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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N™ 님의 서재입니다.

축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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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ON™
작품등록일 :
2012.01.17 20:33
최근연재일 :
2011.05.12 00:14
연재수 :
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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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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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
글자수 :
197,150

작성
11.05.08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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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0쪽

축구 이야기 #13

DUMMY

'으음…….'


햇살에 눈이 부시고 정신이 조금씩 돌아온다. 역시 몸이 찌뿌듯하다. 나는 누운 채로 이리저리 가볍게 몸을 뒤척여본다. 조금 시원해지는 게 괜찮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시내에 내려서 무작정 걷다가 벤치가 보이기에 앉았는데 아…내가 무릎베개를 하고, 그리고……비와 눈이 마주쳤다.


"전?"


"으응."


"잘 잤어?"


"아……. 얼마나 시간이 흘렀지, 비?"


"조금밖에 안 지났어. 좀 더 잘래?"


비가 내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나는 강아지처럼 눈을 감고 비의 손에 얼굴을 비빈다. 마음 같아선 오늘 종일 이러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아니야, 헤헤. 일어나야지."


하지만, 몸은 내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다. 끄응……차. 아, 떨어지기 싫어. 나는 누워 있던 내 몸을 힘겹게 일으켜 비의 옆에 앉았다. 주변에 쉬고 있는 다정한 커플들처럼 내 손을 비의 어깨에 걸쳤다. 그러자 비도 자연스럽게 내게 기대는 모습이 된다. 얼굴 보면 손잡고 싶고, 손잡으면 끌어안고 싶고, 끌어안으면 키스하고 싶고…. 뭐 그런 게 아닐까. 나는 아직 몽롱한 정신으로 비와 달콤한 키스를 한다. 내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이곳에서 남 눈치 볼 필요는 없다. 감정에 솔직하기만 하면 될 뿐. 모든 것이 가능해지는 마법. 이곳은 바르셀로나니까.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비가 눈을 뜬다. 주근깨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가 보인다. 적당히 높고 날카로운 코가 그녀의 인상을 도도하게 꾸며준다. 비의 눈동자는 평범한 갈색의 그것이지만 내가 본 어느 푸른 눈동자나 사파이어 눈동자보다 아름답다. 귀걸이를 한 흔적도 없다. 문신도, 귀걸이도, 배꼽에 피어싱도, 담배도 피우지 않는 여자다. 정말 천연 그대로를 지켜온 듯한. 너무나 깨끗한 여자다. 나는 이런 비와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전, 우리 좀 걸을까? 아이스크림도 먹고 싶다."


"물론이지~. 나도 그게 먹고 싶어. 갈까?"


"응."


비가 밀착하며 팔짱을 껴 온다. 더운 날씨지만 그게 싫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나도 기분 좋게 걸음을 옮긴다. 아이스크림을 파는 곳을 찾기가 어려워 한참을 대로변을 걸어야 했다. 음. 지나친 건가? 그냥 보이는 대형슈퍼에 들어가서 사 먹자고 할걸. 왜 젤라또를 사준다고 설레발을 쳐서 또 이렇게 삐걱거리며 비를 고생시키는지 모르겠다. 이러면 안 되는데…….


"비! 우리 조금 전에 본 거기 슈퍼 가서 아이스크림 사자. 미안! 젤라또 파는 데가 없네…."


"응. 하하. 나는 상관없어, 전~."


그렇게 지나쳐 왔던 체인점인 듯한 슈퍼에 들어가서 컵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고 나와서 시계를 보니 여섯 시가 다 되어간다. 허…. 그럼 내가 낮잠을 몇 시간이나 자 버린 거야? 이제 정말로 시간이 없다…….


"비, 우리 슬슬 저녁 먹자. 맛있는데 내가 알아. 책에서 봤어. 여기랑 가까운지는 모르겠는데 거기 맛있다고 아주 유명한,"


"전."


"응?"


