누구에게나 환영받았다.


이문의 극대화를 노리면서

수시로 불법과 탈법을 저지르던

당시의 다른 장사치들과는

매우 차별화 된,

그의 이러한 태도는


새로운 거래처들과

단기간에 거래를 늘려가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자신의 몫을 덜 가져가는 만큼

상대를 챙겨준다’,

‘이문을 보기 좋게,

기분 좋게 나눌 줄 안다’고

전국의 상인들에게 소문난

그의 거래방식은


고용인들이나 아랫사람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여서

세간의 소문을 듣고

그의 밑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많은 이들이

일청당의 대문을 끊임없이 두드렸다.


그런 이들 중에는

자신이 알아서

좋은 거래의 모양새를 만들어 와서는,

그 사업에 투자(投資)를 바라는

알짜배기 소상인(小商人)들이나


관청에서 ‘공물의 점퇴(點退)’를 결정하는

하급관리들도 많아서,


윤성환이 생각지도 않았던

‘뜻밖의 이문’을

가져다주는 경우도 많았다.


이렇게 확장되기 시작한 윤성환의 사업은

타 지역에서 거래를 틀 때마다

그곳의 실세들과 교분을 다지며

그들을 통해

지방수령들을 후원하는 방식으로

점점 더 단단하고 안정적인

장사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전국 곳곳의 고을에서

새로운 거래를 따내고,

상선(商船)의 수와 마차의 수를

점점 늘려가면서

제대로 기세를 탄 윤성환은,


새롭게 늘어난 이문들을 모조리 쏟아 부어

땅을 사들이는데 주력하였다.


지주(地主)로서의 윤성환은

상거래를 할 때의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로 구입한 땅은 당시의 관행보다

소작료를 반만 받았고,

흉년이 들었을 때는 그것마저 감해주거나

몇 년의 유예기간을 두고

나누어 조금씩 받았다.


이러한 당시로선 파격적인 윤성환의

‘자애로운 방식’은

가진 것 없던 유민(流民)들이나

의욕적인 농민들이 앞 다투어

소작계약을 맺게 만든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윤성환은 일일이 직접 면접을 봐서

의욕을 가진 성실한 사람들 위주로

소작계약을 맺음으로써

다른 지주들보다

훨씬 많은 소출(所出)을 얻었고

그 결과,

단기간에

대규모의 농장을 조성하게 되었다.


쌀과 면화를 비롯한

많은 양의 다양한 농산물들을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대지주(大地主)이자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종이를 비롯해

다양한 공물들을

선혜청에 꾸준히 납품하는

대공인(大貢人),


조선의 산하를 누비며

다양한 물품들을

운송, 유통까지 하는

대상인(大商人)으로

성장한 윤성환은


이제 한양의 권세가들도

그와 깊은 교분을 맺길 원하는

외방(外方)의 명사(名士) 중

한 명으로 성장하였다.


반촌의 하숙집 뒷마당에서

참담한 심정으로

책을 불태운 날로부터 십 년,


홍주목의 윤성환은

민씨 가문과의 인연을 바탕으로

이렇게 충청지역 최고의 거부(巨富)이자

대지주(大地主)로 성장하였다.


과거를 보는 족족 번번이 낙방하고

세상을 원망하며

저자거리에서 주정이나 부리던,

초라했던 관료 지망생이 단 십년 만에,


중앙정계와 탄탄한 연줄을 만들어

어마어마한 부(富)를 운용하며

그것을 토대로

충청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외방(外方)의 명사(名士)이자,

홍주 일대에서는

감히 아무도 범접하지 못하는

실력자가 된 것이다.




주석


7) 도련(刀鍊)

종이 따위의 가장자리를

가지런하게 베는 일


8) 물산객주(物産客主)

또는 물상객주(物商客主)는

객주의 원래의 유형으로서

일반적으로 객주라 하면 이것을 가리킨다.


물산객주의 업무는

주업인 위탁매매는 물론,

부업에 속하는 위탁자를 위한

숙박·금융· 도매·창고·운반 등

모든 주선의

전반에 걸친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실제로는

영업에 관한 사무뿐만 아니라,

위탁자의 일신상의 사무에 이르기까지

돌봐 주어

마치 후견인과 같은 지위를 갖는 것이

통례였다.


그와 같은 신임관계는

여러 대를 계속하는 예가 흔하였다.


그러한 신임관계는

다른 종류의 객주에서도

근본적으로 다름이 없으나,

보행객주나 환전객주 등과 같이

그 업무의 범위가 좁은 경우에는

그 신임의 범위나 정도도

그만큼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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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第 一 章 이름 없는 사내 (1) 20.11.10 482 7 5쪽
6 前日談 두 개의 가문(家門) -5 20.11.10 485 7 2쪽
5 前日談 두 개의 가문(家門) -4 20.11.10 575 6 9쪽
» 前日談 두 개의 가문(家門) -3 20.11.10 676 6 13쪽
3 前日談 두 개의 가문(家門) -2 +2 20.11.10 932 8 11쪽
2 前日談 두 개의 가문(家門) -1 +1 20.11.10 2,124 9 6쪽
1 목차 +1 20.11.10 2,169 8 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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