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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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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장속연어
작품등록일 :
2016.03.16 17:29
최근연재일 :
2016.04.08 13:44
연재수 :
23 회
조회수 :
9,509
추천수 :
201
글자수 :
81,015

작성
16.03.26 03:41
조회
5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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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글자
10쪽

5. 홍제동 (4)

DUMMY

계약서 작성은 순식간에 이뤄졌다. 방에 비치된 가구라곤 가스레인지와 세탁기 뿐. 심지어 세탁기도 이전에 살던 사람이 버리고 나간 거라고 했다.

월세와 보증금, 그리고 계약 기간에 대한 간단한 체크에 이어 내 서명. 그걸로 끝이었다.

복덕방 아저씨가 자기 뒤에 떡하니 써있는 공인 수수료보다 12만원 더 받으려했단 걸 제외하곤 무척 깔끔한 계약이었다.

내가 공인 수수료보다 많이 받는 거 아니냐고 묻자, 아저씨는 멋쩍은듯

“그 정도 방이면 더 받아도 되는데···”

라며 말끝을 흐렸다. 좋은 분 같은데, 약간 죄송하다. 그래도 나도 동네 마트에서 일하는 처지라, 12만원이면 내겐 무척 큰 돈이다.

죄송해요, 아저씨.



“···그건 말도 안됩니다!!”

응? 또 이상한 게 보인다. 나 또 잠든 거야? 그 짧은 시간에?

“···사람을 죽였는데, 그게 어떻게 덮어집니까!!”

“···이봐 최 변. 상대가 누군지 생각해. 자네가 여기서 박 군의 무죄만 증명해주면, 자네도 빅 펌 변호사 부럽지 않게 살 수 있어.”

둘 다 누구 목소리인지 모르겠다. 아저씨 둘인 건 확실한데, 누구지? 나는 확실히 아닌 거 같은데.

“···제가 가진 증거들이 전부 박 군이 범인이라는 것을 가리킵니다.”

“증거는 우리가 만들어준대도. 자넨 양심만 속이면 돼.”

증거를 만들어? 이거 아무리 꿈이래도, 너무 막 나가는데?

“···안 됩니다···”

“···자네 밥 굶고 싶어? 일감 끊겨봐야 정신차리겠어?”

“···변협···”

“···박탈···”



계속 이상한 게 보이네. 근데 기분이 이상하다. 처음 봤던 환상에서 들은 말이 결국은 현실과 연결됐어. 혹시··· 정말 예지몽 같은 거 아냐?

그런데 또 예지몽이라기엔, 처음 본 환상 말곤 전부 나랑 관련 없는 영화 속의 장면 같았단 말야.

방금도 그래. 박 군이 누구야? 게다가 범인이라니. 최 변은 누구고?

모르겠다. 차라리 내 얘기만 잔뜩 나오면 내가 미래를 보는구나 생각할텐데, 남의 미래를 보면 어떡해. 단순히 나의 공상인지, 아니면 진짜 예지인지 알 수가 없잖아. 심지어 미래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말야.

“학생! 12만원으로 어디 약이나 한 첩 지어 먹으라고! 나 원, 이렇게 부실해서야. 내가 수수료 덜 받고 뿌듯한 적은 또 처음이네.”

복덕방 사장이 혀를 끌끌찬다. 내가 또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했나보다.

“아하하, 알겠습니다. 그럼 월세 지불은 누구한테 해야하는거죠?”

“여기, 여기. 이 계좌로. 현찰로 낼 경우엔, 관리인한테 내고.”

관리인 이름이··· 유선아? 선아라면, 아까 그 환상 속에서 봤던 이름 아니야? 근데 선아도 흔한 이름이긴 하지.

애당초 환상을 보여줄거면 아예 성까지 보여주든가. 적어도 누구에 대한 건지는 알려줘야할 거 아냐?