비가 말을 끊자 나는 바로 하던 말을 멈추고 비를 쳐다본다.


"우리 처음 만났던 거기 다시 가면 안 될까? 이름이 '라리타'였지?"


"아…거기? 그럴까? 하하. 거기도 맛있었지. 그런데 이번에는 예약을 못 해서……."


"괜찮아~. 거기 가자. 저기 버스 타는 데서 지도보고 가보자."


"어. 으응."


우리는 버스정류장 옆, 현재 위치를 볼 수 있는 지도에서 가야 할 곳이 한참을 찾아도 보이지 않기에 좀 더 멀리, 멀리 찾아 나가다 겨우 그 거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오! 바레아 끝까지 마음에 안 드네! 시내에 세워 달라고 했더니 여기가 시내야? 완전 이런 구석에다가 내려주고 갔어. 차라리 처음 축구장에다 세워주지, 이게 뭐야?! 진짜 다음에 만나면 반쯤 죽여버릴 거야. 으아~!!"


내가 유령과 대화하듯 허공에다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자 비가 웃으며 말린다. 한 번에 갈 수 있는 버스는 없고 중간에 갈아타야 할 것 같다. 흠흠…. 주변의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본다.


다행히 내가 아주 길치는 아니고, 유럽에서 버스를 타본 적도 많고 해서 감으로 때려 맞춰 방향을 틀리지 않고 라리타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걸린 시간은 40분 정도…. 시간이 이렇게 아깝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정말 소중한 시간인데 버스나 타면서 한 시간 가까이 까먹어야 한다니. 거기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라리타는 오늘도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도 그 뒤에서 줄을 서야만 했다. 여기서 한 시간 가까이 더 까먹는다고 치면? 아…. 밥 한 번 먹고 어두컴컴한 하늘을 보게 생겼다. 역시 오전에 연습장 같은 곳은 가는 게 아니었다. 자꾸만 후회스럽다.


"전~ 바보 같아.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해."


"그렇지만 비…벌써 거의 일곱 신데 나는 비와 함께한 시간도 너무 적고, 또 비한테 미안하고……."


"그런 게 어디 있어. 지금 이렇게 계속 같이 있잖아. 나는 이렇게 같이 보내는 시간도 좋아. 전은 정말 엉뚱한 부분에서 이상한 말을 해."


"으음…. 그래도. 남자 마음은 그게 아니거든? 비야말로 바보네. 쳇. 내 마음도 모르고."


"뭐라고 했어? 전, 왜 한국말로 말해?"


비가 째려본다. 어? 뭐라고 해야 하지?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전, 내가 못 알아듣는 거 알면서 한국말 쓰더라. 그거 나쁜 거야. 뭐라고 했어?"


"어? 어? 그게…비가 아주 예쁘다고. 너무 착하고, 고맙다고."


"거짓말하지 말고."


비가 내 팔을 꼬집는다. 악! 그래도 말할 수 없어. 미안해. 악! 그렇게 나는 길에 서서 몇십 분을 비에게 괴롭힘을 당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우리 차례가 왔고 우리는 다시 한 번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 가지 웃긴 건 내가 입고 있는 바르셀로나 카라티를 보고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외국 사람이 여럿 있었는데 여기 이 웨이터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우리를 빈자리로 데리고 가서 묻지도 않았는데 이런 저런 얘기도 해주며 추천 메뉴를 골라주는데 어이…. 전에는 이런 거 없었잖아. 차별 하냐?


"하하. 비, 많이 먹어. 배고프니까 많이 시켰어. 와인이나 맥주도 시킬까?"


"아니, 전. 오늘은 술 마시지 말자~."


"응? 그러지 뭐. 하하하. 오케이. 웨이터~. 워터 플리즈. 오케이, 오케이."


그저께 먹었던 메뉴를 빼고 다른 메뉴를 시켰는데 역시 맛이 좋아서 비와 나는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제야 다시 평범한 대화도 해가며 웃고 떠들고, 먹고, 먹여주고 하는 행복을 느낄 수 있었다. 정말 점심은 최악이었던 것을 새삼 느껴진다. 생각하지 말기로 한다.


"아~ 배부르다. 히히."


"그렇지? 양 엄청 많이 나오더라. 그래서 다들 그렇게 큰 건가?"


밖으로 나오자 해가 슬슬 떨어질 준비를 한다. 그 아름답던 노을도 비와 다신 볼 수 없는 거구나…. 비는 기분이 좋은 듯 내내 싱글벙글하며 배를 두드린다. 나도 많이 먹긴 했지만, 비도 배가 고팠는지 많이 먹더라. 그렇게 먹었는데도 티는 안 나지만……. 몹시 부드러울 것 같다는 생각에 한번 만져보고 싶어 손을 슬쩍 배로 가져가 보는데 비가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하지 마~ 하지 마~. 스탑. 스탑! 하하."


"한 번만~. 하하하. 왜 도망가?"


결국 비가 내 두 손을 모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제압해버린다. 이거 많이 해본 솜씬데? 비는 그 자세 그대로 나를 쳐다보며 말한다.


"저기 전. 그 분수 나오는 광장. 가지 않을래?"


"음? 나야 좋지만. 비, 가고 싶은데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건 비밀이라니까~. 가자. 나 거기 한 번 더 보고 싶어. 갈 거지?"


"응. 여기랑 멀지도 않으니까. 얼른 가자, 그럼. 자리 없겠다."


나는 전처럼 택시를 잡고 비와 몬주익 광장으로 향했다. 여전히 스피커로 들리는 큰 음악 소리와 거기에 맞추어 분수들이 각자 물을 뿜고 있었고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사람도 더 많았다. 우리 앉을 자리도 없는 거 아닌가 싶어 조금 빠른 걸음으로 둥글게 계단을 쌓아놓은 광장으로 갔고 다행히 드문드문 자리가 많이 보였다. 나름 명당이라고 생각하는 위치를 잡아 비와 함께 앉았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분홍색, 빨간색 등의 색색이 변하는 분수를 바라본다. 꼭 칵테일처럼 정말 예쁘긴 예쁘다…. 비도 그 분수를 멍하니 바라본다. 이제는 내 손을 잡고 옆으로 완전히 기대어 있다. 나는 남은 한 손으로 그런 비의 허리를 감싼다. 우리 둘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의 체온을 느끼며 흘러가는 시간을 음미했다.


'두근, 두근.'


어두운 저녁과 불빛이 만들어주는 몽롱한 분위기에 모두가 취하는 것 같다. 소리를 들어야 할 귀는 눈으로 마시는 술에 취해 시끄럽던 주위 소리는 차차 들리지 않고 한동안 이어졌던 적막에, 오직 비의 목소리만 내 귀에 또렷이 들릴 뿐이었다.


"전…. 내가 사는 벨기에는 말이야 쌀쌀한 곳이야. 전이 가본 영국보다 더…. 그래서 거기에도 분수는 있지만 이렇게 크고 아름답지는 않아. 분수 하나로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걸 몰랐어…. 나는 여기저기를 많이 돌아다녀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곳이 있을 줄은 정말…. 그래서 여기를 처음 보여준 전한테 많이 고마웠어."


"……."


“아…. 이래서 왜 그렇게 내 부모님이나 친구들, 추운 북유럽 지역 사람들이 그렇게 프랑스, 그리스, 이탈리아, 지중해 같은 따듯한 남쪽 지역으로 휴가를 가는지 이해가 가더라니까."


"전, 있잖아…. 나 사실은 얼마 전까지 남자친구가 있었어. 8살 때부터 같은 학교에 다니는 남자애였는데 우리 둘은 사이가 좋았거든…. 그런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못 만나다가 우연히 그 뒤 같은 학교 4학년 때 같은 반이 되어서 사귀기 시작했어."


비의 과거. 비의 남자친구…….