그런데 분명히 그 환상 속의 깡패 같은 남자가 ‘캐스팅’이란 말을 했어. 연예인이나 배우라는 뜻인가? 아까 그 여자의 미모 정도면 말이 되는데···

나, 최 변, 박 군, 선아, 그리고 선아와 함께 있던 남자.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환상은 왜 자꾸 보는거야?

에라, 모르겠다. 일단 시간도 늦었으니 출근 준비나 해야지.

“그럼 들어가보겠습니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래, 그래. 정말로 보약 지어 먹으라고. 빈 말이 아냐.”

난 자리에서 일어나 문쪽으로 걸어간다. 문으로 향하는 길 왼쪽에 잔뜩 걸린 액자들. 대부분이 자격증과 스크랩된 지역 소식지들이다.

그 중 눈에 띄는 것. 공인중개사 자격증. 최...윤호. 이 아저씨도 최 씨네? 근데 변호사가 아니라, 공인중개사라니.

혹시나 싶은 마음에 걸린 액자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펴본다. 하지만 변호사 자격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 이 아저씨가 최 변은 아니겠군.

그런 생각에 빠진 채 부동산 문을 열고 나온다.

주위를 두리번 거리자,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홍제로 한복판. 족발집, 치킨집, 24시간 편의점··· 익숙한 간판들이 시야에 스쳐간다.

“하암. 몇 시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오후 7시 10분. 이렇게 또 출근시간이 가까워지는구나.

난 홍제동과 은평구 사이에 위치한 소형 마트의 매니저다. 주로 사장님과 나 단 둘만이 일하는 작은 마트다. 뭐, 주말에는 알바생을 쓰긴 하지만 주말 알바는 알바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하도 자주 바뀌어서.

체인점이 아니어서 일거리는 많지만, 또 그만큼 융통성 있게 일처리가 가능한 게 매력이다.

여기도 원래는 유명 프랜차이즈 편의점으로 시작했다. 프랜차이즈 계약이 끝난 다음부턴, 사장님이 나름 야망을 갖고 가게를 키우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이젠 야채도 팔고 과일도 팔고 있을 건 다 있는 일종의 소형 종합 마트다.

나는 풀타임으로 뛸 수 있는 알바자리를 찾다가 이곳에서 일하게 됐다. 처음엔 편의점 경혐도 없는 나에게 덜컥 매니저 자리를 준다길래, 이상하다 싶었다. 알고보니 매니저가 곧 말단 직원이었다. 그래도 어디 가서 경력 내세울 땐 쓸만하니 마음에 든다.

사장님은 말도 적고 게으르시지만, 사업에 대한 얘기를 하실 때 만큼은 열정적이다.

가만히 지켜보니, 소형 마트라는 게, 위치만 잘 잡고 유통망만 싸게 잡으면 적당히 노닥거리면서 돈 벌 수 있는 일 같다.

물론 요즘 같이 대형 마트가 판을 치는 때에는 그 두 가지를 이루기가 제일 힘들겠지만 말이다.


보자, 저쪽으로 가면 지하철이 역이 나오니까··· 여기서 버스를 타면 되겠군. 저기 온다. 7713번.

보통은 버스값 아끼겠다고 걸어다니는 길이지만, 오늘은 정말 발바닥이 너무 아프다. 오늘 한 번은 나도 사치 좀 부려보자고.

그런 마음으로 덜컥 버스를 타버렸는데. 아뿔싸, 퇴근 시간이라 이미 만원인 버스다.

난 일찍 출근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앉아가고 싶었던 건데. 발바닥은 여전히 아프고, 출근만 일찍하게 생겼다.

“이번 정거장은 고은 초등학교입니다. 다음 정거장은···”

으, 내려야겠군.

삑!

후우, 그래도 오늘은 오래 일하지 않을 분위기다. 11시에 가게 문을 닫으니, 기껏해야 3시간 반 정도인가.