"참 그때까지도 착하고 씩씩하고 잘 웃는 아이였는데. 헤헤…. 이상한 친구들을 만나기 시작하더니 사람이 변하더라. 그래도 나는 걔가 참 좋아서 졸업할 때까지 꼭 붙어 다녔어. 인기가 많았거든. 그리고 그래도 나한테는 참 잘했었어. 가끔 술 먹고 약 같은 것도 하고…. 싸우고 나서 다쳐서 돌아오기도 하고…. 전화 안 받고 속 썩이던 적은 몇 번 있었지만 말이야."


"그래도 나는 걔가 참 좋았다? 그 애가 가끔, 아니 조금 많이 실망스러웠지만. 그래서 화가 나서 노려보면 어릴 때 내가 좋아하던 모습이 떠올라서……. 그런 모습이 남아 있는 얼굴을 볼 때마다 신기하게 화가 풀리는 거야. 전, 나 바보 같지?"


"아니……."


지금 내 몸에 기대서 분수를 보며 말하고 있는 비의 표정이 어떨까. 어떤 기분으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많은 용기를 내서 하는 말이 아닐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일단은 비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들어줘야 할 것 같다. 나도 비처럼 여전히 아름다운 색으로 변하며 솟구치는 분수를 바라볼 뿐이다.


"아니긴. 하하. 바보 같았지. 학교를 졸업하고, 그 애도 집을 나오고 나도 성인이니까 집을 나와서 둘이 같이 살기로 했어. 우리 집보단 물론 안 좋은 곳이었지만…. 그래도 그게 참 좋았어.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산다는 거 있잖아….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그 애가 집에 술을 먹고 여자를 데리고 오는 거야. 물론 술만 더 마시다가 간다고 했지만, 나는 그게 정말 싫었어.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고. 그러다가 점점 나한테 짜증도 내고…. 소리도 치고…. 그래서 나랑 싸우기도 많이 싸우고. 또 그러면 집에도 안 들어오고…. 그러더라."


"다른 여자가 있었던 거야. 헤어지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은 있잖아, 나와 같은 반일 때의 내 친구들한테까지 손을 대려고 했고, 몇 명은……. 최악의 바람둥이, womanizer 였던거야. 플레이어. 플레이보이였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사년이나 여자 친구라는 이름으로 옆에 있었던 거야…. 하하."


"……."


"정말 상처 많이 받았어. 그 뒤로 머리도 짧게 잘라버리고 그 애가 좋아하던 옷들도 다 버리고…. 화장 같은 것도 안 했어. 내가 여자라는 사실이 너무 싫었고, 내가 그 애를 좋아했다는 사실도 싫었어. 그래서 낮에는 아르바이트하면서 돈을 벌고, 밤에는 TV를 보고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비행기를 타고 벨기에를 떠나서 처음 가보는 나라들을 갔지."


"전, 나는 비행기를 타는 게 참 좋아. 하늘을 날고 있으면……. 또, 창문으로 비행기 밖의 하늘을 보고 있으면 내 고민, 내 상처도, 과거도 모두 사소하게 느껴지고, 구름 속을 날고 있을 때면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


"헤헤. 그래도 돈이 떨어지면 다시 벨기에로 돌아와야 하고, 나를 기억해주는 집으로 들어가고. 또 그러면 나는 다시 돈을 모아서 여행을 가고……. 정신 차려 보니 벌써 스물두 살이 됐어."


"……."


"이번에도 돈이 어느 정도 모여서 혼자서 아무 데나 떠나볼까 하는데 언니가 같이 가자고 하는 거야. 우리 둘이서 여행을 가본 적은 한 번도 없었거든. 언니는 직장이 있어서 너무 오랜 시간은 뺄 수 없었고 그래서 중간까지만 같이 가기로 한 거야. 정확히는 언니 남자친구까지 셋이었지만."


"발렌시아에 내 친척이 있거든. 그래서 이번에는 여행이 끝나고 거기서 일 도와주기로 했어. 이번에는 집으로 돌아가기가 너무 싫어서…. 그리고 발렌시아로 오기 전에 한번 놀러가 보라고 친척이 추천해준 바르셀로나를 한번 와봤던 거야. 전……. 듣고 있지?"


"응……. 그랬구나."


"그랬는데 거기서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을 한 남자를 마주친 거지. 그런데 그 애랑 눈이 마주치고 난 뒤에, 그 애가 갑자기 내 몸을 빤히 보는 거야. 하하하. 그게 뭐야. 그런데 난 그게 참 신기했어. 싫지 않았거든. 헤어지고 난 뒤 일 년이 더 지났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그 이후로 남자가 너무 싫었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 아! 나 이제 네가 누구를 닮았는지 안다? 누군지 궁금하지 않아?"


"누군데?"


"후후. 누군가 했었는데 역시 축구 선수였어. 좋아하는 클럽은 아니라서 기억이 잘 안 났는데 리버풀 선수 중에 토레스라는 선수가 있거든. 절대 한눈팔지 않고……. 부인한테 일편단심에, 아이들이나 팬들한테도 정말 잘해주고. 착하고 멋진 사람이야. 그래도 지금은 네가 더 잘생겼다고 생각해. 하하. 고맙지?"


"……응."


"전…. 있지, 전은 참 좋은 사람이야. 허풍도 심하지만 그래도 순수한 것 같고. 웃을 때 참 보기 좋고, 장난도 많이 쳐 주고, 나한테 잘해주는 고마운 사람. 그래도……. 전은 바람둥이지?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


"나 사실 오늘 가보고 싶은데 있다고 말했지. 우리 첫날 함께 잔 호텔. 거기 다시 가 보고 싶었어. 나 전이 참 좋아…. 그래서 나 기억하고 싶었어. 그날 전과 같이 걸은 곳, 같이 식사한 곳, 같이 먹은 음식. 우리가 키스했던 장소. 다 기억하고 싶었어. 그날은 내가 술이 많이 취했지만, 오늘은 술에 취하지 않고 맨 정신으로 전이랑 같이 하루를 보내고, 전을 전부 느껴보고 싶었어."


"그런데 있잖아, 그렇게 되면……. 나, 전이 정말 많이, 아주 많이 좋아질 것 같아…. 전. 내가…그래도……괜찮을…까?"


말을 마친 뒤, 내게 기대던 비가 몸을 떼고 고개를 들고 나를 마주 본다. 내 대답을 원하고 있다. 그리고 알 것 같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대답을 해 줘야 한다. 나는…. 나는…….


"나는……."


"……."


"…………."


입이…떨어지질 않는다. 나는…비가 좋지만….


내가……. 할 수 있을까? 감당…다 감싸…있을까? 나는 비를…….


'정말. 오빠는 왜 항상 그런 식이야! 그만 만나. 지긋지긋해! 연락하지 마!'


'에구구…. 너는 나를 감당할 수 없어. 알잖니? 우리가 잘 될 수 없다는 거.'


'전화를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삐소리가 나면…….’


'흑흑흑……. 나는 너한테 뭐였어? 이럴 거면 왜 잘해줬어! 네가 뭔데!'


나는……. 나는……. 너를……. 행복하게…….


"……."


아무리 노력해도 벙어리가 된 듯 입이 떨어지지 않자 비가 결국 웃으며 다시 내 어깨에 기댄다.


"괜찮아, 전……. 알고 있었어. 내가 미안해. 이상한 부탁해서."


네가 미안할 게 어디 있어. 네가 이상한 부탁한 적이 어디 있어. 그게 아니야. 나는……. 자신이 없어…. 너를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네가 잘못한 거 아닌데. 내가 못나서 그런 건데. 거절을 당해도 내가 당해야 맞는 건데……. 왜…….


"전 있잖아. 그러면 다른 거 부탁해도 돼?"