미리 사장님께 양해를 구해놓았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좀 삐져있었을지도 모른다. 설마, 미리 말해놨는데 뭐라고 하겠어?

딸깍, 띠디디디딕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여느 때와 같이 문 열리는 전자음이 난다. 대충 핸드폰이나 만지면서 노닥거리다가 저 소리만 들리면 부리나케 열심히 일하는 척을 하는데, 오늘은 내가 손님인 느낌이다.

어디, 사장님은 일을 잘 하고 있는지 볼까!

근데 사장님이 보이지 않는다. 계산대에도, 과일 코너에도, 야채 코너에도, 과자 코너에도 없다. 나보고 맨날 계산대 비워두면 사람들이 돈 훔쳐간다고 노발대발하더니, 오늘은 본인이 비워둬? 흥, 이거 잘 기억해놨다가 다음에 한 번 써먹어야지.

“사장님?”

대답이 없다.

“사장님!! 안계세요?! 저 왔어요!! 준현이요!!”

식사 중이신가? 아니, 나보곤 밥을 먹더라도 계산대에서 먹으라고 하더니!



“···동운아···너 왜 그랬어?! 응? 왜, 왜 그렇게까지 한거야!!”

탁한 공기. 분명 환상이지만 답답하다.

“후우··· 할 말 없습니다, 형.”

“하참, 진짜··· 너 어쩌다가 이렇게 된거냐?! 아무리 막 나가던 놈이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응? 김동운 경사!...”

경사? 경찰이야? 게다가 김동운? 사장님 이름하고 같네?

“우리, 더이상 너 못 챙겨준다. 알았어? 이번 일··· 이미 우리 손을 벗어났어. 우린 이제 끝났다고!! 이 멍청아!!”

“왜 우립니까··· 저 혼자죠. 제가 벌인 일이고, 형들은 그냥 저 불쌍하다고 도와준 건데, 저 혼자 책임져야죠...”

목소리가 익숙하다. 사장님하고 목소리가 같아. 어떻게 된거지?

자세히 그 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니 무척 젊다. 기껏해야 30대 중반? 설마, 사장님이 경찰이었어?

“···혜은이···”

혜은이는 또 누구야?



“왔냐?”

익숙한 목소리. 게으름과 우울함의 완벽한 콜라보. 김동운 사장의 목소리는 듣는 이의 열정을 뺏어가는 마의 음성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뭔가 이상하게 들린다. 방금 환상 속에서 들었던 목소리 때문인가? 평소엔 말투 참 더럽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한이 서린듯한 목소리다. 아무리 무뎌졌어도 쉽게 사라지지 못하는 한.

“아, 사장님. 안 계신 줄 알았어요. 어디 계셨어요?”

“나 뒤에서 밥 먹고 있었지.”

“계산대 비우지 말라고 하신 게 누구더라···”

“야, 근데 난 사장이거든? 사장 마음대로, 그런 거 몰라?”

“아, 예, 예. 사장이 최고죠. 아무렴요.”

“됐고. 계산대 좀 봐. 밥 안 먹었으면 컵라면이나 하나 까먹고. 난 뒤에서 좀 쉬어야겠어. CCTV로 보고 있을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손짓하라고.”

“네, 네.”

김동운. 분명 사장님 이름하고 같다. 그리고 두 얼굴을 연달아보니, 분명히 서로 닮은 점이 있는 얼굴이다. 흐음. 사장님이 거짓말하신걸까? 과거에 대해서?

그런데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경찰이었던 게 감춰야하는 과거인가?

아냐, 아까 환상 속에서 봤던 건 분명 쫓겨나는 모습이었어.

김동운은 무슨 짓을 벌여서 쫓겨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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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홍제동 (4) +1 16.03.26 583 12 10쪽
4 4. 홍제동 (3) +1 16.03.26 540 11 10쪽
3 3. 홍제동(2) +1 16.03.26 600 11 7쪽
2 2. 홍제동 (1) +1 16.03.26 750 10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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