"……."


"오늘…스카우트 받은 거 있잖아, 그거 다시 한 번 생각해봐. 아니, 나는 꼭 전이 좋게 생각했으면 좋겠어. 바르셀로나 클럽은 정말 유명한 곳이고 이런 기회 얻고 싶어 하는 사람 굉장히 많을 거야. 나 전이라면 거기서도 좋은 성적 낼 수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헤헤…. 우리 오늘 이후에 헤어져서 다시 못 보게 되어도 TV에서 전이 자주 나오면 볼 수 있잖아?나……. 흑……. 전의……가장 먼저 팬이 되어 줄 테니까……. 그러니까…. 흑……."


"……."


"흑……."


끝내 비가 내 옷을 붙잡고 눈물을 흘린다. 또…내가 울려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내 생각만 해주는 비인데…. 그래도 오늘 밤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을 먼저 할 수 없는 내가 혐오스럽다. 나따위가 나따위인게……. 더 멋지고 어른스러운 내가 아닌 게 너무 원망스럽다. 자신 있게 감싸줄 수 있지 못하는 내가….


"하하. 또 울어버렸네. 사실 그 사람들이 마음 바뀌기 전에, 전이 오늘 계약도 하고 사인도 하고. 그랬어야 했는데 내가 돌아가려는 전을 잘 말리지 못했어. 전이 잊지 않고 나를 계속 챙겨주려고 하는 게 기뻤고, 오늘은 나도 전이랑 같이 있고 싶었거든…. 나 나빴지? 하하."


"비……."


"…조금만 이러고 있어도 돼? 미안해, 전. 곤란하게 해서…. 조금만…. 조금만…. 쳐다보지 마……."


"………."


"……."


"…."



분수가 꺼지고 주변의 커플들도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나는 비를 안아주었다. 지금이라도 내가 생각을 바꾼다면 우리 둘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을 텐데……. 그런 놈은 두 번 다시 생각나지 않게 비를 위로해줄 수 있을 텐데……. 왜 난…….


"아…. 너무 오래 있었나 봐, 사람들도 빠져나간다. 전, 그만…갈까?"


비가 조용히 내 옷을 놓고 나와 거리를 벌린다. 겨우 그걸로 된 것인지…. 나는 최고의 하루를 선물하고 싶었는데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나란 놈은 왜 이 모양일까….


"비. 나 사실 너한테 거짓말한 게 있어."


"응? 뭔데?"


"나 사실 바르셀로나라는 축구 클럽 잘 몰라. 그냥 비가 좋아한다고 해서 뭐냐…그……."


"알아……. 후후. 바보. 오늘 전이랑 붙은 귀여운 남자아이 기억해? 갈색 머리에 키도 나정도 되는 왜, 있잖아."


음? 오늘 만난 애들은 다 흔하게 생겨서……. 또 외국 애들은 얼굴 구별하기도 어렵고….


"마지막에 전을 이겨버린 아이. 그 애 이름이 보얀이야. 전이 좋아한다던…. 그런데 전은 그런 건 하나도 모르고. 하하하. 바보."


"읔…. 그놈이 끝까지 나를 방해했구나. 왜 하필 그놈이 와서 들킨 거야."


"…그전에도 알고 있었어. 그러니까…다른 사람한테는 그렇게 과장해서 말하지 마. 전은 있는 그대로 충분히 멋있어. 정말이야."


비의 말을 듣자 얼굴이 뜨거워진다. 살면서 저런 칭찬, 저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약속해줄래? 스카우트 명함 줄게. 자, 여기! 내일 꼭 연락하고 만나봐. 알았지?"


"응……."


"후후, 말도 참 잘 듣네. 자~그럼…돌아가자."


애써 감정을 정리하고 밝게 말하며 일어나는 비. 그리고 비가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나는 나….


"……."


약속할게……. 그리고 미안해…. 비……. 내가 이런 겁쟁이라서…. 못난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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